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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몸은 성령의 전 / 시 70:1-5, 고전 6:12-20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의에 전적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하을 받는다. 율법의 형벌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후속적인 조치가 다 끝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의롭다고 인정받은 후에도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 후속적인 조치, 곧 성화의 문제가 구원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조건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구원의 조건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영으로 죽음에서 소생하여 새생활을 하는 사람은, 영적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영적생활과 조화되지 아니하는 것들, 곧 영적생활과 걸맞지 아니하는 옛 습성들을 정화시켜 가면서 또 축소해 가는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그것을 ‘성화’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중생은 곧 성화의 시작’이다. 거듭난 후에도 낡은 습성과의 투쟁은 오래 계속된다. 때로는 낡은 습성과의 투쟁에서 참패하여 비애를 맛볼 때도 있다. 성화는 어떤 고정된 상태나 정체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상태, 완전으로 접근하고 있는 과정,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인격으로 자라나는 과정, 죄에 대하여 날로날로 죽어가고 있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갈 5:16-17절상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어서 24-25절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공동번역 개정판)
하나님의 영을 품은 사람들은 부단히 악과 싸우고 고상한 크리스천의 인격을 갈고 닦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이 점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 당시의 고린도는 문화의 도시, 건축미이 도시, 동(구리) 신상과 동 공예의 도시였다. 또한 그 당시의 고린도는 우상의 도시, 항구의 도시,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다. 고린도는 로마와 아시아의 중간에 있는 교통의 요지였으며, 동서양을 왕래하는 상인들이 이 항구에서 하선하여 오랫동안 억압되엇던 성적 욕구를 푸는 환락의 도시였다. 그런 도시인 고린도에 바울의 자유 복음이 전해졌다. 자유 분방한 고린도의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는 사해지고 인간은 구원받는다’고 하는 자유 복음이 전해지자 자유의 오해, 자의의 남용이라는 잘못된 도덕관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는 바울 사도가 그런 사람들을 고치기 위한 글들을 쓰고 있다. 6:13절에 ‘음식은 배를 위한 것이고, 배는 음식을 위한 것입니다’라는 생각을 고린도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을 우리 몸에다가 적용시킨다면 ‘몸은 음행을 위해 있는 것이요, 음행은 육체의 욕구이니까 죄가 아니다. 왜? 육체는 하나님이 만든 것이니까’라는 논 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배고플 때 음식을 먹는 것과 같이 육체가 요구할 때 성적 만족을 취하는 것이다’라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 사도가 두가지 주장으로 맞서고 있다.
1.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고 다 유익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읽은 성서에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고 주장한다. 교회 안에서는 다 옳다고 하여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하더라도 이웃을 위하여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하여 양보하고 자제하는 것이 교회 내의 윤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소위 사회에서 말하는 윤리는 통하지 않는다. ‘남이야 지게를 지고 장에 가든, 남이야 전봇대를 뽑아서 이빨을 쑤시든 말든, 남이야 홍두깨로 귀를 후비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하는 말들이 있지만 교회 안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바울의 말은 ‘이렇게 방종으로 나가는 것은 자유의 복음을 죄악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라는 비판이다. 기독교인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더라도 건덕상 이웃을 위하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교인들의 눈은 항상 연약한 이웃을 향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상의 재물에 대해 사도 바울이 언급한 장면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감사함으로 받으면 무엇이나 버릴 것이 없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자신은 우상의 재물, 곧 술이나 고기를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믿음이 더 약한 이웃이나 교인이 자기를 쳐다보고 시험을 받을 것 같으면 평생동안 술이나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약한 자를 부추기고 격려하고 그들의 신앙을 키운다고 하는 사건들 앞에서 항상 자기 자신이 성실해야 하는 것이다. 고전 6:13절중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2. 두 번째 바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여러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성령의 전이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값주고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집이 되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이요, 분산된 그리스도가 된 것이요, 하나의 그리스도가 수억 개의 작은 그리스도로 나뉘어진 것이요, 그리스도의 분신으로 이 땅 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그 당시로서는 폭탄적인 선언이요,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이 지구 위에 기독교가 인간의 육체에 대해서 제일 높은 값을 매긴다. 인간의 몸에 대한 그 고상한 이념을 기독교만큼 생각한 종교가 이 땅에 없다. 기독교는 원래 높은 진리를 구체적인 것으로 표현한다. 말씀이 꼬집으면 아프고, 안먹으면 배고픈 고기 덩어리 육체로 화육하는 것이 기독교의 진리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항상 ‘상향의 진리’가 아니라 ‘하향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최종적 진리의 성숙은 언제나 이 땅의 구체적인 삶 속에, 구체적인 사람 속에, 구체적인 상황 속에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결국 인류 역사에서 육체는 ‘성령의 전’이라고 말한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기독교가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랑의 원천은 우리의 몸이, 우리의 육체가 ‘하나님의 전’이라고 하는 기본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의 독특한 육체관을 높고 거룩한 성 윤리, 높고 거룩한 결혼관, 건강관, 절제관, 순결관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 기독교의 부활은 영혼만의 연기같은 부활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정체가 있는 몸의 부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것은 육체이다. 곧 병들지 않고 죽지 않는 영체로 우리는 부활하고 영생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황금빛으로 빛나는 아름답고 신기한 몸, 광채가 나고 향기가 나는 몸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 몸은 죽지도 않고 늙지도 않는 몸이 될 것이다. 요 14장에 보면 예수께서 ‘보혜사를 보내어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하도록 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이 육신을 가지고 있을 때까지만 함께 하도록 하겠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가 그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했을 때라도 성령과 더불어 우리는 영원토록 사는 그런 존재가 된다는 말이다. 아내와 남편은 영원히 함께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가지고 있는 동안만 함께 사는 것이고, 저 나라 가서는 남녀의 구별이 없으며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천사처럼 산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 나라에 가서는 영원히 성령을 모시고 주님 앞에서 살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정신의 집이요, 영혼의 집이요,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요, 인격의 집이다. 우리의 작은 육체는 그래서 위대한 영혼을 가진다. 기독교에서 자살을 제일 싫어하는 것은 자살이란 성전인 몸을 파괴하는 것이기에 ‘성전파괴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또 우리 몸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성전훼손죄’에 해당하는 것이다. 바울이 ‘너희 몸이 성령의 전인 줄 모르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 성령의 전을 더럽히고 훼손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담배를 피운다든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위가 빵꾸가 니고 간이 망가지게 한다든지, 마약이나 환각제를 사용하는 것은 모두 다 ‘성전훼손죄’에 속하는 것이다.
또 바울은 본문에서 음행을 엄히 금하고 있다. 15-19절상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녀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녀와 합하는 자는 그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또한 구약 잠언 5장에 보면 ‘음녀에게 마음을 쏟지 말아라.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나아가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신약 고전에서는 창녀를 조심하라 했고, 구약 잠언에서는 창녀보다 더 범위를 넗혀서 음녀를 조심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히 13:4절의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기독교 역사 속에서 많이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성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3백년 동안 지하의 동굴에서 몰래 모여 예배드린 종교였던 기독교가 주후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칙령으로 지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지상으로 올라온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그런데 국교가 되던 그 당시 로마 인구 중 기독교인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9%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9%도 되지 않았던 적은 무리가 어떻게 국책을 바꾸고 국교를 바꾸었겠나? 그것은 기독교인이 모든 국책, 정책을 결정하는 중요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로마제국의 귀족들, 고관들, 부하들은 모두 다 윤리적으로 문란해서 아기를 낳으면 다 코가 없는 아이들, 눈이 없는 아이들을 낳게 되었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아무리 훌륭한 가정교사를 붙여주어도 그 아이들이 좋은 자녀로 자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비해 기독교인 가정은 히 13:4절의 말씀을 잘 지켰기 때문에 독똑하고 건강한 아이들이 태어나서 공부를 잘하게 되고, 그래서 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보혜사 성령은 나를 감싸주고 나를 항상 변호해 주신다. 보혜사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보다 더 부드럽고 내가 슬플 때 내 눈물을 닦아주시고 나를 위로해 주신다. 혼자 사는 분들을 심방을 할 때는 언제나 ‘이제부터는 예수님만을 남폄으로 모시고 사십시오, 그러면 외롭지도 않고 쓸쓸하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의 성령께서 지켜주시고 함께 하시고 위로해 주시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전혀 허황된 말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분으로 믿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나를 거듭나게 하시고, 나의 기쁨과 사랑의 평안이 되시고, 나에게 절제의 열매를 맺게 해주시고, 사탄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신다. 성령은 ‘전도의 영’이시고 ‘기도의 영’이시고 ‘말씀의 영’이시다. 성령은 나로 하여금 용기와 소망을 갖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은 아홉가지 열매를 맺도록 우리들을 도와주신다. 시 121:1-2절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인간이 수평적인 면에서 사람에게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절망하지 않는 이유는 수직적인 도움, 하나님의 도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경 목사인 안요환 목사는 시력을 잃은 후 시력을 가졌을 때보다 몇 배나 더 큰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시력을 가지고 있을때 는 그는 덜 바빴지만 시력을 잃고나서 소경이 된 후 너무너무 바빠서 하루는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하나님, 당신 아들 병신 하나 만들어 놓고 웬만큼 부려 잡수십시오.’ 그는 지금도 수많은 소경들을 먹여 살리고 교육시키고 있다. 일본의 소설가인 미우라 아야꼬는 병중에서 얼마나 훌륭한 글을 썼는가? 육체가 병들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것을 수락하고 수렴하여 그것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재료로 썼다. 그것은 바로 성령이 미우라 아야꼬의 가슴 속에 내주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건강한 육체는 건강한 정신에서 나온다’는 말을 믿는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혼자일 때 조심한다. 원래 성숙한 사람은 혼자 있을 때, 남이 보지 않을 때 조심한다. 왜냐하면 남은 보지 않으나 성령은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람은 깨끗한 양심을 가진다. 그는 늘 죄를 고백한다. 우연히 뭔가 석연치 않고 마음이 우울할 때는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이다. 가난한 마음을 갖기 바란다. 은혜를 사모하기 바란다. 겸손하기 바란다. 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하기 바란다. 기독교인은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의 전기를 읽어야 한다.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열중해야 한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중보기도를 해야 한다. 중보기도는 하늘에 쌓는 보화요, 하늘에 투자하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에서 끝난다면 그것은 전혀 기도생활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선의를 가지고 대해야 한다. 내게 악하게 대하는 사람에 대해서 선의를 가져야 한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영적 사마리아인’이 된다. ‘인간의 가장 영원하고 근본적인 필요는 구원을 받는 일’이다. 죄와 죽음은 인간의 최후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없이 살고, 영원한 생명 없이 살고, 사탄에게 종노릇하며 사는 사람들을 보고서도 그냥 지나쳐 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레위인’이 될 것이고, ‘영적으로 제사장’이 될 것이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가정구원, 이웃구원, 사회구원, 민족구원’에 대한 기본적인 열정,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을 가지고 산다. 그가 바로 오늘을 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들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며, 여러분 자신이 성령의 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의 전을 훼손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8-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