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당시 유대인 박해및 학살의 진상
첫째 - 1차대전직후까지 독일은 유대인에 대해 관대했다
유태인 박해는 다른 유럽국가들이 심했으며 독일은 오히려 관대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태인들이 2차대전 전에는 독일에 가장 많이 거주 했습니다 그리고 독일계 유태인 금융제벌인 막스바르부르크는 히틀러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걸로 유명합니다
둘째 - 독일은 유태인들에 대해 차별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독일 유태인들은 다른 유럽국에 비해 출세나 사업을 하기 쉬웠고 이들은 학계, 법조계, 의학계, 금융계, 언론계등 독일사회 전분야를 장악할수 있었지만 유태인들은 독일사회와 화합하려 하지 않았고 나중에 독일 국민들의 반감을 사게 되는 원인이된다(1992년 LA폭동때 빈민폭도들이 자수성가한 한인교포들에게 적개심을 품고 약탈한것과, 인도네시아 폭동때 짱골라교포들이 원주민들에게 당한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셋째 - 독일은 유태인의 독립국가 형성에 신경을 썼다
1933~1941년 까지 독일은 유태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독일의 밀텐슈타인이 유대인이주를 하인리히 히믈러 SS사령관은 시온주의자의 대아랍 지하군사 조직인 '하가나'의 활동을 도왔다), 1942년 요제프 괴밸스의 본격적인 유태인박해 주장이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히틀러는 유태인 학살 보다는 그들을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섬으로 보내 그들만의 국가를 형성시키고 나중에 독일의 우방으로 삶으려 했다. 그리고 미국에 제안가지 했다.
(그러나 국제 유대인 협회의 강력한 압력으로 미국의 루즈벨트는 거부하게 된다..)
넷째 - 독일의 등뒤에 칼을 꽃은 유태인
독일이 친영국 성향의 유태인들을 국외로 추방하려하자 당시 독일의 경제를 잡고 있던 유태인들은 독일을 굴복시키기위해 독일의 수출을 분쇄시키고 전세계적인 독일상품 불매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활동을 신성한 전쟁이라고 하면서 세계 유태인경제 연합회 회장인 운터마이어가 앞장을 선다 뿐만아니라 전쟁중에 일부 유태인이 연합군과 결탁하여 연합군의 폭격을 유도하는 신호등을 장착하는 등의 밀정행위를 하자 히틀러는 모든 유태인을 소용소에 강금 시킨다
이쯤되면 유대인의 행위는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며 국가반역죄는 어느나라에서나 사형에 해당 됩니다
다섯째 - 그러나 결국 사고가 터지고 만다.
시온의 칙훈서(유태인의 세계경영지침서)가 발견되어 알려지고, 공산당활동에 유태인들의 간접협조한 혐의와, 1936년 프랑스주체 독일 외교관을 암살하자 반유대감정으로 독일이 들끓기 시작했고 크리스탈학살 사건으로 유태인의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더이상의 피해를 막기위해 유태인이 학살당하지 않도록 2만명의 유태인을 강제로 수용소에서 수용하게 된다
좀더 덧붙여서 말하자면 독일을 패하게 만든 세계 1차대전의 배후에는 바질 자하로프라는 유대인 전쟁무기상인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영국의 군수제벌인 빅커스사의 영업이사로써 친독적인 그리스 국왕을 추방하여 세계대전의 장기화를 획책했다고 합니다
특히 독일의 군사기밀을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으로 빼돌린 사실 하나 만으로도 독일이 유대인을 증오할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영국군이 사용한 수류탄은 독일의 기술로 만들어진 수류탄으로써 이 성능좋은 독일제 수류탄이 독일군을 죽이는 촌극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여섯째 - 유태인 600만 학살은 조작 확대된 것이다.
실제로는 60만정도이며 그것도 연합군의 무차별 폭격과 전염병(더이상의 전염병 확산 방지를 위해 시체들을 소각하게 된다)으로 사망한 사람이 대다수이다 25(7.6평)평방미터 되는 곳에 7~800명을 집어넣고 독가스로 죽였다는데, 실제론 그런 계산이 안나옴니다, 그리고 관광객들에게 전시되는 아우슈비츠 가스실과 소각로는 1946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스탈린의 소련군 또한 폴란드 유태인을 많이 죽였으며 나중에 이것마저 독일의 만행으로 뒤집어 쓰게 된다
일곱째 - 나치 독일에는 과연 살인공장이 활성화 되있었을까??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간수들의 증언은 대부분 살인공장이 그정도로 활성화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여덟째 - 과연 나치의 독가스실은 사용이 되었을까??
독가스로 사용된 체클론 B는 실제로 투여 이후 독이 빠지고 중화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독가스실은 1946년에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아홉째 - 식량도 주지 않았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식량보다 비싼 연료를 공급해 화장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이 발지 전투나 부다베스트 포위전 같은 막판 뒤집기 작전에서 연료 부족으로 작전이 실패하였다..
나치가 식량을 유대인에게 안줬다면, 왜 식량보다 비싸고 그 당시 전쟁에 쓰기도 부족한 연료를 왜 유대인의
시체를 태우는데 사용했을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600만이라고 과장된걸 그대로 밀여붙이는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겠지요.
실제로 유대인 대학살이 과장되었다는 건 독일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게서 쏟아지는 말이니까..
희생자 수
기존에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약 400만명이며 이 중에서 약 250만명이 유대인이라고 알려져왔다. 처음에 이 수용소를 해방한 옛 소련군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 숫자에 대한 반론도 있다. "과장되고 꾸며낸 얘기가 많다"는 제목으로 씌여진 뉴스위크지 1995년 1월 18일 자의 기사[1] 에 의하면, 아우슈비츠에서 죽은 사람은 유대인을 포함하여 110만 ~ 150만명으로 추산했으며, 가장 많은 희생자가 유태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정확하게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유태인 외에 나머지 희생자들은 폴란드 정치범, 옛 소련군 포로(주로 정치장교), 집시 등이었다. 이어 2005년 아우슈비츠 해방 60주년 행사를 알리는 기사에서는 유태인 희생자 수를 100만명으로 쓰고 있다.
195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1000만명
196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800만명
197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700만명
196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600만명
197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500만명
198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450만명
199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400만명
2000년 대 유대인의 주장과 증언 - 100만명
이걸 봅시다.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던 숫자가
400만에서 110-150만으로 고쳐졌습니다.
그뿐만 아니죠. 그중에 유대인들이 얼마나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수가 없지요.
기존에서는 유대인들이 250만이 죽었는데 100만명으로 고쳐졌지요.
결국 600만에서 150만을 뺍시다. 그러면 450만명으로 줄어들겠지요?
그리고 아우슈비츠 외 다른 유대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과장된것은 100% 사실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전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희생자를 800만으로 주장했다가 800만은 무리이다 싶어서 600만으로 수정했지요.
이제는 600만명에서 450만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http://cafe.daum.net/119119so/1qMd/2025?q=%EB%82%98%EC%B9%98%ED%9E%88%ED%8B%80%EB%9F%AC%20%EC%9C%A0%EB%8C%80%EC%9D%B8%EC%9D%84%20%EC%99%9C%ED%95%99%EC%82%B4%ED%96%88%EB%82%98%EC%9A%94
첫댓글 가능한 한 옷을 잘 입어라.
외모는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할인점 가서
열 벌 살 돈으로 좋은 옷 한 벌 사 입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