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나단 에드워즈의 참 부흥과 거짓 부흥 분별 방법론
-「성령의 역사 분별 표지」를 중심으로-
백금산 목사(예수가족교회)
I. 부흥에 대한 바른 이해
부흥에 대한 관심
2007년은 1907년 ‘한국의 오순절’이라 불리는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따라서 한국 교회 전체적으로 또는 교단마다 평양 대부흥 100 주년을 기념식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부흥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고 있다. 그동안 최근 몇 년 동안 '부흥'이니 '영적 각성'이니 하는 말들이 일종의 유행어처럼 사동 되기도 했다. 각종 집회의 제목에 '부흥', '리바이벌', '영적 대각성'이라는 말이 단골 메뉴로서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부흥'이라는 제목의 복음송이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곡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의깊게 살펴보면 사람마다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내용이 의미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부흥'이라는 용어
어떤 사람들은 '부흥'이란 말을 일종의 '전도 집회'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전도집회라고 하는 용어가 약간 식상하다고 생각한 이들이 전도집회라는 이름대신에 약간의 신선함과 유행성을 고려하여 '전도집회'라는 이름대신에 표현만 바꾸어서 '영적 대각성 집회'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흥'을 '부흥회'와 동일시하고 있다. 그동안 전통적으로 한국교회에서 1년에 1회 내지 2회씩 주로 봄. 가을로 '심령대부흥집회'를 개최했다.
전통적인 이러한 '심령부흥회'는 성도들의 신앙 열심을 자극하기 위한 교회의 연례적인 전통적인 집회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부흥'이란 단어가 '교회성장'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모교회가 개척 몇 년만에 크게 부흥했다'라고 사용될 때의 '부흥'이란 단어는 '모교회가 개척 몇 년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었다'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교인수의 증가를 부흥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다. 이처럼 '부흥'이라는 용어는 쓰이는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우리 일상의 가장 대표적인 용례가 되고 있다.
전통적으로 부흥회 집회에 대한 거부개념과 80년대의 성경공부 모임의 한계
부흥 혹은 영적 각성이라는 용어가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한국교회의 지난 경험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선교 20주년이 조금 지난 1907년 1월 2-15일까지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4개 장로회 연합으로 개최된 평안남도 겨울 사경회 때 일어난 소위 ‘한국의 오순절’ 사건을 기점으로 이후 평양과 전국적으로 확산된 대부흥을 경험했다. 1907년의 대부흥은 한국교회의 오순절에 해당되는 경험으로서 지금까지도 한국교회의 영성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1907년의 부흥경험은 지금까지도 알게 모르게 대다수의 교회의 전통을 형성하는 몇 몇 중요한 요소를 우리에게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무엇보다 모든 한국교회의 필수집회형태인 '새벽기도회'의 정착과 연중 '부흥회'의 개최 등은 1907년의 부흥경험으로부터 비롯된 전통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부흥집회'가 시간을 지나면서 점점 순기능보다는 많은 부작용과 문제점을 드러내는 '역기능'을 가지게 되자 대략 1980년대부터 젊은층 들과 지성인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진 '부흥회'보다는 각종 성경공부프로그램들이 교회 안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부흥회'는 점차 시들해지거나 각종 다양한 세미나와 강좌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심령부흥회'가 주로 감정적인 자극을 위주로 하는 집회의 형태였다면 최근까지의 '소그룹 성경공부'는 다분히 지성적인 활동을 위주로 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룹성경공부'니 '제자훈련'이니 하는 프로그램이 20여년을 지나는 동안 교회 안에 메마른 지성주의를 가져오게 되자 이제 교회는 또다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었고, 이러한 교회 안에 정체성에 대한 탈출구로서 좀더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경배와 찬양'형태의 '찬양집회'와 예배의 각종 의식적 요소를 강화하는 '예배갱신운동'이나 현상중심의 몇 가지 활동들 즉 '제 3의 물결운동인 '빈야드 운동'이나 빈야드의 한 갈래로서 크게 현상적인 면이 부각되었던 '토론토 블레싱'등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또한 이외에도 ‘기윤실’ 이나 ‘경실련’ 운동 같은 기독교 사회운동이나 ‘내적 치유’같은 심리적 운동 또는 전도, 새신자 정착, 교회 성장 운동 등의 실험이 지금도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이 무엇인가 침체된 교회의 갱신과 회복과 변화를 위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전통적인 의미에서 ‘부흥’이라 말할 수는 없다. 전통적인 교회의 부흥 경험과는 다른 경험들이다.
부흥에 대한 정확한 개념과 이해가 필요한 시점
따라서 우리는 '부흥'에 대한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규정할 필요가 있다. '부흥'이란 용어에 잘못 면역되어 '부흥'의 깊고 심원한 의미를 바르게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안타깝고 통탄할 일인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남용 혹은 오용하고 있는 ‘부흥’에 대한 참된 의미를 고찰해 보도록 하자. 부흥이란 무엇인가? 를 정의하기 전에 먼저 부정적으로 무엇이 부흥이 아닌지를 살펴보는 것이 유익하다. 왜냐하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부흥이 아닌 것을 부흥이라고 잘못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흥에 대한 오해내지 피상적인 견해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부흥의 본질을 선명하게 알 수 있다.
교회의 외적 성장 즉 교인수 증가가 부흥은 아니다
첫째로 부흥은 교회성장 즉 교인수의 증가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의 수가 갑자기 많이 늘어나게 될 때, 그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흥이란 단어만 부흥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뿐 실제로는 교회의 교인수가 많이 늘었다는 것이다. 물론 부흥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흥과 회심자의 증가, 부흥과 교인수의 증가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부흥의 결과로 전도가 활발하게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이 회심하여 교회에 들어오는 일이 생기고, 그 결과로 교인수의 증가가 일어난다. 그러나 거꾸로 교인수의 증가라는 결과를 보고 무조건 교회가 부흥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잘못이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가 부흥을 경험하게 되면 교회가 교회답게 된다.
즉 비유컨태 잠자던 교회가 깨어나는 것과 같고, 죽은 것처럼 보이던 교회가 생명력이 충만한 상태가 된다. 이와같이 교회가 깨어나고(영적각성), 교회가 살아나게 되면 이 영향의 여파로서 활발한 전도가 일어나게 되고 수많은 불신자들이 회심하게 됨으로 교회 안에 가입하게 되고 그 결과로서 교회의 교인수가 증가 하게 된다. 따라서 부흥의 결과로서 교인수의 증가가 일어난다. 그러나 교인수의 증가를 ‘부흥’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은 교인수의 증가는 부흥이 아닌 다른 이유로도 얼마든지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부흥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게 되는 세속화를 통해서도 교인수는 증가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과 그 이후 기독교 국교화로 로마제국 치하의 교회는 엄청난 수의 교인들이 늘었다. 그러나 이것은 참된 부흥의 결과로 인한 회심의 결과로 교인수가 증가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세속적인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오히려 교회 안으로 대거 몰려온 일이 생긴 것이다. 진짜 거듭난 사람들의 증가로 교인수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않은 세상에 있던 불신자들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 교회 안의 불신자로 위치이동을 한 결과로 교인수가 증가하는 경우였다. 이처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여러 가지 이유로 가시적 교회 안에서는 일시적으로 교인수가 증가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다.
기존신자들의 위치이동으로 인한 교인수 증가가 부흥은 아니다.
또는 교인들의 수평이동의 결과로 교인수가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이미 다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교회를 옮기는 결과에 의해서 교회의 교인수가 증가하는 경우다. 지금까지 수평이동에 의한 교인수의 증가에서 가장 중요한 몫을 차지한 것은 도시화, 아파트화, 신도시화에 따른 인구 이동이었다.
첫째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에서 이미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도시에 들어오면서 도시에 있는 교회에 골고루 분산되지 않고 특정한 몇몇 교회로 몰려들면서 교인수가 증가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는 도시의 특정지역이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면서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아파트단지로 이사 가면서 아파트 단지에 있는 교회에 집중적으로 몰려들면서 교인수가 급성장하는 수가 있다. 서울에 있는 강남지역이 바로 대표적인 경우다. 최근 10-30년 안에 급성장한 대형교회들은 대부분이 강남의 밀집된 아파트 단지에 위치해 있는 교회들이다.
셋째는 새로운 신도시가 형성되면서 이미 믿던 신자들이 신도시로 이사 가면서 신도시 지역의 몇 몇 교회가 교인수가 급증하기도 한다.
왜 같은 도시, 같은 강남지역, 같은 신도시에 있는 교회인데 어떤 교회는 교인수가 더욱 증가하고, 또 어떤 교회는 그렇지 못하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을 것이다. 수평 이동하는 교인들이 선택하는 교회의 기준은 무엇일까? 담임 목사님의 설교가 재미있어서? 알아듣기 쉬워서? 감동적이어서? 진리를 바르게 선포해서? 아니면 교회의 건물이 크고 좋고 주차 시설과 각종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는 복합시설을 갖춘 교회여서, 아니면 수많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다양한 영적, 사회적, 심리적 필요를 채움 받을 수 있는 교회여서, 교인수가 많아서 자신을 깊이 드러내지 않아도, 헌신하지 않아도 적당히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교회여서인가? 아니면 교회의 예배 분위기가 좋고, 소그룹 모임이 활성화되어 있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전도를 열심히 하는 교회이기 때문인가? 당연히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을 두루 잘 갖춘 교회일수록 수평 이동하는 교인들이 빠른 시간 내에 더 많이 모여들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도시교회에서는 갑자기 뻥튀기 하듯이 교인수가 증가해서 대형교회가 되는 수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위 돈이 돈을 벌어주듯이, 또는 눈덩이가 구르면서 점점 더 많은 눈을 흡수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대형교회가 되면 교인수가 더욱 증가할 가능성이 더욱 커지게 된다. 사실 소수의 교회가 갑자기 교인수가 늘어나서 대형교회가 되는 이면에는 다른 다수의 소형교회들이 문을 닫는 일과 맞물려서 진행되기도 한다. 대형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이 들어서게 되면 수많은 구멍가게들이 문을 닫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와같은 기존신자의 위치이동에 의해서 교인수가 증가하는 것을 부흥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단지 교인들의 수평이동으로 인한 교인수의 증가로 교회가 외적으로 수적으로 성장한 것일 뿐이다. 또한 교인수의 크기가 반드시 건강한 교회의 척도는 아니다. 건강한 대형교회가 있을 수 있고, 병든 소형교회가 있을 수 있다. 반대로 건강한 소형교회가 있을 수 있고, 병든 대형교회가 있을 수 있다. 몸무게가 몸의 건강 척도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부흥회 개최가 부흥은 아니다.
둘째로 부흥회를 개최하는 것이 부흥은 아니다. 사람이 부흥회를 개최할 수는 있다. 사람들이 부흥회의 시간과 장소와 부흥회의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는 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부흥집회에 초청할 수는 있다. 그리고 부흥회의 순서를 평상시의 예배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행하면서 기존 예배와는 차별성이 있는 집회분위기를 연출할 수는 있다. 평상시는 조용하고 엄숙하게 예배를 드리던 교회가 부흥회를 하면서는 박수도 치고 열정적으로 찬송을 부르기도 할 수 있다. 평상시 예배시간에는 한 시간의 예배를 지루하게 느끼던 성도들이 2-3시간씩 진행되는 부흥집회를 잘 견뎌낼 수도 있다. 평상시 30분의 설교를 지루해 하던 사람들이 부흥강사로 초청된 사람의 간증담이나 설교를 장시간 들으면서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일시적인 감동이나 깨달음을 느낄 수도 있다. 이 모든 일들은 교회가 계획하고, 진행하고 목표로 한 어느 정도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집회가 곧 부흥은 아니다.
부흥의 본질적 의미
그렇다면 ‘부흥’ 혹은 부흥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영적 각성’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부흥이라 부를 수 있는가? 부흥에 대한 정의는 여러 가지로 내릴 수 있겠지만 필자는 부흥을 ‘성령의 부으심이 교회위에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나는 사건’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즉 부흥에 대한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의 요소를 고찰해 보아야한다.
(1) 부흥의 내용은 무엇인가? 부흥이 일어나면 어떤 체험,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2) 부흥은 누구에게 일어나는 것인가? 부흥의 대상은 누구인가?
(3)부흥은 누가 일으키는 것인가? 부흥의 주체는 누구인가?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1)교회위에
(2) 주권적으로
(3)성령을 부어주시는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부흥은 성령충만, 하나님의 임재 충만이다
첫째, 부흥의 내용은 무엇인가? 부흥은 내용면에서 성령 충만, 성령의 부으심이다. 다른 말로하자면 부흥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것이다. 성령이 평상시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역사하시면 하나님의 임재를 평상시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체험하게 된다. 부흥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로 통한 하나님의 임재 충만, 그리스도의 임재 충만으로 생기는 일들이다. 성령이 교회위에 한량없이 부어지는 부흥이 일어날 때,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과 거룩을 새롭게 체험하게 되며, 죄악에 대한 깊은 자각과 회개를 경험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감격을 회복하며,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과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구령의 열정이 불붙게 된다.
성도 한 개인이 부름받고, 중생하고, 회심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고, 거룩하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모든 일들은 전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 교회가 하나님을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교제하고 봉사하며, 세상에 전도하고 선교하는 모든 일들도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부흥이라 불리는 시기 동안은 성령의 역사가 평상시보다는 아주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즉 부흥은 성령이 교회 안에 역사하시되, 미풍처럼 부드럽게, 이슬비처럼 소리 없이, 화롯불처럼 은근하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폭풍처럼, 소나기처럼, 산불처럼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부흥이 특별한 것은 부흥이 일어나면 교회가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성령의 전혀 새로운 일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평상시에 경험하는 일들을 더욱 크고 강하게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도 교회는 예배, 말씀, 기도, 교제, 전도, 선교 등의 모든 일을 성령의 역사를 통해 행하게 된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이런 모든 일들에 생기가 없고, 마치 잠든 것 같고, 죽은 것 같은 침체를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부흥이 일어나 교회가 성령의 충만, 성령의 부으심을 경험하게 되면 예배는 예배답게, 설교는 설교답게, 기도는 기도답게, 교제는 교제답게, 전도는 전도답게 되는 일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교회가 경험하는 부흥의 기간은 성령이 교회 안에 강하게 역사하는 시기라는 측면에서 교회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소나기’를 경험하는 ‘성령의 장마철’이라 부를 수 있다.
부흥은 교회위에 임하는 것이다
둘째, 부흥은 누구에게 일어나는 것인가?
부흥은 대상 면에 있어서 일차적으로 세상이 아니라 교회가 경험하는 사건이다. 부흥은 교회위에 성령이 충만히 임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령 충만 받음으로 그 영향력이 세상에까지 미치게 된다. 따라서 부흥이 일어나면 교회만이 아니라 세상도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부흥은 어디까지나 세상이 아니라 교회가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부흥은 성도 한 개인이 성령 충만을 경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집단적으로 성령 충만을 경험하는 사건을 말한다. 부흥은 특정한 한 교회나 한 지역 내의 여러 교회 혹은 특정한 한 국가나 대륙이나 혹은 여러 대륙에 걸친 교회위에 성령이 일정기간동안 엄청나게 부어지는 것을 말한다. 태풍을 상상해보라. 태풍이 크면 클수록 태풍이 미치는 범위가 넓어지게 된다.
부흥도 마찬가지다. 부흥이 크면 클수록 부흥이 교회에 미치는 범위가 커지게 된다. 성령 충만, 성령의 부으심 범위가 크면 클수록 즉 부흥의 범위가 크면 클수록 교회사에서 더 큰 부흥 즉 대부흥이 된다. 18세기의 대부흥은 잉글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 등 영어권 전 지역에 일어난 큰 부흥이었다. 1907년의 평양 대부흥은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은 되었지만 부흥의 크기는 곧 평양을 벗어나서 한반도 전 지역의 있는 교회위에 성령의 부으심이 있는 전국적인 부흥이 되었다. 물론 교회가 전체적으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시기에도 개인적으로 성령충만, 성령의 부으심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성령충만 경험을 부흥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부흥은 교회의 집단적인 성령 충만 체험을 말한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세째, 부흥은 누가 일으키는가? 주체 면에서 볼 때 부흥은 사람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일어난다. 따라서 사람이 인위적으로 부흥회를 개최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흥을 주시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사람이 부흥회를 개최할 수는 있다. 사람들이 부흥회의 시간과 장소와 부흥회의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흥을 만들어 낼 수 는 없다. 부흥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다. 부흥이 일어나는 시기도, 부흥이 일어나는 장소도, 부흥시 사용되는 사람도, 부흥이 일어나는 형태도 모두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자신의 주권으로서 결정하시는 것이다.
교회사의 모든 부흥은 오순절의 반복
우리가 내린 이러한 부흥의 정의에 대한 성경적인 모델은 바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이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교회위에 성령이 충만히 부어지신 사건이다. 그러므로 교회사에 나타난 수없이 많은 부흥은 (한국의 1907년 부흥을 포함) 곧 오순절의 반복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이안 머리는 <오순절 성령 강림 오늘도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는가?>(Pentecost-today: The Biblical Basis for Understanding Revival)라는 책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이 다시 반복될 수 있는가? 하는 입장에 따라 교회사에서 부흥에 대한 3가지의 견해가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첫째는 부흥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반복이라는 가능성을 부인하는 견해인데 대표자는 아브라함 카이퍼(1837-1920)이며 대부분의 화란 개혁파가 취하는 입장이다.
둘째는 부흥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반복이지만 이러한 반복은 인간적인 수단과 노력에 의해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보는 부흥관이다. 이러한 견해의 대표자는 찰스 피니(1792-1875)이며, 교회사에서 볼 때 1860년대 이후부터 현대의 많은 대중전도자들이 이러한 피니식 부흥관을 따르고 있다.
셋째는 부흥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반복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부흥이 인간의 수단과 방법에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일어난다고 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부흥의 대표자는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이며 이러한 부흥관은 1860년 이전까지 미국의 제1차 대각성, 2차 대각성, 1857-59 부흥 때까지의 전통적인 견해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전통적 부흥관의 원조이며, 교회사 최초의 부흥신학자이자, 교회사 최고의 부흥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II.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 나타난 참된 부흥 분별법
참된 부흥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관 중에서도 참된 부흥과 거짓 부흥을 분별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있다. 중요한 것일수록 모조품이 많다. 그래서 가짜가 흔한 세상일수록 진짜를 분별하는 법이 중요하다. 교회 내에서도 마찬가지다. 부흥은 본질상 많은 체험을 동반하게 된다. 체험적 신앙은 부흥의 본질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다. 그러나 신자들이 경험하는 모든 체험을 참된 신앙 체험 혹은 부흥 체험이라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우리 신앙의 영적 체험에도 가짜와 진짜가 있다. 즉 성령에 의한 체험일 수도 있고, 악령에 의한 체험일 수도 있다. 또는 인간 본성의 법칙에 의한 자연적인 체험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체험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성도들의 체험가운데서 어떤 체험을 과연 진정한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만일 교회가 어떤 체험을 했다면 이 체험이 과연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악령의 역사에 의한 것인지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이는 교회의 건전한 신앙 생활을 위한 참으로 중요한 질문이다. 1741년 발간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성경적이고도 분명한 대답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교회사의 명작이다.
이 책이 발간된 역사적 배경
조나단 에드워즈(1703-1758)가 살았던 18세기는 교회사적으로 위대한 부흥시대, 영적 대각성의 시대였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영국의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 웨일즈의 하월 해리스와 다니엘 로울랜드 등과 함께 이러한 18세기 대각성의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다. 특히 에드워즈는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메사추세츠주 노샘프턴에서 약23년 간 목회 기간 중(1727-1750) 2번의 부흥을 경험했다. 에드워즈의 탁월한 점은 자신이 체험한 이러한 부흥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변호하는 부흥에 대한 일련의 중요한 저술들을 쏟아냄으로써 부흥신학에 대한 기초를 놓았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1737년에「놀라운 회심이야기(A Faithful Narrative)」, 1741년에「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론(The Distinguishung Marks」, 1742년에 「균형잡힌 부흥론(Some Thought concerning the Revival」, 1746년에 「신앙 감정론(The Religuous Affections)」등의 연속적인 부흥 신학 시리즈를 발간함으로써 교회사에서 최초로 부흥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구속사적 의미, 그리고 부흥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영적 체험의 범위와 깊이 등에 대해 다각도로 분석하고 적용하는 부흥신학의 원조가 되었다.
에드워즈가 체험한 첫 번째 부흥은 1734-35년에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샘프턴 교회를 중심으로 코네티컷 강변에 있는 마을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이었다. 에드워즈는 자신이 경험한 이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에 대한 이야기, 즉 이 부흥 중에 자신의 교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회심에 대한 이야기를 1737년 「놀라운 회심에 대한 신실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발간했다. 이 책은 18세기 대부흥 운동과 관련된 공식적인 첫 번째 부흥문서가 되어 대서양 양쪽 영어권 지역에서 18세기 대각성 운동의 불씨 역할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0-42년, 생애 두 번째로 오늘날 우리가 제1차 대각성 운동이라 부르는 놀라운 부흥을 체험했다. 1차 대각성 운동은 규모면에서 약4-5년 전의 코네티컷 부흥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부흥이었다.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은 말 그대로 코네티컷 강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부흥이라면 1차 대각성 운동은 식민지 13개 지역 전체에 영향을 미친 부흥이었고, 특히 뉴잉글랜드 전 지역에 깊은 영향을 미친 부흥이었다.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중심 인물은 영국인 조지 휫필드(1714-1771) 였다. 1735년 부활절 몇 주 후에 일어난 21살 조지 휫필드의 회심은 영국, 웨일즈, 스코틀랜드, 미국등 18세기 영어권 지역 전체 대부흥의 신호탄이자 도화선이 되었다. 휫필드는 회심이후 약 34년간 영국 전역과 웨일즈는 물론이고, 미국을 7번 방문, 스코틀랜드를 14번 방문하며 약18,000여회의 설교를 통해 영어권 전체 지역 부흥의 불씨가 되고, 활활 타오르는 부흥의 불길의 중심이 되었다. 미국의 제1차 대각성 운동은 휫필드의 7번에 걸친 미국 방문 중에서 두 번째 미국 방문 기간(1739.10.30-1741.1.16, 25-27세) 중에 일어났다. 휫필드가 춘계, 하계, 추계 때 13개 식민지 전체를 돌며 순회 설교를 하는 동안 성령의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났다. 1740년 가을에는 미국 동북부 6개 지역을 통칭해서 부르는 뉴잉글랜드 지방을 73일동안 800마일을 여행하면서 130회에 걸쳐 설교를 했다. 휫필드의 이 뉴잉글랜드 순회 설교 기간중 뉴잉글랜드 지방에서도 부흥의 불길이 옮겨 붙기 시작했고, 1740년 10월 7일부터 4일간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노샘프턴에 머물면서 설교를 하는 동안 노샘프턴은 다시금 옛날 1734-35년때의 부흥때와 같은 은혜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노샘프턴을 떠난 휫필드는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대학에서도 설교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큰 감화를 받았다. 이 때 휫필드의 설교로 큰 감화를 받은 학생중의 하나가 후에 유명한 인디언 선교사가 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였다. 이후 휫필드는 1741년 1월 16일 미국 2차 방문을 마치고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휫필드의 뒤를 이어 뉴잉글랜드 지방에 부흥의 불길을 계속해서 부채질한 사람은 길버트 테넌트(1703-64)였다. 길버트 터넨트는 휫필드가 1740년 10월에 뉴잉글랜드 지방에 붙여놓은 부흥의 불길을 1740년 12월부터 약 3개월 동안 강력한 설교를 통하여 더욱 활활타게 만들었다. 길버트 터넨트의 사역은 많은 회심자를 얻는 결실을 가져왔고, 부흥의 열기를 더 한층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한편 환상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는 등의 열광주의적인 반응으로 인한 부작용도 생겨나면서 사람들 속에 휫필드의 순회설교 때 싹텄던 반부흥주의 정서를 더욱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렇게 휫필드와 길버트 터넨트 등의 사역으로 불붙기 시작한 뉴잉글랜드 지역의 부흥은 여러 지역 목회자들에 의해 1741년 4월에는 20여개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여름에는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기간 중 에드워즈는 여러 지역으로 순회설교를 다니게 되었고, 특히 1741년 7월 8일 앤필드에서 행한 ‘하나님의 진노의 손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설교는 이후 에드워즈의 가장 유명한 설교로 알려지게 되었다. 1741년8-9월에 부흥은 최고봉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나친 열광주의로 인해 오히려 부흥에 찬물을 끼얹고 반부흥주의 노선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강화시켜주는 사건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열광주의를 부추킨 대표적인 사람이 제임스 데이븐포터(James Davenport, 1716-57)였다. 데이븐포트는 아주 좋은 집안 출신이었다. 할아버지는 뉴 헤이븐 식민지의 설립자요 목회자였으며, 아버지는 코네티컷주의 존경받은 목회자요 예일대 이사를 역임하기도 한 사람이었다. 데이븐포트는 1732년 16살에 예일대를 졸업하여, 1738년 22살 때 롱아이스랜드의 사우스홀드(Southold)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740년 휫필드의 놀라운 성공 소식에 깊은 열등감을 가진 그는 교인들을 모아놓고 24시간 연속집회를 가졌다. 여기서부터 드디어 문제가 터졌다. 데이븐포트는 회심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형제라 부르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웃들이라 불렀다. 이후 이웃마을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24살 때인 1740년 봄 목회지를 떠나 6월에는 회심하지 않은 목사들의 위험성을 강도높게 경고하는 사역을 하고 있었던 장로교 부흥사 길버트 테넌트와 그리고 10월에는 휫필드와 개인적인 교제를 나누었다. 1741년 한여름 하나님이 자신을 더 큰 일을 위하여 목회지를 떠나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지면서 코네티컷 지역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따라 여러 지역을 차례로 순회하면서 데이븐포터는 목사들에게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확인하며 회심여부를 판단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목사들에 대해서(대부분이 그랬다) 공개적으로 회심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며, 회중들로 하여금 이러한 목사를 무시하며, 교회에서 분리되어 나올 것을 촉구했다. 여름이 끝나고 데이븐포트는 겨울을 나기위해 사우스홀드로 돌아갔다. 데이븐포터의 이러한 행동은 사려깊은 사람들로 하여금 “부흥이 통제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것들이 부흥의 참열매라면 심지어 부흥이 방어될 수 있을까?” 하는 큰 우려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1741년 9월 예일대 졸업식에서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분별 방법’을 설교하기 직전의 상황이었다.
데이븐 포터가 떠난 지 며칠 뒤인 1741년 9월 10일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일대 졸업식에서 요한일서 4:1절을 본문으로 당시 뉴잉글랜드 지방의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에드워즈는 이 설교에서 부흥시 발생하는 강력한 체험, 특히 부흥에 대한 열광주의적인 극단으로 인해 초래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보고 부흥 자체까지 반대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밝혔다. 오히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령의 역사에 대한 증거를 살펴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참된 부흥임을 강조했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설교에 대해 예일대 학생들은 열렬한 반응을 보였으나 교수진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이후 부흥운동에 대한 친부흥파와 반부흥파의 분열을 예고하는 전조이기도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 바로 이 예일대 졸업식 설교를 확대하여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보스턴에서 발간된 초판은 다음과 같은 긴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성령의 역사의 분별 표지: 특히 부흥에 동반된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여 최근 이 지역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타났던 비범한 일에 적용함.」(The Distinguishing Marks of a Work of the Spirit of God, Applied to That Uncommon Operation That Has Lately Appeared on the Minds of Many of People of this Land: With a Particular Consideration of the Extraordinary Circumstances with Which This Work Is Attended,)
이 책의 구조와 주제
이 책은 일반적인 청교도 설교 구조와 같이 본문-교리-적용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제1부는 본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으로서 이 책 전체의 서론에 해당된다. 2부와 3부는 이 책의 본론에 해당되는데 2부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도 없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중립적인 증거 9가지를 다룬다. 2부에 기록된 9가지 현상을 가지고서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반대로 2부에 기록된 9가지 현상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말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3부는 요한일서 4장에 기초해서 성령의 역사임을 입증할 수 있는 5가지 증거를 밝힌다. 이러한 성경적인 5가지 증거야말로 확실한 성령의 역사임을 입증해 줄 수 있는 긍정적인 증거다. 4부는 이 책의 결론에 해당되는데 본론에서 발견한 진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3부에서 발견한 5가지 성경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분별기준에 근거해 볼 때, 1741년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부흥은 성령의 역사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에서 당시 부흥에 대해 찬성과 반대 혹은 중립 등의 여러 가지 입장을 취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없는 부정적 혹은 중립적인 기준 9가지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의 1부에서 성령의 역사 분별 기준으로서의 부정적인 9가지 증거들 혹은 중립적인 9가지 분별기준을 말한다. 이것은 당시 부흥반대주의자들이 부흥을 반대하는 근거로 사용한 중요한 기준들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부흥반대주의자들이 부흥을 반대하는 데 사용한 이러한 기준들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바른 기준점들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오히려 이러한 기준들은 중립적이다.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도 이러한 일들은 일어날 수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도 이러한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만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또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를 구분할 수는 없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중립적인 분별기준 9가지를 먼저 소개한다.
첫째, 아주 비범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만 가지고는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시 일어나는 비범하고 특별한 일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일을 무조건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옛날에 없었던 일이라고 무조건 반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새로운 일들을 행하실 수 있다. 성경의 계시역사가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의 초림과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 등은 모두 이전에 비해 비범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둘째, 몸에 특별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눈물을 펑펑쏟고, 큰 소리를 지르며, 실신하는 것 등이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시 발생하는 이런 몸의 특이한 현상을 가지고서 이것이 참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몸의 특별한 현상만 가지고는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없다. 몸과 마음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몸이 마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마음이 몸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법이다. 우리는 정신적인 충격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사람은 너무나 비극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실실할 수 있다. 또한 너무나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실신할 수도 있다. 따라서 큰 영적인 체험을 하면 몸에도 영향이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를 들어 지옥을 체험했을 때, 몸에 어떤 현상이 생길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체험했을 때 몸에 어떤 현상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몸에 어떤 특별한 현상이 생겼다고 해서 이것만을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다. 혹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라고 분별할 수는 없다.
셋째, 기독교에 대한 이슈가 사회에 공론화되는 것이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부흥시 일어난 현상으로 사회가 온통 소란스럽게 된다는 것을 들어서 부흥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판단을 잘못된 것이다. 부흥으로 인해 교회는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초대교회 때도 그랬다. 교회가 변화될 때, 교회의 변화가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오히려 정상적인 것 아닌가? 부흥이 일어나면 사회에도 이슈가 된다.
넷째, 상상력에 큰 영향을 받는 것이다. 즉 환상을 보거나 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어떤 강력한 영향을 받을 때, 상상력이 크게 자극된다. 따라서 상상력이 크게 자극받아 심상에 어떤 강력한 인상이 새겨지고 때로는 환상을 보는 것만 가지고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는 성령의 역사인지에 대한 분별 기준을 삼을 수 없다.
다섯째, 모범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다. 부흥을 반대하는 어떤 사람들은 부흥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고 따라하기 때문에 동일한 일이 일어나는 것임으로 이것은 참된 성령의 역사일리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이를 부인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영향을 받는 것은 정상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는 것만 가지고서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되지 못한다. 성경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선한 행동을 본받으라는 것을 적극 권면하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모범에 영향을 받는 것은 인간 행동의 합리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이다.
여섯째, 때로 지혜롭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 속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뒤섞여 있다. 또한 구원받은 한 개인 안에도 여전히 죄의 세력은 잔존하고 있다. 따라서 부흥시에 어떤 사람이 때로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하고, 때로 실수를 한다고 해서 부흥의 모든 현상들을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도매금으로 부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심지어 베드로 사도까지 실수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또한 고린도 교회 안에도 많은 문제가 있지 않았는가?
일곱째,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범하는 것이 분별기준이 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의 실수하는 것을 보니 잘못된 것 아닌가? 아니다. 은혜 받은 사람도 잘못할 수 있다. 그것만 가지고 전부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한 사람의 심령 속에 은혜와 죄가 공존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덟째,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아니다. 가룟유댜를 보라. 초대교회의 니골라를 보라. 때로 부흥운동의 지도자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세상으로 나가거나 이단으로 변질되는 사태가 있다고 해서, 전체 부흥운동을 매도해서는 안된다.
아홉째, 많은 목회자들이 율법설교, 지옥설교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아니다. 지옥이 실재한다면 어떻게 무덤덤하게 지옥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지옥이 있다면 겁을 주어서라도 지옥을 피하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불타는 집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이 사실을 알려 줄 때, 어떻게 말해줄 것인가? 이것은 물론 율법만 설교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율법에 대해, 죄와 지옥에 대해 설교하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에드워즈의 중립적 증거는 부흥반대주의자와 부흥열광주의자의 양극단에 대한 효과적 방어책이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이러한 부정적 혹은 중립적인 증거 9가지는 사람들에 의해서 두 가지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증거들이 나타날 때 너무나 쉽게 이런 증거를 기준 삼아서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지성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만 가지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현상들은 성령의 역사가 없어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령의 역사에도 이러한 현상들이 동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면 무조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열광주의자들이다. 이러한 것만 가지고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은 꼭 성령의 역사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드워즈가 제시한 이러한 9가지 기준은 성령의 참된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으로서는 ‘부정적인 기준’들이며, 또한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립적인 기준’들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증거들 혹은 5가지 바른 분별기준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바른 기준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2장에서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바른 기준 5가지를 소개한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보다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이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4장에서 발견한 성령을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5가지를 제시한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반드시 동반되는 일이다. 사탄은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9가지 증거들은 일으킬 수 있지만, 긍정적인 5가지 증거들은 만들어 낼 수 없다. 이러한 5가지 긍정적인 증거들은 오직 성령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어떤 체험 혹은 어떤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입증할 수 있는 5가지 분별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높인다. 성령은 예수님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께 순종하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예수님 충만이다. 예수님 충만하지 않은 성령 충만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성령운동이 일어날 때, 어떤 외적인 현상이나 체험에만 몰두하고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사역이 강조되지 않을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둘째, 성령은 성경을 높여준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사랑하게 해 준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게 만든다. 만일 성경을 무시하고, 성경을 부인하는 영이 있다면 그는 분명 성령과는 다른 영이다. 성경이외의 다른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만드는 각종 운동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신비주의가 바로 이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반드시 성경 충만임을 명심하자. 성령과 성경은 언제나 함께 간다.
셋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 즉 교리와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성경 속에 나오는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간다. 만일 어떠한 운동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무시하게 만든다면, 또한 기본적으로 교리와 신학에 대한 거부감을 조장시킨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보기 힘들다. 교회사에서 성령의 역사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종교개혁시기와 부흥시기에는 성경의 주요 진리, 기독교의 중요 진리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신앙고백도 함께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진리 충만이요, 교리 충만이요, 신학 충만이라 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넷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로 이끈다. 그리고 거룩을 추구하도록 한다. 성령은 우리가 깨달은 진리, 성경, 예수님을 통하여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한다. 하나님을 닮도록 한다. 성령은 성결의 영이기도 하다. 만일 어떤 운동이나 현상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불러일으키고, 더욱 성결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은 곧 회개충만, 거룩 충만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다. 성경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는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야한다. 거룩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사랑의 역사로 이어진다. 성령 충만은 곧 사랑 충만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함께 결합되어 있다. 만일 이러한 것들 가운데 특정한 어떤 것만을 주장하고 다른 요소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역사인 사랑 충만한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모두를 가지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관심 없는 종교중독자는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인간만 사랑한다고 하고, 하나님 사랑 없는 인본주의도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요소만이 아니라 필수 요소들이 모두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예수님 충만, 성경 충만, 진리 충만, 거룩 충만, 사랑 충만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운동이나 현상도 우리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분별할 수 있다.
부흥이 성령의 역사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3장의 결론부분에서 지금까지 말한 진리를 당시 부흥과 관련해서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즉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 부흥에 대해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 부흥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한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적용
첫째,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성경의 분별기준으로 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다. 분명 요한일서 4장에서 사도요한이 말하는 성령의 분별 기준으로 볼 때, 현재의 부흥은 분명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역사가 틀림없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반대사유는 부흥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특이한 행동을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이에 대해 죄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가지거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가졌을 때, 이런 외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또한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현재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 드러나는 실수를 문제 삼기도 한다. 에드워즈는 현재의 부흥에 이러한 사소한 실수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실수만을 가지고 부흥 전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창조사역과 이스라엘 백성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드시지 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때로는 부흥 때에 젊은이들이 많은 영향을 받는데, 젊은이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혈기 많고 실수를 잘하는 때라는 점이다. 때로는 목회자들이 바른 지도를 해 주지 않아서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부흥시 일어나는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은 시간과 경험이 많이 해결해 준다. 요컨대 부흥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들로 인해서 부흥전체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려고 하다가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부흥에 대해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적용
둘째로 에드워즈는 현재의 부흥에 대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고 있는 중립파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함을 경고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해온 역사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때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다.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 때도 유대인들이 거부했다. 따라서 현재의 부흥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침묵하고 있는 것은 곧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걸림돌만 볼 것이다. 사실은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것에 대해 부지런히 조사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중립을 표방한 사실상의 거부나 마찬가지다.
부흥에 대해 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적용
셋째로 에드워즈는 부흥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현재의 부흥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적용한다. 부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일반적으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특별히 3가지를 조심해야한다.
첫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내적 충동이나 직통계시나 예언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은혜와 은사를 구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은사는 불신자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은사를 받고도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은 바로 은혜다.
은사는 은혜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지 못한다면 은사는 무익하다.
두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목사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되었지, 공부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아이들에게 공부시킬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는 주장과 같다. 4살짜리 아이와 30살짜리 교육을 잘 받은 성인이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 사역에 유용한 사람이 되겠는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교육받은 성인이다. 공부와 교육이란 그런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선한 일에도 악한 일에도 크게 사용된다. 공부를 많이 한 목사와 공부를 거의 하지 않은 목사가 동일한 은혜를 받았다고 가정하자. 어느 사람이 성도를 가르치고 세우는데 유용하게 쓰임 받겠는가? 이런 면에서 독서와 공부하지 않는 목회자는 그 영향력이 미미하다. 교회사의 영적 거장들은 거의 모두가 바로 독서와 공부의 대가들이었음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되지, 공부는 왜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비신앙적인 행동이다. 기도만 하면 되었지 설교준비는 왜 하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다.
세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점이다. 상대방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지를 내가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만이 하시는 권한이다. 은혜를 받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열심히 특심한 사람들은 자꾸 다른 사람의 회심여부를 손쉽게 판단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잘못된 것이다. 물론 이것이 교회에 가입하려고 하는 사람들,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교회적인 차원에서 정당한 회심자를 구별하려고 하는 노력까지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가룟 유다의 배신을 생각해보라. 다른 사람의 회심을 미리 지례 짐작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은 우리에게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데 있어 반드시 알아야 할 3가지 중요한 점을 가르쳐준다.
참된 부흥이 발생할 때 마다,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이 중요한 참고서가 된다
첫째, 에드워즈 시대의 교회는 부흥을 경험함으로써 크고 깊고 다양한 많은 신앙체험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때로 부작용도 있었고, 실수도 있었고,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부흥시 발생한 이러한 체험을 두고서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까지 일었다. 이는 마치 고린도교회의 사정과 비슷하다. 성령의 은사가 너무 충만하다 보니 은사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한 교회 안에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는 이러한 영적 체험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교회다. 그래서 지금 당장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다루어지는 문제가 교회적인 문제로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에서 다루어지는 문제는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성도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또한 수시로 우리 주변에서 각종 이단 내지 불건전한 운동이 발생할 때마다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참된 부흥이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다.
영적 체험을 분별할 때, 외적 현상에만 치우치면 안 된다
둘째는 우리가 어떤 체험을 분별할 때, 그 체험의 외적 현상에만 너무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방언, 치유, 예언, 환상, 기적, 몸의 특이한 현상‘ 등등 우리의 몸이나 감정에 일어나는 크고 특이한 현상에 관심을 주목하기 쉽다. 그래서 이러한 몸에 생겨나는 특정 현상들을 가지고서 한 편으로는 ’이것이 성령의 놀라운 역사다. 아니면 또 한편에서는 이것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라고 너무 쉽게 오판을 한다. 언제나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고, 양분시켰던 수많은 운동과 사건은 대부분 이러한 외적인 현상에 대한 해석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지혜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이러한 현상과 체험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즉 몸에 일어나는 현상은 중립적인 것이다. 성령에 의한 역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가장 최근 교회사에 있었던 카나다의 소위 ’토론토 블레싱‘의 경우 ’특이한 웃음‘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토론토 블레싱‘이 성령의 역사라 믿고 있었던 당사자들이 주로 주장한 근거는 사실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의 1장에서 말한 부정적 근거들이었다. 어이없게도 토론토 블레싱 주창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이 성령의 역사라고 단정한 역사적인 근거를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찾았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러한 현상과 체험은 중립적이며 성령의 역사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없음을 말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을 발간할 당시에는 이러한 현상들이 참된 부흥에도 동반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데 더 강조점이 있었다. 에드워즈의 무게중심은 당시 뉴잉글랜드의 부흥이 참된 부흥임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 세우는 근거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는 데 사용될 수 없는 부증적 혹은 중립적 증거들임을 논증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어쨋던 외적 현상만을 가지고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없다는 에드워즈의 경고는 우리가 언제나 명심하고 있어야 할 영적 분별의 공리다.
신앙 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셋째,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때, 에드워즈가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2장에서 말하는 참된 분별 기준 5가지를 통해 성령의 역사에 동반되는 가장 중요한 내용들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또한 이러한 바른 분별 기준 5가지를 통해서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울러 배우게 된다. 사실 에드워즈가 말하는 성령의 바른 분별기준 5가지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요소들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에 의한 부흥이란 한 개인의 성도 안에, 그리고 집단적인 교회 내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평상시보다 더욱 크게 비범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과 사랑,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과 성경탐구의 열심, 진리와 교리와 신학공부에 대한 관심, 죄에 대한 회개와 거룩과 성결한 삶의 추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등이야 말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언제나 성도들과 교회가 힘써 추구해야 할 성령의 역사다
- 비교적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