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리 능골 강장자의 집터입구에 거북바위가 하나있다.
이 거북바위의 머리는 충주.주덕간 도로 건너편인 노계마을쪽을 향하고 있고 꽁무니쪽은 강장자집터를 향하고 있다.
이 거북바위가 노계마을쪽의 재물을 먹고 강장자 집터를 향하여 변을 보므로 노계는 못살게 되고 강장자는 부자가 되였다고 한다.
거북바위에 전하는 전설은 가까운 중앙탑면 하구암리에 있는 평강채씨거북돌에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거북이는 장수와 부의 상징으로 민초들의 바램과 더불어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그래서 노계마을 사람들과 강장자마을 사람들이 서로 거북의 방향을 바꾸어 놓으며 부자가 되기를 빌었다고 한다.
거북바위는 지금은 마을표지석 옆으로 옮겨져 있다.
원래 거북바위는 장자동터 큰 느티나무 옆에 있었다고 한다.그때는 크나 큰 느티나무가 20여그루 빼곡히 있었다고 한다.
한여름에는 목욕하고 올라와서 피서하기에 안성맞춤이였던 휴게 장소였다고 한다.
당시 대소원면 일원에는 이렇게 커디란 군락을 이루는 숲은 없었다고 한다.당시 그 숲은 대지주 소유의 땅이였다고 한다.
이 때 대지주[부재지주]는 자신의 땅을 관리하기 위해 마람이라는 관리자를 두게 되였는데 그 관리자중에 한사람은 권태웅 노인회장의 부친이였다고 한다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장재동 숲에서 살았던 민가들이 지대가 높았던 탓으로 점차 아랫쪽으로 내려오개 되면서 민가가 하나 둘 사라지게 되였다고 한다.
그래서 장재동 숲터에는 만가가 사라지게 되였고 1985년 10월 5일 성종1리와 2리가 분구되면서 지금 성종2리에서는 마을 이정표로서 표지석을 세우게 되였고 이에 거북바위도 마을의 번영과 발전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전하여 세우게 되였다고 한다.
거북바위가 있었던 장재동 숲터는 점차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되면서 경지정리등으로 많은 변모가 있었고 제대로 돌보지 않게 되면서 거북바위도 흙에 묻혔다고 한다.이에 성종2리 마을주민들은 땅주인과 협의를 이뤄낸 끝에 지금의 마을입구 자리로 옮기게 되면서 마을고사를 지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장성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장재동과 성종리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장성리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1898년에 나온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 보면 이안면은 9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하나가 성종이다. 1912년 『구한국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 보면 이안면 19개 리에 성종리, 부연동, 장재리가 나온다. 이들 3개 마을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성리가 되어 이류면[현 대소원면]에 속하게 되었다. 1956년 충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이류면의 소속이 중원군으로 바뀌었고,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되면서 대소원면 장성리는 다시 충주시에 속하게 되었다.
성종1구, 성종2구, 부연의 3개 행정리로 이루어져 있다. 성종1구가 전통적으로 장성리의 중심 마을이다. 장성리 전체 인구의 56.3%인 241명이 성종1구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성종의 옛이름은 성마루인데, 이곳에 예부터 토성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성종2구는 옛날 장재동을 말한다. 옛날에 장자(큰 부자)가 살았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부연(釜淵)은 가장 산골에 있는 마을로 가마소라 부른다. 마을 앞에 솥처럼 둥근 소(연못 또는 저수지)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장성리 서쪽으로는 금곡리가 있고 동쪽으로는 만정리가 있다. 남쪽으로는 탄용리가 있고 북쪽으로는 요도천을 건너 완오리가 있다. 마을 앞으로 국도 3호선과 충북선 철도가 지나간다. 철도로 인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차단되어 있어 접근이 불편하다. 장성리[長城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첫댓글 거북이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복을 기원하는 우리조상들의 토속신앙이 순하고 착한 민족임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