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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일리옌코프 스터디 자료입니다.
이번 주에는 서론만 다룹니다.
번역 이상한 부분이 있으니 영문 참조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정신현상학] 서문 첫부분도 참조할 필요 있어 보입니다.
E. 일리옌코프: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변증법적 논리학의 역사와 이론], 우기동/이병수 역, 책갈피 2019.
서론
‘논리학’(Logic: 첫글짜를 대문자로)으로 이해됨과 동시에 현대 유물론의 인식론으로 이해되는 변증법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제는 오늘날 특히 중요하다. 레닌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이기도 하다. 사회적 삶과 과학적 지식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의 뚜렷한 변증법적 특징은, 맑스-레닌주의의 변증법이 과학적 인식과 실천적 활동의 방법일 뿐 아니라, 과학자들이 탐구 과정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실험 결과와 사실 자료를 이론적으로 해석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인간19)
‘논리학’ 전체 체계는 아직 완성되지 않고 여전히 이상으로 남아 있는 가운데, 지난 10년 내지 15년 동안 극히 소수의 저작들이 ‘논리학’ 전체 체계의 일부분인 개별 부문에 몰두해 쓰였다. 그런 부문들은 당연히 미래의 ‘논리학’을 구성하는 단락, 나아가 장(章)으로 간주될 수 있고, 건물을 구성하는 다소 정교한 벽돌들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이 ‘벽돌들’을 기계적으로 전체에 접합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변증법적 논리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과제는 집단적 노력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적어도 공동 작업의 가장 일반적인 원칙들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이런 집단적 공동 작업의 몇 가지 출발 요점들을 구체화하고자 한다.(인간19-20)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다소 유감스러운 어조로 지적하고 있듯이, 다른 과학에서보다 특히 철학에서는 “그 궁극적인 목표 혹은 최종적인 결과가…사실 자체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절대적으로 드러내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실 자체를 밝히는 단순한 과정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인간20)
In philosophy, more than in any other science, as Hegel remarked with some regret in his Phenomenology of Mind, ‘the end or final result seems ... to have absolutely expressed the complete fact itself in its very nature; contrasted with that the mere process of bringing it to light would seem, properly speaking, to have no essential significance’.1)
이것은 아주 적확한 표현이다. 변증법(변증법적 논리학)이 이미 받아들여진 논제를 입증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로 간주된다면 ‘본질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않을 것이다. 변증법이 이미 받아들여진(혹은 주어진) 논제를 입증하기 위한 단순한 도구로 바뀔 때, 그것은 단지 외형상 변증법과 유사하지만 내용이 없는 궤변술이 되고 만다. 참다운 의미의 변증법적 논리학이란 “글로 드러난 결과”나 사고운동의 “경향”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결과와 더불어 그 결과에 도달하는 과정을 동반하는 형식에서만” 생명력을 띠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논리학으로서의 변증법을 설명하는 동안 이런 사실을 항상 고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문제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활동의 방법과 특징을 규정짓는 그 어떤 목표를 처음부터 수립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나아가는 극단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지 우리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처음부터 분명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대상은 내적 필연성에 따라 부분들로 분리돼 있고, 이 부분들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밝히고 싶어 한다.(인간20-21)
That is very aptly put. So long as dialectics (dialectical logic) is looked upon as a simple tool for proving a previously accepted thesis (irrespective of whether it was initially advanced as the rules of mediaeval disputes required, or only disclosed at the end of the argument, in order to create the illusion of not being preconceived, that is, of saying: “Look, here is what we have obtained although we did not assume it”), it will remain something of ‘no essential significance’. When dialectics is converted into a simple tool for proving a previously accepted (or given) thesis, it becomes a sophistry only outwardly resembling dialectics, but empty of content. And if it is true that real dialectical logic takes on life not in ‘naked results’, and not in the ‘tendency’ of the movement of thought, but only in the form of ‘the result along with the process of arriving at it‘,2) then during the exposition of dialectics as Logic, we must reckon with this truth. For it is impossible to go to the other extreme, taking the view that we had allegedly not set ourselves any aim determining the means and character of our activity from the very outset in the course of our analysis of the problem, but had set out swimming at random. And we are therefore obliged, in any case, to say clearly, at the very beginning, what the ‘object’ is in which we want to discover the intrinsically necessary division into parts.
전체적으로,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대상’ 혹은 ‘주제’ 일반은 사고 및 사고작용에 관한 것이다. 변증법적 논리학은 우리의 의지나 의식에 전혀 의존하지 않으면서 필연적인 운동과 계기로 진행되는 과학적 사고작용의 발전과정을 그 목표로 삼는다. 우리의 의식과 의지 밖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을 반영해 개념으로 재생산(대상의 정신적 재현)하는 것, 다시 말해 나중에 사실로(실험이나 실천으로) 재창출할 수 있도록 먼저 대상을 개념의 운동논리로 재현하는 것이 바로 논리학이라면, 논리학은 응당 사고가 어떻게 전개되고 발전되는지를 보여 줘야만 한다. 이렇게 볼 때 논리학은 사고작용에 관한 이론적 표상 체계라고 말할 수 있다.(인간21)
이상의 언급으로부터 우리는 사고(사고작용)를, 자신의 노동을 통해 외적 자연은 물론 자기자신도 변형시키는 사회적 인간의 현실적 활동에 포함되는 관념적 구성요소로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인간21)
그러므로 변증법적 논리학은 자연을 창조적으로 변형시키는 주관적 활동의 보편적 체계일 뿐 아니라, 항상 객관적 요구와 연관 아래서 주관적 활동이 수행되는 장(場)인 자연적 혹은 사회역사적 물질의 변화 과정에 관한 보편적 체계이기도 하다.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바로 이 점이 변증법, 현대의 과학적(유물론적) 세계관의 인식론 그리고 논리학의 동일성(단지 ‘통일’이 아니라 명백한 동일성, 완전한 일치)에 관한 레닌 테제의 실질적 요점이다. 이런 접근방법은 엥겔스에 의해 이뤄진 변증법의 정의(“자연, 인간 사회, 사고의 보편적 운동법칙 및 발전법칙에 관한 과학”, 즉 ‘특수한 주관적’ 법칙이나 사고의 형식이 아니라 자연의 발전과 사회역사적 발전에 관한 과학)를^ 충분히 포괄하고 있다.(인간21-22)
우리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변증법과 유물론을 결합시킬 수 있고, 변증법적 논리학이 ‘사고’에 관한 과학일 뿐 아니라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것들의 발전에 관한 과학임을 보여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논리학’이야말로 유물론적 과학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신실증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논리학은 필연적으로 순수 기술(技術)적 분야로 전락하거나 언어를 조작하는 기술(記述)체계로 변형되고 말 것이다.(인간22)
앞에서 제시한 논리학의 보편적 정의를 구체화하는 작업은 논리학을 구성하고 있는 개념, 무엇보다도 사고(사고작용)의 개념을 해명하는 데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사고개념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논리학을 ‘서술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순수한 변증법적 난점을 다시 발생시킨다. 왜냐하면 사고개념에 관한 완전한 서술은 결코 ‘정의’에 의해 주어질 수 없고, 오로지 ‘전개되는 본질적 내용’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인간22)
‘개념’ 자체의 개념도 사고의 개념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여기서 ‘개념’ 자체의 개념을 ‘정의’하는 것은 쉬울지 모르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개념’을 논리학의 특정 전통에 따라 ‘기호’ 혹은 ‘다른 용어를 통해 정의된 용어’ 혹은 단순히 ‘사물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속성의 반영’(이것이 논리학의 특정 전통인 이유는 암암리에 퍼져 있는 ‘본질적’ 그리고 ‘고유한’이라는 말의 애매한 의미 때문이다)으로 이해하지 않고, 내용의 요점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개념의 ‘구체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즉 논리학의 본질과 구체적으로 전개된 논리학 개념에 관한 맑스-레닌주의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모든 사람들에 의해 수용되는 추상적이고 단순한 정의에서 시작하고 ‘내용의 요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인간22-23)
이상에서 언급한 것이 이 책의 계획과 구상이다. 얼핏 보기에 이 책은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도로 철학사 연구인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논리학의 내용’을 채워 나가는 과정에서 취급되는 ‘역사적’ 사례들은 우리의 목적 자체라기보다는 사실적 자료일 뿐이다. 그러나 이 사실적 자료를 활용함으로써 “사상(事象)의 논리학”의 명확한 개요, 즉 맑스⋅엥겔스⋅레닌에 의해 비판적으로 교정되고 유물론적으로 재정립된 논리학으로서의 변증법의 일반적 개요가 점차 철저하게 밝혀질 것이고, 그 결과 논리학에 대한 우리의 입장도 특징지어질 것이다.(인간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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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F. W.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Frajnkfurt/M. 1989.
1. 관습상 서문을 통해 어떤 저술의 앞머리에 붙이게 되는 −저자가 그 저술에서 미리 설정하고 있는 목적에 대한, 또 동일한 대상에 관한 과거나 동시대의 다른 글들과 그 저술이 맺는다고 여겨지는 관계나 그 동기들에 대한− 설명은 철학 저술의 경우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사태의 본성에 비추어볼 때 심지어 부적절하고 목적에 반하는 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서문에서 철학과 관련해 말해도 좋으리라고 여겨지는 내용과 방식−예컨대 경향과 관점, 보편적 내용과 결과들에 대한 역사적 진술, 설왕설래하는 진리에 대한 주장들 및 단언들의 결합 등−은 철학적 진리를 서술하는 방식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철학은 특수를 내포하는 보편성의 영역(Element)에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그 때문에 철학의 경우 목적이나 최종 결과들을 통해 사태 자체가 심지어 그 완전한 본질 차원에서 표현되고 이에 비해 설명의 전개과정은 본래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가상이 다른 과학들의 경우보다 더 잘 생겨난다. 그에 반해 예컨대 해부학이 무엇이냐 하는 일반적 관념에서, 즉 신체 각 부위들의 생명 없는 상태에 비추어본 그것들에 대한 지식이라는 일반적 관념에서, 우리는 이 과학의 내용인 사태 자체를 아직 장악하지 못했고 그 밖에도 특수한 것을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된다.(11)
2.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철학 저서가 동일한 대상에 대한 다른 연구들과 맺는다고 믿는 관계를 규정할 경우에도 어떤 이질적 관심이 끼어들게 되며, 진리의 인식에서 관건이 되는 바는 모호해진다. 그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참과 거짓의 대립이 확실해지는데, 또한 그런 견해는 어떤 기존 철학 체계에 대한 반론이나 동의를 기대하고, 어느 한 체계에 대한 설명에서는 단지 반론이나 동의만을 보곤 한다. 그러한 견해는 철학 체계들의 상이함을 진리의 전진적 발전이라고 파악하기보다 그 상이함을 단지 모순이라고 볼 뿐이다. 꽃봉오리는 꽃이 피면 사라지며 꽃에 의해 논박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열매를 통해 꽃은 식물의 거짓된 현존임이 해명되고, 꽃을 대신해 열매가 식물의 진리로 등장한다. 이러한 형식들은 서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서로를 화해할 수 없는 것으로서 배척한다. 하지만 그것들의 유동적 본성 때문에 그것들은 동시에 유기적 통일체의 계기들이 되기도 한다. 이 통일체 속에서 그것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는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이며, 바로 이와 같은 필연성이 비로소 전체의 생명을 구성한다. 그러나 한 철학 체계에 대한 반론은 흔히 이런 방식으로 파악되지 않으며, 또 파악하는 의식은(das auffassende Bewußtsein) 일반적으로 그 반론을 그것의 일면성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하거나 그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로 보존하지 못하며, 투쟁하며 서로 모순되는 듯해 보이는 모습에서 상호 필연적인 계기들을 인식하지도 못한다.
3. 그러한 설명들에 대한 요구나 이에 대한 충족들은 쉽사리 본질적인 것을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된다.(12) 철학 저술의 목적과 결과들에서 말고 어디서 철학 저술의 본질이 표현될 수 있겠고, 같은 분야에서 그 시대가 달리 산출하는 것과의 상이함을 통해서보다 어떻게 그러한 것들이 더 확실하게 인식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행위를 인식의 출발점 이상의 것으로, 즉 실제적인 인식으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사실상 사태 자체를 회피하고 사태를 위한 노력 및 진지함의 외관과 그런 노력의 실제적 생략을 결합시키기 위한 고안물들이라고 간주해야 할 것이다. − 왜냐하면 사태는 그 목적을 통해 모두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실현과정(Ausführung)을 통해 비로소 모두 해명되며, 결과가 현실적인 전체는 아니며 그 형성과정(Werden)과 더불어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목적은 그 자체만 떼어 놓고 보면(für sich) 생명 없는 보편이며, 경향은 그 현실성을 아직 지니지 못하는 단순한 작동(Treiben)이며, 적나라한 결과는 그러한 경향을 뒤에 남긴 시체다. − 그와 마찬가지로 상이성(Verschiedenheit)은 오히려 사태의 경계선이다. 그것은 사태가 중단되는 곳에 존재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사태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목적이나 결과들 혹은 상이성들이나 이런저런 것에 대한 판정들을 위한 그런 노력들은 그 외관보다 더 쉬운 작업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는 사태와 관계하지 않고 언제나 사태를 벗어나며, 그런 지(Wissen)는 사태 속에 머물면서 그것에 매진하지 않고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을 추구하며, 사태에 머물고 사태에 몰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에 머물기 때문이다. − 가장 쉬운 일은 내실(Gehalt)과 견실성(Gediegenheit)을 지니는 것에 대해 판정하는(beurteilen) 것이며, 좀 더 어려운 일은 그것을 파악하는(fassen) 것이며, 가장 어려운 일, 곧 양자를 결합하는 일은 그것에 대한 서술(Darstellung)을 산출해내는 것이다.
첫댓글 1. 헤겔은 목적 결과 과정 어느 하나가 아니라 전체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반해, 일리옌코프는 대상 내지 목적을 정하는 데에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2. 변증법을 체계화하는 것을 레닌의 뜻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레닌도 엥겔스도 관념변증법이 아니라 유물변증법의 관점에서 인식의 무한한 과정을 인정한 점에서, 일리옌코프의 과욕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