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관 | 명칭 | 위치 | 면적 | 규모 |
---|---|---|---|---|
2010년 3월 18일 | 노작홍사용문학관 (Nojak Literature House) | 경기도 화성시 노작로 206 | 부지면적 990㎡, 연면적 941.55㎡ | 1동 (지상 1층, 2층) |
1F | 산유화극장, 제1전시실, 수장고, 작은 도서관(북카페), 사무실 등 |
---|---|
2F | 제 2전시실, 강의실, 작가의 방, 아동·청소년 자료실, 야외테라스, 북카페 등 |
노작홍사용문학관은 여러분을 위해 열려있습니다.
화·수·목·금 9:00 ~ 22:00
토·일·국경일 9:00~18:00
9:30~17:30
매주 월요일, 명절, 선거일
구분 | 활용방안 | 공간조성 | 주요시설 | 대관 | 관람 |
---|---|---|---|---|---|
산유화 극장 (다목적 소극장) | 시낭송회 각종세미나 소규모연극공연 | 공연, 교류공간 | 중앙무대, 조명, 음향, 냉난방기, 빔프로젝트 | ○ | ○ |
수장고 | 유물보존, 장서소장 | 보존공간 | 모빌랙, 항온항습기, 문학도서 소장 | - | ○ |
작은 도서관 | 시민 누구나 자유롭게 독서 하는 공간, ∙도서대출 | 열람 및 교류공간 | 도서열람실, LCD TV 소장문학도서 총11,441권 | - | ○ |
제1전시실 | 노작홍사용선생 유물 및 사료보존 / 관람 | 보존 및 정보공간 | 쇼케이스, 유물다수 | - | ○ |
제2전시실 | 노작홍사용선생 유물 및 사료보존 / 관람 | 보존 및 정보공간 | 쇼케이스, 유물다수 | - | ○ |
북카페 *야외테라스 | 독서와 커피를 즐기는 공간 | 교류 및 휴게공간 | 문학도서, 노노카페 | - | ○ |
강의실 | 각종 문예강좌, 합평회, 독서토론공간 *적정인원 : 25명 | 창작 및 교류공간 | 빔프로젝트, 책상, 의자 | ○ | - |
노노카페는 화성시 노인일자리 사업입니다.
노작 홍사용은 경기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아버지 홍철유와 어머니 능성 구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경기 용인 및 화성 일대에 많은 농토를 가진 지주였으므로 노작은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태어난지 100일만에 무관학교 1기생에 합격한 부친을 따라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가 9세 때 부친의 군대가 해산하고 백부 승유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본적지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로 이사하였다.(사진1)
그 뒤 부친이 그를 위해 만든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7세에 다시 홀로 상경,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휘문의숙 재학시절(사진2,3,4) 동기인 정백, 1년 후배인 박종화 등을 만나 문학수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그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고, 3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 그 해 6월에 고향에 돌아온다. 고향에서 정백과 함께 현량개에 은신하면서 수필과 시를 쓰며 월탄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후 홍사용은 재종형 홍사중을 설득해 ‘문화사’를 설립하고 문예지 《백조》와 사상지 《흑조》를 기획, 《백조》만 간행했으나 3호로 단명하고 말았다.
또한 그는 우리나라 신극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3년 근대극 운동의 선구적 극단인 토월회에 가담해 문예부장직을 맡았고 직접 서양극 번역과 번안 그리고 연출도 했다. 1927년에는 박진, 이소연과 ‘산유화회’를 결성하고 1930년에는 홍해성, 최승일과 신흥극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30세 무렵부터 5년간 홍사용은 미투리에 두루마기 차림으로 화류목 단장을 짚고 전국 곳곳을 방랑했다. 1932년 〔불교誌〕에 희곡《벙어리굿》을 발표, 1935년을 전후하여 세검정 근처에 자리 잡고 한의공부를 하여 한동안 한의사로 생계를 유지했다.
1939년 희곡 《김옥균전》을 쓰다가 일제의 검열로 붓을 꺾어버렸다. 그는 이 일로 주거 제한조치를 받기도 했다.
이후 강경·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으나 모두 오래 가지 못했으며, 1944년에는 이화전문에 잠시 출강했다. 해방 후 근국청년단에 가입, 청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지병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7년 1월 5일 (음력 1946년 12월 14일) 폐환으로 별세했다.(사진5)
1919년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루고 낙향하여 정백과 함께 은신하면서 발표한 합동수필집 『청산백운』 초교본 표지와 본문(부분). 표지는 노작선생님이 직접 쓰셨습니다.
1939년 2월. 장손 홍규선씨의 결혼기념 사진입니다. 맨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노작선생님이며 그 옆이 주례 춘원 이광수입니다. 앞줄 오른쪽 세 번째는 원씨 부인입니다.
분야 | 소재지 | 발행연도 | 발행 |
---|---|---|---|
순문학 동인지 | 서울 | 1922년 | 경성문화사 |
제1호에 월탄(月灘:박종화)의 시 《밀실로 도라가다》를 비롯하여 이상화의 《말세의 희탄》, 나도향의 소설 《젊은이의 시절》 등, 1922년 5월에 간행된 제2호에는 회월(懷月:박영희)의 시 《꿈의 나라로》, 노작(露雀:홍사용)의 《봄은 가더이다》, 월탄의 《흑방비곡(黑房悲曲)》등, 1923년 9월에 간행된 제3호에는 시에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 노작의 《흐르는 물을 붙들고서》 《나는 왕이로소이다》 《그것은 모두 꿈이었지마는》, 소설에 나도향의 《여이발사(女理髮師)》, 월탄의 《목매이는 여자》 등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에는 ·3.1운동의 실패에서 온 절망감이 그대로 반영되어 애수와 한, 그리고 자포자기적인 영탄(詠嘆)과 유미탐구(唯美探究)의 경향이 뚜렷하다.(사진1)
사진1) 백조지 창간호 표지(1922년)
백조가 처음 나온 것은 1922년 1월 9일 홍사용, 홍사중과 김덕기의 후원으로 순수문학 동인지인 《백조》가 창간되었다. 편집은 홍사용이 맡았지만, 발행인은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1호는 배재학당의 교장직에 있었던 아펜젤러, 2호는 보이스여사, 3호는 러시아에서 망명한 훼루훼로로 외국인을 내세웠다. 백조의 첫 호에는 수상류 및 동화, 희곡 등이 게재되었는데, 의욕이 너무 강한 나머지 2, 3편의 작품을 한꺼번에 수록하면서 질적인 면에서 조금은 아쉬운 창간호였다. 2호는 1호보다 좀 더 절제되고 정돈된 느낌으로 안정감을 주기도 했지만, 그 체재와 작품의 뼈대에 해당되는 의식이라든가 사조, 경향 등은 창간호와 대체로 비슷했다. 1호, 2호가 한해에 출간된 것에 비해 3호는 1년 여만에 출간할 수 있었는데, 순탄하지 못했던 출간 사정을 짐작해 볼 수 있다. 3호가 지니는 보람은 이 호가 전례 없이 질적 향상을 이룩한 작품들을 수록한 데 있다. 대표적으로 《할머니의 죽음》,《목매이는 여자》,《여이발사》 등이 실려 있으며, 홍사용의 대표작 《나는 왕이로소이다》도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백조파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던 김기진의 와해공작으로 백조는 3호를 마지막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백조에 대한 지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 권의 시집도 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또한 1922년 우리나라 최초의 순수문예 동인지 《백조》 창간의 중추적인 인물로 박종화, 현진건, 박영희 등과 함께 활동하나 그들보다 평가받지 못한다. 특히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의 다양한 글쓰기가 도리어 그를 한 가지 이미지로 부각될 수 없게 했다. 그러나 그는 대다수 낭만주의 시인들이 외국풍조에 휩쓸릴 때 민중의식이 스민 민요에 관심을 갖고 민족적 서정성을 끝없이 탐구하고 형상화한, 흔치 않은 시인이었다. 홍사용이 근대문학사상 중요한 위치에 서 있는 이유는 한국의 낭만주의 문학을 이끌어온 《백조》동인이면서 실질적으로 백조를 운용한 점이다. 또한 당시 우리문단에서 종횡무진 횡행했던 문학의 맹목적인 서구화와는 달리 전통적인 맥락에서 시를 창작하고 민족적인 이념을 그의 시를 통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백조 동인의 시적인 경향에 비추어 감상적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인물 혹은 현실을 떠난 주관적인 정열과 몽환적인 세계의 감상적인 경향으로 그의 문학을 치부해 버렸다. 이러한 점은 그의 시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 이전에 문예지를 중심으로 한 선험적인 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홈페이지에 회원가입을 하시면 5권씩, 14일간 대출이 가능합니다. (연장불가)
연체 시 연체일수만큼 대출이 정지되며 분실 및 파손 시 동일 도서, 또는 동일 시가로 변상해야 합니다.
노작홍사용문학관 작은 도서관은 문학전문도서관으로서 시, 소설, 산문, 희곡, 문학 비평, 문학 이론, 인문, 아동·청소년 문학도서 등 약 12,000여권의 도서를 비치하고 있으며 시민 누구나 열람·대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작은 도서관은 수준 높은 순수문학 도서만을 선별 소장하여 문학관을 찾는 시민의 정서 함양은 물론, 문학 애호가와 지망생, 작가들의 창작 역량을 키우는데 이바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