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동감하겠지만, 본 게시판에 올라온 대부분의 영화평들은 정교하고 치밀한 분석에 바탕하고 있다. 단순히 이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무심한 관찰을 불허하는 사람처럼, 작정을 하고 영화에 달겨든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쓰려고 하는 것은 그런 기준에 어이없이 미달한다는 것도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나는 지금, 언제 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심지어 줄거리도 기억나지 않는 영화에 대해 발언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글을 써도 될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가 없고, 내가 쓰려는 것을 이렇게 처음(제목에서)부터 두 가지 질문으로 한정하는 것이다.
영화를 본 사람, 아니 영화소개 프로라도 본 사람이라면, 박하사탕이라는 제목만큼 유명한 대사가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주인공 설경구의 외침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영화는 강조라도 하듯 이 마지막 장면을 처음 장면에 배치하여 반복하였다. 그런데 그 대사 혹은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도 하였을까? 내 질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이며, 다른 하나는 "왜 돌아가겠다는 것인가"이다. 이로써 내가 할 말은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접는 것은 이 글을 클릭한 사람들에게 대단히 송구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약간의, 아주 약간의 설명, 아니 설명 비슷한 것을 적을까 한다. 이 정도는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므로 설명이 아니라 확인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순한 사람으로, 이 단순한 질문 두 가지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곧바로 답을 제시하겠다. 내가 추정하는 그 답은 각각 "과거로 간다"와 "사랑으로 가기 위해서"다. 대답이 보여주듯이 첫째 질문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영화의 시점, 즉 현재는 철교 위 달려오는 기차 앞에서 두 팔 벌려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그 지점이다. 그러니 돌아가는 곳은 그 이전 시점을 가리킨다. 영화는 주인공에게 일어난 일들을 최근으로부터 보다 과거로 거슬러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때 과거에서 더 과거로 넘어갈 때마다 기차가 거꾸로 거슬러가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그러니 결국 과거로 거슬러 끝까지 가면 바로 그곳이 최종 목적지, 즉 돌아갈 그곳이 된다.
이렇게 전체를 시간의 역행이라는 방향으로 설정해 놓으니 일단 안심이 되지만, 이로써 다시 드는 질문은 과거가 현재보다 무엇이 좋은가 하는 질문이다. 반복하는 말에 불과하지만, 이 질문은, 현재는 과거보다 무엇이 나쁜가 하는 질문이 되기도 한다.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불가피하게 내용, 즉 주인공이 겪은 사건들을 말하고 거기서 공통점을 뽑아내거나 해야 할 텐데, 나는 그럴만한 확실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단지 내가 뜨문뜨문 기억하는 것은 철교가 있는 그곳은 고향친구들(입대 전 공장 동료들)과의 야유회로 모인 어느 계곡이라는 점과 그 전에 주인공은 무슨 사업을 하면서 이혼을 했다는 점, 또 사업하기 전에 경찰로 근무하면서 고문수사로 악명이 높았다는 점, 그 전에는 군인으로 광주진압을 나갔다 시민의 죽음을 목격했는 점, 그 전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순진한 청년으로 순임이라는 여자가 등장했다는 점 등이다.
내 기억으로, 가장 먼 과거는 순임과 미묘한 연애감정을 느끼던 청년시절이다. 이 시절이 최종 목적지라는 것도, 철교에 올라오기 직전, 죽음을 앞둔 순임의 병실에 찾아가는 장면으로 반복됨으로써 또 역시 확인되는 듯하다. 송구하지만 반복해 정리하면, 순임-군대-경찰-사업(이혼)-순임 병실-철교가 되겠다. 방금 '연애'라는 말을 썼지만 가만 기억해 보면 그것은 보통의 연애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순임이 박하사탕을 넣은 위문편지를 보낸다거나 면회가는 장면을 보면, 순임은 주인공에게 연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에 반해 주인공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혹은 중립이라고 할까? 아무튼 주인공은 애매한 상태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제대하고 경찰이 되었을 때 주인공은 순임을 찾아 나서거나 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잊고 지내던 순임 씨를 그녀 남편의 도움으로 재회하게 되면서 박하사탕을 기억해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주인공은 잊고 지냈던 무엇을 보았기에 다시 돌아가겠다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순임이 준 박하사탕이나 김밥이 기억나서? 아니면 관객 몰래 양말 한 짝이라도 받았던 일이 기억났던 것일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관객은 지구상에 거의 없을 것이다. 아마 거의 대답은 되지 않겠지만, 내 대답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랑"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을 들을 때 김밥, 양말같은 것을 떠올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철교 위에 올라간 주인공을 너무 무시하는 생각이다. 누가 봐도 주인공이 돌아가고 "싶은" 것은 자신의 삶 전체 혹은 현재를 걸고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인공(혹은 영화)을 존중한다면 '사랑' 옆에 괄호를 쳐 그 안에 좀 더 좋은 것을 넣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좋은 것은 현재를 부정하는 것과 관련되는 것이어야 한다. 거기에는 순임의 사모하는 마음이나, 입장을 바꾸어, 존경이나 대우받는 주인공의 지위도 넣을 수 없다. 그것은 주인공이 하고 싶은 '할래'다. 그렇다면 괄호 안에 '관계'를 넣으면 어떨까? 너무 상투적일까? 순임을 기화로 '세상 모든 것과의 관계'라고 하면 너무 거창해질까?
이제 그 관계나 관계관을 조금이라도 분명히 하기 위해 현재와 비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광주진압 사건 때 그의 표정은 쇼크를 받은 듯하다. 그 표정은 경찰 신입 때 고문수사 딱지를 떼던 날에도 나온다. 이런 사건들을 거쳐 주인공의 얼굴은 바뀐다. 이제 그에게 순진한 얼굴을 더는 볼 수 없다. 그대로 철교까지 가는 것이다. 경찰이 된 이후로 그의 관계는 업무적(일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입건된 대학생한테서 잠적한 선배의 위치를 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집에서도 그랬던 것 같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그랬던 것 같고, 사업을 할 때도 그랬던 것 같다. 구체적인 장면은 기억나지 않지만 하여간 순임의 병실에 가기까지 그랬던 것 같다. 얼굴을 빼고 업무나 활동에만 집중해서 이들을 다시 말해 볼 수도 있겠는데, 예컨대 정의구현과 수사행동의 불일치나, 좀 더 확대하여, 본성(동심)과 일상생활의 불일치 같은 것이다. 현재의 주인공은 무슨 일을 하든지 그것을 일로 보고 일로 처리한다.
일에 빠진 사람에게는 그 일이 어디로 가는지, 그 일을 하는 내가 어떻게 되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주인공에게 이와 같은 자성의 계기가 있어야 할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무튼 인생이 엉망이 되었다는 것이되, 이전의 일적인 기준이 아닌 다른 기준에서 보았을 때 엉망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내어 건 "나 다시 돌아갈래"가 서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놓치는 것이 아닐까 하여 덫붙이지만, 어쩌면 순임의 사모하는 마음을 삶의 모범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거나 그로써 자신의 결핍을 보았거나 하는 등의 변화 계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파이란>이라는 영화에서도 이와 비슷한 계기가 등장하는 것 같다. 주인공 건달은, 서류상 혼인관계인 이민자 아내의 유품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편지를 읽으며 회개 같은 것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인공처럼 철교에 서지는 않지만, 그와 같이 과거 전체를 덮어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사는지 모른다. 그 죽고싶은 심정은 부끄러움과 도피로 나타나는 것 같기도 하다. 철교 위의 장면이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꼽히는 것도, 누구나 살면서 이러한 충동을 느끼기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 충동이 삶의 근본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영화처럼, 자살에 도래한 상황이나 부끄러운 과거를 부정하려는 충동에 집중하는 대신, (그 상황이나 충동의) 긍정적인 측면을 드러내어 삶을 보다 건설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