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필은 왜 코끼리를 쏘았나
-영화 <품행제로>를 보고 나서
1. 소문과 실상
박중필은 전설의 ‘문덕고 캡짱’이다. 만화 영화 <로보트 태권브이>의 비장한 주제곡이 깔리고 침 바른 손으로 구렛나루를 정돈하며 달리기 시작하면 대명고 태권도부 전원이 그의 주먹 아래 추풍낙엽처럼 쓰러진다. 아이들은 중필이를 형이라 경외하고 그의 무용담은 날이 갈수록 부풀려진다.
하지만 이 화려한 액션은 과장된 무협지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중필은 정의의 용사와는 거리가 멀다. 똘마니 수동이가 스케치북이나 교과서에 남자랑 여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그림을 그려서 어린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푼돈을 뜯어내면 중필이가 다가와 윽박질러서 숨긴 돈마저 긁어내는, 그냥 동네 생 양아치다. 매번 약한 애들만 골라 삥뜯는 걸 보면 싸움 실력도 빤한 듯 했다. 그러니까 학교 세셈트리오가 떠벌리고 다니던 전설의 문덕고 캡짱의 소문과 중필이의 진짜 행적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던 거다.
2. 사회적 배역과 욕망
이런 중필이 앞에 민희가 나타난다. 중필이는 엄마 미용실에 찾아온 민희를 보고 한 눈에 반해 버렸다. 커다란 뿔테 안경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동네 기타 교습소에서 클래식 기타를 배우는가 하면, 민희는 중필이와 달리 공부도 착실히 한다. 뿐만이 아니다. 중필이 일당이 세운상가에서 ‘털’도 다 나온다는(?) 검은색 비디오를 찾을 때, 민희는 같은 곳에서 ‘금지곡’이 수록된 검은색 빽판(LP)을 찾으며 감탄한다. 중필이가 학교 선생님 몰래 당구장에서 아이들과 큣대를 날릴 때, 민희는 자기 방에서 금지곡인 Wham의 ‘후리덤(freedom)’을 들으며 자유를 찾는 식이다. 중필이는 민희와 함께 걷고 싶고 오래 머물고 싶다. 그러나 그러려면 ‘문덕고 캡짱’이 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발걸음이 옮겨진다. 민희가 속한 세계가 그랬다. 도서관, 기타교습소…
“너 돌았냐? 이런 데를 다 오고? 야, 민희 그년 때문이냐? 야 너 그러고도 문덕고 캡짱이냐. (…) 기타나 튕기면서 정신 못 차리고 앉아있지. 꼴에 도서실은. 똥 싸네~ (…) 정신 좀 차려라, 중필아. 캡짱자리에서 물러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오늘은 문덕고 캡짱, 내일은 문덕고 좆밥. 앞가름 똑바로 해라. 중필아.”
중필이가 이렇게 전설의 ‘캡짱’이라는 배역에서 조금씩 이탈하는 사이 새로운 위협이 들어온다. 전학생 상만이 나타나고 세셈트리오가 그의 새로운 액션 신화를 퍼트리며 떠받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이트 기도까지 한다는 실력자 상만에게 단군파도 돌아섰다. 캡짱 자리를 지키려면 상만과 싸워야 했다. 중필이를 오래 좋아해 온 정란여고 오공주파 캡짱 나영이는 심지어 중필이를 대신해 상만과 싸웠다가 허다한 소문과 함께 시퍼렇게 멍든 눈으로 돌아와 이렇게 말한다.
“싸우지 마라. 니가 져!”
3. 코끼리를 쏘다
어두운 밤 단둘이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던 민희가 중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모레 우리 학교 축제다. 올거지? 나 기타연주도 하는데. 무슨 일인지 자세힌 모르겠지만… 난, 너… 싸움같은 거 안했음 좋겠어… 그냥… 난… 니가…”
“에이, 씨발! 야. 너 뭐야. 니가 날 아냐? 어? 네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아냐? 내가, 내가 문덕고 캡짱 박중필이야. 너랑 나랑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너처럼 말랑말랑한 기집애가 뭘 알어? 어?”
중필이는 여전히 민희 목소리만 들으면 동공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그네에서 벌떡 일어나 담배를 삐딱하게 꼬나물며 위협적으로 소리 질렀다.
그렇게 내일모레, 중필이는 민희가 선물로 준 95사이즈 셔츠를 꺼내입고 민희가 초대한 기타연주회 말고 상만이의 교실로 걸어간다. 상만과 싸우기로 한 것이다. 전에는 기껏 상만에게 다가갔다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도를 아십니까?”하고 돌아섰으면서.
“야. 김상만이. 내가 문덕고 캡짱 박중필이다. 이 씨발럼아.”
상만의 교실로 찾아가 중필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자 문덕고 학생 수백 명이 너나 할 것 없이 강당으로 뛰어들기 시작한다. 중앙에는 중필과 상만이 서 있다.
그토록 싸움을 주저했던 중필이가 결국 상만과 싸우러 떠나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조지 오웰이 1936년 가을에 쓴 에세이 <코끼리를 쏘다>를 떠올리게 되었다. 조지 오웰이 영국 식민지 버마에서 경찰로 일했던 시절, 발정난 코끼리가 사슬을 끊고 달아나 시장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나서 겪은 일이었다. 대나무 집을 부수고 가판대를 습격해서 과일을 먹어치우고 기차를 뒤집고 날뛰는가 하면 암소 한 마리와 남자 하나를 이미 밟아 죽인 상태였다. 그러나 신고를 받고 나선 조지 오웰이 발견한 코끼리는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오웰은 이미 발정기가 지나 진정된 코끼리를 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뒤에는 2천 명의 구경꾼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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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2천 명은 될 듯한 군중이었고, 1분마다 더 늘어나는 듯했다. (…) 이 신나는 소동 때문에 더없이 행복하고 흥분된 표정, 코끼리가 총에 맞으리라 굳게 믿는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이제부터 재주를 부릴 마술사를 보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그때 불현듯 깨달았다. 결국 나는 코끼리를 쏘아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그것을 기대했으므로 나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저항할 수 없도록 등을 떠미는 2천 명의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라이플을 손에 들고 거기 서 있던 바로 그 순간, 동양에서 백인의 지배가 얼마나 부질없고 공허한 것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여기 내가, 총을 든 백인이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무리 앞에 서 있다. 겉으로는 주연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뒤쪽의 저 노란 얼굴들의 뜻에 따라 이리저리 떠밀리는 어리석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백인이 독재자로 변할 때 그가 파괴하는 것은 자신의 자유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 그 순간에도 나는 내 입장이 아니라 뒤에서 지켜보는 노란 얼굴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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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
중필이와 상만의 싸움에는 세셈트리오가 입이 닳도록 떠벌리던 날라차기도 풍차돌리기도 없었다. 중필이는 한 대 맞을 때마다 아파서 “아! 아!” 소리 지르면서 몸을 움찔거리거나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져서 버둥거렸다. 손에 잡히는 게 공이든 빗자루든 들고 풍차처럼 마구 휘둘렀다. 그러나 나이트 기도까지 한다던 상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둘이서 몸을 그러잡고 바닥을 구르더니 중필이가 주먹을 연달아 내지르자 새우처럼 몸을 옹크리고 아무 반격도 못 했다. 심지어 수세에 몰린 상만을 도우려고 단군파는 중필이의 등에 몰래 칼을 꽂기까지 한다. 바닥에 쓰러진 상만을 뒤로 하고 등에 꽂힌 칼을 뽑아 든 중필이가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똑똑히 들어 이 개새끼들아. 내가 문덕고 씨발 캡짱이야. 이 개새끼들아. 으 히~ 으 히~ 나 괜찮다. 이 씹새끼들아. 이 씨발럼들아. 으 히~ 으 히~ 이 시발럼들이. 으 히~ 으 히~ 으 히~”
중필이와 상만의 결투가 이렇게 끝나자 세셈트리오의 간증이 새로 시작되었다.
“야, 그날 싸움 죽였다. 이단옆차기, 날라차기, 가위조르기, 풍차돌리기. 야~ 발이 안 보이더라. 발이. 김상만이 칼 휘두르는 거 봤냐. 그걸 중필이형이 다 피했다는 거 아냐. 마지막에 중필이 형이 소리지르는 거 들었지? 천상천하 유아독존!”
민희가 좋다고 하던 금지된 노래, Wham의 ‘후리덤(freedom)’에는 ‘열쇠를 쥐고 있는 죄수 같아 (like a prisoner who has his own key)’라는 가사가 있다. 어떻게 보면 오웰이야말로 열쇠를 쥐고 있는 죄수였다. 그는 발정이 지나 온순해진 코끼리를 그렇게 쏘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도 2천 명의 시선 앞에서 코끼리를 쐈다. 열쇠를 쥐고 있었지만 감옥 문을 열지 못했다. 아니, 열 수 없었다. "백인 경찰"이라는 역할이, 바보처럼 보일 거라는 또 다른 협박이 그를 가뒀다.
중필이도 열쇠를 쥐고 있는 죄수였다. 민희가 좋았고 상만이와 싸우는 것보다는 민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좋았다. 그런데도 민희를 버리고 수백 명의 학생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상만과 싸우는 길을 선택했다. 열쇠를 쥐고 있었지만 감옥 문을 열지 못했다. 아니, 열 수 없었다. ‘문덕고 캡짱’이라는 전설이, ‘오늘은 캡짱 내일은 좆밥’이라는 협박이 그를 가뒀다.
4. 그 이하로 살 권리
세셈트리오는 여전히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떠들고 있지만, 중필은 이미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모두가 중필이의 근황을 알지 못하던 사이 ‘클래식 기타 개인지도 박중필 기타 교습소’를 차렸다. 어쩌면 중필이는 상만과 싸워서 문덕고 캡짱 자리를 고수한 것이 아니라 중필이를 지키고 싶어서 위험도 불사하던 나영과 민희, 그리고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민희를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중필이는 그토록 ‘쪽팔려’하던 ‘캡짱’이 절대 가면 안 되는 그곳, 정란여고 캡짱 나영이가 비웃던 그곳, 민희가 다니던 기타교습소에 자기 이름을 박고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감옥에서 나온 것이다.
오웰도 버마를 떠났다. 경찰 제복을 벗고 영국으로 돌아가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을 썼다. 부랑자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제국의 하수인이 아니라, 제국이 만든 빈곤을 목격하는 작가가 되었다. 그도 감옥에서 나온 것이다. ‘박중필 기타교습소’라는 간판은 오웰의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이라는 책만큼이나 독특하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전설" 아래로, 그 이하로 살 권리가 있다는,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할 수 있다는 어떤 선언문 같아서 말이다. 세셈트리오는 여전히 전설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 전설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 권리, 그 이야기에서 내려올 권리, "문덕고 캡짱"이 아니라 그냥 기타 치는 박중필로 살 권리. 중필은 그 권리를 찾았다.
첫댓글 영화 <품행제로>를 보고 나서 후기 쓰는 내내 들었던 노래입니다.^^
https://youtu.be/4D71bD1TGqM?si=F1n5kHbvMGdgSk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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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몇 개와 표현 몇 개 수정해서 다시 업로드 했습니다.
늦게 수정해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