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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북한산의 남쪽, 한강의 북쪽, 옛날부터 이름난 경치 좋은 땅, 광교, 종로 건너 들어가 휘휘 늘어진 소나무, 우뚝 솟은 잣나무(사직의 원로 대신), 위엄 있는 사헌부 (위) 청렴한 모습 그것이 어떠합니까? 2장 닭이 이미 울고 날이 밝아 올 때, 잣나무가 호위하듯 길게 늘어선 길로, 대사헌, 노집의, 장령, 지평 등 사헌부 관리들이 아름다운 가마를 타고, 앞에서 길을 치우고 뒤에서 옹위하며, 잡인의 통행을 막으면서, 아, 사헌부로 등청하는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 3장 각 방에서 아침 인사가 끝난 후 대청에 가지런히 앉아, 도를 바로 잡고 의를 밝히며 고금의 일을 참작하여, 정치의 득과 실, 민간의 이해 관계에 관한 폐단을 조목조목이 구제하여, 아, 서장으로 올리는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 4장 회의가 끝난 후 공무를 마치니, 방주 유사들이 의관을 벗고 서로 선생이라 부르며 섞어 앉아, 진귀한 요리에 좋은 술을 잔에 가득 부어, 아, 권해 올리는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 5장 초나라 상수의 물가에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제 정신을 못 차리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다'고 읊조린 굴원이 그대는 좋은가? 절의를 지켜 녹문산에 들어가 은거했던 맹호연이 그대는 좋은가? 현명한 임금과 충성스런 신하가 만나 이룩한 태평성대에 뛰어난 인재들이 모인 것이야말로 나는 좋습니다. [요점 정리] * 연대 : 세종 때 [ 내용 연구] 이 작품은 전 5 장의 분절체 형식으로 구성된 경기체가 형식의 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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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남 : 화산의 남쪽, 화산은 삼각산(북한산) ![]() ![]() ![]() ![]() ![]() ![]() ![]() ![]() ![]() ![]() ![]() ![]() 통행을 금하던 일 ![]() ![]() ![]() ![]() ![]() ![]() ![]() ![]() ![]() ![]() ![]() 말한 일을 가리킴. ![]() ![]() ![]() ![]() [이해와 감상] 상대(霜臺)란 사헌부의 별칭이다. 상대에서의 생활을 통하여 새 국가 문물 제도의 훌륭함과 정연(整然)함을 칭송함으로써 창업의 위대함을 과시하고 있다. 이 노래는 한자어를 나열한 것과 3.3.4조의 운율, 후렴구가 경기체가의 형식이며, 전절과 후절로 나뉜 것도 경기체가와 같다. 악장 문학에 속하기도 하는데 사헌부는 새 왕조의 기강을 바로잡는 기관으로 서릿발 같은 기세로 새 왕조에 반대하는 세력을 규찰하고 엄격한 질서를 수립하는 중대한 임무를 맡았으니, 거기서 일하는 관원을 위의가 대단하고 자부심도 남다르다는 관점에서 이 작품을 살펴 보면 된다. [심화 자료] 권근(權 近 1352∼1409 )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학자. 자 가원(可遠)·사숙(思叔). 호 양촌(陽村). 시호 문충(文忠). 초명 진(晋). 1367년(공민왕 16)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이듬해 문과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고, 우왕(禑王) 때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예의판서(禮儀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창왕(昌王) 때 좌대언(左代言)·지신사(知申事)를 거쳐 밀직사첨서사(密直司僉書事)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75년(우왕 1) 박상충(朴尙衷)·정도전(鄭道傳)·정몽주(鄭夢周)와 같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여 원나라 사절의 영접을 반대하였고, 89년(창왕 1) 윤승순(尹承順)의 부사(副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올 때 가져온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이 화근이 되어 우봉(牛峯)에 유배되었다가 영해(寧海)·흥해(興海)·김해(金海) 등지로 이배(移配)되었다. 90년(공양왕 2) 이초(彛初)의 옥(獄)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청주(淸州)에 옮겨졌다가 풀려났다. 조선이 개국되자 93년(태조 2)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대사성·중추원사(中樞院使) 등을 역임하고, 96년 표전문제(表箋問題)가 일어나자 자청하여 명나라에 들어가 두 나라의 관계를 호전시켰으나,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불안한 위치에 있게 되었다. 98년 정도전 일파가 숙청되자, 정당문학(政堂文學)·문하부참찬사(文下府參贊事)를 거쳐 대사헌을 지내고, 사병(私兵)의 폐지를 주장하여 왕권확립에 큰 공을 세웠다. 1401년(태종 1)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으로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예문관 대제학이 되었고, 대사성·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거쳐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이사(貳師) 등을 역임하였고, 왕명으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찬하였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경학(經學)에도 밝아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였다. 또한 그의 《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장현광(張顯光) 등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는 성리학자이면서도 문학을 존중하였고, 시부사장(詩賦詞章)의 학을 실용면에서 중시하여 이를 장려하였으며, 경학(經學)과 문학(文學)의 양면을 조화시켰다. 문집 《양촌집(陽村集)》 외에 저서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고, 작품에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다. (동아대백과사전)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양촌 권근(權近:1352~1409)의 시문집. 목판본. 40권 10책. 아들 제()에 의해 세종 초년에 의해 처음 간행되었는데, 이후 여러 차례 복각(覆刻)되어 현재 여러 종류의 판본이 남아 있다. 권근은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스승과 행동을 같이하였으나, 조선 건국 후에 태조의 부름을 받고 출사(出仕)하였다. 시문(詩文) 가운데 <계룡일송(鷄龍一頌)>에서는 왕조의 개국을 칭송하였고, <환왕정릉신도비병서(桓王定陵神道碑幷序)>에서는 고려의 국운이 공민왕에서 끊어졌고, 창왕 이후는 왕씨(王氏)가 아니라 하였는데, 이는 후인들에게 곡필(曲筆)이라는 평을 받았다. <응제시(應制詩)> 24편은 그가 1396년(태조 5) 표전(表箋) 문제로 명나라와의 외교가 어려워졌을 때 명나라에 가서 명나라 황제에게 지어 올린 것으로, 중국에 문명(文名)을 떨쳤다. 여기에는 특히 단군(檀君) 설화가 언급되어 있어 주목된다. <동국사략론(東國史略論)>은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사실(史實) 가운데 문제시되는 사건을 뽑아 자신의 비평을 서술한 사론집이고, <동현사략(東賢事略)>은 허공(許珙)·김방경(金方慶) 등 고려 후기의 명현 24명의 간략한 사적을 적은 전기집이다. 그는 조선 최초의 문형(文衡)으로서 활약하여 많은 표전·소(疏)·계(啓)·차(箚)·서(序) 등을 남겼는데, 문학·의학·지리학·인쇄술·학교·향토·문화재 등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동아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