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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선교역사:
1892년- 무어(Miss Elizabeth S. Moore, 모이리사백, 牟以利 女+少 伯)선교사 선교활동(1892년 내한~1918년 퇴임, 부산 1892~1913, 통영 1913~1919), 빅토리아주 윔배트 힐(Wombat Hill)가까이에 있는 데이레스포트(Daylesford)출신, 맥케이목사와 동행, 1892년 8월에 내한하여 부산에서 1912년까지 근무하면서 통영지역을 정기적으로 순회 전도 하였고 1913년에 통영선교부가 개설되면서 왓슨 부부와 함께 개척선교사로 부임함. 여성교육에 전념함. 학교, 야간학교, 유치원설립함. 젊은 여성들에게 공장노동을 안선한 선구자, 두 번째 유치원 개원했으나 1931년 당국에 의해서 폐쇄, 26년간 부산과 대화정교회에서 헌신, 1918년까지 통영내륙지방과 도서지방 순회, 1919년 은퇴, 1956년 사망.
1894년- 아담슨(Adamson, 손안로, 孫安路) 아담슨 선교사 통영선교시작(호주출생, 중국북부에서 영국성서공회선교사로 5년 활동, 호주빅토리아신학교(Presbyterial College in India)에서 목사안수, 호주 빅토리아 청년연합회(The Fellowship Union in the State of Victoria)파송 한국선교사, 1894년5월20일 내한, ~1909년까지는 부산중심활동, 1910~1914년 마산중심 활동, 호주장로교 통영선교부 설립, 거제지역은 통영관할로 소속, 주로 여객선을 이용하여 통영과 거제지역선교, 발동기선(통통배)으로도 선교활동을 함.
1903년- 겔슨 엥겔(Gelson Engel, 왕길지, 王吉志, 1868 독일남부 부르텐베르크 출생~1939소천), 1900년9월19일 아내와 세 아이를 데리고 멜버른출발 10월29일 부산항도착, 1901년 한국어설교, 울산과 함안등에서 선교, 부산진교회설립, 일신여학교 2대교장, 1917년 경남노회장, 1903년 10월 이후부터 손안로 선교사와 서부경남지역 선교활동시작, 1904년 4월14일 왕길지 목사의 부인인 브라운선교사 거제도 방문.
1910년- 왓슨(Rev. R. D. and Mrs. Watson, 왕대선, 王大善, 빅토리아 금광도시 발라랏;Ballart출생, 델보론대학교 오르몬드신학교(Ormond College)졸업, 빅토리아 장로교회 발라랏노회에서 목사안수)선교사 통영방문, 1913년 왓슨 선교사 부인 A. Baird 와 통영정착, 통영선교부 초대 주임선교사, 오스트레일리아 출생, 호주장로교 선교부 파송, 무어선교사와 함께 1913년 통영선교지부 설립을 맡음. 1928년까지 15년간 통영선교의 기초설립, 1929년 은퇴귀국, 1935년 소천, 통영일대, 칠암, 고성, 진해, 거제, 삼천포, 남해, 사량도, 욕지도 순회전도, 지세포교회설립, 왓슨부인 선교사가 1913년부터 진명강습소로 통영최초의 유치원과 학교를 시작하여 소녀들의 교육에 헌신함. (진명유치원은 70명의 학생, 16개 여름성경학교로 1,400명이 모였음), 1915년 진명보통학교설립신청이 좌절됨.
1910년- 메켄지(N. J. Mackenjie, 매견시, 梅見施)선교사, 부산선교부에 부임하였으며 임시로 통영선교부에 파송되기도 하였음, 부산 나병원 원장.
???? 1대선교사 커틀, 2대선교사 맥클라렌 통영 도착
1912년 호주선교부(특별위원회)는 경상남도 통영에 선교지부를 설치하기로 결의함.
1913년 5월- 통영선교부 개설(관할구역은 통영일원, 거제, 고성, 진해, 용남지역)
- 손안로선교사, 왕대선선교사 통영선교지부 개설
1913년 4월- 제3대 테일러(Taylor. William, 위대인, 魏大仁) 선교사(1877년6월14일 출생~ 1938년9월23일 소천), 창신대학에 순직기념비 있음, 에딘버러 의과대학(홍콩)졸업, 부인 엘리스(Main, Alice)와 결혼, 1913년 4월 호주 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 부인은 그해 9월에 내한하여 통영배속??, 작은 배로 이동진료, 한센병자치료.
1913년 5월- 라례인선교사???(~1941년 4월)
1918년- 알렉산더 ((Margaret. L. Alexander, 안진주 安眞珠)여 선교사 통영배속, 1911년 2월 내한하여 부산선교부 부임, 일신학교교장(1913~1916), 부산과 동래근무, 1937년 거주지를 부산 좌천동에서 통영으로 옮겨서 1941년 9월19일 시국관계로 일제에 의해 강제추방, . 꽃을가진 여인으로 유명함. 1967년 사망.
1920년- 메카그(J. E. McCague, 맥계익, 麥啓益)선교사, 1816년~1942년 재한, 1818년 9월에 내한하여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부터 1925년까지 통영에서 활동함. 통영에 재직시 대화정교회에서 1921년12월10일(12대당회)왕대선 선교사부인과 매카그, 스키너등 3명이 주일학교 우후 부인반에 임명됨, 1942년 일제에 의해 남편과 함께 강제 송환됨.
1921년- 스키너(Miss A. M. Skinne, 신애미, 愼愛美 )선교사, 1914년 9월에 내한, 1940년 맬버른에서 사망, 1921년에 통영선교사로 임명(1921~1940), 스키너 선교사는 한국명 신애미(愼愛美)로서 통영교육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이다. 지금도 교육계에서는 ‘신교장’으로 불리며 교육학을 전공하고 1921년 통영선교부로 전입하여 육영사업, 복음전파, 여성계몽사업을 담당했다. 신애미선교사는 1923년 통영진명유치원(문화유치원 전신)을 설립하였고 진명야학교, 도천야학교를 세웠는데 세계가 인정하는 음악가 윤이상, 청마 유치환 시인, 극작가 유치진, 토지의 작가 박경리, 시인 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제2대 윤보선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등이 진명학교 출신이다.
이시기에 스키너 선교사와 왓슨부부 와 함께 활동한 선교사는 무어(Miss E. S. Moor)와 쿠거(Miss M. O. Cague), 매카그(J. E. McCague) 등으로 조선어강좌, 주일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들은 주로 강습소나 야학회를 설치하여 문맹을 깨우치는 선교활동을 했다.
1923년- 던(Miss Elizabeth Whyte Dunn, 전은혜, 全恩惠)선교사. 1923년 9월 내한하여 1923~1928년 통영근무후 거창, 진주에서 사역하다가 1941년 강제철수, 해방후 다시 부산에 와서 1947~1950까지 근무하면서 거창, 진주, 통영지역 방문지도하면서 성경을 가르침. 1956년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야간학교 가르침, 1958년5월15일 송별환송, 1958년 6월3일 호주도착, 1986년 소천.
1924년- 프란시스(A. L. Francis, 방선생) 여선교사로서 ‘방선생’으로 불렸으며 1924년 9월 내한하여 3년동안 산업체학교의 임무를 맡았고 결혼으로 사임함, 대화정교회 유년 주일학교 교장으로 임명됨.
1925년- 엘리스(Miss C. Ellis, 이명선, 李明善)선교사,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여선교사, 1933년까지 근무, 1925년 통영전임, 1926년까지 2년동안 근무, 마을학교교사와 유치원교사훈련을 위한 특별과정을 만들고 야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일함.
1928년- 커어 (Edith A. Kerr, 거이득, 巨怡得)선교사 (1921년 8월 내한, 1926년 진주 시원여학교 교장취임, 1924년 마산 의신여학교 교장 부임, 1928년부터 1935년까지 통영선교부에 배속, 진명여학교 교장, 1921년 9월 내한, 통영에서 만든 물품을 호주에서 판매함. 1941년 본국 강제송환.
1928년- 트루딩거(M. Trudinger, 추마전, 秋瑪田) 선교사 부부(1922년 1월 부부내한, 1922~1925 마산선교부, 1926~1928 진주선교부, 1928~1935 통영선교부 활동, 1935~ 부산선교부로 전임)
트루딩거(M. Trudinger) 선교사는 1883년9월25일 영국 Yorkshire 의 Manston에서 출생함. 1920년 1월 간호사였던 베리이레안포스터(Vera Lrene Foster, 1888-1953)와 결혼함. 1926년부터 1935년까지 부인과 함께 통영선교부로 전임하여 간호사인 부인과 함께 지역 의료활동을 하였고 1938년 2월7일 부산으로 이임하였다.
이후 통영선교부의 의료선교사업은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선교사들이 강제철수 되고 말았다. 1955년 별세.
1928년- 레가트 (Miss Dorothy Fairlie Leggatt, 이혜수, 李惠受)여선교사, (1928.9 내한 통영사역~1930.6, 마산 1930.7~1931.6, 부산 1931. 7~1941)재한기간 1928년9월~1950년 까지.
1931년- 에드가(Elsie Edgar, 엽덕애, 葉德愛 또는 엽득아, 葉得兒)선교사 1931년부터 1941년까지 의료여선교사로 내한하여 통영선교부에서는 1931년~1933년까지 활동했다. 1941년 4월1일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강제로 본국으로 돌아감.
1931년- 호킹(Hocking Daisy, 허대시, 許大是)선교사(재한기간 1916~1941), 그녀는 1931년부터 34년간 통영선교부에서 활동하였고 1941년 부산에서 강제 추방되었다. 3.1 운동당시 학생선동죄로 고소되기도 했다.
1937년- 레인(H. W. Lane)선교사 부부 통영선교부 의료선교사업을 계속함. (1900.9.25 호주 빅토리아주 베언스테(Bairnsdale)에서 출생, 1934년 진맥퀸(Jean Macqueen)과 결혼, 1934년12월 한국도착, 3년간 어학공부후 통영지부에 배속, 트루딩거 선교사 부부가 부산 선교부에 전임됨으로 1937년 통영으로 전입함. 1941년 봄 대동아전쟁으로 가택연금 후 1942년 11월 포로교환형식으로 본국귀환)
1940년- 와킨스(I. Watkins, 왕영혜, 王 言+永 惠)선교사, 호주장로회파송 1940년 조선에 들어와 1941년 강제추방, 1945~1950 중국활동, 1951년 일본선교사파송, 1952년 내한 마산선교부 근무, 통영지방교회를 매월 방문.
1946년- 레인(H. W. Lane, 나예인)선교사는 조지앤더슨(George Anderson, 안다손)과 1946년에 내한 후 안다손선교사는 곧 돌아감, 나예인은 1949년 호주로 돌아갔다가 1950년 초 내한, 2개월 후 한국전쟁발발로 한국떠남, 1981년 1월2일 80세로 질롱에서 소천.
1947년- 1947년 9월 레인(H. W. Lane)선교사는 전은혜(Miss E. W. Dunn), 위대서(Miss M. Withers)선교사와 함께 부산, 통영, 거제도 성경학교교사봉사
1940년대에 통영선교부에 남아있던 선교사들은 알렉산더, 레인목사, 와킨스 등이 있었음.
1954년 8월18일- 전은혜(Miss E. W. Dunn), 왕영혜(Wakins) 통영방문, 대화정교회 성도들과 고 신애미 별세 추모예배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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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에 통영시내에서 두번째로 설립된 미수교회의 당회록 1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교회 설립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마포원(馬浦元)선교사가 남선(南朝鮮)순회시 통영교회(현. 충무교회)에 출석한 하강진씨가 자택에 표식을 세워 교회를 설립하였다."
여기서 언급된 ‘마포원’ 선교사가 누구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1884년에 통영선교를 시작한 아담슨 선교사(Adamson Andrew, 한국명: 손안로, 孫安路) 영국성공회 소속이면서 호주장로교 통영선교부를 설립한분인데 이 분의 이름을 잘못 기재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박연식목사)이 있다.
1대 원로장로 하성원 원로장로(초대 하강진 영수의 후손)으로부터 들은 구전에 의하면 ‘서양선교사가 말을 타고 선교를 왔었다’라고 하기에 말 ‘馬’ 자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또 한명의 추정되는 선교사는
호주 장로교 여선교사인 무어(Miss E. S. Moore)양의 한국명은 모이리사백(牟 以 利 女+少 伯)으로 아담슨 선교사와 함께 1894년부터 통영선교를 시작하여 1918년 퇴임때까지 통영에 있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어선교사는 호주 빅토리아주 윔배트 힐(Wombat Hill) 가까이에 있는 데이레스포드(Daylesford)출신으로 여전도회 연합회의 파송을 받고 한국으로 가기위해 기다리던 중 요양을 마치고 임지로 돌아가는 맥케이 목사와 동행하였다. 1892년 8월에 조선에 처음 와서 부산에서 1912년까지 근무하였고 통영지역을 정기적으로 순회전도하였다. 1913년 통영선교부가 개설되면서 와트슨선교사와 함께 개척선교사로 부임하였다.
이분은 여성교육에 전념하여 학교와 야간학교 유치원을 설립하였다.
무어선교사는 26년간 부산과 통영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에서 헌신하다가 1919년에 은퇴한 후 귀국하여 1956년에 사망하였다.
이 분의 성함이 한국명으로 다소 생소한데 이를 기록으로 옮기면서 ‘마포원 선교사’로 잘못 기재했을 수도 있다.
다음으로는 추정되는 선교사들로는
왓슨(왕대선) 선교사부부는 1910년에 통영에 처음 왔다가 1913년에 통영에 정착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1907년 보다 뒤에 방문했기에 가능성은 낮다.
1913년 4월에 통영에 의사선교사로 배속되어 통영진료소에서 활발한 진료활동을 한 윌리엄 테일러(위대인)선교사와 1915년에 통영에 온 테일러선교사 부인도 있지만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들은 호주 신우회에서 기부금을 받아서 진료소를 운영하였고 발동기 배를 구입하여 통영인근 섬들에 순회선교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21년에 통영선교사로 임명된 스키너(Miss A. M. Skinner) 선교사는 한국명 신애미(愼愛美)로서 통영교육의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이다. 지금도 교육계에서는 ‘신교장’으로 불리며 교육학을 전공하고 1914년 9월에 내한하여 1921년 통영선교부로 전입하여 육영사업, 복음전파, 여성계몽사업을 담당했다. 그러나 입국시기가 미수교회 설립과 맞지 않다.
신애미선교사는 1923년 통영진명유치원(문화유치원 전신)을 설립하였고 진명야학교, 도천야학교를 세웠는데 세계가 인정하는 음악가 윤이상, 청마 유치환 시인, 극작가 유치진, 토지의 작가 박경리, 시인 김춘수, 시조시인 김상옥, 제2대 윤보선대통령의 부인 공덕귀 등이 진명학교 출신이다.
그나마 한자이름의 말 馬자 가 들어가는 선교사는 트루딩거 선교사(추마전: 秋馬田)이다. 1883년에 태어나서 1955년에 사망했으며 재한기간은 1922년 1월~1941년으로 알려져 있다.
트루딩거(M. Trudinger) 선교사는 1926년부터 1935년까지 부인과 함께 통영선교부로 전임하여 간호사인 부인과 함께 지역 의료활동을 하였고 1938년 2월7일 부산으로 이임하였다.
이후 통영선교부의 의료선교사업은 1941년 일제의 탄압으로 선교사들이 강제철수 되고 말았다.
진명여학교 교장으로 봉사한 거이득선교사(Edith Ker)는 1921년 9월에 조선에 도착했으므로 가능성이 낮다.
이외에 ‘마포원선교사’로 추정되는 가능성이 높은 선교사는 통영에 배속된 1대 커틀선교사, 2대 맥클라렌선교사가 미수교회 설립계기가 된 복음 전파의 주역일수도 있다. 이분들의 한국명이 무엇인지 아직 조사중이다.
공식기록 외에 마지막으로 추정되는 선교사는 정말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한 실존 선교사 일 수도 있다.
1919년 통영지역 3.1운동
음력2월12일(3월13일)에 거사를 위해 진평헌, 박봉삼, 송정택과 함께 통영면서기 이학이와 강세재(미수교회교인), 허장완 등 18명이 3월8일 송정택씨 집 사랑방에서 의거를 의논하고 '동포에게 격하노라'는 장문의 격문 1200매를 등사하여 주도하다가 3월10일 새벽 1시30분경에 일경에 체포되고내란미수죄로 투옥. 이학이 성도는 내란미수죄로 대구감옥에 6개월 수감되었으나 고문당한 여독이 심하여 가석방되었 부산병원에 입원했으나 운명하고 말았다.
이에, 첫시위는 3월13일 유치원 보모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진명유치원 보모인 문복숙, 김순이, 양성숙에 의해서 3월13일 장날 중앙시장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수많은 군중이 호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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