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홍건적 침입
- 1361.10.20 홍건적 10만 명이 삭주를 침략하다. 홍건적의 자칭 평장인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10여만 명이나 되는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를 노략질하였다.
추밀원부사 이방실을 서북면도지휘사로 삼고, 동지추밀원사 이여경을 보내어 절령(岊嶺)에 책(柵)을 세웠다.
- 1361.10.26 홍건적이 니성(泥城)을 노략질하니, 참지정사 안우를 상원수(上元帥)로, 정당문학 김득배를 도병마사(都兵馬使)로, 동지추밀원사 정휘를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삼았다.
- 1361.11.02 홍건적이 무주(撫州)에 진을 치자 이방실이 중과부적임을 감안해 병력을 모아 후퇴시킨 다음 순천(順川)·은산(殷山)·성천(成川)의 세 주(州)와 양암(陽岩)·수덕(樹德)·강동(江東)·삼등(三登)·상원(祥原) 등 다섯 현(縣)의 백성들과 양곡을 절령(岊嶺)의 목책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 1361.11.03 안우와 이방실이 지휘사 김경제와 함께 각기 휘하의 병력을 거느리고 개주(价州)·연주(延州)·박주(博州) 등에서 적과 계속해서 싸워 이들을 격파하여 300여 명을 죽이자 왕이 안우를 도원수(都元帥)로 임명하였다.
- 1361.11.09 홍건적이 안주(安州)를 습격하자 아군이 패배하고 상장군 이음과 조천주가 전사하였다. 홍건적이 지휘사 김경제를 생포하여 원수(元帥)로 삼고 아군에게 글을 돌려 말하기를 “장차 군사 1,100,000명이 동쪽으로 진군하고 있으니 속히 투항하라.”라고 하였다.
- 1361.11.12 참지정사 정세운을 서북면군용체찰사로 임명하였다. 전 밀직제학 정사도와 김두를 보내어 절령책(岊嶺柵)을 지키게 하고, 평장사 이공수는 죽전(竹田)에 주둔하게 하였다.
- 1361.11.14 이성계가 홍건적의 왕원수(王元帥) 이하 100여 명의 목을 베었고, 1인을 사로잡아 바쳤다.
- 1361.11.16 홍건적이 만여 명의 병력으로 절령의 목책을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니 아군이 크게 무너져 안우와 김득배 등이 단기(單騎)로 도망쳐 돌아왔다.
- 1361.11.18 홍건적의 선봉이 흥의역(興義驛)까지 도달하였다.
- 1361.11.19 복주(안동) 피난. 왕과 공주가 태후를 모시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 임진강을 건너 두솔원에 당도하였는데 수행하는 관리는 오직 시중 홍언박·이암, 평장사 김용·경천흥·유탁, 복야 김일봉, 참정 정세운, 판추밀원사 이춘부, 첨서 김희조, 지추밀원사 유숙·손등, 지주사 원송수, 승선 김속명·홍언유·이색·김달상, 병부상서 목인길, 상장군 김원명, 전 이부상서 홍사범, 전 형부상서( 유연, 간의 김한룡, 장군 이림·장백안(장바얀), 원외 김군정, 형부시랑 곽충수, 정언 박사신, 어사 박대양, 시어사 전녹생 뿐이었다.
- 1361.11.24 개성 피함락
이 날, 적이 경성(개경)을 함락하여 여러 달을 머물러 주둔하면서 소와 말을 죽여서 그 가죽을 펴서 성을 만들고 물을 부어 얼음을 얼리니, 사람들이 올라갈 수 없었다. 또 남자와 여자를 잡아서 굽거나 혹은 임산부의 젖을 구워서 먹으며 잔학한 행동을 마음대로 하였다.
정세운 총병관 및 20만 군사 동원
- 1361.12.15 왕이 복주(안동)에 도착하여 김용을 총병관에서 내리고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하였다.
- 1361.12.19 정세운을 중서평장사로 임명하였다.
- 1361.12.20 염주(鹽州) 사람인 검교중랑장 김장수가 군사를 일으켜 홍건적을 격파하여 유격기병 140여 인을 죽이고 그 고을 사람 최영기를 행재소로 보내 급하게 보고하니, 김장수를 상장군 겸 만호(上將軍 兼 萬戶)로, 최영기를 서해도안무사(西海道安撫使)로 임명하였다.
- 1361.12.30 홍건적 300여 기(騎)가 원주(原州)를 함락시켜 목사 송광언(宋光彦)전사하였다. 홍건적 29인이 다시 안변부(安邊府)에 당도하자 고을 사람들이 거짓 투항하며 음식을 대접하다가 술이 세 순배 돈 후 이들을 모조리 쳐서 죽였다.
강화부(江華府)에서 거짓으로 적에게 항복하고 적의 비장(裨將) 왕동첨에게 음식을 주다가 복병을 모두 죽이니, 적이 감히 경계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 1362.01.17 안우·이방실·황상·한방신·이여경·김득배·안우경·이구수·최영 등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동교(東郊) 천수사(天壽寺) 앞에 주둔하였다.
총병관 정세운이 감독하여 진군하게 하여 여러 장수들이 나아가 경성을 포위하게 하고, 정세운은 물러나서 도솔원에 주둔하였다. 이때 막 눈비가 내리니, 적의 방비가 해이하여졌다. 이여경이 숭인문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휘하의 호군 권희가 이를 정탐하여 알고는 말하기를, “적의 정예병이 모두 여기에 모여 있으니, 만약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경성(개경) 탈환
- 1362.01.18 동틀 무렵에 여러 장수들이 사방에서 전진하여 공격하니, 우리 이성계가 휘하의 친병 2,000명을 거느리고 용기를 내어 공격하여 먼저 성에 올라가 적을 크게 격파하였으며, 적의 괴수 사류, 관선생 등을 베어 죽였다. 적이 달아나면서 서로 짓밟아서 쓰러져 죽은 시체가 성에 가득 찼으며, 머리를 베어 죽인 것이 무릇 십만여 급이었고, 원 황제의 옥새와 금보, 금·은·동으로 만든 도장, 병장기 등의 물품을 노획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도적을 다 없앨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숭인문과 탄현문 2개의 문을 열어두니, 남은 무리 파두반(破頭潘) 등 10여 만이 도망하여 잔당인 파두반(破頭潘) 등 십만여 명은 도주하여 압록강을 건너 가 버리니, 적들이 드디어 평정되었다.
* 이 글은 태조 이성계를 다소 미화한 감이 있다. 모든 장수들이 용감하게 힘껏 싸웠을 것이다.
총병관 및 삼원수 피살
- 1362.01.22 김용이 왕의 명령을 위조하여 안우, 이방실, 김득배를 비밀리에 회유하여 총병관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하필이면 왜 삼원수에게 교지를 내렸을까?)
- 1362.01.24 장군 목충이 군전으로부터 돌아와 말하기를,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을 살해하였는데, 쉬쉬하며 발표하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1362.01.25 여러 장수들에게 〈정세운(鄭世雲)을 살해한 죄를 용서한다는〉 유지(宥旨)를 반포하였고, 곧이어 행재소(行在所)로 나올 것을 독려하여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이렇게 빨리?)
- 1362.01.27 판태의감사 김현, 상장군 홍사우가 와서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에 대해 논한 글을 바치니, 왕이 기뻐하며 김현 등에게 금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
- 1362.02.29 안우가 돌아와 행궁(복주?)에 출두하니 김용이 문지기를 시켜 그를 살해하였고, 사자를 파견하여 이방실과 김득배를 각기 체포하게 하였으며, 만호 박춘이 용궁현에서 이방실을 살해하였다. 김득배는 상주에서 참수당했다.
교서를 내리다
- 1362.03.01 왕이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앞부분 생략-
총병관이 나를 대신하여 모든 일을 집행하는데 아랫사람이 감히 함부로 그를 죽였으니, 이는 나를 무시한 것이다. 윗사람을 능욕하고 침범한 죄보다 큰 것이 무엇이냐? 돌이켜보건대, 안우 등은 나라의 군인이 되어 수년 동안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를 하여 공로를 크게 세웠는데도, 한 순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앞서의 공적을 모두 버렸으니 내가 진실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이다. 비록 그러하나 적을 격파한 공로는 한 때 간혹 있을 수 있는 것이지만 임금을 무시한 죄는 만세토록 용납할 수 없는 바로서, 그 경중은 너무나 명백하여 도저히 덮어줄 수 없는 것이니, 이 자를 석방하고 죽이지 않는다면 후세 사람들에게 무엇으로써 〈옳고 그름을〉 보이겠는가? 그러므로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도원수 안우와 원수 김득배·이방실·민환·김림 등을 법에 따라 처벌한 것이다. 또한 그들의 옛 노고를 생각하여 처자식에게는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들이 지휘하던 높고 낮은 관리들은 모두 유사에게 명령하여 공로를 헤아려 서용(敍用)할 것이다. 악당으로서 공로를 배반하고 손수 정세운을 해친 낭장 정찬은 도주 중에 있으니 사면시킬 수 없으나, 그 나머지 실정을 알면서도 자수하지 않는 자는 모두 죄를 용서하고 사면하니, 전국에 포고하여 모두 사람들이 다 알 수 있도록 하라. 생각건대 너희 장병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힘써서 너희 직분을 넘지 않도록 함으로써, 끝까지 몸을 보존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 1362.04.01 요양행성동지 고가노(高家奴)가 홍건적의 나머지 무리를 공격하여 4,000여 명의 목을 베고, 그 괴수인 파두반(破頭潘)을 생포한 뒤에 사신을 보내 그 사실을 알려왔다.
- 1362.06.23 전법판서 이자송을 원에 파견하여 홍건적이 평정되었음을 알리고, 노획한 옥새 2개, 금보) 1개, 금·은·동으로 만들어진 인장 20여 개 및 금패와 은패를 바쳤다.
1363년 공신
- 1363.11.07 홍건적 격퇴 공신: 경천흥, 송경, 안우경, 이성서, 이순, 우제, 목인길, 유방계, 김광조, 지용수, 조돈, 허자린, 신순, 유계조, 김선치, 최준, 이선, 김두달, 조린, 장신보·황보림, 노철, 김손, 왕백 등을 일등공신으로 삼았다. 한휘(韓暉) 등등을 이등공신으로 삼았다. 병사들을 징발해 군대를 증강시킨 공로를 기록하여, 이인임, 이금강, 임희재, 조민수 등을 이등공신으로 삼았다. .
*제2차 홍건적 격퇴 공신에는 안우, 이방실, 김득배는 없다. 대신에 이들 삼원수는 조선에서 용감한 무장으로 백성을 구한 영웅으로 기록되고 고려16공신 반열에 오르게 된다.
*황보림은 안우 장군의 사위인데 뛰어난 업적으로 일등공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