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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산 김용태 시인/전 신라대학교 총장 | 나는 이 시에 관해서 약간의 해설을 붙여 두기로 한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향가 ‘원왕생가’의 작자에 대해서는 광덕으로 보는 학설도 있고, 광덕의 처(아내)로 보는 학설도 있다.
나는 후자의 학설에 따르고 있다. 그 까닭은, ‘향가의 불교적 연구’에 일가를 이룬 김종우 교수(작고)님이 나의 스승이시고, 나의 불교문학적 판단으로도 스승님의 학설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 시는, 석정스님의 삶이 너무 멋지고 아름다워서, 석정스님과, 스님을 시봉하고 있는 보살(사실상의 처)을 아주 멋지고 아름답게 승화시켜 비유해 본 것이다.
즉 석정스님을 신라의 광덕스님으로, 같이 살고 있는 보살을 광덕의 아내로 본 것인데, 그 아내는 사실상(남이 보기에도) 아내이지만, 실상으로서는 관음보살의 응화신으로 격상시켜 본 것이다.
이는 마치 김종우 교수님께서 원왕생가의 작자를 광덕의 처로 보고, 그를 관음보살의 응신으로 본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석정스님은 달마의 그림으로도 일가를 이뤘다. 그 달마 그림은 기존의 틀을 다 깨고서 자유자재한 달마를 이뤘는데, 이를 ‘면벽(面壁)을 거둔 달마(達磨)/깨어진 듯 이룬 한 소식’이라 표현했고, 또 스님은 다기를 그려 차 맛을 일어나게 한 묵화로 특징을 보였기에, ‘먹으로 빚은 차(茶) 맛에/꽃향기가 감돈다’고 표현을 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광덕스님과 함께 살고 있는 그 아내를, 아내인 줄만 알고 있었지만 그는 실상은 관음보살의 응신이었듯이 석정스님과 함께 지내는 그 보살도 스님의 불모(佛母)작업을 열심히 돕기도 하고, 스님을 편안하게 모시기도 하니 마치 광덕 스님과 함께 살았던 그 여인과 같은 관음보살의 응신과 같다고 격상시켜서 이 마지막 구절에 ‘중생의 원(願)을 스스로 부르짖던/그 원왕생가(願往生歌) 오늘 다시 부를/그 응신(應身)의 관음(觀音)은 누구입니까’하고 의문 종결어미로 끝맺었다. 그러니까 석정스님 곁에서 아내 비슷하게 여러 가지로 스님을 돕는 그 보살이 바로 응신의 관음이란 말이다.
후일 이 시를 스님께 보여드렸더니 “너무 과찬”이라면서도 퍽 좋아하셨다. 그리고 또 나의 시적 상상력을 격찬해 주시기도 하셨다.
5. 새해(庚申) 첫날 휘호를 받다.
이렇게 스님과 가깝게 지내게 됐는데 1980년 새해의 첫날, 나는 무엇인가 의미 있게 새해를 맞이하고 싶었고, 이날을 나의 문학적 행보에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는 날이 되도록 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생각 끝에 나는, 누구도 만나기 전에 석정스님을 먼저 뵙고 싶었다.
그래서 전화로 “오늘 찾아뵙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좋다고 하시면서 10시 이후쯤에 오라고 하셨다.
시간에 맞춰 ‘선주산방’으로 찾아갔더니 작업실 옆방에 커다란 장지 한 장의 상단에는 일필로 큰 원을 하나 그리고 그 아래에 ‘佛日增輝 法輪常轉 南無大行普賢菩薩(불일증휘 법륜상전 나무대행보현보살)’이라 쓰시고 말미에 庚申 新春 三樂子 (경신 신춘 삼락자)음양의 낙관까지 해놓고 그것을 들여다보고 계셨다.
서로가 새해 인사로 큰절을 마주하고 난 다음 “이것 교수님 오신다기에 새해 선물로 드리려고 오늘 이렇게 쓰고 싶어서 써 보았는데 글씨는 대수롭지 않지만 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본 것입니다”라고 하셨다.
나는 흥감한 생각을 하면서 이 글에 담은 스님의 깊은 마음을 꿰뚫어 헤아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부처님 지혜 광명이 나날이 더욱 빛나도록, 불법의 수레바퀴가 언제나 쉬지 않고 굴러지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스님의 신심 가득 찬 원력을 깊이 새길 수 있음과 동시에 나에게, 그렇게 살고, 그러한 한 해가 되도록 큰 서원을 세우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서원을 성취하는 길은 오로지 보현보살께 귀의하면서 보현보살과 같이 무궁한 만행을 실천하라는 뜻을 담아 써 놓은 글귀가 아니겠는가. 새해의 선물치고는 너무 큰 선물이기에 나는 다시 마음을 간추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스님께서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감동적으로 읽으시고, 원력을 세우시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역연히 나타나고 있는가 하면 나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스님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져 있는 글귀가 아니겠는가.
나는 이 대작을 바로 표구를 해서 나의 방 ‘무애실’에 걸어두고 오늘도 이 글귀를 쳐다보고 있다.
스님께서 이런 글귀를 쓰시어 나에게 주게 된 것은 아마도 전시회 당시 내가 쓴 ‘보현찬’이란 연작시를 예사로 읽지 아니하신 까닭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때 두 사람의 마음은 다 보현보살이 되고자 하는 서원이 같았을 것이다. 이심전심이라고나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