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대한제국의 황제, 위풍당당한 친인척
휴버트 보스는 아시아 일주 여행 출발에 앞서 가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 여러 나라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런 목적에 따라 그는 1898년부터 2년 동안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해서 왕족 · 귀족 · 평민 등 다양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조선에 와서는 〈서울 풍경〉을 그린 후 고종과 순종, 민상호의 초상화를 그렸다.
보스는 고종 황제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연유에 대해, “민상호의 초상화를 본 고종 황제가 자신의 초상화[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와 황태자의 초상화[예진(睿眞),
왕세자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황명’을 내렸다”고 〈자서전적인 편지〉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민상호의 초상화를 얼마나 잘 그렸기에 고종 황제가
감탄을 하면서 어용화사(御容畵師)가 되라는 명을 내린 것일까?
휴버트 보스, 〈민상호 초상〉, 캔버스에 유채,
76.5×61cm, 1898~1899년, 개인 소장
민상호(閔商鎬, 1870~1933)는 명성황후의 사촌동생으로, 1882년 미국에 가서 1887년까지
6년간 교육을 받은 후, 영국 · 독일 · 러시아 · 이탈리아 · 프랑스 ·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보스가 이 초상화를 그릴
당시 민상호는 29세였는데, 황실 인척이자 미국에서 교육받은 외교관으로서의 자부심이 가득 담긴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보스가
〈자서전적인 편지〉에서 “민상호의 얼굴 생김이 한국 민족을 대표하는 데 부족함이 없고, 학식이 높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그렸다”고 한 것을
보면, 이 초상화는 파리 만국박람회의 전시회 출품을 염두에 두고 정성을 다해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을 보라. 머리에 쓴 정자관을
비롯해 옅은 연두색이 감도는 한복 그리고 가슴에 두른 띠 등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하게 지나치지 않았다.
이 초상화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부분은 흰색으로 쓴 ‘민상호’와 검은색으로 쓴 ‘휴벗 보스’라는 한글인데, 이 글자들은 보스가 직접 쓴 것으로 보인다. 보스는 1905년
12월 17일자 〈뉴욕타임스〉에 실린 인터뷰에서, 중국의 여황제를 그린 〈서태후 초상〉에 있는 한자를 자신이 직접 썼다고 밝혔다. 섬세하고
꼼꼼하게 붓질을 하는 초상화가이기에 어렵고 복잡한 한자도 쓸 수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이 한글도 직접 썼을 가능성이
높다.
민상호의 초상화를 본 고종이 어진을 그리라는 황명을 내리자, 보스는 매일 경운궁으로 가서 고종을 직접 스케치한 다음 환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작업을 했다고 〈자서전적인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훗날 이당 김은호가 고종 황제의 초상화를 그릴 때 “덕수궁의 자명당에 매일
나와 10여 분씩 앉았다 들어가셨다”고 했으니, 보스에게도 그 정도 시간 동안 자세를 취해주었을 것이다.
보스가 그린 47세의 고종
황제 초상화는 세로 약 2미터의 실제 크기 전신 초상화다. 하지만 황제의 위엄이나 카리스마는 찾아보기 어렵고, 대신 쓸쓸하고 지친 표정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고단한 상황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머리에 쓰고 있는 익선관(翼善冠)은 모(帽)가 턱이 진 2단으로 되어 있는데, 뒤쪽을 자세히
보면 매미 날개 모양의 장식(작은 뿔)이 달려 있다. 복식연구가들에 따르면, 왕이 “이슬을 먹고 사는 매미처럼,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휴버트 보스, 〈고종 황제 초상〉, 캔버스에 유채,
199×92cm, 1899년, 개인 소장
초상화에서 고종이 입고 있는 곤룡포(袞龍袍)는 곤복(袞服) 또는 용포(龍袍)라고도 하는데, 임금이 정사를
돌볼 때 입는 정복(正服)이다. 가슴과 등, 양어깨에 보(補)라고 하는 금실로 수놓은 오조룡(五爪龍)을 붙였다.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때 입는
시무복이기 때문에 역대 조선 임금의 어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전 왕들이 입었던 곤룡포는 자주색이지만 고종이 입고 있는 것은 황색이다.
이전 왕들은 황제가 아니었기에 자주색 곤룡포를 입었지만,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에 즉위했기 때문에 황색을 입은 것이다. 중앙을 상징하는
황색은 황제의 색으로, 대한제국의 신하들은 황색 옷을 입지 못했다. 이전까지 왕이 입던 자주색 곤룡포는 황태자가 입었다.
가슴의
흉배(胸背)에는 황제의 상징인 용과 대한제국의 상징인 태극무늬가 있다. 어깨에도 용이 있는데, 황제의 용과 왕의 용은 발가락 수가 다르다.
황제의 용은 다섯 개, 왕의 용은 네 개다. 그래서 왕이 통치하던 조선시대 백자를 보면 용의 발가락이 대부분 네 개 또는 세 개다. 네 개짜리는
왕실에서 사용했고, 세 개짜리는 사대부 집에서 사용했다(물론 예외적으로 발가락이 다섯 개인 용이 새겨진 왕실용 백자도 가끔
만들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내다가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8개월 후인 1897년 10월 12일, 원구단(園丘團, 지금의
조선호텔 자리)에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에 즉위했다.
고종이 스스로 황제임을 선언한 이유에 대해 주한 미국 공사관
1등서기관 샌즈(W. F. Sands)는 “왕은 황제의 신하가 될 수 있으나 황제는 누구의 신하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황제에 즉위하면 중국 ·
일본 · 러시아 황제와 동등해질 것이라는 봉건적 이론에 근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자신의 책 《조선비망록》에 썼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이렇게 ‘대한제국’이 되었고 고종은 ‘광무(光武) 황제’에 즉위했지만, 그 사실을 아는 외국인은 극소수의 외교관뿐이었다.
외국의 유력 언론에서 이를 보도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보스는 〈자서전적인 편지〉에서, 고종 황제의 초상화를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할 수 있도록 한 점 더 그릴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을 했다고 회상했다. 비록 힘없는 나라 조선이지만, 황제의 초상화를
만국박람회에 출품하면 화가로서 영광일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민족의 초상화를 종합해서 전시하려는 자신의 계획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스의 청원을 전달받은 고종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고종도 대한제국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대규모 ‘대한제국관’을 설치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자신의 초상화가 전시되는 것이 득이 되면 되었지 나쁠 게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고종은 보스가 그린 자신과 황태자의 초상화에 만족해하며 선물을 내렸다. 〈황성신문(皇城新聞)〉 1899년 7월 12일자
기사에 의하면, 황제의 선물은 1만 원이었는데, 이는 당시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보스는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그린
초상화를 갖고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파리가 아니라 뉴욕으로 갔다. 파리로 가는 증기선이 뉴욕에서 출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만국박람회가
열리는 4월 15일까지는 시간이 충분했는지, 뉴욕의 유니온리그 전시장에서 1900년 2월 9일부터 ‘다양한 민족의 모습’이라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아시아 각국에서 그린 작품들과 이전에 꾸준히 그려온 작품들이 전시되었는데, 여기에 〈고종 황제 초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뉴욕타임스〉는 2월 9일자에 전시회 소개 기사를 실으면서 “대한제국 황제의 초상화는 옷에 대한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했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했다는 사실을 전한 외국의 언론 보도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황제에 즉위한 지 2년 4개월 후 외국인 화가가 그린 초상화 덕분에 대한제국 황제의 존재가 처음으로 미국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니, 보스에게
초상화를 한 점 더 그리도록 허락하면서 고종이 기대했던 바가 어느 정도는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고종 황제의 초상화는
원래의 목적대로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을까? 만약 출품되었다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1979년 미국의 스탬퍼드 박물관과
네덜란드의 보네판텐 박물관(Bonnefanten Museum)에서 열린 보스 유작전 도록의 작품 전시 기록에 의하면, 〈고종 황제 초상〉은
〈민상호 초상〉 〈서울 풍경〉과 함께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미국 회화관 전시 작품 목록을 아무리 찾아봐도 〈고종 황제
초상〉은 없다. 유족의 착각이었을까? 아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커미셔너 보고서》(1901년 뉴욕 발행)에 의하면, 〈고종 황제
초상〉은 회화관이 아니라 여러 인종과 사회의 모습을 소개하는 ‘인종과 사회관(제16관)’ 안의 110전시실에 걸렸다.

〈뉴욕타임스〉 1900년 2월 9일자
〈고종 황제 초상〉이 출품된 보스의 전시회 소식이 실렸다
미국관 안의 소규모 전시실에 초라하게 걸렸던 자신의 초상화만큼이나, 고종 황제는 격동하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무력하게 밀려나고 있었다. 거대한 나라 중국조차 열강의 휘둘림과 흥정의 대상이 되던 시절이었으니, 극동의 작은 나라 대한제국의 황제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결국 고종 황제는 일본과 친일파 각료들의 강요에 의해 1907년 순종에게 황위를 넘겼고,
얼마 후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보스가 ‘대표적 한국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민상호는 친일에 앞장서며 남작이 되었다. 그의
사촌누이인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의 손에 비참하게 시해당한 지 불과 10여 년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