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밴스’는 폴랑드르 바로크의 대표 화가로 독일에서 출생했지만 ‘벨기에’에서 활동하였다, 운동감과 강한 명암 대비를 즐겨 표현했다. 폴랑드르 화가답게 색채 표현에 능숙하고 사물을 마치 진짜처럼 정확하고 생생하게 그렸다. 루밴스는 궁정 화가로 일하며 수많은 종교화를 그렸는데 (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벨기에 성모마리아 성당 소장)로 전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예수의 몸이 죽은 사람처럼 한쪽으로 기울었고, 하늘은 검게, 예수는 환하게 표현한 명암 대비와 대각선 구도, 감정을 자극하는 비극적 주제에서 바로크 미술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다. ‘프란더스의 개’라는 만화 동화에서 화가를 꿈꾸던 가난한 소년 ‘레오’가 죽기 직전까지 간절히 보고 싶었던 그림으로도 유명하다.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로 30년 동안 궁정 화가로 일하며 왕족을 그렸지만 위엄있고 아름다운 왕족이 아닌 자신의 눈에 보이는 왕족을 그렸다. 그의 그림 속의 미묘한 빛의 효과는 19세기 인상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궁전의 시녀들)
‘렘브란트’는 네델란드 바로크 미술의 대가로 100점의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자화상에서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지 않고 성실히 그린 통찰력을 볼 수 있다. 연극에서 사용되는 조명과 같은 명암 대비, 은근함이 느껴지는 ‘야간 순찰’ 자유로운 자세를 취한 인물들, 적절한 색채 사용으로 풍부한 감정 표현과 생생한 분위기가 압도적이다. 그 외 네델란드 ‘베르메르’ ‘진주 귀걸이를 한 여인‘ 이 있다. 베네치아에서 한 쪽 귀에 진주 귀걸이를 하면 창녀였다고 한다.
로코코양식 은 16세기. 부드럽고 섬세하고, 로맨틱함을 표현한 양식이다. 부르조아가 세상의 주인공으로 떠 오르며 귀족이 향유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대표화가 부세는 르네상스의 고전적 규범에서 변화를 시도하고 새로움을 추구하였다.
시뇨리아 광장 Signoria
피렌체 행정의 중심지, 지금은 시청, 베키오 궁전과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 예술인들의 작품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옥외 미술관이다..
메디치가문 the Medici family
은행가였던 그의 아들 ‘코지모’는 정치적으로 수완이 좋아 완전히 권력을 장악했으며 로렌초는 많은 지식인들을 돌봐 이 집안에서 2명의 교황이 선출되었다. 바로 레오네 10세, 클레벤스 7세다. 메디치가는 정치뿐만 아니라 당시 가장 권위가 있는 교황청까지 넘봤다. 메디치가는 3명의 교황과 2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하는 등 유럽 역사를 장식하더니 마침내 코사모 1세가 토스카나 대공 작위를 받고 피렌체를 다스리게 되었고, 이 가문의 막대한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은 1494-1559년 까지 66년 동안 8차에 걸친 프랑스 샤를 8세와 신성 로마제국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 와의 이탈리아 침공으로 안정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소국들의 세력균형이 깨지고 전란의 시기를 맞으면서 ‘사보나롤라’의 혁명으로 메디치가는 단절되었다. 코사모 3세에게는 두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세 자식 모두 후사를 보지 못해 대를 잇지 못했다. 장남 페르디난드는 방탕한 양성애자로 생식 능력을 잃었고, 차남 ‘장잔가스토’도 동성애자인 ‘줄리아노 타미’의 품에 파묻혀 살다가 알콜 중독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일한 장녀 딸 안나 마리아 루이사는 짤즈 선제후 ‘요한 벨헬름’과 결혼했지만, 남편에게 매독이 옮아 첫아이를 유산 후 임신하지 못했다. 1718년 코사모 3세는 후계자로 총명하고 모범적인 안나로 정했고, 메디치가 소장하고 있던 모든 예술품을 피렌체 밖으로 반출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 에 모든 미술품들은 메디치 가문이 기증한 것 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