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은 민씨 정권이 개입을 요청한 청국군사 1500 명에게 3일 만의 정말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명성황후와 고종은 개화당과 손잡고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개혁을 스스로 해 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김옥균과 개화당을 믿지 못했고 민씨척족의 정권유지만을 바랬다. 우리 민족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다.
그들은 임오군란에 이어 또 한 번 외국군대의 힘을 빌리는 커다란 누를 범한다.
그들의 이러한 조치는 우리 민족과 역사에는 엄청난 죄를 진 것이었지만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들에게는 십 년 간 권력의 달콤함을 가져다 주었다.
이후 명성황후와 민씨정권은 정권의 위기만 오면 청국군대에 요청하는 못된 버릇이 완전 습관화 되어버린다. 10년 후 동학혁명 때도 정권이 위기에 빠지자 아니나 다를까 청국에 군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이 요청은 명성황후와 민씨정권의 자충수가 된다. 청국은 명성황후 요청대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고 갑신정변 때 맺은 텐진조약에 따라 일본도 군대를 조선에 급파한다. 뒤에 자세히 다루겠지만 그 당시 일본 국내사정으로는 조선상황은 일본에게 하늘이 준 기회였다.
이 때문에 드디어 미루고 미루어졌던 청일 전쟁이 발발한다. 이처럼 외국군대의 힘을 빌어 백성들의 항쟁을 진압하려했던 못난 민씨정권은 몰락하고 뒤이어 명성황후 자신 목숨 마저 잃고 나라를 빼앗기는 계기를 만들고 만다.
사실, 임오군란에 이어 갑신정변 때도 청,일간의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두 나라 다 국내 내부상황이 너무 좋지않았다.
청은 양무운동으로 또는 서양열강세력의 등쌀에 일본과 전쟁을 치룰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일본 또한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는 이루었지만 군국주의로 가기 위해서는 마지막 일본 자유주의 세력을 넘어야 했다. 그래서 일본 군국주의 헌법을 제정하기위해 온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에 청과 일전을 겨루기는 버거웠다.
어쩜 김옥균은 이런 국외정세를 일찍 파악하고 조선의 개화에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조금 무모하게 준비가 덜 된 갑신정변을 저질러는지도 모른다.
명성황후가 청에 군사 요청을 안하고 일본이 김옥균에게 조금만 힘을 더 보태줘 갑신정변이 성공하고 개혁조치들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어 십년동안 조선이 내정개혁에 성공하고 근대화 기반을 마련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여러분들 상상에 맡긴다.
어쩠든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된 갑신정변 이후의 10년은 조선이 스스로 개혁하고 근대화의 길을 열어갈 소중한 기회였다. 내부 여건도 좋았다.
실패는 했지만 갑신정변으로 개화의식이 크게 성장했다. 서양이나 일본에 다녀온 이들이 많아지고 한성순보나 번역된 책들을 통해 서양 세계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
고종과 명성황후도 외국 공사나 선교사, 외국을 다녀온 신하들과의 만남을 통해 서양에 대한 이해도가 크게 높아졌다. 고종과 명성황후도 더 이상 개화를 늦출 수 없다고 판단하고 나름 개화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후 고종은 우선 군제 개편을 서둘렀다. 질적 변화를 꾀한 조처라기보다는 임시변통이었는데, 기존의 군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다. 그리고 개화 정책을 직접 이끌기 위해 궐 안에 내무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민씨 척족에게 책임을 맡겼다. 그러다보니 내무부가 주력한 일은 개화 조치보다는 민씨척족을 위한 비자금 확보였다.
또한 고종은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해 육영공원을 세우고 고종 30년에는 미국 박람회도 참가했으며 프랑스, 덴마크,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수교도 했다.
그 밖에도 이 시기에 기독교, 천주교의 포교가 허용되면서 곳곳에 서양 교회가 생겨났고 외국 선교사들에 의해 배재학당, 이화학당 등이 세워졌다. 근대식 병원도 세워졌다. 전신이 가설되어 빠른 통신이 가능해졌고 경복궁에 처음 전깃불이 밝혀졌는가 하면 개항지나 서울 곳곳에 양옥집이 늘어났다.
이렇듯 겉으로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였다. 정부가 주도한 근대화, 개화 노력은 대략 이런 정도 흉내내기에 그쳤다. 그리고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들의 부정부패는 더 심해졌다.
그래도 1894년 이전 이 10년간 열강들의 이권침탈은 주로 상품 수출의 형태로 경제 침탈이 진행되었다. 주로 일본과 청국의 상인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또 해관 세수권, 연안 어로 채취권, 전신 부설권, 저탄소 설치권 등이 역시 일본과 청국에 의해 독점되었다. 이때까지는 서양 열강들이 조선에 아귀다툼처럼 몰려들지는 않았 다.
앞서 말한 것 처럼 갑신정변이후 십년간은 대외정세가 조선이 잘만했다면 스스로 근대화의 초석을 이루어 낼 수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고종과 민씨 정권은 자기들 안위에만 힘썼다. 조선의 불행이었다.
이때에 조선에 괄목할 만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1860(철종 11)년에 최제우가 제세구민의 뜻을 가지고 창건한 민족 종교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했다. 포교를 시작하자마자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최제우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게 된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든다.
이후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이 해 7월 제자 최시형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최제우 자신이 관의 지목을 받고 있음을 알고 미리 후계자를 정한 것이다.
이때 조정에서는 이미 동학의 교세확장에 두려움을 느끼고 그의 체포계책을 세우고 있었다.그해 11월 20일 선전관 정운구에 의하여 제자 20여 명과 함께 경주에서 체포되었다.
최제우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철종이 죽자 1864년 1월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심문받다가 3월 10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41세의 나이로 참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교주의 죽음에도 동학의 교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도통을 이어받은 2대 교주 최시형의 공이 컷다. 최시형은 흩어진 조직을 모으고 정비 확대해갔다. 그리고 최제우가 지은 글들을 모아 용담유사, 동경대전을 간행해 교리를 가다듬었다.
서양 세력의 부상에 불안하고 탐관오리의 횡포에 절망하던 백성들은 동학에서 의지할 곳을 찾았다.
충청, 전라 지역으로 확대된 동학, 교세를 자각한 지도자들은 교주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운동 (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 )을 요구하고 나섰다.
최시형의 승낙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고종 29년 신도 1,000여 명이 공주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지도부는 충성 감사 조병식에게 요구 사항을 전달했다.
이에 조병식은 각 고을에 공문을 내려보내 요구의 일부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고무된 동학 쪽은 며칠 후 감례에서 더 큰 집회를 가졌다. 전라 감사의 반응도 조병식과 다르지 않았다.
고종 30년 40명의 대표가 상소문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궐문 앞에 엎드렸다. 하지만 지방에서와 달리 상소에 대한 조정의 반응은 싸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