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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용 수필집
삶의 풍랑과 햇볕과 비가 만들어 낸 향기로운 무늬
- 이태용 자전적 수필집 <종합상사 맨의 삶, 도전과 응전> -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사)한국수필가협회이사장⋅월간 한국수필발행인⋅사)한국문인협회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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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人生)이란 사람의 삶이지만 어느 일생(一生)도 결코 혼자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수없이 많은 인연 속에서 수많은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는 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이태용 수필가가 등단 후 첫 번째 책으로 자서전적 수필집을 내겠다고 원고를 보내왔다. 말하자면 전기인 셈인데 그걸 수필의 형식을 빌어 일대기적 삶을 수필집으로 엮겠다는 것이다.
이태용 수필가는 2019년 5월 월간 《한국수필》 신인상 당선으로 수필가가 되었다. 등단은 그의 화려한 전력에 비하면 조금 생뚱맞을 수도 있지만 그가 살아온 삶을 가장 아름답고 의미있게 빛나게 할 위대한 선택일 것 같다.
수필은 결국 삶의 이야기다. 살아온 삶을 통해 나를 보고 나를 통해 살아온 내 삶을 보는 것이 곧 글(수필)이 된다.
그는 누가 봐도 성공한 인생을 산 성공자이다. 자신의 삶도 그렇고 인생의 면류관이라 할 수 있는 자녀들 역시 빛나는 인물들이다. 이만한 삶이 어디 쉽겠는가. 그러나 그런 그가 있기까지는 어느 누구보다 더 힘든 나날이 있었고 말로 차마 다 표현해 낼 수 없는 고통과 슬픔과 절망도 있었다. 그렇기에 진주처럼 그의 삶이 더 빛나는지도 모른다. 사실 그가 살아온 삶은 이 나라 산업화의 역사이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땀과 피다. 그 수고가 그를 그리고 이 시대를 그리고 오늘의 이 나라가 있게 했다. 그렇기에 그가 내는 첫 번째의 이 책은 개인적 뿐만 아니라 격동의 한 시대를 살아온 사회적 역사적 기록물로도 큰 가치가 있을 것이다.
그가 굳이 책 제목을 ‘나의 인생 나의 꿈’이라 한 것도 그만의 특별한 이유와 의미가 있어서일 것이다.
2. 이태용이란 사람
이태용은 1946년 그러니까 해방 이듬해 4월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와서 11남매를 낳으셨는데 2남 2녀만 겨우 살려 다섯째 아들이었던 그가 장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서른여섯에 본 아들이라 애지중지 했지만 마흔다섯에 동생을 하나 더 두셨다.
경기도 남양주 마석이 본거지로 능원대군의 11세손인데 아버지는 가족 부양을 위해 면화도매상, 책가방공장, 갈포벽지공장, 국수공장 등을 하셨다. 6ㆍ25가 나자 아버지는 대청마루 밑과 다락 속에 숨어 지내다 경기도 화성으로 피난을 갔다.
이태용은 종전 후 큰누이가 종암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자 누이를 따라 전학하여 학교를 다녔는데 중학교 진학에 계속 낙방하다 서울사범병설중학교에 합격했는데 3학년 때 4ㆍ19혁명이 났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5⋅16군사혁명이 났다. 혜화동 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법대에 응시했는데 낙방하자 종로에 있는 양영학원을 다녔다. 이듬해 종암동 서울상대에 진학하여 큰아들로서의 체면을 세웠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장이 문을 닫게 되자 아르바이트로 자신의 등록금과 동생들 학비도 감당했다. 경제적으로 아주 고생한 기간이었으나 그가 철도 들고 연단이 되는 과정이었다.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입대하여 부산 통신기지창에서 미군 고문관 당번병으로 근무하다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복학 후 아버님이 돌아가셔서 가장이 되었는데 학장님 배려로 한국은행에 입행이 되었다. 그리고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영어 선생을 하던 친구의 동생과 1972년 12월 1일 충무로 엘씨아이(LCI) 예식장에서 학장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는 상산 박씨로 3남 2여 중 셋째인 장녀였다. 결혼 이듬해 큰아들을, 2년 후 둘째 아들을 낳아 어머니께 효도했다.
1973년부터 은행원들의 급여를 대폭 삭감하는 정부 조치가 있었다. 은행 선배가 대우그룹으로 옮겼는데 대우로 옮기고 싶다면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하여 아내와 의논후 대우로 옮긴 후 수출 전선에 투입되어 31년을 근무했다. 그의 주 종목은 철강과 자동차 수출이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아프리카인, 중남미인, 중동인, 유럽인, 아시아인,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득을 주는 사람, 손해를 끼친 사람, 도움을 주는 사람, 짐이 되는 사람 등등, 80년대 초 5년간은 시드니 지사장을 90년대 초 5년간은 말레이시아 지점장을 하면서 다른 문화를 접하는 기회도 누렸다.
90년대 후반 외환위기에 50대 그룹 중 30개 이상이 도산했다. 대우그룹도 도산의 대열에 섰는데 그 와중에 채권단이 ㈜대우무역 부문의 사장으로 임명했다. ‘죽으면 죽으리라’란 결심으로 대표이사 사장으로 취임을 했다. 정부, 금융계, 국내외 거래처들의 이해와 도움으로 2000년 12월 24일 대우인터내셔널이란 신설회사를 출범시켰다. 2005년 4월 상공인의 날엔 금탑산업훈장을 받는 영광도 누렸다. 2006년 12월 후배에게 대표이사를 인계한 후 일 년간 상임고문으로 있으면서 한국장학재단 대학생 멘토도 하고, 여러 대학에서 특강도 하고 교회에서 지원하는 ‘서부노인요양병원’에서 노인들의 머리를 깎아 주는 봉사도 했다. 남산 활터 ‘석호정’에서 국궁도 배우다 호텔과 레미콘 사업의 아주그룹 부회장으로 해외투자의 길라잡이 역할을 만 10년 하고 2017년 말 은퇴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산업화의 여정이었지만 그 틈에서도 봉사하는 삶도 살았다. 이만큼 다양한 삶을 산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그는 삶의 성공자다. 그 성공 속엔 누구보다도 더 많은 간난의 수고와 절망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이룸이 빛났지만 그에게 인생의 면류관은 자신의 그런 성공보다도 자녀라고 했다. 그래선지 자신 이상으로 자녀들도 빛을 발한다.
큰아들은 미국 프린스턴(PRINCETON)대학과 유펜 로스쿨(U-PENN LAW SCHOOL)을 졸업한 미국 변호사로 유학생을 만나 졸업 직후 결혼을 했는데 며느리는 은행 임원과 은행장을 하신 분의 3녀 중 둘째 딸이다. 아들과 며느리는 졸업 후 미국 5대 법률회사 중의 하나인 뉴욕에 있는 스캐든 압스(SKADDEN ARPS)에서 국제변호사로 일을 했다. 아들은 군 법무관으로 합동참모본부 법무실에서 병역의 의무를 수행했다. 이때 며느리는 홍콩소속으로 발령을 받았는데도 회사가 재택근무를 허락하여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서울에 있는 동안 첫 손자를 보았다. 할아버지가 된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아들은 군 복무 중에 틈틈이 공부하여 미국금융인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병역을 마친 후 뉴욕에 있는 모건 스탠리(MORGAN STANLEY)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귀국하여 토종 사모펀드회사에서 금융인의 길을 착실히 가고 있다. 변호사로 계속 활동하던 큰며느리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경력단절녀가 되었다. 첫 손자는 2022년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하였고, 손녀는 예원학교 3학년으로 잘 성장하고 있다.
작은아들은 스탠퍼드(STANFORD)대학으로 진학했다.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고 여러 회사를 거처 구글(GOOGLE) 본사에서 간부로 일하다가 최근에는 삼성전자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작은며느리는 시드니 살 때 만난 동년배 친구인 현대종합상사 사장을 역임한 김영남 씨의 3녀 중 맏딸이다. 서울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예일(YALE)대학원에 유학한 미국 건축사이다. 두 아들을 두었고 큰 녀석은 11학년, 작은 녀석은 7학년이다. 작은며느리도 아이들 교육을 위해 일을 쉬고 있다.
피난 갈 때 이태용을 업고 갔던 큰누나는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은퇴한 후 몇 해 전 당뇨로 하늘나라로 갔다. 이태용에게는 어머니에 버금가는 잊을 수 없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2남에 손자 둘과 손녀 하나를 두었다. 바로 아래 여동생은 성악을 전공하고 중학교 음악 선생을 하다가 미국신학대학교 유학 후 선교사가 되었다. 항상 든든한 막내 남동생은 평생직장이었던 대림그룹에서 은퇴하고 특수가스회사 대표로 그리고 특수가스협회 회장으로 경제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일남일녀에 손자 둘 손녀 둘을 두었다. 이태용은 형제·자매가 우애 있게 사는 것이 부모님의 생전 가르침이었음을 상기하며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것이 감사할 뿐이라고 한다.
이태용은 칠십 평생 사는 동안 역풍이 불어올 때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뜻밖의 도움의 손길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매사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하늘에 맡긴다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주위에 도움이 필요한 곳에 베푸는 삶을 실천하면서 자식들에게도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길 강조한다. 그리고 만나는 젊은이들이나 후배들에게도 매사에 긍정의 시각과 감사의 마음을 갖기를 권면(勸勉)한다.
이태용은 이런 사람이다. 지금도 동갑내기 아내와는 이인삼각 경기를 하듯 오순도순 산다. 인생의 반려자이며 친구로 여행도 가고 골프도 치면서 집안일도 열심히 도우며 산다. 아내가 장로이기에 함께 새벽기도의 제단도 같이 쌓으며 삶을 정리하는 글쓰기에도 열정적이다. 그렇다면 이런 그가 이 책에서 정작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어쩌면 자신의 삶의 이야기보다도 이 시대를 살아온 그의 여적을 함게 나누고자 함은 아닐까. 그는 어쩌면 자신의 삶의 이야기로보다도 이 시대를 살아온 그의 여적을 함께 나누고자 함은 아니었을까.
3. 진솔한 삶의 드러내기 – 평범과 특별함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와 두 동생을 부양하는 가장이 되었다. 장남이라는 무게감이 속히 결혼하여 가정을 안정시켜야겠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하여 결혼을 생각하지만 홀시어머니에 고등학생 시동생과 시누이가 있다는 집에 누가 시집을 오겠는가. 그러나 인연도 만들어가는 자에게 오는 법이다. 여동생의 선생이면서 친구의 여동생을 그는 아내로 맞는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의 노력은 자못 눈물겹게 사랑스럽다. 지금의 이태용을 생각한다면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그때를 회고한다.
눈 덮인 창경궁 경내에서 내 포부를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틈틈이 내가 아는 모든 미국 팝송을 쉼 없이 불러주었다. 춘당지 위를 가로지르는 흔들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고즈넉한 겨울의 창경궁을 만끽했다. 저녁 식사 후 집까지 바래다준 성공적인 데이트였다. 그 이후 또다시 진전이 없었다.
직장생활이 시작되면서 말단직원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4월의 어느 토요일 옆의 여직원이 전화기를 건네주었다. 마음속으로 그리워하며 짝사랑하던 그 여선생이었다. 오후에 만나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하늘을 날 듯이 기뻤다. 벚꽃이 필 때 시내 고궁들을 야간에 개장할 때였다. 덕수궁 내의 벚나무 아래 데이트하는 청춘 남녀들이 쌍쌍이 앉아 있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마침 빈 벤치를 찾았다.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그녀의 두 눈이 달빛 아래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일 수가 없었다. 너무 좋아서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슬그머니 손목을 잡았더니 다소곳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기습적으로 포옹을 했으나 거부하지 않았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내친김에 달빛 아래 청혼을 했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다. 짝사랑이 드디어 열매를 맺는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
그런데 굳이 왜 짝사랑이라 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환경과 처지를 생각하면서 그건 혼자서만 애태우는 갈망쯤으로 여기면서도 행여 그런 그의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사실 어쩌면 지극히 평범하고 그 시대쯤엔 그렇게 해야만 했을 그의 가정에 대한 출발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일이 이뤄졌는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삶이란 꼭 좋은 일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어머니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것도 결혼을 앞두고 말이다.
결혼을 얼마 앞둔 어느 날 어머니에게 풍이 왔다.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고 입이 돌아가서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른 저녁 약혼녀와 장모님이 흰 오리 한 마리를 사 왔다. 밤을 넘기기 전에 오리 피를 마셔야 한다고 해서 한 종지 만들어 어머니에게 마시게 했다. 그다음 날부터 내가 퇴근하면 어머니를 택시로 모시고 창신동 동진한의원에 가서 침을 맞았다. 다행히 침을 맞고 열흘쯤 지나 입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혀가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신혼생활> 중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어찌 혼자만이겠는가.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던 약혼녀의 집에선 더 놀랐을 것이다. 약혼하고 결혼식을 앞둔 때라 자칫 사람이 잘못 들어와 생긴 일처럼 생각될 수도 있는 때였다. 다행히 양가의 극진한 보살핌과 염려로 회복이 잘 되었으니 하늘의 도움이었다. 그는 결혼식 날이 꿈만 같았을 것이다. 어머니를 쳐다봤다.
결혼식 날 어느 정도 회복된 어머니가 맨 앞줄에 앉아 나를 자랑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반년 정도 한약을 먹고 침을 맞으면서 오른쪽의 마비가 모두 풀렸다. <신혼생활> 중
그는 결혼하자 첫 살림집을 수유리에 마련한다. 말하자면 안암동이 자신을 어머니의 품처럼 품어준 곳이었다면 수유리는 그가 가정을 열고 가장이 된 곳이다. 비로소 그의 삶이, 그의 무대에서 그가 주인공이 되는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는 첫 번째 내 집에 문패를 단다. 그리고 딸이 태어나면 쓸 요량으로 오동나무도 두 그루나 심는다. 그렇게 그의 새로운 인생의 배가 출항을 했다. 그러나 가장이 되었어도 그의 삶 중심엔 늘 어머니가 계셨다.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자식들을 위해 사신 어머니, 그 어머니의 말씀과 뜻은 그래서 어떤 법보다도 먼저였다. 해서 그는 평생 어머니의 엄명을 지키며 살았다. 어머니는 다섯가지만은 꼭 지키라 엄명을 내리셨다.
어머니는 서른여섯에 다섯 번째 아들로 이태용을 낳았다. 이태용 위로 열두 살 위의 누이만 하나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섯 가지 엄명을 내렸으니 물가에 가지 말라, 산에 가더라도 절대로 바위는 타지 말라, 개인사업이나 헛된 일에 기웃거리지 말고 안정된 직장에 취업하라, 개고기는 먹지 말라, 아내 이외의 여자에게 한눈을 팔면 안 된다 등이었다.
거기에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었다.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맏아들이 된 그는 어머니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조심하면서 살다 보니 여기까지 잘 지내 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어느새 아들들이 장성하여 각기 일가를 이룬 지금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니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는 것 같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태용 부부는 어머니처럼 아이들에게는 하지 말라는 엄명보다 무엇이든지 하라는 방식이란다. 어머니의 양육방식이든 우리의 방식이든 자식에 대한 사랑과 기대는 표현이 다를 뿐이지 바탕은 같다는 생각이란다. 그런 어머니께서도 가셨다. 아들 내외와 손자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 속 어머니가 다섯 가지 엄명을 잘 지켜주어 고맙다고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단다. 그러고 보면 이태용은 지극히 가정적인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태용은 아내에 대한 사랑이 유별나다. 그는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도 아내를 든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아내와 첫 포옹을 하고 청혼에 성공했을 때다. 국산 장갑차를 보스니아 내전 때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되는 말레이시아 육군에 수출했다. 우리나라 최초로 육상 무기 수출을 수행한 종합상사원으로 수탉 같은 우쭐함이 있었다. 파산한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아 4년여의 뼈를 깎는 노력 끝에 회사가 경영정상화되었을 때는 경영자로서 대단한 자긍심을 가졌다. 회사가 가장 어려웠을 때 미얀마에서 해상유전을 확보했다. 3년여의 탐사 후 두 번째 시추에서 대형 가스 매장량이 발견되었을 때는 마치 대그룹의 총수가 된 것 같은 내 생애 최고 절정의 순간이었다. 이런저런 최고의 순간들을 되돌아보니 그 모두가 행복한 징검다리의 디딤돌이었다. 그래도 꼭 한 가지만 꼽으라면 아내를 만난 것이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고 망설임 없이 이야기하겠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 중
이런 아내 사랑이 어디 또 있겠는가. 종합상사원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무기 수출을 해냈고, 경영자로서 파산한 회사를 4년 만에 정상으로 만들고, 3년 만에 가스 탐사 시추에 성공한 일보다도 아내에게 청혼이 성공했을 때가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니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아내 사랑이다. 그뿐이 아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도 아내를 만난 것이란다.
목표지향적인 삶 속에서 치열하게 살다가 2017년 말 경제계에서 은퇴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는 줄기찬 구애 끝에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이다. 시동생들까지 챙겨주며 아이들 교육은 물론 내 뒷바라지까지 삶의 곳곳에 그녀가 있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보배 같은 사람이다. 두 번째의 터닝 포인트는 한국은행을 과감히 퇴직하고 대우로의 전직이었다. 세계는 넓고 할 일도 많았다. 대우그룹의 도산으로 무너진 회사를 임직원들의 노력과 많은 분의 도움으로 정상화한 일이다. 국가로부터 인정도 받았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 중
그 모든 일이 아내를 만났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가장 큰 변화였던 대우로의 전직도 그 아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친구같고 누이같은 아내와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을 이어가고 싶다‘고 한다.
요즘은 읽을거리가 넘쳐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읽으려 하기보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으려 한다. 어느새 거기에 익숙해 있다. 그 이유가 보는 것 듣는 것이 편해서이기도 하지만 읽는 것들이 보고 듣는 것보다 재미가 덜하기 때문이다. 보고 듣는 것은 온갖 시청각 양념을 다한 것이고 읽는 것은 오로지 내 수고가 들어가서 눈으로 읽고 생각으로 씹어야만 하는 것이다. 거기다 재미가 없다면 읽을 맛도 나지 않는다.
이태용이 펼쳐내는 이야기들은 이상하게 읽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누구에게나 다 있는 얘기 그래서 누구도 다 할 수 있는 이야기들까지도 이태용의 펜에선 밉지 않게 수용이 되고 거기다 공감이 되고 감동이 된다. 그 이유가 뭘까. 바로 진솔함이다. 사실의 직설적인 표현들이 오히려 진솔하다는 점수를 받으며 그래 그땐 그랬었지 하는 동의를 얻어낸다. 그래서 이태용의 글들은 읽을 맛이 난다.
4. 우리나라 산업화의 역사인 이태용
이태용의 원고들을 읽어가면서 감사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을 동시에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내 일에만 빠져 있을 때 어느누군가는 물론 그의 일이기도 했겠지만 우리나라가 이만큼 되게 하는 대 역사들을 그의 손이 그의 발이 그의 입이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구소련의 붕괴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이 민족 별로 해체되어 신생독립국가들이 우후죽순처럼 탄생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가 민족별 종교별로 갈가리 찢어져서 여러 독립 국가들이 되었고 그중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란 나라에서 민족은 같은데 종교 문제로 내전이 일어났다. 기독교계와 이슬람계 간에 참혹한 인종 말살 전쟁이 발발하여 UN에서 평화유지군을 파병키로 결의가 되었다. 말레이시아는 회교도 보호를 위하여 당시 수상인 마하티르가 이끄는 내각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파병을 결정했다. 그런데 파병을 준비하다 보니 군인들을 무장시킬 변변한 장비가 없었다. 이것이 말레이시아 국방장관과 내가 만나게 된 동기였다. 그 후 약 2년여의 끈질긴 협상을 통해 말레이시아 정부가 대우로부터 한국형 장갑차 111대를 구매하여 전쟁터에 가서 평화유지군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게 되었고, 이 일로 나는 국산 장갑차를 최초로 수출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런 커다란 국책사업을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나집(NAJIP)을 수시로 만나야 했다. 그는 말레이시아 두 번째 수상의 아들로 소위 금수저 출신이다. 이후 이분이 당시 수상이었던 마하티르의 후원으로 부수상이 되고 마침내는 그 나라의 수상이 되었을 때 나의 일처럼 자랑스럽고 기뻤다. <말레시아의 리더들>
한국에서 국산 장갑차를 말레시아에 판 최초의 수출 주역이 이태용이었다. 그리고 그 인연이 계속되어져 그 국방장관의 한국방문이 이뤄지고 군비 수출국 대한민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모든 거래엔 국가간의 이익이 우선되지만 신용과 신의가 제일인데 그런 신의를 지키는데도 이태용은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상대 또한 신의를 지켰을 것이다. 물론 거기엔 많은 좋은 인연들도 작용했다. 어디나 인맥은 가장 큰 자산이다.
이때 말레이시아 대사인 홍순영 씨(전 외교부 장관-작고)가 나에게 국방부 장관을 소개해주었다. 이를 계기로 국방부 장관의 한국 방문이 이루어졌다. 함께 창원에 있는 대우중공업 장갑차공장을 방문했다. 탑승도 해보고 여러 가지 시범 운전을 참관한 후 대우 장갑차를 사겠다고 언급을 했다. 그 결과 세 번에 걸쳐 111대의 국산 장갑차를 말레이시아 정부에 납품했다. 이 중 일부가 보스니아에 보내져 평화유지군 활동에 투입되었다. 장관의 한국 방문 이후 첫 번째 선적까지 24개월이 걸렸다. 이런 과정에 우방국들이 우리의 경쟁자가 되었다. 총성 없는 경제전쟁에서 우방도 적이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B장군은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하여 고비 고비마다 우리 손을 들어주었다. <우연한 만남>
미얀마 정부는 대우에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그러나 대우의 탐사 성공으로 미얀마 모든 해상광구는 물론 육상광구까지 전부 외국에 분양되어 큰 이득을 보았다. 때아닌 자원개발 붐이 일어났다. <미얀마 가스전 소고>
이러한 큰일들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모르는 곳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평화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쪽에서 이런 평화를 얻기 위해 싸워준 이들이 있기 때문 아닌가. 일선에 나가 싸우는 사람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그런 전력이 평가되어 성과에 대한 포상이 이뤄지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이 일과 관련하여 대표이사인 이태용은 2005년 3월 상공인의 날 금탑산업훈장을, 본부장인 임채문은 2010년 12월 수출의날 철탑산업훈장을, 현장소장이었던 양수영 박사는 2011년 은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회사는 2000년 12월 27일 ㈜대우의 무역 부문이 분할되어 ㈜대우인터내셔널로 거듭났다. 2010년 10월 1일 포스코에서 채권단 지분(68.2%)을 인수하여 포스코 그룹의 일원이 됐다. 2016년 3월 포스코대우로, 2019년 3월 포스코인터내셔널로 사명이 변경되어 자원개발 및 종합무역회사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미얀마 가스전 소고>
중국이 개혁개방을 하면서 중국 정부가 포스코를 무척 부러워했다. 그래서 김우중 회장에게 포스코 같은 제철소를 중국에 건설할 것을 종용했다. 상해에 있는 보산제철소의 현대화를 부탁했다. 그래서 포스크와 팀을 이루어 보산제철소의 고위층들과 중국과 우리나라를 오가며 협상했다. 제철소 건설은 단순한 투자가 아니고 한 나라의 산업구조를 바꾸는 대형 국책사업이기 때문에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았다. 제철소 건설 후 우리와 경쟁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닌지, 이 과정에 우리의 제철 기술이 유출되는 것은 아닌지 등이 최종고려사항이었다. 보산과의 협상 때는 홍콩지사에서 활약했던 박근태 부장이 능력을 발휘하면서 본사와 보산제철소 사이에서 연락책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경제체제가 다른 국가들>
그많은 사람이 편안히 잠을 자고 있는 순간에도 누군가는 깨어 일하고 있듯이 순간순간이 시계 초침처럼 쉬지않고 분주히 돌아가는 것이 세상이고 삶이다. 삶은 자신의 삶이건 한 나라 또는 세계의 움직임이든 같은 원리로 같은 열정으로 돌고 움직이고 만들어내고 이루어내는 구조다. 그 속 중심이 되어 이태용이 이만한 일을 해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있었겠는가. 해서 그도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한다. 그게 보람이고 자신에게 주는 상급이기도 할 것이다.
1998년 상품영업부 부장이 되었다. 명실상부한 ㈜대우 무역부문의 핵심 자리였다. 서형석 회장, 장병주 사장 밑에 상품영업부문장 이태용 전무, 국내판매부문장 홍세희 전무, 영상부문장 정주호 부사장, 관리본부장 김영구 부사장이었다. 이 자리에서 일하는 동안 회사의 모든 수출입업무에 대해 본부별 상품별 특성을 파악할 좋은 기회였다. 98년 말 무역의날 (주)대우가 150억불 탑을 수상했고, 나는 무역총괄 임원으로 석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내 생애 최초의 국가 훈장이었다. 그때는 무역의날이 11월 30일이었고 무역협회 강당에서 국무총리 참석하에 행사를 했다. <해외지사장 회의>
그런 그에게 위기가 왔다. 그가 어찌해 볼 수도 없는 불가항력이었지만 그 중심에서 그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감수해야 하는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남미 쪽 대우자동차 판매법인들이 열심히 하여 소형차 티코(TICO)와 중형차 씨에로(CIELO- 국내 브랜드 르망)는 중남미 모든 국가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북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특히 리비아에서는 누비라(NUBIRA) 5만 대 신용장(L/C)을 받는 쾌거도 있었다. 이때 리비아 지사장은 철강 출신인 황양연 부장이었다. 이 신용장은 대우 역사상 단일 신용장(L/C)으로 최대 금액이었다. 반면 미국과 유럽 시장은 저조한 판매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동시에 좋은 차를 출시하는 전략을 세우고 김우중 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했다. 주말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평기술연구소의 임원들이 김우중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출석하여 난상토론을 하곤 했다. 그래서 출시된 차가 라노스(LANOS), 누비라(NUBIRA), 레간자(LEGANZA)였다.
이런 과정 중 우리나라 외환보유고가 바닥이 나면서 99년 8월 27일 대우그룹이 파산했다. 김우중 회장 보유주식이 모두 채권단으로 넘어갔다. 그룹 전체가 채권단 관리회사로 되었다. 대우자동차는 산업은행 대출금이 제일 많아 산업은행 관리회사가 되었다. <대우자동차 수풀총괄>
그만이 아닌 대우라는 거대한 조직 속 모두가 한 순간에 주저앉게 된 이 상황 앞에서 이태용의 삶도 꿈도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도 주저앉을 수도 없이 다시 일어난다. 그는 99년 12월 15일 파산 회사 (주)대우 무역 부문 사장으로 취임한다. 그에게 떠안겨진 새로운 삶의 무게는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거역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거대한 한 힘에 붙들려 있었다.
결혼을 앞둔 직원들은 배우자 쪽에서 대우를 그만 두어야 결혼을 하겠다고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본인은 계속 대우에 근무하고 싶다면서 다른 회사로 이직하여 결혼하고 다시 입사하겠다는 직원도 있었다. 아이들도 학교에서 “너희 아빠 망한 회사 다니지?” 하면서 놀림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듣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태용은 그 모든 절망적 어려움 속에서도 꽃을 피워냈다. .
주총장을 나오는데 한겨울이었지만 내 와이셔츠가 물주머니가 되어 있었다. 회사 파산 후 가시밭길을 걸어왔지만 1년 4개월 만에 새로운 회사 ‘대우인터내셔널’과 ‘대우E&C’ 두 회사가 탄생한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감격스러운 날이었다. 커다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점심을 생략하고 바로 회사로 와서 이사회를 개최하여 대표이사로 선임이 되었다. 주총일이 금요일이어서 월요일인 2000년 12월 27일 회사등기가 완료되었다.
2003년 12월 31일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그동안 함께 고생했던 임직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대우를 회생시킨 자랑스러운 얼굴들이다. 2005년 상공인의 날 경제 4단체장의 추천으로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내 생에 2번째 훈장이었다.
2000년 12월부터 2006년 12월까지 만 6년간 대표이사를 하는 동안 회사는 미생의 단계에서 완생으로 변화되었다. 비록 3 연임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으나 맡았던 회사가 견실한 회사로 발전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오뚜기 이태용, 탱크같은 이태용,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외모인데 이번 책의 내용들을 보면서 갖게된 느낌이다. 삶은 늘 배수진일 수 있다. 특히 종합상사원들겐 매일이 전쟁의 나날이고 결코 물러설 수 없는 배수진의 싸움이다. 그래서일까. 이겨낼 때가 더 많다. 그 말은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실패 속에서도 다시 도전하여 결국은 승리로 만든다는 얘기다. 이태용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었고 그런 우리나라였고 그렇게 했기에 우리의 오늘이 있는 거였다. 대우는 한 때 세계를 품었고 세계를 날았고 세계에 군림했다. 대우는 숱한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고 이루게 했다. 하지만 어느날 추락하는 데는 날개도 없었다. ’그룹 전체가 채권단 관리회사로 되었다.‘는 한 문장 속에 그는 평생을 바쳐온 대우의 침몰을 회한 가득 다 담았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일어난 그는 새로운 자부심의 빛나는 새 날을 열었던 것이다.
5. 그래도 안암동⋅어머니⋅만남들
이태용과 대우, 대우와 이태용은 하나였다. <나의 인생, 나의 꿈>은 문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그렇다고 개인적 자서전이랄 수만도 없다. 개인의 이야기로는 너무나 크고 넓고 많은 이야기들이 수많은 중심점을 만들며 부표를 띄웠다. 이태용이라는 한 사람의 줄기로 뻗쳐가면서 펼쳐진 수많은 경제 사회적 현상과 실체들이 대한민국 산업화의 역사였고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던 이 나라의 가닥이었고 선진국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으로 보여지고 놓여지고 올라가게 했다. 그 중심에 이태용-대우-아내가 있었다. 하나일 것 같지 않은데 하나인 것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으로 꿈으로 다져지고 넓혀지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는 고리를 만들었다.
안암동 혜화동 양영학원 알바 등은 이태용의 삶을 열게 했던 모판이었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연단하고 더러는 깨우치고 그러면서 탈피(脫皮)를 위한 몸부림으로 생을 펼쳤다. 그런 그는 아내라는 동반자요 동지를 통해 새로운 삶의 장을 열면서 무엇이 중하고 귀한 것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혼자에서 둘이 함께로 그리고 어머니, 부모 되기, 자녀들의 가족, 거기에 상사원으로서의 도전과 응전은 많은 인연과 도움의 틀을 만들었고 어떤 경우에도 쓰러지지 않을 굳건한 모습으로의 탄생을 가져왔다.
삶은 동사(動詞)다. 하기에 멈출 수도 없지만 멈추어서도 안된다. 잘 나갈 때보다는 어려움으로 직면했을 때 진가가 나타나는 것이 능력자의 모습이다. 세계를 날던 기업이 순식간에 무너졌을 때의 참담함과 황당함은 어떤 표현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참담과 황당까지 이겨내는 위대한 성공자로서의 이태용이었기에 인생 2막의 평화와 행복이 주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태용은 거대한 항모 같다가도 지극히 작고 사소한 것에 목말라 하는 소소한 정의 사람이 된다. 며느리가 동계올림픽 참관의 기회를 만들어 준 것에도 기뻐하고 감격하고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갔을 때나 골프로 맺어진 소소한 인연들을 중시하는 것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소시민의 한 모습을 보인다. 말하자면 이런 다양성이 험난한 그의 삶의 날들에서도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는 삶으로 최종 승리자가 되게 하지 않았을까.
일에서는 강하게, 사랑 앞에서는 가장 부드럽게 넓고 깊게 관계를 가지면서 과하게 욕심내지 않고 자신을 확보하는 이태용 삶의 방법이었기에 오늘의 그가 있게 된 것 같다.
그는 그의 인연 속에서 만난 상사를 분류했다. 서형석 회장 같은 가장 존경하는 상사, 유기성 부사장 같은 끝까지 나를 신뢰해 준 상사, 엄길용 부사장 같은 나를 단련시켜 준 상사, 그런가 하면 Y회장 같은 반전의 기회를 준 상사이다.
그런 인연과 도움과 연단이 그만이 해낼 수 있는 일들을 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안암동⋅어머니⋅그리고 수많은 만남들이 있었다. 그 힘이 그를 붙들어주었고 의지가 되게 했고 한 번 더 일어날 수 있게 했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 남은 생애 동안 ‘나의 나’와 ‘남의 나’에 큰 괴리가 없는 늙은이로 살아가길 다짐한다.‘며 소망도 펼친다. 그런 마음을 갖게 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감사하는 마음일 것이다.
’가슴 한복판을 절개하는 큰 수술을 받은 사람 중에 제 발로 병원에 걸어 들어가서 수술을 받고 제 발로 걸어서 퇴원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는 그렇게 자신의 생명 또한 큰 힘의 도우심이고 은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크게 교만하지 않고 방종하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지금부터의 삶이 더 값진 삶, 가장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이 될 수 있는 기회라 보는 것이다.
6. 로그 아웃
이태용의 자전적 수필집 <나의 인생 나의 꿈>은 이 시대를 사는 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이 시대 모두의 자전적 삶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문학도 문학적 서정이나 서사만 중요시하는 것만은 아니다. 문학이 갖는 순수 서정 서사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부분은 바로 그 시대 그 환경에서 어떻게 삶을 펼쳐냈고 그 삶이 어떤 향기로 그 시대 내지 후대에까지 풍겨지는가가 더 문학적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태용의 자전적 수필집은 그 어떤 문학적 사유보다 높은 가치로 우리를 사유케 하고 그 어떤 문학적 감동의 진실보다 더 높은 가치의 진실로 감동을 준다 할 것이다.
그게 진정한 이태용만의 삶의 문학일 것이다. 곧 또 문학적 수필집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면서도 이 책이 갖는 의미와 감동을 더 크고 높이 평가하곺은 것은 단순한 그의 삶의 기록을 넘는 우리 시대의 공통된 삶의 숨소리를 함께 듣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일독하면서 숨비소리를 듣는다. 들숨으로 물속 깊이 들어갔다가 날숨으로 나오며 몰아쉰 숨을 휘파람처럼 뱉어내는 해녀들의 숨비소리처럼 이태용은 수많은 우리 경제사 고비고비를 숨비소리와 함께 살아나왔다. 조금만 숨이 모자라도 살아날 수 없는 매 순간의 숨 가쁨을 이젠 옛이야기처럼 편안히 말할 수 있게도 되었지만 어쩌면 그런 그의 삶은 3막의 인생을 더 멋지게 펼쳐내고 있음일 것이다.
일단 펼치고 눈을 붙이면 떼지 못하고 끝까지 읽게 될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맨 먼저 감사함으로 읽어 본 거룩한 부담감의 시간이었다. 이런 선한 영향력이 이젠 그에게서 순수문학으로도 아름답게 꽃을 피워낼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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