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현
전라도 신안을 여행할 때였다. 비금도를 지나는데 ‘이세돌 바둑 기념관’이라는 팻말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문득 ‘비금도 총사령관’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세돌의 어머니가 이곳 어딘가에서 굽은 허리를 두드리며 농사를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난 10여 년 간 세계 바둑계를 평정했던 이세돌 9단이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AlphaGo)’의 도전장을 받고 백만 달러의 상금이 걸린 대국을 펼친다는 기사에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8여 년 간 월간지 편집자로 일 한 적이 있다. 나는 내가 담당했던 특집의 주제를 정하느라 어지간히 도서관과 서점을 들락거렸다. 하지만 막상 책이 나오고 나면 늘 부족해 보이기만 했다. 어느 해 3월 특집 주제는 ‘한국을 빛낸 사람들의 어머니’로 자식을 세계적 인물로 키워 낸 어머니들의 삶을 조명하는 내용이었다. 피겨 선수 김연아, 음악가족 정트리오(정명화, 정명훈, 정경화), 소프라노 조수미, 바둑 기사 이세돌. 그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 어머니들의 열정과 희생은 눈물겨울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 중에서 내 기억에 가장 남은 분은 이세돌의 어머니 이양례 여사였다. 그녀는 목포에서 배로 두 시간거리, 하루에 한 번 밖에 배가 오지 않는다는 비금도에서 억척스레 농사를 지으며 다섯 자식을 키웠다고 했다. 둘째와 다섯째인 두 아들은 프로 바둑기사로, 첫째와 셋째인 두 딸은 이화여대에, 넷째인 아들은 서울대로 보냈던 그녀의 눈물겨운 분투기가 가슴을 찡하게 했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남편의 수입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특집 서문 첫 문장을 “세상 모든 어머니는 위대하다.”고 쓰면서 마음속으론 ‘이세돌의 어머니는 더 위대하다’고 되뇌었다.
비금도를 지나면서 이세돌이 더욱 와 닿았던 건 우리집 다용도실에 몇 십 년 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바둑판 때문인지도 몰랐다. 삼십여 년 전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서는 해마다 직원들을 대상으로 바둑대회를 열었다. 당시만 해도 골프가 대중화 된 때가 아니라서 바둑처럼 정적인 취미를 가진 사람이나 애호가들도 많았다. 토너먼트로 진행된 대회에서 남편이 2년 연속으로 우승을 했다. 비록 아마추어들의 경기지만 준결승전부터는 난다 긴다 하는 고수들의 접전이라고 했다. 거기에다 전 해 우승자는 상대에게 다섯 점을 깔아주고 대국을 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우승은 꿈도 안 꿨는데 운이 좋아 결과가 좋았다고 했다.
사장의 사인이 새겨진, 보기에도 고급스런 바둑판을 부상으로 받은 남편은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들어섰다. 그날부터 그 바둑판은 애지중지 사랑을 받으며 거실 한쪽을 차지했다. 바둑광인 그는 유명인의 대국 기보(碁譜)를 구해서는 혼자서 흑돌과 백돌을 번갈아 놓으며 기보 연구를 하곤 했다. 그런데 그 바둑판 때문에 대형사고가 났다.
청소를 하느라 걸레로 거실바닥을 닦고 있는데 이제 막 돌을 지난 지 몇 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들 녀석이 뭐가 그리 좋은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나를 따라 빙빙 돌며 내 등에 업히기도 하면서 까르륵거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바둑판 위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가 전에 없이 자지러지게 울기에 얼른 안았는데 그 조그만 아이의 이마에서 피가 펑펑 쏟아져 금세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하필이면 바둑판 모서리에 이마가 부딪친 것이다. 너무 당황한 나는 당장 지혈을 시킬 생각도 못하고 당장 눈에 보이는 천 기저귀로 아이 이마를 막고는 현관문을 열고 비명처럼 위층에 사는 지은 엄마를 불렀다. 아이는 죽어라고 울어대고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실신을 할 지경이었다. 놀란 지은 엄마가 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고 나는 울면서 그 뒤를 따랐다. 집에 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119는 불이나 나야 부를 수 있던 시절이었다.
아들은 동네 정형외과에서 이마를 스무 바늘이나 꿰맸다. 상처가 너무 깊은 데다 마취를 하면 흉터가 많이 남는다며 마취도 안하고 속과 겉을 이중으로 꿰맸다고 했다. 얼마나 울었던지 지쳐 잠든 아이를 두고 나는 시어머니한테 전화를 해서는 고부가 전화통을 붙들고 펑펑 울었다. 아빠가 퇴근을 하자 아이는 바둑판과 제 이마를 가리키며 또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남편은 아이를 꼭 안아주고는 말없이 바둑판을 다용도실로 옮겼다. 그 후로 남편은 그 바둑판을 몇 번 꺼내 보지 않았다. 같이 대국을 해 줄 사람도 없었거니와 바쁜 일상에 혼자서라도 한가로이 바둑을 둘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월계관을 쓰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왔던 그 바둑판은 아들의 이마에 상처를 냈다는 불명예를 쓴 채 그렇게 방치가 되었다.
친정 오빠도 어지간한 바둑광이었다.
“이 서방, 지갑 두둑이 채워왔나? 한판 해야지.”
“형님한테 따서 갈라고 올라 갈 차비도 안 가져 왔습니다.”
부산 친정에 가면 실력이 비슷했던 오빠와 남편은 서로 자신이 한수 위라며 너스레를 떨곤 했다. 오빠가 우리집에서 가까운 병원에 입원을 하고 있을 때도 남편은 휴대용 바둑판을 사서 병원에 가지고 갔다. 암 선고를 받은 오빠가 그 순간만이라도 두려움을 잊어버렸으면 하는 배려였을 것이다. 두 사람은 병실 침대에 앉아 바둑삼매에 빠져 들었다. 그때 오빠는 바둑을 두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가로 19줄, 세로 19줄, 361개 교차점의 바둑판 위에서는 흑과 백의 치열한 진검승부가 벌어진다. 수많은 묘수와 전략으로 공격과 방어가 난무한다. 하지만 바둑에서는 신의와 절개는 있어도 배신이나 변절은 없다고 한다. 경기가 시작되면 정해진 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바둑돌을 놓아야 하듯 우리도 매 순간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지 않았을까. 그 선택이 성공이든 실패든 자기 앞에 놓인 삶의 한 부분임에야….
지난날들을 복기(復棋)한다면 실패를 흑으로 성공을 백으로 봤을 때 우리네 인생은 흑일까, 백일까. 남편과 함께 바둑 삼매에 빠졌던 오빠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그때 당시 신입사원이나 다름없던 서른 살의 남편은 얼마 전 퇴직을 하고는 인생 2막을 향해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앙증맞은 얼굴로 엄마 아빠를 부르며 아장아장 걷던 아들은 모자란 잠에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얼마 전 입사한 직장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