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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3회 후쿠오카(福岡)②
학회의 위업은
민중을 소생시킨 데 있다
‘토관’ 지역
이름도 없는 서민이 ‘지용보살(地涌菩薩)’의 사명에 분기해 ‘입정안국(立正安國)’의 대원(大願)을 위해 끝까지 살아간다. 숙명에 괴로워하던 민중이 소생하는 드라마로 벗과 지역에 그리고 사회에 희망의 빛을 보낸다.
이것이 학회원의 삶이다. 진실한 불법의 힘은 숙명을 사명으로 하는 동지의 모습으로 빛난다.
니치렌(日蓮) 대성인은 당신을 “전다라(旃陀羅)의 자식(최하층 집의 자식)”(어서 891쪽) “빈궁하천(貧窮下賤)한 자(가난하고 천한 사람)”(어서 958쪽), “백성의 자식”(어서 1332쪽) 등이라고 말하면서 사회 최하층 출신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셨다. 그야말로 니치렌불법은 ‘민중불법’이고 그 정신을 현대에 되살린 것이 학회다.
일찍이 후쿠오카시 하카타항(港)에서 튀어나온 매립지 한구석에 ‘토관’이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었다. 제6권 ‘가속’에는 ‘토관(土管)’ 지역에서 탄생한 ‘민중 소생의 드라마’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가속’을 읽으면 불법에서 설하는 인간주의의 진수와 동지의 따뜻함 그리고 학회의 사명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토관’ 지역에는 겨우 함석만을 붙여 지은 허름한 판잣집이 밀집해 있었다. 길은 좁고 햇볕도 들지 않는다. 치안도 나빠 절도와 싸움은 일상다반사이며, 도박판이 벌어지고, 밀주도 만들어 알코올중독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자주 볼 수 있었다. 현재는 하카타항의 항만계획으로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이런 곳이 분명 존재했다.
이곳에 학회원이 생기기 시작한 시기는 1954년 무렵이었다. ‘토관’ 지역 근처에 사는 여성이 ‘이 사람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안면이 있는 사람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절복하기 시작해 묘법(妙法)의 씨앗을 심었다.
모두 남에게 배신을 당하는 등의 과거의 쓰라린 경험 때문에 사람을 불신했지만, 끈기 있게 대화해 한 사람 두 사람 신심을 시작했다.
신앙에 힘쓰면서 많은 공덕의 체험이 탄생하고 꾸준히 멤버가 늘어, 1962년 무렵에는 사백여 세대에 이르렀다. 그 곳에 거주하던 회원의 이야기로는 ‘토관’ 지역 주민의 절반 이상이 입회했다고 한다. 학회원의 증가하면서 아동 취학률도 높아지고 범죄 수도 감소하기 시작했다.
이케다 선생님은 그들의 모습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썼다.
“암흑 속에서 살아온 이곳 사람들의 마음에 희망의 빛을 비추고 살아갈 용기를 갖게 한 것은 신앙의 힘이었다.
창가학회의 가장 큰 위업은 고뇌하는 민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러한 한 사람 한사람을 현실에서 소생시켜 온 것이라 하겠다.” (제6권 ‘가속’)
멤버들이 차례로 소생할 수 있던 배경에는 동지의 헌신적인 격려가 있었다. 회합장소를 제공하는 부부는 생선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매일같이 살을 발라내고 남은 생선뼈로 전골요리를 만들어 회합에 모인 사람들을 대접했다.
“그 행동의 이면에는 자신들도 동지에게 격려 받고 신심이 분기하여 장사가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체험을 통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제6권 ‘가속’)
동지가 아프기라도 하면 주위의 멤버들이 죽을 끓이는 등 세심하게 보살펴 주었다. 장례식이 있으면 모두 함께 관(棺)을 짜는 일부터 시작했다.
이곳에는 몸이 불편한 사람, 일본 국적이 아닌 사람, 전과자 등 다양한 처지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멤버들을 외면적인 것으로 차별하지 않았다. 일찍이 사람을 불신하던 사람들이 모인 지역이 어느 사이에 사람을 신뢰하는 유대로 빛나는 천지가 되었다.
이와 흡사한 지역은 전국 각지에 있었는데 이처럼 민중 소생의 드라마가 탄생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케다 선생님은 ‘가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창가학회가 걸어온 길은 불법이라는 휴머니즘의 철리를 인간의 마음에 확립하고 민중을 소생시켜 삭막한 현대 사회를 근저에서부터 바꾸고자 했다.
새로운 민중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을 알리는 서곡이 높게 울려 퍼졌던 것이다.”
‘가속’이 연재되자 “설마 우리 이야기를 소설에 써주시다니!” “하루하루가 감동의 연속입니다. 꿈만 같습니다.” “그리운 ‘토관’의 광경이 눈앞에 선합니다.” 등 일찍이 ‘토관’ 지역에서 활동한 사람들의 놀람과 환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각지로 옮겨간 멤버들은 다시 연락하기 시작했다. 모두 긍지를 가슴에 품고 새로운 천지에서 실증을 나타냈다. 한 사람 한사람이 자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매진했다. 멤버들은 소설에 게재되었다는 기쁨으로 크게 고조되었다.
“이케다 선생님이 ‘가속’을 통해 우리 ‘토관’ 지역 출신의 사람들을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해주셨다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하고 중심 멤버의 한 사람인 아사노 사다오 씨(본진상락권 부권장)가 감회를 이야기했다.
1999년에 개최한 규슈최고협의회에서 선생님은 다시 한번 벗을 칭찬했다.
“후쿠오카의 ‘토관’ 지역에서 탄생한 소생의 드라마는 우리 규슈의 영예로운 역사입니다. 같은 서민으로서 철저히 서민의 편에 서서 한 사람 한사람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용기를 끌어냈기에 학회는 강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규슈의 성(城)은 견고합니다. 우리 규슈, 우리 후쿠오카는 전원이 진정한 ‘영웅’이라고 진심으로 찬탄하고 싶습니다.”
‘다가와에 봄을’
1963년 11월 9일,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에 있는 미쓰이미이케광업소에서 탄진폭발사고가 일어났다. 희생된 학회원도 있었다. 신이치가 그들에게 격려의 손을 내밀고자 후쿠오카를 방문한 장면이 제8권 ‘격류’에 등장한다.
그리고 11월 24일, 신이치는 기타큐슈시의 야하타시민회관에서 개최한 규슈여자부간부회, 규슈남자부간부회에 잇달아 참석했다. 그 뒤 간부에게서 피해를 본 회원에 관해 상세하게 보고받고, 학회 차원에서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의 추선법요를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제18권 ‘비약’에는 1974년 1월 규슈 지도를 자세하게 설명했다.
19일, 후쿠오카로 이동한 신이치는 규슈대학회 총회에 참석하고, 이튿날인 20일에는 기타큐슈시립종합체육관에서 개최한 제22회 ‘청년부총회’에 참석해 후계의 제자들에게 희망을 보냈다. 이 총회는 수도권 이외의 지역에서 처음으로 실시하는 전국청년부총회였다.
총회가 끝난 뒤 신이치는 다가와회관으로 갔다. 1년 전에 다가와본부장인 요시이 도시미에게 ‘다음에는 꼭 방문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지쿠호탄전 최대의 탄광도시로 번영한 다가와시는 시대의 흐름으로 석탄대신 석유가 주요 에너지원이 되면서 탄광이 차례로 문을 닫았다. 다가와도 탄광이 문을 닫아 직장을 잃은 동지들이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심정으로 각지로 옮겨 갔다.
1968년, 신이치가 규슈를 방문했을 때, 다가와의 어느 부인이 이렇게 질문했다. “다가와에서는 광산이 폐쇄돼 모두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다가와 사람들은 어찌하면 행복해질 수 있습니까.”(제18권 ‘비약’)
신이치는 확신과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어떠한 사태에 내몰려도 신심은 반드시 활로를 열 수 있습니다. 져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제목을 끝까지 불러 회원을 지켜 주세요. 부탁합니다.”(제18권 ‘비약’)
이듬해 1969년 3월 7일, 신이치는 규슈전력기념체육관에서 개최한 규슈간부회에 다가와의 멤버 50명을 초대하고 단상에 자리도 마련했다. 나아가 신이치는 다부지게 투쟁하는 다가와 멤버를 참석자에게 소개하고, 다가와의 벗에게 “여러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하고 말했다.
멤버들은 감동과 결의를 가슴에 품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원을 담아 애창가를 제작했다. 노래 제목은 ‘다가와에 봄을’이라고 정했다.
‘언젠가 이 노래를 야마모토 선생님께 들려드리자!’고 결심하고 노래를 부르면서 시련의 고개를 넘었다.
요시이 본부장은 다가와회관을 방문한 신이치에게 ‘다가와에 봄을’의 노래 가사와 악보를 내밀었다. 신이치는 이틀 뒤에 규슈전력기념체육관에서 개최할 예정인 본부간부회에서 대표가 노래를 부르도록 제안했다. 도쿄 이외의 장소에서 본부간부회를 개최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본부간부회 날은 시작부터 끝까지 눈물이었습니다.”라며 요시다 미토시(규슈 참사)는 그때를 회고했다.
올해는 그 원점으로부터 45주년이 되는 해로 요시다 씨는 이케다 선생님이 다가와회관을 방문한 당시를 이야기했다.
1974년 1월 20일은 겨울 특유의 구름 낀 하늘에서 눈발이 흩날리는 추운 날이었다. 이케다 선생님의 몸이 좋지 않아 측근 간부가 걱정하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다가와 행을 결행하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다가와회관으로 갔다.
도중에 ‘선생님이 오실지도 모른다’며 기다리고 있던 학회원을 발견한 선생님은 차창을 활짝 내려 두 손을 크게 흔들고, 미래부원에게는 과자를 선물했다.
2시간 동안 흔들리는 자를 타고 다가와회관에 도착했다. 요시다 씨는 커다란 마스크를 한 이케다 선생님이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왔습니다. 드디어 다가와에 왔습니다!” 선생님은 요시다 씨와 회관 관리인에게 말을 건넸다.
회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서 창제실에서 창제를 했다. “다가와 동지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했습니다.” 하는 선생님의 말에 모두 가슴이 뭉클했다.
“선생님은 1시간 반 가량 다가와회관에 머물며 끊임없이 격려해주셨습니다. 다가와의 영원한 원점입니다.”(요시다 씨)
2011년에는 분카방송에서 방송한 <신·인간혁명> 낭독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다가와에 봄을’ 노래가 흘러나왔다. 본부간부회에서 노래를 부른 멤버를 비롯해 다가와의 동지는 기쁨을 가슴에 안고 대화확대에 앞장섰다.
“탄광이 잇달아 문을 닫는 속에서 모두 이를 악물고 노력한 날들이 선생님 덕분에 황금의 원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다가와에 봄을 알리는 지역광포를 위한 투쟁을 온 힘을 다해 추진하겠습니다.” 하고 요시다 씨가 힘주어 말했다.
<기고> 난공불락의 ‘선구의 인재성’을!
다이라 마스미 총후쿠오카 부인부장
“광선유포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드는 지금, 만년에 이르는 견고한 신심의 토대를 전 동지의 마음에 구축해야 한다. 또 인재를 찾아내어 육성하자! 전국 각지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인재성(人材城)을 만들자!”
이케다 선생님은 1977년 5월 17일부터 규슈 지도에 나서는 진심을 제25권 ‘공전’에 써주셨습니다.
후쿠오카는 니치렌 대성인 재세 당시 몽고 내습이 격전의 무대였습니다. 1958년 8월 10일, 요새가 남아 있는 니시진(현재 사와라구)의 땅에 선구의 본진 규슈 본부가 탄생했습니다. 경사스러운 개관식에는 당시 총무였던 이케다 선생님이 참석하셨습니다.
선생님은 ‘동양광포의 노래’에 맞추어 용장하게 춤을 추셨습니다. 회합이 끝난 뒤에도 규슈 본부 뒤쪽에 있는 바닷가에서 청년들과 낚시를 하는 등 추억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1983년 3월 29일, 같은 장소에 세워진 규슈이케다평화기념관(현재 후쿠오카 평화회관)을 방문하신 선생님은 ‘영원한 승리를 위해’라며 월계수를 식수하셨습니다.
그것은 미래를 내다보고 청년에게 기대를 거는 선생님의 마음이 각인된 것이기도 합니다.
1994년 11월, 제가 후쿠오카의 여자부장이었을 당시, 후쿠오카돔(당시)에서 ‘아시아청년평화음악회’를 개최했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반전공세의 ‘선구의 사명’을 완수하겠다고 기원하고 싸워 승리한 초창기의 부모님. 그리고 그 혼을 이어받은 청년 5만명이 부른 ‘환희의 노래’.
사제의 개가(凱歌)가 울려 퍼지고 돔의 지붕이 천천히 열리자 한 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아시아 민중에게 빛을 보낸다’는 도다 선생님의 시(詩)를 상기시키는 하늘을 이케다 선생님과 함께 올려다본 일은 생애 잊지 못할 황금의 원점입니다.
올해는 그로부터 25주년의 가절을 맞이합니다.
“‘후계의 사람’이란 승리의 깃발을 치켜세우는 ‘선구의 사람’이지 않으면 안 된다.”(제2권 ‘선구’)
이러한 스승의 마음을 가슴에 품고 창립 90주년을 향해 단연코 ‘완승의 깃발’을! 지금이야말로 선구의 서원을 불태우며 세계 제일의 청년을 선두로 ‘인간혁명의 빛’으로 빛나는 난공불락(難攻不落)의 후쿠오카를, 인재와 행복의 성을 구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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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매번 소중한자료 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