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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감리교 공동선교전략협의회와 제20대 표용은 감독회장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20회 총회가 ‘하나 되어 평화를’이란 주제로 1992년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금란교회에서 개최되었다. 감리교신학대학교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에 대해서 ‘출교’라는 최고의 징계가 내려진 종교재판의 결과 때문에 감리회는 심한 후유증으로 앓고 있었다. 총회장 밖에는 이에 반대하는 진보성향의 목회자와 신학생들의 시위로 시끄러웠다. 그런 중에 개최된 제20회 총회는 정상적으로 회무를 처리했고 예정대로 7개 연회는 선거를 통하여 각각 연회 감독을 선출했다. 서울연회는 표용은 목사가, 서울남연회는 이종수 목사가, 중부연회는 고용봉 목사가, 경기연회는 최기순 목사가, 동부연회는 이석희 목사가, 남부연회는 박철규 목사가, 삼남연회는 구동태 목사가 각각 선출되었으며 감리교를 대표할 감독회장은 총 투표수 828표 중에 433표를 얻은 표용은 감독이 맡게 되었다.
표용은(表用垠) 감독회장은 1933년 1월 11일 충청북도 제원군 수산면 수산리 578번지에서 태어났다. 1955년 감리교 학교인 공주영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감리교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1960년 9월부터 서울 서대문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은퇴할 때까지 평생 한 교회만 담임한 ‘특이한 목회경력’을 가졌다. 1964년 2월 12일~15일에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3회 중부연회에서 이환신(李桓信)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1년 1월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 및 부회장을 1993년까지 맡았다. 1972년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이사를 2년 간 역임했다. 1976년 12월에 호주 시드니 기독교연수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77년 서울남지방 감리사, 1977년 기독교방송 이사, 1980년 한국기독교사회봉사회 이사장, 1982년 학교법인 승리학원 이사장, 1982년 감리회 유지재단 이사, 1984년 기독교방송 이사장, 1985년 학교법인 영명학원 이사, 1988년 한국 YMCA 전국연맹 이사장, 1988년 서울 YMCA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미국 하와이 로아대학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그해 10월 28일~29일 금란교회에서 개최된 제20회 총회에서 당선되어 제7대 서울연회 감독, 제19대 감독회장 및 감리회유지재단 이사장 역임하였다. 표용은 감독의 감독회장 당선으로 서울연회 감독이 감독회장 직을 겸하여 수행하는 체제가 회복되었다. 이로써 표용은 감독회장은 서울연회만이 아니라 전체 한국 감리교회를 화합과 일치라는 무거운 과제를 풀어가는 것으로 감독의 업무가 시작되었다. 그는 감독회장 취임사에서 밝힌 것을 보면 이 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려고 했다.
첫째, 화해와 평화의 대도를 함께 나갑시다.
둘째, 교단 중심의 감리교적 신앙의 뜨거운 불길을 붙여 나갑시다.
셋째, 민족의 사회와 역사 앞에서 책임적인 교회가 되며 겨레의 가슴 깊이 신앙의 등불을 밝혀 나갑시다..
넷째, 세계의 형제 교단들과 연대하고 연합해 나갑시다.
표용은 감독회장은 감리교단이 추진하고 있는 7천 교회 2백만 신도 운동의 지속적인 전개와 사화의 소외 계층을 위한 봉사활동,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과 세계 교회와 연대를 연회의 선교적 과제로 지시하였다. 1990년대 ‘민주화’시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계층 간, 지역 간 사회적 갈등에다가 종교재판 이후 교회 내부에 생긴 깊은 상처 등의 우울한 현실에서 표용은 감독은 미래지향적인 선교비전을 제시하였다.
특히 표용은 감독회장은 한국감리교회 역사서를 출판하는 업적을 남겼다. 유동식 교수에게 집필을 의뢰하였고 한국선교 109년인 1992년 10월 20일에 발간된 《한국감리교회 역사》(1884~1992)Ⅰ권 ․ Ⅱ권이다. 이는 표용은 감독회장이 한국감리교회 역사 편찬에 중요한 공헌을 남긴 것으로 기록될만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표용은 감독회장은 재임 시 1993년 학교법인 감리교신학대학교 이사장, 세계감리교회 실행위원을 맡았다. 감독 임기를 마친 후에도 1994년부터 2003년까지 기독교방송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1997년 국무총리실 청소년 보호위원, 1999년 학교법인 감리교 영명학원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표용은 감독은 2003년 4월 22일~23일까지 임마누엘교회에서 개최된 제23회 서울연회(김진호 감독)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또한 서울 YMCA 명예이사장으로 있다.
“세상은 밝게 살며, 마음은 넓게 갖고, 희망은 크게 품자”라는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온 표용은 감독은 《진리 위에 세운 삶》(샘서운, 1991), 《와서 조반을 먹어라》(공저, 교음사, 1992) 저서를 남겼다.
표용은 감독은 제13회 서울연회(1993년 3월 12~13일, 정동제일교회 개최), 제14회 서울연회(1994년 3월 8일~10일, 정동제일교회 개최)를 인도하였다. 또한 제20회 총회 특별총회(1993년 10월 25일~27일, 광림교회 개최), 제21회 총회(1994년 10월 25일~27일, 광림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이종수(李鍾秀 호 海岩) 감독은 1932년 10월 7일에 충남 예산에서 출생하였다. 예산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신학대학을 입학했다. 그 후 감리교신학대학 선교대학원, 감리교신학대학 박사원을 졸업하여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종수 목사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 진로에 대해서 고민했다. 그의 부모와 이화대학의 모 교수가 정치학을 권유했지만 이종수는 한국전쟁 당시 기적으로 죽음에서 살아 돌아오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 때문에 목회자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1957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그해 5월 4일 육군 군목 제11기로 임관하여 군복무를 했다. 1958년 군복무 당시 제6군단 참모총장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군목 전역하고 이태원교회와 광염교회에서 목회했다. 감리교 총리원 선교국 선교정책 간사로 있으면서 1970년 한국기독교 구라회 회장 및 이사장을 역임했고 1972년 감리교 부흥단 창단에 일조했다. 그 후 1974년 6월 창영교회 제11대 담임자로 부임했는데 당시 창영교회는 동인천교회 분립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게다가 성전 신축을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교회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목사의 리더십에 교회 분규와 신축 문제가 잘 마무리되었다. 1975년 영화학원 이사 및 이사장을, 1977년 중부연회 부흥단장을 맡았다. 이때 인천 도시산업선교 이사장도 겸임했다.
창영교회에서 목회를 잘 마무리하고 그는 서울로 목회지를 옮겼다. 1979년 서울 응암교회, 1985년 감람교회에 부임했다. 서울강남지방 감리사를 역임했다. 1987년 감리회 부흥단장을, 1989년 감리교남선교회장을 역임했다. 그러던 중 1992년 10월 금란교회에서 개최된 제20회 총회에서 서울남연회 제2대 감독에 당선되었다. 이종수 감독은 취임사에서 늘 새롭게 갱신, 개혁하는 교회, 뜨겁게 역사하는 교회, 가득하게 운동하는 교회를 전개하겠다고 밝혔다.이종수 감독은 재임기간 동안 94년 아시아지역감독회의가 1994년 3월 3일부터 4일까지 서울 북악파크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총 10개국에서 27명의 감독과 대표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각국 선교의 어려움과 연대성을 협의하였고 한국감리교회와 유대감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특히 선교지 상황과 문화에 대한 이해 가운데 협력하여 복음을 전하고 한국의 노동자 선교를 위해 연구하고 검토하는 시간을 가졌다.
감독의 임기를 마치고 이종수 감독은 1994년 태평양선교회장, 감리교신학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1995년 대치교회 부임했다. “마음은 넓게, 삶은 즐겁게, 일은 진실하게, 믿음은 끈기 있게”라는 좌우명을 가진 이종수 감독은 제4회 서울남연회(1993년 3월 17~19일, 광림교회 개최), 제5회 서울남연회(1994년 3월 16일~18일, 광림교회 개최)를 인도하였다.
고용봉(高龍鳳, 호 望月) 감독은 1929년 3월 24일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 망월리에서 아버지 고수명과 어머니 김순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9년 8월에 수도사단(현 맹호부대) 창설멤버로 입대, 1950년 한국전쟁 참전하였다. 1951년 간석지구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해 병원에 입원 치료받던 중 그해 윤창덕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1952년 2등 상사 계급을 받고 국가 유공자로 명예전역을 했다. 1953년 고학으로 동북 통신 중․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감리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그는 이화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여 산유, 시동교회를 담임하였다. 1956년 감리교신학대학 졸업하고 1957년 동부연회 춘천지방 신남교회에 서리전도사로 파송받았다. 1961년 원천교회를 담임하던 중 1963년 3월 10일~12일까지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2회 동부연회에서 이환신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63년 철원 향로교회, 1965년 3월 16일~22일까지 배화강당에서 개최된 제24회 동부연회에서 정원원에 허입했다. 1965년 호렙선교회 회장을 역임했다.
1967년 중부연회 인천동지방 도화교회 파송을 받고 목회했으며 1971년 7월 1일 소사중앙교회를 개척하였다. 당시 고용봉 목사는 서울 시온교회 윤장근 장로와 함께 강원도 인제에 교회를 개척하고 건축하였으나 소양강댐 공사로 교회가 침수되었다. 고용봉 목사는 그 보상금으로 1971년 7월 1일 소사중앙교회를 개척하였다. 1대 담임자로 박영준 목사가 부임했지만 그가 1976년에 사임하는 바람에 고용봉 목사가 제2대 담임자로 부임하고 1995년에 은퇴할 때까지 담임했다.
1970년 전상용사 복음선교회 회장, 1971년 소사중앙교회(현 부천기둥교회)를 개척하여 1995년 중부연회에서 자원 은퇴할 때까지 목회하였다. 1972년에 서울누가교회, 성산교회도 개척하였다. 1978년 서울신학대학 목회대학원 졸업, 1981년 중부연회부흥단장, 1983년 감리회전국부흥단장, 1987년 한국기독교구라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2년 제20회 총회에서 중부연회 제21대 감독에 당선되었고 동시에 서부연회 감독직도 겸임하였다. 1992년 감리교신학대학 이사, 1993년 한국성서공회 이사로 활동하였다. 1994년 미국 훼이스루터란 신학대학원에서 명예인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중부연회에서 자원 은퇴하고 부흥회인도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부끄럽지 않은 삶, 강하고 담대한 삶, 주님만 존귀케 하는 삶”(빌 1:20)이란 좌우명을 가지고 평생 살아온 고용봉 감독은 다음과 같은 상훈을 받았다. 1950년 대한민국 대통령표창, 1952년 대한민국 육군상이용사 훈장, 1951년 내무부장과 표창, 1984년 보훈처장 표창, 1986년 대한민국 국가유공자 기장을 수상했다. 또한 그가 남긴 저서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1982년), 《승리의 삶》(1986년), 《기회는 지금이다》(1986년), 《제일 행복한 사람》(1989년), 《즐거운 삶을 살자》(1989년), 《뜨겁게 믿고 기쁘게 살자》(1991년), 《새벽에 도우시리라》(1992년) 등이다. 교재자료집으로는 《축복받으는 믿음》(1977년), 《교회생활》(1980년), 《구원과 중생》(1987년), 《신앙실천집》(1991년) 외 17권이 있다.
고용봉 감독은 감독 재임 시 제52회 중부연회(1993년 3월 22~24일, 계산중앙교회 개최), 제53회 중부연회(1994년 3월 14일~16일, 숭의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또한 고용봉 감독은 제20회 총회에서 정식으로 재건된 서부연회 제2대 관리감독직도 수행하게 되어 1994년 5월 9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제2차 재건 제1회 서부연회를 주관하고 12개 지방 감리사를 임명했으며 본격적인 평화통일 북한선교에 나서게 되었다.
최기순(崔起淳) 감독은 1938년 12월 2일 충청남도 천안군 성환읍 도하리 537번지에서 출생하였다. 1965년 감리교대전신학대학 신학과를 졸업했으며 목회는 1964년 아산 모산교회에서 시작하여 1966년 천안 봉암교회를 담임했다. 1969년 3월 5일~7일까지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5회 남부연회에서 변홍규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1년 3월 10일~12일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7회 남부연회에서 정회원에 허입했다. 1973년부터 개봉교회를 담임한 이후 1976년 감리교신학대학 선교대학원,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필리핀 크리스천 유니온 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1992년 10월 제20회 총회에서 경기연회 제2대 감독에 당선되었다. 또한 총회는 국외선교연회의 업무를 경기연회가 맡기도록 인준하여 최기순 감독은 국외선교연회 초대 관리감독을 겸하게 되었다.
“너희는 먼저”라는 좌우명을 가진 최기순 감독은 제4회 경기연회(1993년 3월 30일~4월 1일, 여주중앙교회 개최), 제5회 경기연회(1994년 3월 22일~24일, 평택제일교회 개최)를 이끌었다. 또한 제1회 국외선교연회를 1993년 4월 1일부터 2일까지 창전교회에서 개최하고 제2회 국외선교연회는 1994년 4월 5~6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 나성 한인교회에서 개최하였다.
이석희(李錫熹, 호 德水) 감독은 1929년 4월 9일 황해도 옹진군 용연면 봉황리 촉봉동 809번지에서 아버지 이종훈(李種薰)과 어머니 김음전(金音全)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7년 중앙신학교(현 강남대학교)를 졸업하고 1957년 충북지방 고암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1959년 제천봉양교회를 목회하던 중 1962년 감리교 대전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63년 제천지방 봉평교회(평창군 봉평면 소재)를 담임하고 1964년 2월 1일~8일 동대문교회에서 개최된 제23회 동부연회에서 이환신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았다. 1966년 3월 30일~4월 3일까지 동대문교회에서 개최된 제25회 동부연회에서 정회원에 허입했다. 1970년 성동지방 상대원교회를 개척하고 성전을 건축하였다. 1971년 제천지방 매포교회를 담임하면서 1975년 제천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1979년 청주에덴교회를 담임하고 1980년부터 청주지방 감리사를 6회(1983년, 1984년, 1985년, 1989년, 1992년) 역임하였다. 1981년 총회재판위원, 1982년 청주경찰서경목실장, 1985년 동부연회 부흥단장, 청주시 기독교연합회장, 동부연회 목원대학 동문회장, 한국 기독교 선교 100주년대회 충북․청주지역 준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86년 청주제일교회를 담임하고 1988년 본부 선교국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90년 청주 NCC회장을 맡았으며 1992년 청주지방 감리사 재임 시 제9대 동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그는 감독 재임 시 7천 교회 2백만 신도 운동에 힘쓸 것과 성령 충만한 연회와 교단, 화합하는 감리교회를 만들어갈 것을 다짐했다. 특히 미래지향적인 연회와 교단 행정을 위해 과감한 제도 개혁을 천명하여 동부연회 표어를 “민족과 세계를 영도할 감리교 동부연회”라고 정하여 매진하였다.
1993년 감리회연수원개발 위원장, 기독교방송이사, 동부연회신학원장, 감리교신학대학이사, 1994년 사회복지법인 한국선명회 충북․청주지회장, 동부연회 신학원 이사장, 1999년 충북연회 신학원 이사장, 기독교 충북 선교 100주년 상임회장을 역임하였다. 2000년 3월 13일~14일에 충주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2회 충북연회(김기웅 감독)에서 43년의 목회를 마감하고 은퇴했다. 청주에덴교회 원로목사가 되어 김계자 사모와 함께 청주시 흥덕구 산남동에 거주했다. 은퇴 후 2006년 3월에 충북 기독교 청소년협회 지도고문으로 활동했다.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좌우명으로 삼고 평생 살아온 이석희 감독은 목원을 빛낸 공로패(1997), 감독공로패(1990), 청주방송 공로패(1995), 경찰청장 공로패(1991, 1998)를 수상했다. 또한 《구원의 길》(1991), 《청주제일감리교회 40년사》(1997) 등 저서를 남겼다. 그가 감독 재임 시 제44회 동부연회(1993년 3월 31일~4월 2일, 강릉중앙교회 개최), 제45회 동부연회(1994년 3월 21일~23일, 충주제일교회 개최)를 주재했다.
박철규(朴哲圭) 감독은 1934년 9월 13일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동성리 237번지에서 태어났다. 1954년 예산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 고향에 천막으로 교회 개척을 시작하여 임시 설교자로 일하였다. 1958년 충서지방 지방회에서 지방전도사 시험에 합격하여 1959년 충서지방 입침교회 전도사로 파송받고 1963년 감리교 대전신학교를 졸업했다. 1963년에 대전 소망교회를 담임했다. 1966년 3월 16일~20일까지 대전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남부연회에서 이환신 감독에게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1년 총리원 선교국 간사로 일했다.
1974년부터 1992년까지 남부연회 총무로 6회 연임을 하며 연회 업무를 수행했다. 1976년에 감리교신학대학 선교대학원을 졸업하고 1980년 대전 도마동교회(현재 충남제일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1983년 목원대학 강사, 1989년 사회복지법인 감리교 사회복지재단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92년 10월 28일~29일 금란교회에서 개최된 제20회 총회에서 제9대 남부연회 감독에 당선되었다. 재단법인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 이사, 1993년 학교법인 감리교신학대학교 재단이사로 일했다. 1993년 대전동산교회를 담임하고 1994년 미국 패시픽 림 신학교(Pacific Rim Graduate School of Theology)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 대전 한남제일교회를 개척 설립하였다. 1999년 목원대학 재단이사로 있다가 2005년 4월 18일~19일까지 충남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51회 남부연회(곽성영 감독)에서 정년 은퇴하였다.
“문제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해답도 있다”는 좌우명을 가진 박철규 감독은 감리교 대전신학교를 졸업할 때 최우수상(이호운 교장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남부연회 모범교역자상(김영배 연회장, 1970), 연회직무 모범상(김창희 감독, 1976년), 남부신학교 설립공로상(김순경 감독, 1978), 연회총무 모범직무수행상(남부연회 감리사, 1983), 헌신적 직무수행 감사패(남부연회 여교역자회, 1986), 연회회관 건축공로패(이종주 감독, 1990), 목원을 빛낸 동문패(동문회장, 1997), 연회발전 공로패(곽성영 감독, 2005)를 수상했다. 그는 남부신학교 설립추진 및 준비 본부인가, 지상 5층, 지하 1층, 총 685평 규모의 연회회관 건립 계획 추진하고 완공했으며 남부연회 교회 연감 발간, 남부연회 상조은행 설립하고 남부연회 장학재단 기금을 확보하는 등 여러 공적을 남겼다.
감독 재임 시 박철규 감독은 제39회 남부연회(1993년 3월 24일∼26일, 대전선화교회 개최)와 제40회 남부연회(1994년 3월 23일∼25일, 대전선화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구동태(具東泰) 감독은 1943년 10월 17일에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마산리에서 태어났다. 1961년 마산 창신고등학교, 1964년 감리교대전신학대학을 졸업하였다. 마산남지교회를 담임하고 1968년 마산합성교회에 부임하여 이 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평생 목회했다. 1971년 삼남선교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71년 마산 YMCA 이사, 1977년 부산 연합신학대학원 수료, 1979년 마산지방 감리사를 역임하였다. 1992년 10월에 금란교회에서 개최된 제20회 총회에서 삼남연회 제7대 감독에 선임되었다. 구동태 감독은 연회 회관 건립과 해외선교의 확장, 연회 내에 신학교 설립을 밝히고 미자립교회의 후원과 교회 개척에 힘쓸 것을 다짐하였다.
그 후 목원대학 총동문회장, 경남교회협의회 회장, 기독교방송 이사장, 경상남도 경찰청 경목실장을 역임하였다. 미국 인디아나주 트리니티 신학대학에서 목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구동태 감독은 2014년 4월 23일~24일 마산합성교회에서 개최된 제23히 삼남연회(석준모 감독)에서 정년 은퇴하여 아내 김혜숙 사모와 마산에 거주하고 있다.
“성경대로 살자”는 좌우명을 가진 구동태 감독은 합성교회 부흥, 중국, 방글라데시, 필리핀, 태국 등 해외선교에 꾸준히 지원하였으며 국내에도 구미은혜교회, 성사교회, 칠현교회, 웅남교회, 금포교회, 권혜교회를 개척 설립했다. 군선교와 경찰선교에도 관여하고 CBS경남방송 설립에 공로를 세웠다.
또한 다수의 설교집을 출간했다. 《제1권 예수를 따라나선 사람》, 《제2권, 충성된 사람에게》, 《제3권 좋은 편을 택한 사람》, 《제4권 작은 씨 큰 나무, 《제5권 변화된 이름으로 살자, 《제6권 안식과 희년, 《제7권 먼저 쓴 글과 앞으로 쓴 글, 《제8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한 사람》, 《제9권 감사하는 목소리로》, 《제10권 너 하나님의 사람아》, 《제11권 예수님의 가족은》, 《제12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제13권 끗을 정한 다니엘》, 《제14권 마땅한 일》, 《제15권 갑절로 좋은 세상》, 《제16권 하늘이 열리는 날》 등이 있다.
구동태 감독은 감독 재임 시 제13회 삼남연회(1993년 3월 16일~18일, 부산부암교회 개최)와 제14회 삼남연회(1994년 3월 15일∼17일, 대구제일교회 개최)를 주재하였다.
제20회 총회 감독들이 이끄는 감리교회는 다음 같은 강조점을 두고 감리회를 이끌었다. 첫째, 화해와 평화의 대도로 나아간다. 둘째, 감리교적 뜨거운 신앙의 불길을 회복한다. 셋째, 민족과 사회의 역사 앞에 책임지는 감리교회가 된다. 넷째, 세계 형제 교단들과 연대하여 연합한다.
특히 한미감리교 공동선교 전략협의회가 1994년 5월 23일, 24일에 뉴욕 홀리데인 호텔에서 개최되었는데 한미 양 교회가 21세기에 실천해야 할 세계 선교문제의 현안에 대하여 상호공조 협력 관계를 모색하여 21세기 협조적인 동반자적 관계에서 협력할 것을 다지기도 했다. 그리고 1994년 8월 30일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 하야트 리전시에서 감리교 세계 선교사 대회를 열고 ‘세계는 우리의 교구’라는 주제로 세계 감리교 한인 선교사들의 우호와 친교의 장을 마련하였다.
표용은 감독회장(서울연회)
이종수 감독(서울남연회)
고용봉 감독(중부연회)
최기순 감독(경기연회)
이석희 감독(동부연회)
박철규 감독(남부연회)
구동태 감독(삼남연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