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탄생하라
이원
우리의 심장을 풀어
발이 없는 새
멈추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던
하나의 돌은
바닥까지 내려온 허공이 되어 있다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
봄이 혼자 보낸 얼굴
새벽이 받아놓은 편지
흘러간 구름
정적의 존엄
앞에
우리의 흰 심장을 풀어
꽃
손잡이의 목록
그림자를 품어 그림자 없는 그림자
침묵으로 덮여 그림자뿐인 그림자
울음이 나갈 수 있도록
울음으로 터지지 않도록
우리의 심장을 풀어
따뜻한 스웨터 한 벌을 짤 수는 없다
끓어오르는 문장이 다르다
멈추어 섰던 마디가 다르다
그러나 구석은 심장
구석은 격렬하게 열렬하게 뛴다
눈은 외진 곳에서 펑펑 쏟아진다
거기에서 심장이 푸른 아기들이 태어난다
숨이 가쁜 아기들
이쁜 벼랑의 눈동자를 만들 수 있겠구나
눈동자가 된 심장이 있다
심장이 보는 세상이 어떠니
검은 것들이 허공을 뒤덮는다고 해서
세상이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심장이 만드는 긴 행렬
더럽혀졌어
불태워졌어
깨끗해졌어
목소리들은 비좁다
우리의 심장을 풀어
비로소 첫눈
붉은 피가 흘러나오는 허공
사람은 절망하라
사람은 탄생하라
사랑은 탄생하라
우리의 심장을 풀어 다시
우리의 심장
모두 다른 박동이 모여
하나의 심장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심장
우리의 심장을 풀면
심장뿐인 새
*사람은 절망하라/사람은 탄생하라: 이상,「선에 관한 각서 2」에서
사랑은 탄생하라 이원 시집 중에서
죽음은 유한한 사람에게 열린 가능성의 세계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절망하는 세계이며, “침묵으로 덮여 그림자뿐인 그림자”의 세계, 울음의 세계이다. “우리의 심장을 풀어/ 따뜻한 스웨터 한 벌을 짤 수는” 없지만, 그러나 삶의 국소적 영역인 ‘구석’이라는 곳에서 “심장이 푸른 아기들이 태어난다.” 아기들은 “눈동자가 된 심장”으로 세상을 본다. 갓 태어나 어른처럼 더럽지 않은 심장은 순수하다. “검은 것들이 허공을 뒤덮는다고 해서/ 세상이/ 어두워지지는 않는” 것은 순수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삶과 죽음의 물리적인 인과 관계 속에서 ‘죽음’이라는 절망과 함께 태어나는 결정론적 운명을 지녔다. 이것이 사람의 우주이고 실재이다. 지구라는 이 세계에서 사람은 영원한 영역에 존재할 수 없으며, 가능하다면 시공간을 초월하는 종교적인 영역 안에서 재탄생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태로서의 비가역적인 삶의 과정 속에는 숨이 멈추는 사람의 절망과 갓 태어나 숨 쉬는 사람의 희망이 공존하며, 탄생하는 사람은 사랑의 가능태로 세계 내에 던져진다.
사람을 탄생하게 하는 위대한 힘은 사랑이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사랑 안에서 “모두의 숨으로 만드는 단 하나의 심장”, 그러니까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희망이 가능함을 예감케 하는 것은 이 세상의 부조리한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어 상승하는, “심장뿐인 새” 의 이미지이다. 모든 존재의 근거가 되는 심장. 영원히 머무를 수 없는 이 불완전한 지구에서 심장이 뛰고 있는 아기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 봄빛이며, 미래 공동체의 가능한 희망으로 진화할 것인가.
추천사유 글 김민율
『 시현실 』2017년 겨울호
첫댓글 푸른 심장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서 우리 사회가 맑고 밝은 구석을 찾아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