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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동학농민혁명의 의의와 동학사상
19세기 말엽 조선은 부패·무능했던 봉건정부의 학정과 외세의 공공연한 침략으로 안팎의 위기에 처해있었다. 이런 상황 아래에서 1894년 반외세·반봉건의 기치를 들고 떨쳐나섰던 사건이 동학농민혁명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우리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중항쟁으로써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 근대사의 첫새벽을 열어놓았고, 이로써 향후 우리 나라 근·현대사의 나아갈 길을 결정짓는 중대한 역사적 사변이었다.
1. 동학농민혁명의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 질서재편의 기점인 청·일 전쟁과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개혁인 갑오개혁과의 깊은 연관성만으로도 주목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이와 같은 겉모습에서보다는 우리 나라 근대사의 첫새벽을 열어제친 전민족적인 대규모 민중항쟁이라는 점과 우리 조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반외세 반봉건 기치를 전면에 내걸었던 혁명의 내용적 측면에서 더욱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이며, 세기를 넘어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오는 그 혁명정신은 무엇일까.
봉건정부의 부패와 무능으로 통치질서가 파탄에 처하고, 청나라 일본 등을 비롯하여 일찍이 자본의 길로 들어선 서구 열강들의 침탈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19세기 말엽 조선은 크게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 하나는 안으로는 낡은 신분질서를 뜯어고쳐서 모든 민족 구성원이 평등의 원칙 아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개혁, 즉 근대화( 0代化)의 과제이고, 또 하나는 밖으로는 외세에 자주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말하자면 19세기 말엽 조선은 침략을 배격하는 자주적 입장에서 사회적 개혁을 이룩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면 조선은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말엽 우리 민족 앞에 닥쳐온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위정자들도 어느 정도는 고민하고 노력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예로 양반지배층의 위정척사(爲政斥 :조선 말기에 정학인 주자학을 지키고 사도를 물리치자는 유교의 벽이단 이념) 운동과 개화지식인들의 개화운동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양반층은 위정척사운동을 통해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사회개혁에는 반대했으며, 개화세력은 개화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외세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침략세력과 결탁했다. 결국 위 두 운동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각해졌고, 그 최대 피해자인 농민들이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 동학농민혁명이다.
이런 측면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시대적 요구에 제대로 답한 아주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 세상을 향한 기층민중들의 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다가 삼, 사십만 명의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좌절되었다. 그런데 이 혁명의 전개과정은 우연히도 우리의 한 해 농사와 꼭 닮았다. 농민혁명의 씨앗이 뿌려진 동학공인운동 기간은 해빙기, 고부농민봉기는 봄의 파종기, 3월 봉기는 여름철의 경작기, 집강소 설치 및 재봉기 단행은 가을철의 결실기, 그리고 9월 재봉기의 좌절은 농부가 떠난 황량한 겨울에 견줄 수 있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전근대적 모순과 부패의 척결 즉 근대적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실행해나갔다. 동학농민군은 사회적으로는 신분타파운동을 벌여 양반질서를 붕괴시키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제적으로는 세금을 걷어들이는 조세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 영세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를 비롯한 직접생산자들의 자립과 발전을 이루고자 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王政)체제의 개선을 희망했다. 나아가 동학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전민족적인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절체절명의 과제인 사회개혁과 외세침탈 배격, 즉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루려 한 반외세 반봉건의 일대 농민항쟁으로 우리 근대사의 성패를 가르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뿌리인 농민들의 대규모 항쟁은 불행하게도 일제의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흔히 실패한 혁명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광무년간의 사회개혁 및 항일운동·의병전쟁·3.1만세운동·상해임시정부·광복군 활동 등 농민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숱한 민족운동의 조직적·이념적 뿌리로 굳건했다. 18세에 동학 접주가 되어 이듬해 황해도 농민군의 선봉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일본인 밀정 살해, 신민회 및 상해 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조직 등 민족지도자의 길을 올곧게 걸어온 백범 김구 선생의 생애를 통해서도 이 점을 잘 알 수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된 여러 민주화 운동, 즉 4.19 의거·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신적 본령을 이룬다. 그런 점에서 농민혁명은 끝내 실패로 마무리된 사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했을 때, 부패한 지배세력이나 노골적인 외세침략에 대한 대중적 비판과 저항이 미약했을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처지로 떨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현재의 우리가 차가운 이성으로 찬찬히 들여다봐야 할 경험의 역사이다.
2. 동학사상
가. 동학(東學)
동학은 1860년(철종 11)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도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신흥 민족종교이다. 당시 조선은 정치적으로 세도정치와 과거제도의 문란과 서구 제국주의 열강(列强:여러 강한 나라)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가톨릭교를 위시한 서학(西學)이 번성하였으며, 경제적으로는 세금을 걷어들이는 수취제도의 문란과 지방수령의 가혹한 수탈로 민중들의 삶은 끝없는 수렁을 헤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는 새로운 도(?)를 구하고자 하였다.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나랏일을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함) 의식과 시천주, 인내천의 사상과 교리를 두 가지 큰 산맥으로 한 반봉건적, 반침략적 성격이 짙은 민중적인 구원의 종교였다. 특히, 동학은 그 시대 우리 나라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여러 가지 모순을 과감히 개혁, 변혁시켜 지상의 복락과 인류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민족관을 내세워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동학은 양반사회의 해체기에 농민대중의 종교가 되면서 반왕조적인 사회개혁운동 성격을 띠었고,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하였으며, 그 뒤 3.1운동에서 나타난 민족주의 역량을 키우는 등 한국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
나. 창도와 조직
최제우는 구세제민(救世濟民: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고통받는 민중을 구제함)의 큰 뜻을 품고 양산군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과 내원암의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의 기도를 끝내고, 다시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를 계속하였다. 그러던 1860년 4월 '한울님'의 계시를 받아 '동학'이라는 대도(大?)를 깨닫게 되었다. 최제우가 한울님으로부터 동학의 교명(敎名)과 영부(靈符), 그리고 주문(呪文)을 계시 받았다고 한다. 동학이란 곧 서학에 대응할만한 것으로 동토(東土)인 한국의 종교를 의미하며, 그 사상의 기본은 종래의 풍수사상과 유(儒)·불(佛)·선(仙:?敎)의 교리를 토대로 하여, 인내천(人乃天)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의 사상에 두고 있다. 영부란 백지(白紙)에 한울님의 계시에 따라 그린 일종의 부적(符籍)으로, 궁을형(弓乙形)으로 되어있다. 주문은 13자로 된 본주(本呪)와 8자로 된 강령주(降靈呪) 등이 있다.
한편, 동학은 신분·적서(嫡庶)제도 등에도 반기를 들어 이를 비판하였다. 동학의 이같은 대중적이고 현실적인 교리는 당시 사회적 불안과 질병이 크게 유행하던 삼남지방에서 급속하게 전파되었다. 그래서 포교를 시작한 지 불과 3,4년 사이에 교세는 경상도·충청도·전라도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마찬가지로 불온한 사상적 집단이며, 민심을 현혹시키는 사교( 敎:사회에 해로운 작용을 하는 그릇된 종교)라고 단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다.
1863년에는 최제우를 비롯한 20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혹세무민(惑世誣民:세상 사람을 미혹하게 하여 속임)의 죄로 체포되었고, 최제우는 이듬해 대구에서 처형되었다. 동학은 포교를 통해 교세가 확장되자 접주(接主)제도를 만들었는데, 이 접주제도는 각 지방에 포교소로서 접소(接所)를 두고, 그 접소에 접주(接主)를 두는 제도였다. 접주에게는 그 지방 교인들의 관할과 강도(講?), 새로운 교인의 포교활동을 담당하게 하였고, 접주 위에는 도주(?主)를 두어 접주를 통솔하게 하였다. 한편, 최제우의 뒤를 이은 최시형(崔時亨)은 접주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교인들의 일단(一團)을 포(包)라 하고 여기에 포주(包主)를 두었다. 포주 위에 접주·대접주, 그 위에 도주·대도주를 두었다. 또한 중앙에는 법소(法所) 지방에는 도소(? 所)를 두었다. 접주의 자격은 포덕 실적(布德實績)에 의한 정수제(定數制)로 하였다. 즉 105명 이상 포교한 사람을 접주, 500명 이상 포교한 사람을 대접주로 하였다. 대도주는 성(誠)·경(敬)·신(信)·법(法)의 4자를 이름한 4명이 있었다.
다. 경전
동학 경전은 최제우가 직접 지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 詞)'가 있다. 동경대전은 최제우의 도에 대한 가르침이나 종교적 수행을 담은 경편 등과 많은 시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학의 요체와 천도를 밝힌 글이다. 동경대전의 내용은 포덕문·논학문·수덕문·불연기연의 4편과 주문· 팔절 등 각종 시구들로 순 한문본이다. 용담유사는 가사체의 형식으로 동학의 교의를 보다 보편적으로 폭넓게 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최제우의 가르침을 노래로 지은 것이다. 용담유사의 내용은 교훈가·안심가 등의 8편과 부록으로 검결(칼노래 칼춤)이 있으며 순 한글로 되어있다.
라. 기본교리
①한울님관 / 신에 대한 관념은 유신론적 입장과 범신론적 입장으로 구분할 수 있는 데 동학의 한울님관은 유신론적인 입장에서 보는 초월적(超越的)인 신, 범신론적 입장에서 보는 내재적(內在的)인 신이라는 관념을 반대 일치의 변증법적 논리로써 동시에 포용하고 있다. 즉 한울님은 창조주
이면서도 만물 속에 계시면서 모든 일을 간섭하고 명령하시는 무형의 이치 기운이며, 대우주의 대정신·대생명이 되는 것이다.
②후천개벽관 / 최제우는 한글경전 '용담유사'에서 인류역사를 크게 두 시대로 구분
하여, 창도 후의 새 시대를 후천(後天)이라고 하고, 구시대를 선천
(先天)이라고 하였다. 후천개벽은 선천운수(先天?數)가 지나고 후천
운수(後天?數)가 열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후천운수는 5만 년
이며, 공간적으로는 인간생활의 전면적 변혁이 시작될 때라 한다. 선
선천시대의 종교란 천계(天界)의 한울님을 순종하며 천상의 극락을 누
누리려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지만, 후천시대의 종교는 인계(人界)
에서 한울님을 모시는 지상극락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또 선천시대는
존비귀천(尊卑貴賤)의 계급주의이지만, 후천시대는 평등주의를 원칙으
로 하며, 이에 따라 정치·사회의 제도까지 바뀌어져 국기(國基)가 바
로 서고, 모든 사회의 불안이 제거되는 지상극락의 이상사회가 이룩된
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의 혼란한 시대가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종
말론(終末論)을 주창하면서도 다가오는 새 시대야말로 이상시대가 될
것이라는 낙관적 종말론을 주창했다. 최제우 자신이 확립한 동학사상
이야말로 오만 년 동안 지속되어온 지금까지의 문명을 해체시키고 다
시 오만 년 동안 지속될 새로운 문명을 열기 위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무극대도(無極大?:우주 본체인 무극의 신령스런 능력)라고
천명한다.
③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 동학은 사람을 시천주(侍天主)의 존재로 본
다. 시천주란 글자 그대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으로, 모든 사
람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음으로써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면서부터 신령한 한울님 마음을 가지고 있고, 이 한울님 마음이 우주
에 가득 차 있는 한울님 기운과 끊임없이 기화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사람의 형체라고 말한다.결국 시천주(侍天主)의 인간관은 사람에게
있어 정신이나 육신은 모두 한울님 마음과 한울님 기운을 모시고 있는
존재라는 앎에서 비롯된다. 또한, 사람은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기 때
문에 평등하면서도 존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관에 의하
여 '사인여천(事人如天: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 '인내천(人乃天)'
등의 사상도 등장하게 된다.
Ⅱ. 혁명의 전사(前史), 동학농민혁명을 향하여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대응을 함께 보아야 한다. 시대적인 상황과 함께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을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1. 동학농민혁명은 왜, 어떻게 일어났나
가. 농민혁명의 시대적 배경
19세기 후반 조선은 통치질서의 파탄을 맞았고, 그런 가운데 농민들은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다. 조선 팔도의 농민들이 예외 없이 이런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산업의 거의 전부가 농업이던 때, 농업의 중심지였던 까닭에 호남지역의 농민들은 보다 극심한 수탈을 겪어야 했다. 가혹한 수탈과 궁핍으로 견딜 수 없었던 백성들은 마을을 떠나거나 유리걸식(流離乞食:정처 없이 떠돌며 빌어먹는 일)하는 소극적 형태에서 관에 소장을 올리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점차는 물리력을 동원한 봉기의 형태로 저항하였다. 농민들의 무력봉기를 민란·민요·농민봉기·농민항쟁이라 부르는데, 이것이 농민저항의 대표적인 형태였다. 기본적인 생존권을 요구하는 농민들의 무력봉기는 19세기 내내 전개되었다. 특히, 19세기의 후반인 철종과 고종 때에는 더욱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이렇듯 농민들의 저항은 1세기 가량이나 계속되었지만, 그들의 생계 여건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고 더욱 악화되는 가운데 1894년을 맞게 된다.
(1)농민층의 양극화 / 18세기를 넘어서면서 조선사회는 이앙법(移秧法)이라는 새로운 농사법의 발달로 커다란 경제적 변동에 직면하였다. 이앙법은 농지이용도를 높이고 농업생산력의 증대를 도왔다. 이런 농업생산력의 발전은 농업경영에도 뚜렷한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노동력의 절감과 생산력의 증대라는 변화를 잘 활용한 지주나 농민들은 경영 규모를 확대해 갔다. 한편 생산력이 발전하는 가운데 상품화폐경제도 급속히 발달하여 농촌경제는 장시(場市:시장)와 연결되었다. 농산물의 상품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일고있던 새로운 농업경영 즉 광작(廣作: 확대된 경작 형태)이나 상업적 농업(商業的 業:시장을 상대로 한 농업)에는 일부 자작농이나 소작농이 참여하여 부를 축척하고 부농 또는 서민지주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결과적으로 소수 지주나 상인에게 토지와 부가 더욱 집중되고, 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는 현상을 낳았다. 요컨대 조선후기 농업 경제상의 변동 속에서 농민층은 소수의 부농과 지주, 그리고 다수의 빈농으로 양극 분화해 갔던 것이다. 이처럼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바탕으로 19세기 후반 농민층은 양극단으로 분화되었고, 이는 조선사회 전반을 크게 동요시켰다.
(2)조세 수취제도의 모순과 문란 / 18세기 중반 이후 조선의 세금제도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 穀)이라는 삼정(三政)체제로 확립되었다. 그런데 이 조세 수취제도는 제도 자체가 모순을 안고 있었다. 모순의 내용은 기본적으로 '얼마를 수탈했느냐’는 것이라기보다 누가 냈느냐’는 것이었다. 이 시기 세금은 평민층, 즉 직접생산자인 자·소작농에게 집중적으로 부과되고 있었다. 토지세를 말하는 전정(田政)의 경우, 토지소유주인 지주가 아니라 직접생산자 즉 지주에게 세를 물고 토지를 빌어 농사짓는 소작인에게 집중 부과되었다. 16세에서 60세까지의 양인 장정에게 부과된 군정(軍政)의 경우도 양반은 면제되었다. 환곡( 穀)의 경우 애초에는 춘궁기(春窮期:보리고개)에 관곡(官穀:관아의 곡식)을 싸게 빌려주어 농민들이 굶주림을 면하도록 하는 빈민구제책이었다. 그러나 그 이자를 국가재정에 충당하면서부터는 국가고리대의 성격을 띄었는데, 이 역시 일반 농민들에는 부담이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더하여 세금거두는 일을 담당한 수령과 아전은 중앙지배층과 결탁하여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인 수탈을 일삼아 농민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처럼 삼정이라는 국가의 조세 수취제도는 그 잘못된 구조와 파행적인 운영으로 직접생산자인 농민층의 성장을 가로막았을 뿐 아니라 생계 기반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3)정치세력의 부패 / 19세기초 순조 대에 이르러, 왕실과 연결된 소수의 몇몇 집안이 국가 권력을 장악하는 기형적인 정치형태인 '세도(勢?)정치'가 헌종, 철종대로 이어졌다. 1863년 고종이 즉위한 후, 왕권의 회복을 도모한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 권력가들을 숙청함으로써 세도정치는 끝나는 듯하였다. 그러나 10년 뒤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민비의 집안인 여흥민씨에 의해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들의 파행적인 정치운영은 만성적인 국가재정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중앙정부는 부족한 재정을 지방관청의 재정으로 충당하였고, 재정이 줄어든 지방관청에서는 각종 잡세의 부과나 환곡, 고리대 등을 통하여 재정을 보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봉건권력에 의한 농민수탈은 더욱 강화되었고, 이것은 19세기의 만성적인 삼정수탈의 계기로 작용하였다. 국가재정의 위기를 농민수탈의 강화를 통해 모면해 보려는 국가의 정책이 바로 삼정 문란을 야기시켰고, 그 가운데 세금의 부담은 자꾸만 빈농층에게 집중되어 갔던 것이다. 민씨정권은 통제력의 이완으로 지방관리의 부정을 통제할 수 없었을 뿐더러 오히려 탐관오리(貪官汚吏:욕심이 많고 행실이 깨끗하지 못한 관리)를 대량으로 양산하며 관리의 수탈을 조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부패구조의 최종적인 희생자가 일반농민이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다.
(4)열강의 경제적 침탈 / 1876년 조선은 일본의 무력적 위협에 굴복하여 전혀 준비되지 않은 가운데 문호를 개방하였다. 개항이후 조선은 일본과 무역을 시작하였는데, 조선의 수출품은 주로 농수산물과 귀금속이었다. 수입품은 일본산 면포와 생필품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런 대외 무역구조는 곧바로 조선의 농업, 수공업 기반을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수출입의 절대량을 차지하던 일본은, 값싼 식량의 필요에 의해 조선의 쌀을 수입하였다. 다량의 쌀 유출은 쌀이 모자라던 조선에 심각한 쌀 부족 현상을 불러왔고 이는 쌀값 앙등(昻騰)으로 이어졌다. 쌀값의 앙등은 소수 지주에게는 더 많은 이익을 의미했으나 임금노동자들에게는 생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결국 지주들이 막대한 토지를 집적해 가는 반대편에서 영세한 자·소작농들은 생활기반인 집과 토지마저 상실하고 몰락해 갔다. 수공업(手工業: 간단한 도구와 손을 사용하여 생산하는, 작은 규모의 공업)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값싼 외국산 면포(綿布:무명)는 가내수공업 단계에 있던 조선의 면포시장을 순식간에 잠식했고, 그 결과 조선의 면포산업은 몰락단계에 놓였다. 값싼 생필품의 수입 역시 조선의 수공업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상업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1887년부터 외국상인들 특히 청·일 상인들이 조선에서 활발한 상업활동을 벌였다.결과적으로 이들의 활동은 영세한 조선 상인의 활동 기반을 위협하였다. 결국 아무런 대안과 준비 없는 문호개방 속에서 농촌의 양극 분화는 심화되었고 영세한 수공업자와 상인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거나 외국자본의 손아귀에 놓이는 결과에 처하였다.
나. 농민혁명 주체세력 형성
(1)19세기의 농민봉기, 그 한계와 의미 / 19세기 사회·경제상은 한결같이 농민 대중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었고, 이에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농민봉기가 집중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철종 때였다. 철종 13년(1862) 한 해에만 37개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를 통칭하여 '임술민란'이라고 한다. 임술민란을 지역별로 보면, 경상도 16개 지역, 전라도 9개 지역, 충청도 9개 지역, 경기도·황해도·함경도 각각 1개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결국 정부의 농민봉기를 근본적으로 수습하기 위해 모색된 방안이 삼정의 문란을 바로 잡기 위한 삼정이정청(三政 整廳)의 설치이고 삼정이정절목(節目)의 반포였다.이정청의 설치 직후에 정부의 의도대로 봉기는 가라앉는 듯했다. 그러나 삼정을 부분적으로만 개선하겠다는 데 그쳤고, 반포된 지 석 달도 못되어 시행이 중지되고 말았다. 결국 삼정의 폐단은 계속되었고 1년 뒤인 고종1년(1864)부터 농민봉기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여, 고종 25년(1888)부터는 전국적으로 만연하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고종대의 농민봉기는 전국에서 60여 차례에 걸쳐 발생하였다. 철종대의 봉기가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발생한데 비해 고종대의 봉기는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고종대에는 일반 봉기와 달리 수령을 살해하고 왕조에 반기를 드는 병란(兵亂)적 성격의 봉기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1871년 경상도 영해부(寧海府)에서 일어난 영해민란 또는 영해 이필제(李弼濟) 병란이 그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봉기를 통해 삼정의 폐단과 수세 담당자인 지방관리의 부정행위를 바로잡으라고 요구하였다. 즉 농민들의 요구는 국가의 조세문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시기 농민들은 지주와의 문제나 신분관계의 문제는 주목하지 못한 한계를 보인 것이다. 더불어 19세기 농민봉기는 봉기 상호간에 연계를 맺지 못하고 개별적이었으며, 지도부가 농민층에 뿌리 박지 못함으로써 봉기가 지속적·조직적이지 못했고 자연발생적 경향을 보였다. 이런 한계로 농민봉기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19세기 백여 차례에 걸친 농민봉기는 대규모 농민항쟁이 일어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시켰다. 또한 농민봉기의 실패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그 한계를 극복하는 지도자가 성장하는 계기를 주었다. 결국 19세기 농민봉기는 동학농민혁명을 꽃피워 내는 토양이 되었던 것이다.
(2)농민혁명 주체세력의 성장 /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농민대중은 일찍부터 봉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문제는 그것이 지닌 한계였다. 거의 대부분의 농민봉기는 한 개 군현( 섨?옛 지방 제도)을 단위로 일어나서 그 지역을 넘어서지 못했고, 내용도 삼정의 폐단과 관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 조세 따위를 가혹하게 거두어 들여 백성들을 못살게 들볶음) 시정을 요구하는 정도에 한정되었다. 그러나 갑오동학농민혁명은 농민봉기의 그런 한계를 규모와 내용 등 모든 면에서 훌쩍 뛰어넘는 대규모 농민항쟁이었다. 그러면 갑오동학농민혁명이 19세기 농민봉기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게 한 주체적 동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근본적으로 당시 농민대중의 사회변화와 개혁에 대한 강렬한 욕구에서 온 것이지만, 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요인은 다음의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동학(東學)'을 주목하자. 1860년에 창도된 동학은 대중 지향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농민대중과 탄탄하게 결합하며 바른 속도로 확대되었고, 1890년대 초에는 충청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조직망을 형성하였다. 이런 동학의 조직망은 1894년 농민항쟁의 조직적 토대가 되었고, 이로서 농민혁명은 19세기 농민봉기가 보여온 지역 분산적인 한계를 순식간에 극복하였다. 둘째, 전봉준(全琫準)·손화중(孫化仲)·김개남(??寔?을 비롯한 전라도 동학교단의 변혁 지향적 인물들의 활동이다. 이들은 사회변화와 개혁에 대한 욕구를 농민대중과 공유하는 한편, 사회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동학을 종교사상의 자리에 안주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사회 변혁의 장으로 이끌어 냈다. 이를 통해 비로소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진 것이다.
2. 동학의 창도와 공인운동
가. 동학의 확산과 억압
19세기 후반 조선사회는 안팎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안으로는 통치질서의 파탄으로 농민대중의 삶이 피폐되고, 밖으로는 서양의 침략 위협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현실에서 농민대중들이 의지할 만한 곳마저 마땅치 않을 때 새로운 종교가 창도되었다. 1860년 경주에 사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유교 사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서양 열강의 정신적 배경인 천주교에 대항하고자,'유·불·선(儒·佛·仙) 3교의 장점을 융합하여' 만든 동학(東學)이 그것이다.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라는 인간평등사상과 새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後天??)의 사상을 근간으로 하였는데, 그 요지는 신분에 관계없이 그 누구나 동학에 입도하여 성·경·신(誠·敬·信)을 다하면 시천주(侍天主)를 이룰 수 있고, 그와 같이 사람들이 천운(天?)에 순종하고 천도(天?)에 합치하면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조화롭고 정의로운 새 세상, 즉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동학은 이와 함께 질병의 치료와 길흉에 대한 예언 등 현실구복적인 요소를 포함하였고, 척왜양(斥倭洋:일본과 서양을 배척함)의 민족적인 사상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동학은 당시 농민대중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의 의식과 염원을 그대로 수용하여 체계화한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동학은 창도되자마자 농민대중의 환영을 받으며 순식간에 경상도 일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동학을 체제를 위협하는 학문으로 지목한 조선정부가 1863년 12월 최제우를 체포하여 이듬해 3월 '어두운 곳에서 무리를 모으고 평세에 난을 꿈꾸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고, 그의 제자 다수를 유배 보냄으로써 동학은 불법시 되어 지하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최제우가 처형된 후 동학교단의 지도자가 된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은 정부의 탄압을 피해가면서 동학 전파에 온힘을 기울였다. 이에 힘입어 동학은 1860년대 말 주로 강원도와 경상도 북부 산간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최시형이 1871년 영해 이필제 병란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면서 동학은 또 한차례의 심각한 타격을 받게되었다. 이후 강원도 깊숙한 곳으로 숨어든 최시형은 이곳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 "용담유사(龍潭 詞)" 등 경전을 간행하고 제의(祭儀:제사의 의식)와 조직을 체계적으로 정비하는 등 동학교단의 기틀을 다졌다. 그리고 1880년대 초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으로 중앙의 정치상황이 극심한 혼란에 빠져, 정부가 동학과 동학교도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펼 수 없는 틈을 타서 동학은 충청도로 활발하게 전파되었다. 전라도의 경우는 1880년대 중반에 익산 등지에 동학이 뿌리내리기 시작했으며, 80년대 후반부터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1880년대 중엽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동학교도들이 급격히 늘어나자, 이 일대 각 고을의 수령과 아전, 토호(土豪:지방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치는 호족)들은 정부의 동학 금지령을 빙자하여 교도들의 재산을 다투어 수탈하였다.이런 수탈에 대해 1890년대 이전까지 동학교도들은 체포되면 속전(贖 : 죄를 면하려고 바치는 돈, 일종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거나 체포를 피해 달아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하였다. 그러나 교세가 급격히 늘어나고 조직화되었고, 탄압과 수탈이 견elf 수 없게 가혹해지는 상황에 이르자, 동학교단은 1890년대부터 확장된 교세를 바탕으로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動) 즉, 동학공인(公認)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다.
나. 동학 공인을 위한 공주, 삼례집회
동학교단의 첫 번째 집회운동은 서인주(徐認周), 서병학(徐炳鶴) 등에 의해 1892년 10월에 충청도 공주에서 열린 '공주취회'이다. 10월 20일경 공주에 모인 1,000여명의 동학교도들은 충청감사에게 소지(所志:관청에 올리는 소장·청원서·진정서)를 올려, '지방관들의 학정을 그치게 하고 임금께 최제우의 신원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감사 조병식은 '동학은 정학이 아니라 사학이다. 동학을 금한 것은 조정의 일이므로 감영에 호소할 일이 아니다'고 답했다. 이렇게 해서 동학 공인을 임금에게 올려달라는 요구는 거부되었지만 충청도 각 지방에 공문을 보내 '동학을 금단하는 과정에서 자행되는 폐단을 일체 중지할 것'을 명령하였다. 비록 교조에 대한 신원의 염원은 이루지 못했지만, 단지 동학교도라는 이유로 지방관들로부터 공공연히 수탈 당해야 했던 동학교도, 동학교단에게는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성과에 고무된 동학교단은 전라감영에도 소지를 올리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동학교단은 10월 27일 전라도 삼례역에 도회소(? 會所)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동학간부에게 경통(敬 :동학교단내의 공문)을 보내어 교도들을 거느리고 삼례역으로 모이라고 지시하였다. 11월 1일에는 전라도 대부분 지역과 그밖에 수원 등 각지에서 온 동학교도 수 천명이 삼례역에 집결하였다. 이들은 2일에 전라감사에게 소지문을 제출하였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 이때 소지문을 제출한 사람이 전봉준이었다는 점이다. 즉 삼례집회부터는 뒷날 농민혁명을 주도하는 전봉준 등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 전면에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지문의 취지는 '최제우의 신원과 동학교도에 대한 수탈중지'를 강력히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라감사는 해산하라는 답서를 내려보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전라감사도 충청감사처럼 각 읍에 공문을 내려 '동학금지를 핑계로 한 관속배의 (동학교도에 대한) 재물 수탈을 일체 금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지시는 동학포교의 불법성을 재확인시키면서 교도들에 대한 수탈을 엄히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동학지도부는 공식해산을 결정하게 된다. 그러나 동학교인 일부는 복합상소와 같은 적극적인 대책 수립을 요구하였던 것 같다. 이런 강경한 움직임은 동학 집회운동의 성격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써, 이를 이끈 것은 바로 전봉준을 비롯한 전라도의 동학 지도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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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루가 다르게 가을색이
짙어져 갑니다.
청명한 가을 하늘 예쁘게 물든 단풍잎처럼
마음도 곱게 물드는 계절.
청명한 가을을 배경삼아 나의 마음을
운동장에서 젊은 원우님과 함께
채육운동으로 멋진 가을 추억 많이 만들어
웃음이 함께하는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소망해봅니다.
안녕하세요 ♡
새벽에는 날씨가 차갑네요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보고싶은 사람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눈을 감아도 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 생일이 기다려 지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그의 생일이 기다려집니다.
조석으로 날씨가 쌀쌀한 환절기에 건강 조심하시고.
오늘도 우리 회원님들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즐겁게 보내시고 평안하고 행복한 금요일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