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매 36부 -
남매 –36부-
나보다 더 놀란 건 영준이다. 방금 집어 든 신발을 떨어뜨릴 정도다.
영준이가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는 얼굴은 처음 본다. 나를 볼 때면 늘 궁지에 몰린 제리를 보며 군침을 흘리는 톰 같기만 했는데 말이다.
잠깐 동안의 침묵을 먼저 깬 건 영준이 엄마다.
"아이고, 현이 엄마 부지런도 하네. 이렇게 일찍 온 거야?"
"네, 오랜만에 뵈요"
영준이 엄마가 엄마에게 반말로 건네는 말에 꼬박꼬박 존댓말로 대답하는 엄마가 내심 못 마땅하다. 영준이 엄마가 나이가 더 많다는 말은 들었지만 내가 영준이 에게도 지고 사는 마당에 엄마까지 영준이 엄마에게 공손하게 대하는 게 왠지 싫다.
"그러게, 현이 엄마야 늘 바쁘니까 동네 사람들 볼 세가 없지 뭐"
"네, 요새 일이 많아서 그러네요"
"쉬엄쉬엄 해. 그러다 몸 축나면 애들이 더 고생이야"
"네, 그래야죠"
"그래, 애들 아빠는 아직 안 들어 왔어?"
어떻게 알았는지 영준이 엄마는 아빠가 집을 나간 얘기를 하고 있다.
"네? 아, 네"
영준이 엄마를 향해 애써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 있는 엄마가 웃고 싶을 만큼 그리 유쾌한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엄마는 세수대아를 집어 들며 조금은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엄마와 영준이 엄마가 그렇게 인사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영준이 와 나는 뚜껑을 열고 쇠돌이가 타기만을 기다리는 마징가 제트 같기만 하다. 숨소리조차 낼 틈도 없이 서로에게 시선이 머문 채 그대로 서 있을 뿐이다.
아마도 더 놀라고 당황한 쪽은 영준이 같다. 동네 아이들 틈에서 늘 대장 노릇을 하는 영준이가 엄마 손에 이끌려 여탕에 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영준이 엄마가 출입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영준이를 부른다.
"왜 그러고 서 있는 거야? 얼른 들어와서 현이 엄마한테 인사 안 해?"
영준이는 그제야 내게 두었던 시선을 거두고 떨어진 신발을 다시 주워 들고 안으로 들어선다.
"안녕하세요?"
신발을 든 손을 가지런히 모아 엄마에게 꾸벅 인사를 하는 영준이를 보자 어느새 놀란 마음은 사그라들고 이번 기회에 영준이를 단단히 골려 줘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다. 영준이가 내 앞에서 저렇게 다소곳할 수 있다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난다.
'자식, 오늘 제대로 걸렸다'
행여 영준이가 볼세라 소리 없이 키득키득 웃고 있는데 엄마가 내 엉덩이를 툭 친다. 가볍게 친 엄마의 손이 꽤 둔탁하게 느껴지는 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손찌검이었기 때문이다.
"너는 뭐하니? 너도 영준이 엄마한테 인사 해야지"
엄마의 손찌검에 들고 있던 옷가지를 옷장 안으로 다 넣기도 전에 또 다시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다.
"엄마, 나 좀 그만 때려요. 내 엉덩이 불나겠어"
"이 녀석이, 얼른 인사드리라니까"
엄마에게 얻어맞은 엉덩이를 매만지며 영준이 엄마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자 영준이 엄마는 "허허, 그놈 참 개구쟁이 같다“ 하며 영준이의 옷을 하나씩 벗겨 옷장 안으로 던져 넣는다.
영준이 엄마와 영준이가 옷을 벗어 옷장 안에 넣고 있는 사이 엄마와 나는 먼저 욕탕 안으로 들어간다.
"현아, 엄마 빨래하는 동안에 탕 속에 들어가서 푹 담그고 있어"
엄마는 목욕탕에 올 때면 세수대아가 넘칠 만큼 빨랫감을 많이 가져 온다. 목욕을 하러 온 동네 아줌마들이 그런 엄마를 보며 왜 목욕탕에 저렇게 많은 빨래를 가져 오냐며 수군덕거리지만 엄마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따듯한 물로 빨래를 하느냐며 개의치 않고 벗은 몸이 땀에 흥건해질 정도로 빨래를 하고는 한다.
말끔히 청소가 된 바닥에 빨랫감을 늘어놓는 엄마의 맨 몸이 몇 달 전에 목욕탕에 왔을 때 보다 더 말라 보인다. 누룽지를 그렇게 많이 먹는데도 살이 찌기는커녕 다른 아줌마들과 달리 앙상하게 마른 살에 출렁임도 없는 엄마가 왠지 측은하게 느껴진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탕 속에 발을 담그자 살이 익을 만큼 뜨거운 열기가 느껴진다.
한쪽 발을 잠깐 담갔다가 꺼내자 엄마는 어서 들어가라는 손짓을 하지만 연두 빛으로 출렁이는 그것은 분명 적잖은 두려움이다.
"뜨거워서 못 들어가겠어?"
"네, 너무 뜨거워요 엄마"
내 말에 엄마는 탕 속으로 손을 넣어 휘휘 젓는다.
"이게 뭐가 뜨겁다 그래 이 녀석아? 얼른 들어가"
"아씨, 진짜 뜨거운데"
탕 난간에 쪼그리고 앉아 우물쭈물하는 나를 바라보던 엄마는 탕 속에 넣었던 손을 꺼내고는 갑자기 나를 번쩍 들더니 탕 속으로 풍덩 던져 넣는다. 너무나 갑작스런 엄마의 행동에 마치 용광로에라도 들어가는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나를 엄마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뜨거운 탕 속에 들어갈 때면 언제나 불알 끝부터 뜨거워진다.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두 손으로 아랫도리를 감싸고 있는 나를 보며 엄마는 욕탕 안이 울릴 정도로 소리 내어 웃는다.
"현아, 네 고추 익을까봐 그래? 호호"
목욕탕으로 오는 내내 엄마를 골려 줘야겠다는 생각만 했는데 아무래도 그럴 틈은 없어 보인다. 지금도 엄마에게 이렇게 놀림만 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욕탕 문이 열리고 영준이 엄마와 영준이가 들어온다.
"모자가 뭐가 그렇게 재밌어?"
"아니에요, 물 좋을 때 얼른 목욕 하세요"
다시 빨랫감에 물을 끼얹는 엄마는 여전히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비록, 새벽 일찍 부터 줄곧 놀림을 당하고 있지만 지금처럼 엄마가 매일 웃는 얼굴이면 좋겠다.
영준이 엄마가 파란색이 짙은 플라스틱 바가지를 뒤집어 놓고는 엄마 옆으로 풀썩 주저앉는다.
"아휴, 현이 엄마는 무슨 빨래를 이렇게 많이 들고 왔어?"
"별로 안 많아요. 금방 하는 데요 뭘"
"아이고, 이게 뭘 금방이야. 한나절은 걸리겠구만"
엄마의 빨랫감을 나누어 드는 영준이 엄마가 영준이를 돌아본다.
"너도 현이랑 같이 탕 속에 들어가 있어"
영준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탕 속에 몇 번 발을 담갔다 꺼내다를 반복하고는 나처럼 두 손으로 아랫도리를 감싸며 탕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탕 속에서 나란히 마주 앉아 있는 영준이와 나는 평소와 다르게 무척이나 어색한 눈빛을 나눈다. 달랑 넷 뿐인 욕탕 안은 영준이 엄마와 엄마가 비벼대는 빨래 소리만 가늘게 울려댈 뿐이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후후 불며 영준이가 먼저 조용히 말을 꺼낸다.
"야, 너 종규랑 수학이한테 말하면 죽는다"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 해오는 영준이를 보고는 하마터면 깔깔대고 크게 웃어버릴 뻔 했다.
"뭘 말해?"
"아씨, 나 여탕 온 거 말하지 말라고 그 새끼들한테"
얼마 전에 빠진 송곳니 자리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나 또한 같은 마음인 냥 영준이 에게 대꾸한다.
"야, 내가 뭐 하러 말 하냐? 너나 말 하지 마"
"나는 말 안 해 새끼야, 그러니까 너도 말 하지 마. 알았지?"
내게 재차 다짐을 받으려는 영준이는 하얀 도복을 입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다.
영준이 엄마와 엄마가 빨래를 끝낼 무렵 어느새 욕탕 안은 동네 아줌마와 키가 큰 누나들로 채워진다. 한 사람 한 사람 욕탕 안으로 더 들어 올 때마다 영준이와 나는 그만큼 움직임이 줄어들고 벗은 몸으로 이러 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을 힐끔거리기만 한다.
영준이가 작은 물보라를 내며 살금살금 다가와 내게 속삭인다.
"야, 너 여탕 많이 와봤어?"
"응, 엄마랑 같이 몇 번 왔어"
영준이는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내게 더욱 바짝 붙어 앉아 내 귀에 가까이 입을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인다.
"야 현아, 근데 여자들은 참 이상하게 생겼다 그치?"
여탕에 온 것이 처음이 아닌 나는 영준이의 그 말에 그저 피식 웃음만 흘려보낼 뿐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를 따라 여탕에 다녔던 나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다만, 동네 아줌마들이 나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놀려대는 것이 싫을 뿐이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영준이가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 본다.
"현아, 숨어"
"응?"
"아씨, 숨으라니까!"
갑작스러운 영준이의 말에 휙 찬바람을 불러들이며 열리는 욕탕 문으로 남자처럼 짧게 머리를 자른 아줌마가 들어온다.
"영준아, 왜 그래?"
내가 다시 영준이를 돌아보며 묻기도 전에 영준이는 이미 탕 속으로 머리를 깊숙이 넣고 보글보글 물거품을 내고 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짧은 머리의 아줌마를 돌아보는 순간 나 또한 영준이를 따라 뜨거운 탕 속으로 얼굴을 머리끝까지 밀어 넣고 말았다. 아줌마가 등 뒤로 돌린 팔을 앞으로 당기는 순간 종종 걸음을 하고 아줌마를 앞지르는 여자 아이가 보였기 때문이다.
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