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4.11 20:46
토레스 델 파이네와 피츠로이 트레킹에 도전한 부부
아주 오래 전 우연한 기회에 심심풀이로 뒤적이던 어느 잡지에서 순간 숨이 멎는 듯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어느 신혼부부가 여행지로 다녀온 칠레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 3봉’이었다.
나는 ‘세상에 이런 곳도 다 있네!’하며 두근거림과 설렘으로, 언젠가는 꼭 가봐야겠다는 마음으로 지도를 찾아봤다.
하지만 너무나도 먼 나라였다. 더구나 나의 체력으로는 엄두를 낼 수도 없는 머나먼 곳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10여 년 전 한국트레킹학교에서 실시하는 트레킹 교육과
마더스틱 교육을 통해 새로운 삶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 교육을 통해 산행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시작으로, 환갑기념 스위스 오뜨루트(총 거리 177km), 알프스 TMB와 3대 미봉,
캐나다 로키, 돌로미테, 그랜드캐년(사우스카이밥-팬텀랜치-리본폴-브라이트 엔젤) 트레킹을 다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동안 잊고 지냈던 나의 로망이었던 파타고니아의 W트레일에 기회가 닿게 되었다.
나에게는 정말 꿈같은 일이다.
여행사의 남미 패키지 상품은 나이가 있는 우리 부부에게는 소화하기 힘든 일정이기도 하고,
관광 위주의 일정보다는 파타고니아의 꽃인 W트레일을 걷고 싶었다.
그 래서 남편과 나는 이곳에 관한 사진과 지도 교통편 정보를 1년 전부터 공부하기 시작했고
남편은 스페인어 공부까지 돌입했다.
오랜 준비 끝에 지난 1월 인천공항에서 거의 30시간을 채워 페루 쿠스코에 도착했다.
쿠스코는 해발 3,399m에 위치해 많은 여행자들이 고산증으로 고생하는 곳이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고산증이 없었다.
이곳에서 시차적응 시간을 가지며 마추픽추를 다녀왔다.
쿠스코에서 W트레일 시발점인 푸에르토나탈레스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쿠스코 공항에서 칠레 최남단 공항인
푼타아레나스까지 비행기 환승 2번에 버스이동 3시간까지 꼬박 24시간을 채워야 갈 수 있었다.
[ 변화무쌍한 파타고니아 기후]
W트레일은 대다수 사람들이 3박4일 일정으로 떠나지만 우리는 하루를 더해 4박5일 일정으로 산장을 예약하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시즌 예약 사이트는 매년 5월 중에 여는데,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아 매일 사이트를 방문해야 선착순으로
필요한 산장을 예약할 수 있다.
산장마다 숙박 가능한 인원이 매우 적어 어느 곳 하나 예약에 차질이 생기면 하루 일정이
길어져 고생하거나 텐트에서 지내야만 하는 상황이 생긴다. 세 끼 식사 포함 하루 숙박비용이 워낙 비싸기 때문에
젊은이들은 야영을 많이 한다. 빌려주는 텐트도 있고 산장의 식사도 미리 예약해서 먹을 수 있다.
여름이라도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 춥고 바람도 심하게 불며 비도 자주 내려 나이가 있으신 분들에게 텐트 이용은
권하고 싶지 않다.
푸에르토나탈레스 버스 터미널에서 3시간 달려와 공원 입구에서 입장료를 지불하고 배로 30분 정도 들어가면
파이네그란데 산장이 나온다. 야영장은 캠핑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이곳에서 Grey산장까지
W트레일 첫 구간(11km)이 시작된다.
파타고니아의 ‘토레스 델 파이네’의 W트레일은 알파벳 W 모양 그대로 올라갔다 내려오고 하는 코스이다.
파타고니아의 특징은 일기 변화가 심하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준비 과정 없이 나서면
고생하기 십상이다. 하루에도 사계절을 만날 수 있는 날씨 변화이기 때문이다. 평지에선 보슬비처럼 내리던 비가
산 위로 올라가면 급격한 눈보라로 바뀔 수 있고 몸을 가눌 수 없는 바람이 불어대기 때문에 체온을 빼앗기지 않도록
적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레이빙하를 향해 어느 정도 올라갔을 즈음, 어마어마한 규모의 산불 장소를 지나게 되었다. 산불이 나게 된 동기는
어느 등산객의 사소한 부주의였다고는 하지만 바람이 심하게 부는 지역이라 그 피해 규모는 상당이 컸다.
비록 불은 났어도 세월이 지나면서 야생화가 곳곳에 피어 있어 이 구간을 지나는 트레커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는 듯했다.
[ 비바람 뒤에 만난 멋진 경관 ]
트레킹 2일차는 그레이산장에서 프란세스Frances산장(20.5km)까지 가는 구간이다. W트레일은 서에서 동으로
바람이 불기 때문에 바람을 등에서 맞으며 동쪽으로 가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래도 이 험한 길을 어린 학생들도
자기들끼리 조를 짜서 열심히 걷는다. 어릴 때부터 학교나 부모와 같이 함께 트레킹을 하면서 산행문화와
산에서 지켜야 할 예의들을 배우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 우리도 이런 산행 문화가 어릴 적 교육을 통해
하루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걸어가는 길을 따라 맑다 못해 시린 색깔의 호수가 펼쳐진다.
속담에서나 들어본, 너무 맑아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실제 호수를 그곳에서 봤다.
트레킹 3일차는 프란세스산장-프란세스계곡-브리타니코전망대-쿠에르노스Cuernos산장을 걷는 18km 구간이다.
아침부터 간간이 뿌리는 비 때문에 단단히 준비를 했다. 계곡 중턱에 올랐을 즈음에 여태껏 살면서 보지 못했던
눈보라를 만났다. 산 위 만년설에서 내려오는 거센 강풍을 타고 눈이 옆으로 미친 듯이 내려치기 시작하면서
한치 앞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이런 놀라운 자연 변화가 무섭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앞서가던 일행이
산행을 포기를 하고 내려가는 바람에 더욱 난감해졌다. 그래도 아쉬움을 떨칠 수 없어서 잠시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젖은 장갑을 갈아 꼈다. 그런데 그 사이 바람은 어느새 잦아들고 눈앞에 몽환적인 신천지가 펼쳐졌다.
너무나 웅장한 자연의 위대함에 기가 질리도록 감탄만 연발했다. 세상에 이런 곳도 있다니….
트레킹 4일차는 쿠에르노스산장-칠레노Chileno산장 사이 16km 구간이다. 트레킹을 하다 보면 같은 구간을 걷는
사람들을 자주 스치게 된다. 첫날 그레이산장에서 딸 부부와 함께 온 캐나다 부부와 같은 방을 썼는데,
딸과 사위는 캠핑하면서 함께 트레킹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은 머나먼 한국 땅에서 인터넷을 통해
모든 것을 예약하고 이곳까지 온 우리 부부를 대단하다고 하면서 ‘엄지 척!’을 해주었다.
트레킹 내내 만날 때마다 친구처럼 서로 등도 토닥거려 주며 화이팅를 외치고 함께 사진도 찍었다.
세계 어느 곳에 살든 이렇게 같은 뜻을 갖고 같은 길을 걸으며 모두 한마음이 된다.
트레킹 5일차 칠레노산장-토레스 3봉 사이 14.5km 구간이다. 드디어 토레스 3봉을 만나는 날이다.
지난밤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끼리 내일 새벽 서로 깨워 주기로 하고 좋은 날씨를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이른 새벽부터 내리는 비 소리와 바람 소리에 마음은 뒤숭숭하고 출발시간이 다 되어도 아무도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이곳까지 왔는데 그냥 되돌아 갈 수는 없어서 무거운 짐은 산장에 맡겨놓고
간단한 짐만 챙겨 길을 나섰다. 산장에서 새벽 일출을 보러 가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한 조식용 샌드위치와
간식거리가 이름과 함께 테이블에 놓여 있다. 이것을 챙겨 들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온 간절함을 더해 3봉을 향해 올라갔다.
마지막 가파른 너덜길을 거의 다 올라갔을 무렵 때마침 구름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치며 3봉의 모습이 환하게
내 눈앞에 들어왔다. 그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정말 대단한 곳이었다. 이 장엄한 모습을 보기 위해
숱한 날을 그리워하며 지구 정반대 편인 이곳까지 왔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많은 기도가 절로 나왔다.
그리고 말없이 그 장엄한 광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내 나이 67세,
나는 노후의 인생은 재미있고 의미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마음이 건강해지고, 그리고 긍정의 에너지가 생겨 내 몸과 마음이 더욱 더 건강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당신은 건강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라고.
그러나 나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산행교육을 받으며 꾸준히 노력한 끝에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도 함께 교육 받았던 10년 된 산행친구들과 일주일에 꼭 한 번은 산을 오른다. 이것이 원동력이 되어 아직까지도
건강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W트레일을 마치고 다시 푸에르토나탈레스로 돌아와 버스로 칠레와 아르헨티나 국경을 넘어 엘칼라파테에 도착했다.
하루 시간을 내어 모레노빙하를 보고 피츠로이가 있는 엘 찰텐으로 갔다.
[ 여유롭게 돌아 본 피츠로이FitzRoy ]
피츠로이의 변화무쌍한 날씨를 감안해 여유 있게 이곳에서 3박 일정을 계획했다. 주방이 딸린 현지 민박집을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했다. 저렴하고 맛이 좋은 소고기와 와인으로 직접 음식도 해먹을 수 있었다.
도착한 날 밤은 깊은 잠을 청할 수 없을 정도 비바람이 불어댔다. 하지만 새벽녘에 잠이 깨어 이 고요하고 작은 마을에
있는 아름다운 길을 걷고 싶어 민박집 바로 위 길을 따라 토레 호수를 다녀왔다.
피츠로이까지는 왕복 20km로 8~9시간이 걸린다. 카프리호수와 포인세노트 캠핑장을 지나자 지금까지의 힘들었던
여정을 보상이라도 하듯 너무 멋있고 아름다운 피츠로이의 자태가 눈앞에 펼쳐졌다. 토레스 델 파이네 3봉도 그랬지만
피츠로이로 가는 마지막 오르막길도 장난이 아니었다. 한여름철임에도 간간이 눈이 쌓인 길도 만만치 않고 가파른
너덜길도 힘에 겨웠다.
마지막 정상에 올랐을 때 내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눈이 부실 정도로 멋있는 광경에
할 말을 잊고 신선이 노는 듯한 봉우리들을 말없이 즐기고 있는데 갑자기 정적을 깨며 올라오는 한 무리가 있었다.
모처럼 내 귀에 잘 들리는 익숙한 언어. 한국 단체 여행객들이었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한꺼번에 쏠리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아~ 숨고 싶었다.
파타고니아는 바람의 땅이다. 거부할 수 없는 대자연의 유혹과 세상 끝의 비경들이 숨은 곳이다.
아름다운 것을 넘어 너무도 장엄하고 광활한 대자연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왜 이곳을 갈망하고
사랑하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금까지도 작은 감동들이 내 가슴 한구석에 뭔지 모를 애잔함으로 남아 있다.
파타고니아 트레킹을 위한 Tip
1 흐르는 계곡물을 마실 수 있다.
2 산장에서 Full Board 신청시 런치박스(샌드위치, 견과류, 과일, 초콜릿 등) 제공.
3 산장 :남녀 공동숙소(2층 침대).
4 산장 샤워실에 옷 걸어둘 곳이 없음. 보조가방 있으면 좋음.
5 개인수건 지참. 샴푸와 비누 있음.
6 4박5일 동안 필요한 최소한의 짐(보온, 방수, 방풍, 다운재킷, 장갑, 버프, 헤드랜턴, 방수등산화, 스틱 필수).
7 점심과 물만 넣어 다녀올 수 있는 작은 색(Sack)이 있으면 편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