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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시감상
증별당질원량잠지임영동군 / 신광한
贈別堂姪元亮潛之任嶺東郡 申光漢
一萬峯巒又二千(일만봉만우이천) 일만 봉우리에 다시 이천 봉우리
海雲開盡玉嬋姸(해운개진옥선연) 바다 구름 다 걷히자 옥빛이 곱다
少時多病今傷老(소시다병금상로) 젊을 때는 병이 많았고 이제는 늙어서
終負名山此百年(종부명산차백년) 끝내 명산을 저버린 지 백 년이네
〈감상〉
이 시는 당질 원량인 신잠(申潛)이 영동군의 임소로 가는 것을 전송하면서 지은 시로, 금강산을 가 보지 못한 안타까움을 드러내고 있다.
일만 이천 봉우리인 금강산, 바다에 가득한 구름이 걷히자 옥빛처럼 곱디곱다. 젊은 시절에는 병이 많아 오르지 못했고 지금은 늙어서 찾지 못해 명산인 금강산을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세주(細注)에 ‘욕유풍악이불득(欲遊楓岳而不得)’이라는 언급으로 보아, 신광한은 금강산에 오르고자 했으나 여건이 허락지 않아 오르지 못한 작가의 아쉬움을 읽을 수 있다.
신광한은 16세기에 활동한 문인으로 도학적(道學的) 면모와 사장적(詞章的) 면모를 겸하였으며, 훈구파의 가계에다 사림적(士林的)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송풍(宋風)에서 당풍(唐風)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지냈던 사람이다. 그의 시(詩) 성향에 대해서는 김태준은 『조선한문학사』에서 박은(朴誾)·이행(李荇)·정사룡(鄭士龍)·노수신(盧守愼)·박상(朴祥)·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을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라 규정했으나, 이후 학자들에 따라 신광한을 제외하기도 한다.
『해동잡록』에는 다음과 같이 간략한 생평(生平)이 실려 있다.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자는 한지(漢之) 또는 시회(時晦)라 하며, 호는 낙봉이다. 중종 경오년에 급제하고 기묘년에 배척당하여 여주(驪州)에 우거하였다. 후에 이조 판서로 문형(文衡)을 맡았다. 명종 을사년에 다시 충순당(忠順堂)에 들어가 공신에 참여했으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좋지 않게 여겼다. 벼슬은 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기재집(企齋集)』이 있어 세상에 전한다
(高靈人(고령인) 字漢之(자한지) 一曰時晦(일왈시회) 號駱峯(호락봉) 我中廟庚午登第(아중묘경오등제) 己卯被斥(기묘피척) 寓居驪州(우거여주) 後以吏曹判書典文翰(후이리조판서전문한) 我明廟乙巳(아명묘을사) 再入忠順堂(재입충순당) 參錄(참록) 人多少之(인다소지) 官至贊成(관지찬성) 謚文簡(익문간) 有企齋集行于世(유기재집행우세)).”
문형(文衡)을 맡은 신광한이지만 글공부는 늦게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의 글공부와 재주에 대한 일화(逸話)가 『부계기문(涪溪記聞)』에 실려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기재 신광한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늙은 여자 종의 손에서 길러졌다. 나이 18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글을 알지 못하였다. 이웃 아이와 냇물에서 장난하다가 이웃 아이가 공(公)을 발로 차서 물속에 엎어지게 하였다. 공이 성내어 꾸짖기를, ‘너는 종인데, 어찌 감히 공자(公子)를 업신여기느냐?’라고 하니, ‘그대처럼 글을 모르는 자도 공자란 말인가? 아마 무장공자(無腸公子, 게[해(蟹)]의 별명)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크게 부끄럽게 여겨 비로소 마음을 고쳐먹고 글을 읽었는데, 문장이 물 솟아나듯 하였다.
다음 해에 「만리구(萬里鷗)」라는 부(賦)를 지어 예위(禮圍, 생원·진사의 복시(覆試). 예조에서 시취(試取)하였기 때문에 예위라고 함)에서 장원하고, 얼마 안 가서 대과(大科)에 급제하였으며,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의 별칭)을 맡은 것이 20년이나 되었다. 기재는 비록 문장에는 능했으나 실무(實務)의 재주는 없었다. 일찍이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소송(訴訟)이 가득 차 있었으나 판결을 내리지 못하여 죄수가 옥에 가득하니 옥이 좁아서 수용할 수가 없었다.
공이 옥사(獄舍)를 더 짓기를 청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판서를 바꾸는 것만 못하다. 어찌 옥사를 증축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허자(許磁)로 대신 시켰는데, 허자가 당장에 다 처리하여 버리니 옥이 드디어 비게 되었다고 한다
(申企齋光漢(신기재광한) 少失父母(소실부모) 鞠於老婢(국어로비) 年十八猶不知書(년십팔유부지서) 與隣兒戱于川(여린아희우천) 隣兒踢公(인아척공) 仆水中(부수중) 公怒叱曰(공노질왈) 汝隷奴(여례노) 何敢凌公子(하감릉공자) 如君不知書者(여군부지서자) 亦公子耶(역공자야) 是必無腸公子也(시필무장공자야) 公大慚(공대참) 始折節讀書(시절절독서) 文藻水湧(문조수용) 明年以萬里鷗賦(명년이만리구부) 魁禮圍(괴례위) 未幾登第(미기등제) 典文衡者二十年(전문형자이십년) 企齋雖能文章(기재수능문장) 而無實才(이무실재) 嘗判刑部(상판형부) 訴訟塡委(소송전위) 不能決囚繫滿獄(불능결수계만옥) 獄不能容(옥불능용) 公請加構獄舍(공청가구옥사) 中廟曰(중묘왈) 不若易判書(불약역판서) 何必改構(하필개구) 遂以許磁代之(수이허자대지) 許裁決立盡(허재결립진) 囹圄遂空(영어수공)).”
〈주석〉
〖巒〗 산 만, 〖嬋〗 곱다 선, 〖姸〗 곱다 연, 〖傷〗 불쌍히 여기다 상
각주
1 신광한(申光漢, 1484, 성종 15~1555, 명종 10):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한지(漢之)·시회(時晦), 호는 기재(企齋)·낙봉(駱峰)·석선재(石仙齋)·청성동주(靑城洞主). 신숙주(申淑舟)의 손자로, 1507년(중종 2) 사마시를 거쳐 1510년(중종 5) 식년문과에 급제, 1514년(중종 9)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홍문관전교가 되었다.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신진사류(新進士類)로서 1518년(중종 13) 대사성에 특진되었으나 다음 해 기묘사화에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1537년(중종 32) 등용되어 이조판서·홍문관제학을 지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 때 윤임 등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이 되었다. 같은 해 우찬성으로 양관대제학을 겸임, 영성부원군(靈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550년(명종 5) 좌찬성이 되었다. 1553년(명종 8)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필력이 뛰어나 몇 편의 몽유록(夢遊錄)과 전(傳)을 남겼는데 「안빙몽유록(安憑夢遊錄)」·「서재야회록(書齋夜會錄)」은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몽유록이다.
노처사(즙)경장 십영 / 신광한
盧處士(檝)慶莊 十詠 申光漢
「雉岳湧月(치악용월)」
瑞暈初分岳(서훈초분악) 고운 달무리 처음 산에 솟아오르자
寒光忽射空(한광홀사공) 차가운 빛이 갑자기 공중에 비추네
半窺驚魍魎(반규경망량) 반만 보여도 도깨비들 놀라고
全露破鴻濛(전로파홍몽) 완전히 뜨자 뭉실 기운 다 없어지네
爽透林泉外(상투림천외) 상쾌하게 정원 밖에 쏟아지다가
淸銜草屋東(청함초옥동) 맑게 초가 동편을 감싸네
慇懃來入戶(은근래입호) 은근하게 방문으로 들어와
還照覓詩中(환조멱시중) 도리어 시를 찾는 나를 비추네
〈감상〉
이 시는 원주 치악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달이 뜨는 것을 보고 읊은 시이다.
상서로운 달무리가 산 위에 막 솟아오르자 차갑게 느껴지는 달빛이 하늘에 넓게 퍼진다. 달빛이 반만 보여도 한밤중에 생활하는 도깨비가 놀라서 도망갈 듯하고, 완전히 떠오르자 세상이 훤히 밝아졌다. 정원 밖을 상쾌하게 비추다가 초가집을 청신하게 감싸 안는다. 그러다 은근히 방문으로 들어오더니, 시를 짓고 있는 나를 비추고 있다.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의 「답이생서(答李生書)」에서는 우리나라의 시사(詩史)를 언급하면서 신광한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외져서 바다 모퉁이에 있으니 당(唐)나라 이상의 문헌은 까마득하며, 비록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진덕여왕(眞德女王)의 시(詩)가 역사책에 모아져 있으나, 과연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었던 것인지는 감히 믿을 수 없소. 신라(新羅) 말엽에 이르러 최치원(崔致遠) 학사(學士)가 처음으로 큰 이름이 났는데, 오늘로 본다면 문(文)은 너무 고와서 시들었으며 시(詩)는 거칠어서 약하니 허혼(許渾)·정곡(鄭谷) 등 만당(晩唐)의 사이에 넣더라도 역시 누추함을 나타낼 텐데, 성당(盛唐)의 작품들과 그 기법(技法)을 겨루고 싶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고려(高麗)시대의 정지상(鄭知常)은 아롱점 하나는 보았다 하겠지만, 역시 만당(晩唐) 시(詩) 가운데 농려(穠麗)한 시 정도였소.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는 더러 맑고 기이(奇異)하며 진화(陳澕)·홍간(洪侃)은 역시 기름지고 고우나 모두 소동파(蘇東坡)의 범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급기야 이제현(李齊賢)에 이르러 창시(倡始)하여, 이곡(李穀)·이색(李穡)이 계승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김구용(金九容)이 고려 말엽의 명가(名家)가 되었지요. 조선 초엽에 이르러서는 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이 그 명성을 독점하였으니 문장(文章)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달(達)했다 칭할 만하여 아로새기고 빛나곤 해서 크게 변했다 이를 만한데 중흥(中興)의 공로는 이색(李穡)이 제일 크지요. 중간에 김종직(金宗直)이 포은(圃隱)·양촌(陽村)의 문맥(文脈)을 얻어서 사람들이 대가(大家)라고 일렀으나 다만 한(恨)스러운 것은 문규(文竅)의 트임이 높지 못했던 것이오.
그 뒤에는 이행(李荇) 정승이 시에 입신(入神)하였으며, 신광한(申光漢)·정사룡(鄭士龍)은 역시 그 뒤에 뚜렷하였소. 노수신(盧守愼) 정승이 또 애써서 문명을 떨쳤으니, 이 몇 분들이 중국(中國)에 태어났다면 어찌 모두 강해·이몽양(康海·李夢陽, 명(明)의 전칠자(前七子)로 시문(詩文)에 능함) 두 사람보다 못하다 하리오? 당세의 글하는 이는 문(文)은 최립(崔岦)을 추대하고 시(詩)는 이달(李達)을 추대하는데, 두 분 모두 천 년 이래의 절조(絶調)지요.
그리고 같은 연배 중에서는 권필(權韠)이 매우 완량(婉亮)하고, 이안눌(李安訥)이 매우 연항(淵伉)하며 이 밖에는 알 수가 없소
(吾東僻在海隅(오동벽재해우) 唐以上文獻邈如(당이상문헌막여) 雖乙支(수을지), 眞德之詩(진덕지시) 彙在史家(휘재사가) 不敢信其果出於其手也(불감신기과출어기수야) 及羅季(급라계) 孤雲學士始大厥譽(고운학사시대궐예) 以今觀之(이금관지) 文菲以萎(문비이위) 詩粗以弱(시조이약) 使在許鄭間(사재허정간) 亦形其醜(역형기추) 乃欲使盛唐爭其工耶(내욕사성당쟁기공야) 麗代知常(여대지상) 足窺一斑(족규일반) 亦晩李中穠麗者(역만이중농려자) 仁老奎報(인로규보) 或淸或奇(혹청혹기) 陳澕洪侃(진화홍간) 亦腴艶(역유염) 而俱不出長公度內耳(이구불출장공도내이) 及至益齋倡始(급지익재창시) 稼牧繼躅(가목계촉) 圃陶惕(포도척) 爲季葉名家(위계엽명가) 逮國初(체국초) 三峯陽村(삼봉양촌) 獨擅其名(독천기명) 文章至是(문장지시) 始可稱達(시가칭달) 追琢炳烺(추탁병랑) 足曰丕變(족왈비변) 而中興之功(이중흥지공) 文靖爲鉅焉(문정위거언) 中間金文簡得圃(중간김문간득포), 陽之緖(양지서) 人謂大家(인위대가) 只恨文竅之透不高(지한문규지투불고) 其後容齋相詩入神(기후용재상시입신) 申鄭亦瞠乎其後(신정역당호기후) 蘇相又力振之(소상우력진지) 玆數公(자수공) 使生中國(사생중국) 則詎盡下於康李二公乎(칙거진하어강이이공호) 當今之業(당금지업) 文推崔東皐(문추최동고) 詩推李益之(시추이익지) 俱是千年以來絶調(구시천년이래절조) 而儕類中汝章甚婉亮(이제류중여장심완량) 子敏甚淵伉(자민심연항) 此外則不能知也(차외칙불능지야)).”
〈주석〉
〖湧〗 솟다 용, 〖暈〗 무리 훈, 〖窺〗 엿보다 규, 〖魍魎(망량)〗 도깨비. 〖鴻濛(홍몽)〗 우주가 형성되기 전의 혼돈된 상태. 〖透〗 지나가다 투, 〖銜〗 머금다 함, 〖還〗 도리어 환
간사김사군혜매와전 / 신광한
簡謝金使君惠買瓦錢 申光漢
才名遠愧杜陵賢(재명원괴두릉현) 재주와 명성은 뛰어난 두보에게 많이 부끄럽지만
生理堪誇我在前(생리감과아재전) 살림살이는 내가 앞선다고 자랑할 만하네
春雨不愁茅屋漏(춘우불수모옥루) 봄비에 초가집이 새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 것은
野橋今復見携錢(야교금부견휴전) 들 다리에서 방금 다시 돈 들고 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네
〈감상〉
이 시는 김사군이 기와 판 돈을 보내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이 시는 기수(起句)와 승구(承句)에 대우(對偶)의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다. 대우(對偶)는 절구(絶句)보다 율시(律詩)의 함련과 경련에 주로 사용하며, 기구와 승구에는 대우를 두지 않아도 된다. 신광한은 절구(絶句)에서는 기구와 승구에, 율시(律詩)에서는 수련과 함련과 경련에 모두 대우(對偶)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송중원우사군이진서원(送中原禹使君移鎭西原)」 등). 이것은 ‘이문위시(以文爲詩)’를 표방한 강서시파(江西詩派)들의 시작(詩作)에 나타난 산문화(散文化) 경향과 상통하는 것이다.
조사수(趙士秀)의 「문간공행장(文簡公行狀)」에,
“문을 지을 때에는 반드시 한유(韓愈)와 맹자(孟子)를 모범으로 삼아 성대함이 만 이랑의 큰 파도가 출렁이는 것과 같아 기이(奇異)하기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기이하고 변화할 수 있었다. ······시를 지을 때는 『시경』을 근본으로 하였고, 두보(杜甫)를 조(祖)로 삼고 강서(江西)를 종(宗)으로 삼아 기가 웅혼하고 율(律)이 부섬하며 청연유묘하고 준결유려하여 구리 구슬이 널판에서 달리듯 하고, 빽빽한 별이 하늘에 걸려 있는 듯하며, 여러 체를 두루 갖추어 전고(前古)보다 매우 뛰어나니, 사람들이 두보를 잘 배웠다고 하였다
(爲文(위문) 必以韓孟爲範(필이한맹위범) 汪汪如萬頃洪濤淪漣蕩潏(왕왕여만경홍도륜련탕휼) 不求爲奇(불구위기) 而自能奇變(이자능기변) ·····爲詩(위시) 本諸三百篇(본제삼백편) 祖少陵而宗江西(조소릉이종강서) 氣渾而雄(기혼이웅) 律贍而富(율섬이부) 淸硏幽妙(청연유묘) 峻潔流麗(준결류려) 如銅丸走板(여동환주판) 如繁星麗天(여번성려천) 衆體森備(중체삼비) 遠駕前古(원가전고) 人謂善學老杜(인위선학로두)).”
라 하여,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를 종(宗)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보한재 신숙주·이요정 신용개·기재 신광한 조손 세 사람은 모두 문장에 뛰어나 대제학을 지냈으니, 위대한 일이다. ······위에 든 여러 시는 당시에 양보할 것이 없다(保閑齋申叔舟二樂亭用漑企齋光漢(보한재신숙주이요정용개기재광한) 祖孫三人(조손삼인) 皆以文章典文衡(개이문장전문형) 偉哉(위재) ······諸詩何讓唐人(제시하양당인)).”라는 평을 남기고 있다.
〈주석〉
〖使君(사군)〗 고을의 장관이나 사람의 존칭으로 쓰임. 〖愧〗 부끄러워하다 괴, 〖生理(생리)〗 =생계(生計),
〖堪〗 능히 하다 감, 〖誇〗 자랑하다 과, 〖携〗 들다 휴
좌유화자 부용전운 이시석춘지의 / 신광한
座有和者 復用前韻 以示惜春之意 申光漢
名是爲春實是賓(명시위춘실시빈) 이름은 봄이지만 실은 손님
桃花欲謝強爲春(도화욕사강위춘) 복사꽃 지려는데 억지로 봄이라 하네
年年惜此春光去(년년석차춘광거) 해마다 봄빛이 지나가는 것을 애석해했는데
春作殘春人老人(춘작잔춘인로인) 봄은 늦봄이 되었고 사람은 노인이 되었네
〈감상〉
이 시는 함께한 사람 중에 화운(和韻)한 사람이 있어 다시 앞에 사용했던 운(韻)을 사용하여 봄이 가는 것을 애석해하는 뜻을 보여 준 시이다.
산문(散文)에서 필력(筆力)을 펴고 기운을 깊이 있게 하기 위하여 동일한 어구를 반복하는 중복(重複)의 수사(修辭)를 사용한다. 시(詩)에서도 어세(語勢)를 강화시키고 표현을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 중복(重複)을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근체시에서는 한 글자가 두 번 들어가면 작법(作法)에 어긋나지만, 1구(句)에 또는 1연(聯)에 같은 자가 두 번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고 1수(首)에 같은 자가 3번 들어가는 것도 허용은 하지만 피하는 것이 좋다. 신광한은 이 시에서 춘(春)과 인(人)을 중복(重複) 사용하여 산문화(散文化) 경향을 띠고 있다.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신광한을 포함한 조선의 시사(詩史)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조선의 시(詩)는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러 크게 성취되었다. 이행(李荇)이 시작을 열어 눌재(訥齋) 박상(朴祥)·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충암(冲庵) 김정(金淨)·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이 일세(一世)에 나란히 나와 휘황하게 빛을 내고 금옥(金玉)을 울리니 천고(千古)에 칭할 만하게 되었다. 조선의 시는 선조조(宣祖朝)에 이르러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노수신(盧守愼)은 두보(杜甫)의 법을 깨쳤는데 황정욱(黃廷彧)이 뒤를 이어 일어났고,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은 당(唐)을 본받았는데 이달(李達)이 그 흐름을 밝혔다. 우리 망형(亡兄)의 가행(歌行)은 이태백(李太白)과 같고 누님의 시는 성당(盛唐)의 경지에 접근하였다. 그 후에 권필(權韠)이 뒤늦게 나와 힘껏 전현(前賢)을 좇아 이행(李荇)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니, 아! 장하다
(我朝詩(아조시) 至中廟朝大成(지중묘조대성) 以容齋相倡始(이용재상창시) 而朴(이박) 訥齋祥(눌재상), 申企齋光漢金冲庵淨鄭湖陰士龍(신기재광한김충암정정호음사룡) 竝生一世(병생일세) 炳烺鏗鏘(병랑갱장) 足稱千古也(족칭천고야) 我朝詩(아조시) 至宣廟朝大備(지선묘조대비) 盧蘇齋得杜法(노소재득두법) 而黃芝川代興(이황지천대흥) 崔白法唐而李益之闡其流(최백법당이이익지천기류) 吾亡兄歌行似太白(오망형가행사태백) 姊氏詩恰入盛唐(자씨시흡입성당) 其後權汝章晩出(기후권여장만출) 力追前賢(역추전현) 可與容齋相肩隨之(가여용재상견수지) 猗歟盛哉(의여성재)).”
이 외에도 『성소부부고』에는 신광한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낙봉(駱峰) 신광한(申光漢)의 시는 청절(淸絶)함에 아취가 있다. 「중추주박장탄(中秋舟泊長灘)」라는 시에, ‘갈대꽃 핀 물기슭에 외로운 배 매고 보니, 양 갈래 맑은 강에 사면에는 산이로세. 인간 세상에도 이 밤 같은 달이야 없을까만, 백 년 가도 이러한 달 보기 어려우리’라 하고, ······편편이 모두 읊을 만하다. 비록 웅기(雄奇)함에 있어서는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에 미치지 못하나 청창(淸暢)함에 있어서는 오히려 그보다 낫다
(申駱峯詩(신락봉시) 淸絶有雅趣(청절유아취) 中秋舟泊長灘曰(중추주박장탄왈) 孤舟一泊荻花灣(고주일박적화만) 兩道澄江四面山(양도징강사면산) 人世豈無今夜月(인세기무금야월) 百年難向此中看(백년난향차중간) ······篇篇俱可誦(편편구가송) 雄奇不逮湖老(웅기불체호로) 淸鬯過之(청창과지)).”
〈주석〉
〖謝〗 시들다 사, 〖强〗 억지로 강
황작음 / 신광한
黃雀吟 申光漢
黃雀啄黃黍(황작탁황서) 참새가 누런 기장을 쪼아 먹고는
飛鳴集林木(비명집림목) 날아 울며 숲으로 모이네
田中有稚兒(전중유치아) 밭 가운데 어린아이 있어
日日來禁啄(일일래금탁) 날마다 와서 쪼아 먹지 못하게 하네
雀飢不得飽(작기부득포) 참새는 먹을 수 없어 굶주렸으나
兒喜能有粟(아희능유속) 아이는 곡식을 지킬 수 있어 기뻐하네
有粟輸官倉(유속수관창) 지키던 곡식은 관의 창고로 보내고
歸家但四壁(귀가단사벽) 집으로 돌아가니 다만 사방 벽뿐이네
黃雀終自肥(황작종자비) 참새는 끝내 살이 쪘으나
兒飢向田哭(아기향전곡) 아이는 굶주려 밭을 향해 운다네
〈감상〉
이 시는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있을 때 참새를 보고 노래한 것으로, 현실에 대한 풍자시(諷刺詩)이다.
1연에서는 참새의 힘을 묘사하고 있고(참새는 당시 지방관이나 아전들을 비유함), 2연에서는 참새를 지키는 아이를 그리고 있다(아이는 당시의 백성들을 비유함). 3연에서는 잠시 참새를 막아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나, 4연에 이르러서는 수확한 곡식을 세금으로 내고 나니,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당시 백성들의 허무한 마음을 묘사하고 있고, 5연에서는 참새와 아이를 대비시켜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신광한은 「왕조사학황화집서응제(王詔使鶴皇華集序應製)」에서,
“무릇 시는 사람의 성정에 근원하여 말로 드러난 것이다. 성정이 바르면 말에 드러난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이 없다. 성정이 바르지 않으면 생각이 따라서 사악해지니, 그 말이 어찌 바름을 얻을 수 있겠는가? 옛날 태평성세 때에 성인이 위에 있어 자신으로 가르침을 삼아 직온관률을 한데 섞어 그 중(中)을 얻은 연후에 천하의 말 중에 바르게 드러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시라는 것은 또한 말의 정화이다
(夫詩者(부시자) 根於人之性情(근어인지성정) 而發之於言(이발지어언) 性情正(성정정) 則發於言者無不正(칙발어언자무부정) 性情不正(성정부정) 則思從而邪(칙사종이사) 其言烏得而正哉(기언오득이정재) 古昔盛時(고석성시) 聖人在上(성인재상) 以身爲敎(이신위교) 直溫寬栗(직온관률) 揉得其中(유득기중) 然後天下之言(연후천하지언) 無不發於正(무불발어정) 而詩者又言之精華也(이시자우언지정화야)).”
라 하여, 시가 성정(性情)의 표현으로 인간의 심성(心性)을 도야(陶冶)하여 사회교화(社會敎化)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다. 신광한의 풍자시(諷刺詩)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홍만종은 『시화총림』에서,
“기재 신광한과 호음 정사룡은 같은 시대에 이름이 함께 높았는데, 기상과 격조는 서로 달랐다. 신광한의 시는 맑고 밝으며, 정사룡의 시는 웅장하고 기이하다. ······기재는 각체의 시를 구비한 반면 호음은 유독 7언율시만을 잘 지었다. 호음이 기재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자, 호음은 ‘신공의 각체가 어찌 내 율시 하나를 대적하겠는가?’라 하였다
(申企齋鄭湖陰一時齊名(신기재정호음일시제명) 兩家氣格不同(양가기격부동) 申詩淸亮(신시청량) 鄭詩雄奇(정시웅기) ······企齋於詩各體俱備(기재어시각체구비) 湖陰獨善七律(호음독선칠률) 湖似不及企(호사불급기) 而嘗曰(이상왈) 申公各體(신공각체) 豈能敵吾一律哉(기능적오일률재)).”
라 하여, 신광한과 정사룡 시(詩)의 장처(長處)를 제시하고 있다.
〈주석〉
〖黃雀(황작)〗 새 이름으로, 뜻을 얻은 소인(小人)에 비유. 〖啄〗 쪼다 탁, 〖黍〗 기장 서, 〖倉〗 창고 창
산거 이수 / 서경덕
山居 二首 徐敬德
雲巖我卜居(운암아복거) 운암에 내가 살게 된 것은
端爲性慵疏(단위성용소) 모두 성질이 게으르고 못 사귀기 때문이네
林坐朋幽鳥(임좌붕유조) 숲에 앉아 조용한 새와 벗하고
溪行伴戲魚(계행반희어) 시냇가에 가서 노니는 물고기와 짝하네
閒揮花塢帚(한휘화오추) 한가로이 꽃 언덕을 빗자루로 쓸고
時荷藥畦鋤(시하약휴서) 때로 약초밭에 호미질을 하네
自外渾無事(자외혼무사) 세상 밖에 전혀 아무 일 없으니
茶餘閱古書(다여열고서) 차 마신 뒤에 옛글을 읽네
〈감상〉
이 시는 산에 살면서 누리는 한가로운 정서를 노래한 시이다.
자연 속의 운암에 내가 살게 된 이유는 모두 내 성질이 게으르고 사람을 잘못 사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아닌 자연을 벗 삼아 숲에 앉아서는 조용한 새와 벗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때로는 시냇가를 거닐며 노니는 물고기와 짝한다. 시간이 나면 한가롭게 꽃이 떨어진 언덕을 빗자루로 쓸고, 때로는 호미를 메고 약초밭에 가서 김을 맨다. 세상 밖의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으니, 차를 끓여 마신 뒤에는 한가롭게 옛글을 읽는다.
〈주석〉
〖端〗 모두 단, 〖慵〗 게으르다 용, 〖伴〗 짝 반, 〖塢〗 둑 오, 〖帚〗 비 추, 〖荷〗 메다 하, 〖畦〗 쉰 이랑 휴, 〖鋤〗 호미 서, 〖渾〗 모두, 아주 혼, 〖閱〗 읽다 열
花潭一草廬(화담일초려) 화담의 한 초가집이
瀟洒類僊居(소쇄류선거) 맑고 깨끗하니 신선집 같네
山簇開軒面(산족개헌면) 산들은 옹기종기 집 앞에 펼쳐졌고
泉絃咽枕虛(천현열침허) 샘물 거문고 소리 허공을 베고 울리네
洞幽風淡蕩(동유풍담탕) 골짜기 그윽하니 바람이 돌아가고
境僻樹扶疏(경벽수부소) 경계가 궁벽하니 나무도 무성하네
中有逍遙子(중유소요자) 그중에 소요하는 사람 있어
淸朝好讀書(청조호독서) 맑은 아침에 독서를 좋아하네
〈감상〉
화담에 초가집이 한 채 있는데, 맑고 깨끗하여서 마치 신선이 사는 집 같다. 그 집 앞의 산들은 옹기종기 겹쳐 저 멀리까지 펼쳐졌고, 집 앞을 흐르는 샘물 소리는 허공에 울려 퍼지고 있다. 골짜기 그윽하여 깊으니 바람이 돌아 흘러 소슬하게 불고, 그곳이 궁벽한 곳이라 사람의 베임을 벗어나 나무도 울창하게 자랐다. 그 화담에 소요하는 사람인 나는 맑은 아침이면 자리에서 일어나 한가롭게 독서를 즐긴다.
『기묘록(己卯錄)』에 서경덕의 화담에서의 은거(隱居)와 학습과정, 효(孝)에 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본관은 당진(唐津)으로 자는 가구(可久)며, 스스로 호를 복재라 하였다. 일찍부터 화담에 은거하며,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학자들이 화담선생이라 불렀다. 역리(易理)에 밝았으며 특히 수학에 정밀하였다. 중종 때에 여러 번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끝내 집에서 작고하니, 후에 특별히 영의정의 벼슬을 증직하고, 시호를 문강(文康)이라 하였다. 어머니 한씨(韓氏)가 꿈에 공부자묘(孔夫子廟)에 들어갔다가 그 후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고 과단성이 있었다.
학문에 뜻을 둘 나이가 되어(15세를 말함) 이웃집 유생한테서 『서전(書傳)』을 강의받다가 기삼백(朞三百)의 주석(기(朞) 삼백유육순유육일(三百有六旬有六日) 「요전(堯典)」)에 이르러 선생이 책을 덮고 그 장(張)을 넘어서 지나가자 공(公)이 그 이유를 물으니, 선생이, ‘본래 모르는 대목이고 나도 배우지 않았으며 세상 사람이 다 읽지 않는다.’ 하였다. 공이 이상하게 여기고 물러나서 곰곰이 15일을 생각하고 읽고 외기를 몇천 번 하니 자연히 뜻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글이란 생각하여 알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공의 천성은 효성이 지극하여 상주가 되어서는 『예기(禮記)』를 읽다가, ‘처음 죽어서는 황급하다.’는 구절에 이르러서는 여러 번 반복하며 눈물을 흘렸다.
평생 남에게 모난 행동을 싫어하여 이웃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종일 이야기하고 웃고 하여 보통 사람보다 다른 점을 볼 수 없었다. 집은 지극히 빈한하여 혹 며칠 밥을 짓지 않아도 태연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그 덕망에 교화되어 서로 다투는 일이 있으면 관부(官府)에 가지 않고 선생한테 와서 판결을 받았었다. 기묘년 천과(薦科)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신묘년에 어머니의 명령으로 서울에 가서 사마(司馬)가 되어 돌아와, 후릉(厚陵, 정종과 그 비의 능) 참봉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나이 58세에 죽었다
(唐津人(당진인) 字可久(자가구) 自號復齋(자호부재) 嘗隱居花潭(상은거화담) 不求聞達(불구문달) 學者稱爲花潭先生(학자칭위화담선생) 明於易理(명어역리) 而數學尤精(이수학우정) 我中廟累召不起(아중묘루소불기) 終於家(종어가) 後特贈領議政(후특증령의정) 謚文康(익문강) 母韓氏(모한씨) 嘗夢入夫子廟(상몽입부자묘) 生公(생공) 自幼聰明英果(자유총명영과) 年近志學(년근지학) 授書傳於隣儒(수서전어린유) 至朞三百註(지기삼백주) 其師便掩卷踰張而去(기사편엄권유장이거) 公問其故(공문기고) 其師曰(기사왈) 本不知處(본부지처) 吾所不學(오소불학) 世人皆不讀(세인개부독) 公怪而退來(공괴이퇴래) 精思十五日(정사십오일) 讀誦幾千遍(독송기천편) 自然通曉(자연통효) 乃知書之可以思得也(내지서지가이사득야) 公天性至孝(공천성지효) 居憂讀禮記(거우독례기) 至始死皇皇等語(지시사황황등어) 未嘗不三復流涕(미상불삼부류체) 平生惡崖異之行(평생악애이지행) 與隣人處(여린인처) 終日言笑(종일언소) 未見有異也(미견유이야) 家至貧(가지빈) 或連日不炊(혹련일불취) 而常晏如(이상안여) 鄕隣化其德(향린화기덕) 有爭辨(유쟁변) 則不至官府(칙부지관부) 而來咨決焉(이래자결언) 己卯薦科(기묘천과) 辭不赴(사불부) 辛卯以母氏之命(신묘이모씨지명) 到京師(도경사) 得司馬而歸(득사마이귀) 除厚陵參奉(제후릉참봉) 不起(불기) 年五十八卒(년오십팔졸)).”
〈주석〉
〖瀟〗 맑다 소, 〖洒〗 물 뿌리다 쇄, 〖簇〗 모이다 족, 〖咽〗 목메다 열, 〖淡蕩(담탕)〗 물이 돌아 천천히 흐르는 모양. 〖僻〗 후미지다 벽, 〖扶疏(부소)〗 가지와 잎이 무성한 모양.
각주
1 서경덕(徐敬德, 1489, 성종 20~1546, 명종 1):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부재(復齋)·화담(花潭). 그의 집안은 양반에 속했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무반 계통의 하급관리를 지냈을 뿐, 남의 땅을 부쳐 먹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18세에 『대학』을 읽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장에 이르러 “학문을 하면서 사물의 이치를 파고들지 않는다면 글을 읽어 어디에 쓰겠는가?”라고 하여, 독서보다 격물이 우선임을 깨달아 침식을 잊을 정도로 그 이치를 연구하는 데 몰두했다. 이 때문에 건강을 해쳐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영남·호남 지방을 유람하고 돌아왔다.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되었으나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다시 속리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구경하고, 기행시 몇 편을 남겼다. 그는 당시 많은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의 명으로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벼슬길에는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면서 성리학 연구에 전력했다. 이 해에 병이 깊어지자, “성현들의 말에 대하여 이미 선배들의 주석이 있는 것을 다시 거듭 말할 필요가 없고 아직 해명되지 못한 것은 글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이제 병이 이처럼 중해졌으니 나의 말을 남기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고 하면서 「원리기(原理氣)」·「이기설(理氣說)」 등을 저술했다. 그의 문하에서 박순(朴淳)·허엽(許曄)·이지함(李之菡) 등 많은 학자·관인들이 배출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한국 유학사상 본격적인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독자적인 기철학(氣哲學)의 체계를 완성했으며, 당시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가 전하며, 박연폭포·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