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두려움은 유령이나 마귀의 이야기로 악화되어온 것처럼, 죽음의 두려움은 무지한 상상력에 의해 사람 안에 자리잡아 왔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모든 육체적인 몸의 필요한 종식으로 죽음을 생각하고, 미묘한 아스트랄 몸으로 보다 더 자유롭게 존재하는 것을 기대함으로서 위안받아야 합니다.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의 진정한 본성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거기 두려워할 아무 것도 없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혼은 생명과 지성의 물결을 지니고 몸의 육체적인 물결에 애착해 성장하며, 문이 열려있지만 오래 새장에 길들여져 그것을 떠나기를 두려워하는 새처럼 몸을 떠나기를 두려워합니다. 새장에 대한 새의 확신은 새로 하여금 열린 하늘로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을 잊게 만들어왔습니다. 새는 생각합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 걸까? 저 넘어에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를 새장에 있게 해줘.” 비슷하게 제한한 한계에서 보다 덜 제한된 상태로 변화되기 위해 죽음이 올 때에도 한계와 질병, 그리고 몸의 연약함에 갇힌 혼은 안전하고 무한한 천상의 신의 영역을 두려워합니다.
몸의 무게와 느낌, 감각적 쾌락, 햇빛, 친구의 목소리, 가족의 유대, 따뜻함이나 시원함을 좋아하는 것, 생명을 위한 산소에 대한 의존, 음식 옷 자동차 가구 집에 대한 사랑--이런 것들은 혼을 몸에 묶는 생명의 공통의 애착입니다.
청년이 될 때 어린 시절은 죽습니다. 유사하게 나이든 사람이 죽을 때 그는 그저 또 다른 존재 상태로 변화한 것입니다. 만일 생명이 바르게 살아왔다면 죽음은 보다 나은 상태로 가는 보상이자 변화입니다. 몇몇은 건강실패나 그들 자신의 잘못된 삶의 방식의 결과의 희생으로 생명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런 실패일지라도 혼에 대한 영원한 오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먼알 그가 정확한 학교선생인 죽음에 의해 이 곳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면, 그 개개인은 또 다른 삶의 학교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