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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내가 새일을 행하리라 / 사 43:18-21, 계 21:5-6
오늘은 1937년 제26회 총회에서 여신도주일이 제정된 이래 60번째 맞이하는 여신도회 주일이다. 지금 이 시간 전국의 여신도회원들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과 기도를 드리며, 은혜를 받는 예배를 드리고 있다. 올해 우리 여신도회가 택한 표어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이다. 다가오는 21세기와 1998년 저희 지회 100주년, 전국연합회 70주년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이 전환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새 일을 행하신다는 이 선언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 전하여진 기쁜 소식
이 표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 40장 이하의 말씀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이 말씀이 선포되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되는 포로생활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도 잊어가며 살고 있었다. 물론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던 초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비록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긴 했지만 그들을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끌어 내셨듯이 곧 구해주시리라는 굳은 믿음과 해방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해려 강해지고 거대해지는 바벨론의 세력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차 그 희망을 잃어 갔다. 창조주시며 역사의 지배자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위기를 맞게 되었고, 계속될 것만 같은 포로생활에서 낙심하여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때 이들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는 말씀은 지칠대로 지치고 마를대로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복음이요 생명의 말씀이었다.
무명의 예언자(제2 이사야)는 이러한 백성들에게 포로에서 구원하여 주실 그분을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 그 백성들을 위하여 배풀어 주실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 바벨론 포로에서의 놓여남을 하나님께서 이미 계획하고 계시며 실현에 옮기고 계심을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알려지기는 제2 이사야는 기원전 583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기원전 539년 바벨론 제국의 몰락 사이에 활동하였다고 한다. 그의 활동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시기와 합치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 역시 바벨론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더불어 힘겨운 삶을 살았고 백성들의 삶을 잘 이해하였을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가장 기다리던 예언자였을 것이다. 그 구원사건을 제2 이사야는 하나님이 행하신 새 일로 표현하였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손길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에서 놓여나 새로운 생명을 얻고 그와 더불어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구원을 얻으며 들짐승까지도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의 소식을 모두에게 알려주었다. 이 예언은 바벨론이 멸망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고레스 왕에 의해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실제 역사를 통하여 성취되었다.
2.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19-20절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모두가 살 수 없는 상황이라고 절망하는 곳에서 싹터옴을 제2 이사야는 갈파하고 있다. 광야와 사막은 생명이 살아가기에는 어려운 곳이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기에 가끔 상인들이나 가로질러 갈 뿐 비어있고, 사막은 쌓여진 모래 구릉과 휘날리는 모래 속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특수한 기능을 가진 몇몇 생물 이외에는 살 수 없는 곳이다. 그 이유는 그곳에 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은 물이 있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물이 없는 곳, 그곳은 생명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이 살 수 없는 바로 그곳에 길을 내어 사람들이 생명을 잃지 않고 지날 수 있게 하며, 사막에 강을 내어 생명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꾸시겠다는 것이다. 생명체가 살지 않는 그 볼모의 땅에 이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새 일로 인하여 생명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바꾸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지이다. 아니 그 생명을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일차적으로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위하여 시작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새 일은 단지 당신의 택하신 백성을 위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소중하지 않다고 여기는 들짐승들, 승냥이와 타조까지도 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천명되어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피조물 모두의 생명을 살리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시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손으로 친히 빚으신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리는 기쁨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으로부터 구원해 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곧 마르고 황폐한 광야와 사막 같은 바벨론 생활에 물을 내고 길을 내어 이스라엘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리라는 하나님의 역사를 유비해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또다른 깨우침을 주고 있다.
3. 오늘 - 우리의 삶의 자리 : 광야, 사막
이제 우리들의 삶의 자리로 성서의 말씀을 옮겨 보자. TV나 신문을 보면서 살아가나? 무슨 내용들이 방송되던가? 믾은 사건들이 방송되거나 지면에 실린다. 지하 석탄갱이 무너져 사람이 죽었고, 돈 몇푼 뺏으려 사람을 죽인 사건이 있고, 자동차 주차하려는 시비가 벌어져 몇마디 끝에 서로 치고받는 사건이 일어났고, 남편의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남편을 살해한 여자가 있고, 매일매일 구타당하면서 살아서 생명이 말라가는 매맞는 여자와 자녀들의 이야기도 있다.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아비라고 자식에게 질시당하여 괴로워하는 부모와, 자식이 부모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내치는 부모의 이야기도 있다. 몇천억원을 꿀꺽하고도 죄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몇푼의 돈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이들도 있다. 오염된 하천에서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오염된 식물을 먹고 사람들이 병들어 간다는 기사도 있다. 철새 도래지인 주남 저수지에서 보존을 반대하고 개발을 원한다며 불을 지른 사건도 있다. 어디서도 살아 넘치는 생명력은 찾아볼 수 없고 죽음의 그림자만이 무겁게 드리운 활동사진이 우리 눈앞을 스쳐간다. 이 시대를 인류역사상 최고로 문명이 발달하여 인류에게 편안함과 풍족함을 제공하고 있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때라고 하는데, 누구나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여기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 주위는 행복하고 좋은 이야기보다는 절망적이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야기들로 우리 주변은 가득 채워져 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낙원이 아니라 점점 더 광야로 사막으로 황폐해져만 간다.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은 이제 구호에 지나지 않으며, 생명이 가장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 생명의 자리에는 사람들이 더 소중하다고 여기는 돈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들이 점점 늘어 생명이 헌신짝 취급을 당하고 있고, 우리가 사는 새상을 점점 더 생명이 살 수 없는 광야와 사막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물질의 풍요 속에 생명은 시들어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하여 주시겠지 하는 희망도 점점 빛이 바래 이제는 그마저도 무덤덤해진채 희망없는 삶을 유지해 나가고 있다. 점점 더 광야와 사막으로 황폐해져가는 오늘 우리들의 삶에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고. 우리가 그동안 생명이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놓은 광야, 사막에 다시금 길을 내고 물을 내어 하나님의 백성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를 다시 살리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지내온 풍요한 안락에 대한 추구는 잊어버리고 오직 생명을 다시 살리기 위하여 시작하는 새 일 -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물을 내는 그 일만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된 일을 보라는 것이다. 그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의지하고 그 일에 함께 나서라는 부르심이기도 하다.
4. 우리의 할 일 : 생명 살림
오늘 우리는 대전환의 시대에 서 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를 눈 앞에 두고 있으며, 앞으로 열어갈 제3의 천년대는 인류의 삶의 모양과 질이 달라지는 대전환의 때라고 미래학자들은 예견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의 역사에서 볼 때도 지금은 전환의 시기이다. 우리나라에 그리스도 복음이 전도된지 올해로 111년이 된다. 우리 여신도회 역사를 살펴보면 1898년 평양 널다리교회에서 첫 여신도회 지회가 결성된 이래 100주년을, 전국연합회 역시 결성 70주년을 맞이하게 되는 1998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때이기도 하다. 우리 증조 할머니들이 복음의 씨를 받아들여 이 땅에 열성을 다하여 뿌리고,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가꾸시고 우리가 꽃피워온 복음이 이제 열매를 맺어야 할 때가 왔다. 지나온 100년 동안 우리 기장 여신도회는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포하신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하신 그 말씀을 우리의 좌표로 삼고 광야와 사막같은 이 땅의 현실 속에 길을 내고 물을 내는 생명문화운동을 펴왔다. 생명을 살리기 위햐여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생명의 일군으로 삼아주신 그 부르심에 감격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생명을 보듬고 키워가려는 결단으로 ‘생명을 어머니의 손에’를 표어로 삼고 지난 한해를 살아왔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이 일은 때로 우리가 살고 있는 광야와 사막같은 이땅의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희청거리기도 했고, 미래가 환히 보이지 않아 희망을 잃고 그저 변죽만 울리고 있을 때도 있었다. 지나온 100년의 역사는 희망과 절망이, 기쁨과 슬픔이, 낙심과 환희가 교차하는 시간들이었다. 우리가 정말 광야와 사막의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낙심할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오셔서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고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 주셨다. 특히 지난 한해는 이러한 생명살림의 기치를 ‘생명은 어머니의 손에’라는 표어에 담아 우리의 삶속에서 실천하려 노력하여 왔다. 비록 작은 일들이었지만 그 일들이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는 새 일의 시작임을 알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이제 올해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고 선포하시며 우리가 그 일에 함께 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께 ‘네,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를 살림의 도구로 써주소서’ 하는 기도로 응답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오늘 우리는 변혁의 때에 살고 있다. 이때는 하나님과 함께 새 일을 하기 위한 준비의 때이기도 하다. 우리는 새 일을 위한 준비의 하나로 지난해 우리가 앞으로 100년을 내다보며 일할 자리를 마련하기로 결단하였다. 이는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40:3하)는 말씀에 힘입은 것이었다. 우리는 가칭 ‘생명의 집’(여신도회 100주년 기념회관)을 마련하여 많은 생명살림의 사업들을 그 안에서 진행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건립을 위한 모금 발대식을 거행하였다. 이것은 광야에 길을 사막에 물을 내는데 필요한 일들을 준비하고, 생명살림의 일군들을 키워내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선교센터의 역할을 하고 생명살림을 담아낼 그릇을 준비하는 곳이 될 것이다. 그 집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그 안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 - 생명살림의 한길로 매진하여 나갈 터전이 될 것이다. 오늘 정보화시대의 용어로 말한다면, 100주년 기념회관은 컴퓨터요, 우리 여신도회 조직은 하드웨어요, 우리가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진행할 모든 프로그램들은 소프트웨어가 될 것이다. 특히 감사할 일은 우리 기장의 모든 교회들이 우리 여신도회가 이 회관(생명의 집)을 짓는데 적극 협력하여 주기로 제81회 총회에서 결의하여 주었다는 점이다. 어디에서나 생명살림이 필요한 곳에서 손을 들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 시작의 가장 작은 부분이다. 우리가 사는 곳 그곳이 사막이든 광야이든 푸른초장이든 우리는 생명살림의 길에 하나님의 작은 손으로서 역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올 한해동안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우리가 길을 내야할 광야는 어디이고, 물을 대야할 사막은 어디인가를 끊임없이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왜 그곳이 광야와 사막이 되었는가를 원인을 규명하여 보고, 셋째, 어떻게 길을 내고 강을 낼 것인가 방법을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넷째는 이 일이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임을 깨닫고 8만 여신도들과 함께 의논하며 손을 잡고 힘을 합하여 길을 내고 물을 대는 실질적인 일을 행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땅의 모든 생명들이 함께 살아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우리를 부르셨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1997-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