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할머니 / 정선례
휴가철에 엄마와 동생들이 왔다. 처음에는 반가웠다. 올여름이 좀 무더운가? 이틀이 지나니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옷도 편하게 못 입고 삼시 세끼 차리느라 힘들었다. 자연히 말이 부드럽게 안 나왔다. ‘오뉴월 손님은 범보다 무섭다.’, ‘7월 손님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속 담이 괜히 생긴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하필이면 이 무더위에 오셨을까, 애써 오시라고 해 놓고도 대놓고 짜증 섞인 말이 나와 버릴 뻔했다. 생전에 이모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을 이뤄 드리려고 벌인 일이다. 그동안 우리 집에 몇 번이나 오셨다고, 그리고 앞으로는 더 보기 어려울텐데.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불편한 마음이 누그러졌다.
8월이 시작되는 날 엄마와 나, 여동생, 막내 남동생과 함께 임자도에 갔다. 섬은 고즈넉하고 아름다웠다. 천사 섬이라 불리는 신안군의 관문인 지도읍에서 임자도를 잇는 임자대교가 2021년도에 개통된 덕분에 5분 만에 건널 수 있었다. 그전에는 여객선을 타고 족히 30여 분이 걸려야 닿을 수 있던 섬이었다.
지금껏 한 번도 이모할머니를 본 적이 없었다. 가끔 이모의 안부를 살피던 엄마에게서 요양원에 입소하셨다는 소식만 들었다. 엄마가 이야기를 꺼낼 때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내가 사는 지역과 멀리 떨어지기도 했거니와 찾아갈 정도의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면 소재지 농협 옆에 있는 요양원에 들어서니 요양 보호사가 방으로 안내했다. 세 분이 누워 계셨는데, 다 백발이 성성했다. 이모할머니는 꼭 안으면 스러질 듯 연약해 보였다. 엄마는 침대 가까이 가더니 자신의 체취가 고스란히 스며들기를 바라듯이 이모할머니의 볼에 자기의 얼굴을 비볐다.
다행히 엄마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들릴 듯 말 듯 꺼져가는 목소리로 ”반갑다.“ 한마디 하시고는 입을 다물었다. 침대에 누워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에 이슬이 촉촉하게 맺힌다. 희미해지는 기억에도 조카인 엄마는 그대로 남아 있었나 보다. 엄마가 이모할머니 손을 잡아 드리고 얼굴을 어루만지는 동안, 나와 동생은 멀찍이 떨어진 창문에 등을 기대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방을 나서기 전 엄마는, 이모할머니 얼굴에 또 볼을 맞대고 비볐다. 살아서는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우러나온 애정 표현이리라.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에서 긴말하지 않아도 애잔함을 읽을 수 있었다. 감정을 억누르고 못내 아쉬워 돌아서는 엄마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밖으로 나오니 요양보호사가 문 앞까지 따라 나오며 ”김초혜 어르신은 우리보고 밥 먹었냐고 물으시곤 항상 먼저 먹으라.“고 하는 따뜻한 성품을 지녔다고 말한다. 아, 우리 엄마도 그러한데….
엄마는 당시 유행한 역병으로 외할머니를 잃었다. 엄마 나이 세 살 때였다. 이모할머니는 그런 엄마를 안타깝게 여겨, 직접 돌봐 주지는 못해도 자주 전화하여 안부를 물었단다. 이모할머니의 생활도 편하지는 않았다. 남편(이모할아버지)의 잦은 음주로 수 년간 두통에 시달리기도 했다. 자신의 가족 건사하기에도 팍팍한 생활이었을 텐데 조카를 챙긴 그 마음이 고마웠는지 엄마는 자주 이모할머니 이야기를 했다. 엄마에게 그녀는 세 살 때 먼 길 떠난 엄마 대신이다. 이모할머니라도 계셨기에 엄마는 덜 외로웠을 것이다.
요양원에서 나와 삼촌 집으로 향했다. 이모할머니 아들 그러니까 삼촌은 우리가 목포에서 자취할 무렵 서너 번 봤다. 마을에 도착하니 외국인 근로자들과 양파 모종 붓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동생이 삼촌과 숙모에게 건넬 모자, 과일, 음료를 트렁크에서 꺼냈다. 매사 목소리가 크고 덜렁대지만 이럴 때는 나보다 더 생각이 깊다. 삼촌을 보지 못한 지가 오래전인데도 두꺼비상의 얼굴과 다부진 체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아 옛 모습이 그대로 떠올랐다. 그런데도 동생들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단다. 임자도에서 생산한 천일염, 멜론 참외를 트렁크 가득 실어 주고도 삼촌은 뭐 더 챙겨줄 게 없나 두리번거렸다.
돌아오는 길에 평소 가 보고 싶었던 대광 해수욕장에 들렀다. 여름에는 뭐니 뭐니 해도 바다가 최고다. 바다에서 금방 튀어나왔을 것 같은 커다란 민어 조형물이 반겼다. 알레르기 피부에 좋다는 말을 들었기에 나는 따뜻한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엄마는 그늘에 앉아 저 건너편 이모가 계시는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동생들은 백사장을 걸었다. 나도 따라 걷다가 나중에는 운동화를 벗고, 7km나 되는 백사장을 마구 뛰었다. 그래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맨발에 와 닿는 감촉이 싱그러웠다. 해안가 끄트머리 모래사장에서 진분홍빛 해당화가 핀 것을 보았다. 와, 이런 행운과 마주하다니. 내 어릴 적 늘상 오가던 해변 길에 무더기로 피어난 분홍빛 꽃잎에 코를 갖다 대곤 했었지.
모실 길 해양 탐방로도 가 보고 싶었는데 들르지 못했다. 진리항에서 여름 별미인 민어회와 낙지볶음도 먹지 못해 아쉬웠다. 내년 민어 축제 기간에 다시 가야겠다. 부디 이모할머니가 그때까지 살아 계시기를 기도한다.
첫댓글 이야기 단락마다 가족간의 정이 잔잔히 묻어 납니다. 수묵화 같은 이모할머니의 이야기 가슴 속으로 따스하게 스밉니다.
그분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뵐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귀찮아하는 마음이 확 사라지는 것 같아요.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을 다시금 새기게 하는 글이네요.
가족들과 행복한 여행하셨네요. 백사장을 이 더위에 마구 뛰시다니 대단하십니다. 하하.
우와, 선생님은 몸이 아주 가벼우시군요. 대박 부럽습니다.
마음은 따뜻하고요.
잘 읽었습니다.
이모 할머니가 살아 계시다니 복이 많은가 봅니다.
점점 친척이 모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아요.
가까운 친척도 찾지 않으면 남이 되는데 이모할머니 잘 하셨네요.
임자도가 고향이신가요? 그곳을 처음 갔을 때 해수욕장이 어찌나 길던지 놀랬습니다.
이모할머니께서 맘이 풍요로우셨겠습니다. 의미있는 시간이셨을 것 같아요.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형제들과 엄마 모시고 간 다복한 시간이었네요.
부럽습니다.
마음이 따뜻하신 선생님을 느끼게 해 주시는 글입니다. 이모할머니께서 행복하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