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4:1~7 주의 이름으로 2021. 6. 2
1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 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이소서 3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셀라) 4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5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6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7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나이다
본문 1절을 봅니다. 하나님께 간구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을 다른 표현으로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주의 힘’입니다. 시란 같은 뜻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여 그 뜻을 더 풍성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여 달라는 말은 주의 힘으로 구원하여 주시고 주의 힘으로 변호하여 달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름이란 그 이름을 가진 분의 전 존재를 말하기에 그 이름을 가진 분이 어떤 분이냐에 따라 그 이름에 따른 힘이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그 계시를 주신 하나님께서 그 이름도 알려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스스로 계시는 자’입니다(출3:14).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기에 천지를 그 뜻대로 창조하시고 그 뜻을 이루어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내십니다. 그 언약대로 그 당시 세계 최고의 제국인 이집트에서 구원받아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에 들어왔습니다. 이 내용을 자손들에게 늘 전하라고 율법에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하나님의 이름을 늘 들어왔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봅니다. 다윗도 들어온 내용이기에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여 주시고 주의 힘으로 변호하여 달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 곧 주의 힘으로 구원하여 주신다면 우리는 어떤 구원을 생각하게 됩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쏟으신 능력, 홍해를 가르시고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능력, 만나와 메추라기를 광야에서 주시고, 요단강물을 끊으시고 약속의 땅을 주신 그 힘으로 구원하여 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다윗을 어떻게 구원하여 주십니까?
표제어를 봅니다. ‘다윗의 1)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 이 시편의 배경은 사무엘상 23:15~29절입니다. 이 배경 바로 앞의 내용인 23:1~14절부터 봅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 다니는 중에 그일라 사람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일라 사람들을 구하여야 할지를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구하라고 합니다.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울에게서 도망 다니기도 바쁜데 어떻게 블레셋을 치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블레셋 다윗의 손에 붙여주신다는 말씀을 믿고 그일라 사람들을 구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정보를 사울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이 성과 문이 있는 곳에 들어갔으니 포위하여 잡으려고 합니다. 이때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울이 자기를 잡으려고 그일라로 와서 이 성을 멸할지와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줄지를 물었습니다. 사울이 내려올 것이며 내려오면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줄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울이 그일라를 치려고 온다면 그일라 사람들은 다윗과 힘을 합하여 사울을 막아 내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블레셋에서 구원한 자에 대한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이 구원자를 사울에게 넘겨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그일라를 떠나 십 황무지로 들어갑니다.
사무엘상 23:15~29절을 보면, 다윗이 그일라를 떠나 십 황무지로 들어가니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이 그곳으로 왔다고 보고합니다. 그러자 사울이 내려와서 다윗을 잡으려고 합니다. 다윗은 이리저리 도망 다닙니다. 사울이 다윗을 포위하여 잡으려고 하자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블레셋 사람들이 쳐들어왔다고 하자 포위를 풀고 블레셋을 막기 위하여 떠납니다. 다윗은 다시 엔게디로 피신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 구원하여 달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힘으로 멋있게 다윗을 구원하여 주시면 안 됩니까?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방식이 왜 이렇습니까?
본문 1~3절을 봅니다. “봉독” 주의 이름으로 주의 힘으로 구원하여 주시고 나를 변호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낯선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들이 나의 생명을 수색하며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수색한다는 말이 다윗을 찾아내려고 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배신하는 겁니다. 심지어 그일라 성 사람들은 다윗을 통하여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위기에 처하면 다윗을 사울에게 넘겨주는 겁니다. 시편 52편에서 도엑을 보았습니다. 도엑은 에돔 사람이라서 다윗을 고발하였다고 할 수 있지만, 십 사람들은 유다 지파에 속한 사람들입니다(수15:24). 같은 지파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이유는 여호와가 눈앞에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 4~7절입니다. “봉독” 앞에서 살펴본 대로 다윗은 도망 다니는 신세입니다. 구원하여 준 사람들도 버리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고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신다고 말합니다.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낙헌제로 주께 제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주의 이름이 선하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주의 이름에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다고 하면서 참으로 주께서는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내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이 똑똑히 보게 하셨다고 합니다.
오늘 제목이 ‘주의 이름으로’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여 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주의 이름이 선하다고 합니다. 이런 고백이 왜 중요한가 하면 타락한 모든 인간은 자기 이름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선악과의 유혹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조차 이용하여 자기의 이름의 영광과 무궁함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바벨탑을 쌓을 때도 우리의 흩어짐을 면하고 우리의 이름을 내자고 합니다(창11:4). 그러므로 오늘도 세상의 모든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우리나라의 효도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입신양명(立身揚名)입니다. 입신양명이란 자기 뜻을 확립하고 이름을 드날린다는 뜻으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유명해짐을 말합니다. 요즈음도 곳곳에 현수막이 붙는 것을 보면 출세하거나 무슨 시험에 합격한 자의 이름과 그 부모의 이름을 붙여 놓습니다. 그러므로 정치나 경제나 학문의 세계나 종교계나 다 자기 이름을 날리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자기 이름을 위한 일이 결국은 바벨탑을 쌓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바벨탑 쌓기가 무너지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1절과 6절을 다시 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주의 이름으로 곧 주의 힘으로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기에 주의 이름에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의 이름이 선하다고 합니다. 결국 다윗은 주의 이름으로 인한 구원을 받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선하다고 찬양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찬양은 자기 구원이 자기 이름을 위한 구원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만 살펴보아도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하시는 모습이 우리의 생각과 전혀 반대입니다. 구원해 준 자들에게 버림받는 모습입니다. 자기 지파에서 고소당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인한 구원이 무언지 성경 몇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사야 48:9~10절입니다. “9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1)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11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새 일을 행하신다고 합니다(6). 새 일은 이스라엘의 죄를 드러내시면서 구원하시는 일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가 무언지 다 드러났습니다. 진실도 없고 공의도 없고(1), 완고하며 네 목은 쇠의 힘줄이요 네 이마는 놋이라고 합니다(4). 배신하여 모태에서부터 네가 배역한 자라고 합니다(8). 이러한 이스라엘을 위하여 새 일을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일하십니다(11). 그 이름이 ‘내가 그’라고 합니다(11). 스스로 계시는 분이며 처음이며 마지막인 그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십니다(12).
에스겔 36:16~20절입니다. “16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고국 땅에 거주할 때에 그들의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행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여러 나라에 헤쳤더니 20 그들이 이른바 그 여러 나라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말미암아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의 땅에서 떠나게 된 것은 그들의 죄로 인한 것이지만, 나라가 망하게 되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망한 것으로 보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더러워진 것입니다.
이어지는 21~22절입니다.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여 달라는 다윗의 간구가 이렇게 이루어집니다. 주의 이름을 주께서 아끼신 겁니다.
이어지는 24~28절입니다.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1)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2)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다니엘 9:18~19절입니다. “18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공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니이다 19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바 됨이니이다” 에스겔이나 다니엘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자들입니다. 이들이 주님께 드리는 기도나 받은 계시가 주의 이름으로 일하시는 겁니다. 다윗이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여 달라는 기도를 다니엘도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이루시는 내용을 봅니다.
요한복음 12:12~16절입니다. “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 이는 기록된 바 ㄱ)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스가랴 9:9절의 말씀을 아는 자들은 호산나 찬송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를 구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구원하여 주시는 일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로마의 황제보다 더 센 힘으로 구원하여 달라는 겁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런 구원을 이루셨다면 모두가 환영할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십니다. 이 일로 인하여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이 더 확실하게 예수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의 이름으로 오셔서 하시는 일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 다 도망갑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시고 성령을 부어주시자 이런 일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2:23~24절입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을 때가 언제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가 주의 이름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인 줄 제자들이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신 후에 알았다고 합니다. 그 영광이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영광이지만 이 역사 속에서의 영광은 십자가의 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죽음이 인자의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2:32~33절입니다.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내시는 일이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이며 예수님을 보내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주의 이름을 증거 합니다.
사도행전 2:19~21, 36절입니다.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누구든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로마서 10:9~13절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에 이르되 ㄹ)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ㅁ)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사도가 이사야 28:16절과 요엘서 2:28절을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누구든지란 유대인인이 이방인이나 사람의 어떤 외적 조건이나 차별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바울 자신이 예수는 이단의 괴수이며 예수를 따르는 자를 다 잡아 죽이는 일이 하나님의 영광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합니다(갈6:14). 그 이유는 십자가가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의 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11~12절입니다.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니 흔들리는 겁니다. 이들에게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내가 할례를 전하였다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게 되었으리라고 합니다.
십자가란 그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래서 걸림돌이 스캔들이라는 헬라어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라의 높은 자리에 앉히려고 청문회를 할 때 그 사람의 스캔들이 나오면 낙마를 하게 됩니다. 이러한 걸림돌이 되는 말이 십자가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라고 증거 합니까? 그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합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바라는 자기 이름의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들의 주의 이름으로 대단한 능력을 행하였다고 하지만 이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결국 자기 이름의 영광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한 삶이 죄 임을 알게 됩니다. 청춘의 십 년을 어느 선교단체에 고스란히 바친 어떤 분이 그렇게 한 이유가 결국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 이름이 부끄러워지는 일을 숨기려고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자살까지 합니다. 다 자기 이름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라면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자기 이름이 낮아지고 수치스러움을 당하여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가장 높으신 이름이 가장 낮은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세상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되신 그 영광을 버리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 가장 수치스러운 자라도 그보다 더 낮아지신 주의 이름을 부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이 오셨을 때 세리와 죄인과 창기와 살인강도까지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한 자들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이름 앞에 고개를 흔들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다 이루었다는 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주의 힘으로 구원하시는데 그 구원을 십자가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