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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요한계시록 14장1~13절
제목 : 어린 양과 함께 선 성도
12장에서는 예수님과 사단의 대결이 나오고,
13장에서는 사단이 두 짐승을 하수인으로 성도들을 핍박하고 미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14장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광의 날에 참여하게 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이들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지만, 어린 양의 인을 새긴 십사만 사천 성도는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올라 구원의 새 노래를 부릅니다.
1. 성도가 부를 새 노래(1~3절)
1) 시온산에 선 어린양과 십사만 사천(1절)
“[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 시온 산에 서 있는 어린양의 모습은 12:17에 묘사된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용의 모습과 명백한 대조를 이룹니다.
시온 산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약간씩 차이가 났습니다.
즉 포로 시대 이전에는 유다의 전 영토와 이스라엘 전 족속을 의미했고,
포로 시대 이후에는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가리켰습니다.
또한 구약성경과 예언서에서 시온은 메시야가 오셔서 구속받은 자기 백성들을 모으는 장소를 상징했습니다(시 48:1;사 24:23;욜 2:32;미4:1,7).
이러한 배경을 지닌 '시온 산'이 본문에서 어디를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1) 혹자는 실제적으로 지상에 있는 땅을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2) 혹자는 영적인 세계인 하늘에 속한 것으로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거하는 곳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히12:22의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에서 '시온'을 '하늘의 예루살렘'과 관련시켜 이해합니다.
(3) 혹자는 지상에서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 또는 천년 왕국을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이들은
히12:22의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갈4:26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 모두 하나님이 계신 하늘 시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땅에 거하는 구속 받은 성도들에게 이 땅에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의 전형이나 모델로서 제시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합니다.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본문의 십사만 사천 명은
7:4절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 명과 같은 무리들로 단순히 유대 지파나 유대인 성도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이 무리들은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13:16)과는 달리 이마에 아버지와 어린양 되신 그리스도의 이름이 쓰여져 있어서 그들이 짐승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백성들임을 시사합니다.
본장에서 십사만 사천 명을 구성하는 무리들은 본서 7장의 무리와 동일인들이지만 사건은 7장보다 훨씬 진전되어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은 달라져 있습니다.
즉 7장에서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치심을 받으며 순교당한 무리들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 반면, 본장에서는 구속받은 모든 성도들이 이 땅의 종말론적인 나라에서 부활하여 어린양과 함께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2) 하늘 보좌에 울려 퍼지는 새 노래(2~3절)
“[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1) 사도요한이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2a절).
“[2a]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그 ‘소리’는 구원받은 무리인 십사만 사천 명이 합창하는 찬양의 소리라고 주장하나 천사들의 큰 합창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5:11;6:1;19:1,6).
(2) 그 소리는 많은 물소리, 큰 우렛소리, 거문고를 타는 것 같았습니다(2b절).
“[2b]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많은 물소리'는 크고 우렁찬 소리를, '큰 우렛소리'는 위엄과 승리를,
'거문고 타는 소리'는 아름다운 선포와 조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늘의 찬양은 크고 위엄차고 듣기에 아름다운 소리일 뿐만 아니라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성도들을 환영하는 천사들의 노래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지상에서의 승리와 하늘나라에서의 기쁨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3) 새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자는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입니다(3절)
“[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새 노래’라고 한 것은 이 노래가 오직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성도들, 즉 하나님으로부터 새롭게 창조된 무리들만이 부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죄 가운데 있는 옛 사람들은 배울 수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지식이 새로워지고, 마음이 새로워지고,
생명이 새로워진 새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2:17;롬 8:1-6;12:2).
새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십 사만 사천 인'은 '속량함을 받은 자'(호이 에고라스메노이), 즉 지상의 모든 족속 중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께 '사서 드려진'(에고라사스, 5:9)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인을 맞았을 뿐만 아니라(7:4-8),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7:14).
*7: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7:14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2. 성도의 자격(4~5절)
“[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5]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1)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입니다(4a절).
“[4a]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하나님과 어린양에 대한 신앙의 정절을 지켜 우상 숭배와 배교를 하지 않은 자를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순결한 처녀로,
신약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 37:22;렘 18:13;암 5:2;고후 11:2).
*고후11: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2)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입니다(4b절)
“[4b]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그리스도께 철저히 헌신하는 자입니다.
'따라가는 자' 는 막 8:34을 연상시키는 것으로 지상에서 생활하셨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자를 나타냅니다.
*막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혹자는 이것이 십 사만 사천명의 무리가 순교(殉敎)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추종하였음을 암시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3)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온전히 속한 자들입니다(4c절).
“[4c]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처음 익은 열매'는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성물'(sacrifice)을 의미하였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하나님께 바쳐지는 '첫 수확물'을 뜻하였습니다.
이는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림으로 말미암아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하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출 23:19;느 10:35;잠 3:9;약 1:18).
같은 사람들일지라도 구속을 받지 못한 자들이 많은데 불구하고 오직 이들만 구속을 받았으니, 그들은 하나님의 보화(寶貨)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실지언정 이들을 버리실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드린 처음 익은 열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보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들을 잊지 못하십니다.
*사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출19:5,6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①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백성을 잊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갈대아 우르에서, 롯-소돔과 고모라, 이스라엘 백성-애굽, 요셉, 청교도 등.
②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이 약해진 때에도 기억하십니다.
*시103:13~16 “[13]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14]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5]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6]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백성이 강해서 귀히 여기심이 아니고, 연약한 고로 기억하신다는 의미로 보입니다.
4)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5절).
“[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언제나 진실하고 성결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기 “입에 거짓말이 없다”함은 정직한 언행을 가리킨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잠6:16~19 “[16]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17]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18]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19]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하였고,
*잠13:5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에 이르느니라”
*잠21: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다니는 안개니라”
새 예루살렘성에 참예하지 못하고 영원한 유황 불못에 던져져 둘째 사망에 참예하는 자들 중에는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이 있습니다(22:15).
반면에 본문의 십 사만 사천은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는 습 3:13을 반영한 것으로 그들이 '흠이 없는 자' 즉 생활이 정결한 자이며 지상에 있는 동안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순결을 간직한 자들임을 시사합니다(히 9:14;벧전 1:19).
*습3:13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거짓된 혀가 없으며 먹고 누울지라도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벧전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3. 진노의 포도주(6~11절)
1) 첫째 천사의 메시지 - 영원한 복음(6~7절)
(1)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습니다(6절).
“[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8:13에서 독수리가 공중에 날아가면서 큰 소리로 땅에게 거하는 자들에게 화(禍)를 선포하는 것과 유사하게 본절에서는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며
'큰 음성'(7절)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앙겔리온'은 본서에서 이곳에만 나타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복음은 7절에서 언급된 대로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며, 그의 심판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천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인정할 것을 불신자들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2)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의 내용입니다(7절).
“[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영원한 복음”이란 말은, 세상 끝까지 전파되도록 예정된 복음이라는 의미도 가진다고 생각됩니다(박윤선).
그러므로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역경에서도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복음은 반드시 끝까지 전파되고 폐할 수 없습니다(마10:26,27).
*마10:26,27 “[26]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27]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
*롬1: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⓵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7a절).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 '큰 음성'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듣고 경외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천사가 전하는 '영원한 복음'의 내용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곧 이 세상을 심판하실 심판주가 되실 것임을 암시합니다(13:7).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그러기에 당연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영광을 돌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⓶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7b절)
천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회개를 촉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타락한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이들에게 아직도 구원의 소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배하며, 영광을 도리라는 것입니다.
2) 둘째 천사의 메시지-큰 성 바벨론의 멸망을 예고(8절).
“[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둘째 천사는 모든 나라들로 하여금 음행을 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만들었던 큰 성 바벧론의 멸망을 예고합니다.
'큰 성 바벧론'은 단 4:30을 반영합니다.
*단4:30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는 세상 권세의 모형이며 불신과 부도덕이 팽배한 대도시를 상징합니다(사 14장). 구약에서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던 적이었으며(사21:9;렘 50:2;51:8),
본절에서 바벨론은 하나님께 반항하며 대적하는 배도적인 국가를 상징합니다. 본서가 기록될 당시 로마 제국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권력을 사용하여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정황과 묵시문학적 표현 방법으로 보아 바벨론은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이 단순히 로마 제국만을 의미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로마 제국은 물론 모든 시대에 걸쳐서 교회를 핍박하는 권세와
하나님을 부인하고 반대하는 세상 권세를 상징합니다.
바벨론은 모든 시대에 있어서 바벨론이나 바벨탑처럼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돈, 성적 쾌락, 명예, 문화, 문명, 과학 등을 통해 사람들을 유혹해 음행에 빠뜨리는 모든 세속주의를 말합니다.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는 두 개의 문장, 즉 '음행의 포도주'와 '진노의 포도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이는 렘51:7,8을 반영한 것으로 사단으로 인한 악이 모든 나라들로 취하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렘51:7,8 “[7]바벨론은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어 온 세계가 취하게 하는 금잔이라 뭇 민족이 그 포도주를 마심으로 미쳤도다[8]바벨론이 갑자기 넘어져 파멸되니 이로 말미암아 울라 그 상처를 위하여 유향을 구하라 혹 나으리로다”
3) 셋째 천사의 메시지 - 짐승 숭배자들의 심판(9~11절)
(1) 짐승 숭배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습니다(9,10절)
“[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본절은 혹자의 주장대로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기를 계속하면'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즉 7절에서 세상을 심판하실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경배하라는 천사의 선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경우를 나타냅니다.
설사 불신자들이 짐승에게 경배한 경험이 있다 할지라도 회개와 믿음으로 천사가 전하는 용서와 구원의 '영원한 복음'(6절)을 받아들일 경우 그들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짐승에게 경배할 경우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10절)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포도주 잔'은 구약성경에서 자주 나타나는 표현입니다(욥 21:20;시 75:8;사 51:17;렘 25:15-38).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 즉, 물을 섞지 않은 순수한 포도주는 독주에 해당할 만큼 그 농도가 짙어 사람들이 그것을 마시게 되면 금방 취하여 인사불성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진노는 매우 맹렬하여 한번 당하면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파괴력으로 범죄 한 인간을 엄하게 심판하십니다(신 75:8;사 51:17).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짐승에게 경배하였던 자들에게 내려질 마지막 심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서 마지막 부분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이것은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이 받을 형벌이기도 합니다(20:10, 15;사 34:9, 10;눅 16:23).
(2) 그의 이름표를 받는 자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합니다(11절)
“[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쉼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13절에서 성도들이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것은 그들의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간다는 것과 연결된 표현으로 그들이 지옥에서 당하는 고통이 영원한 것임을 시사합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영원한 지옥 형벌에 관한 것을 온전한 기독교 교리로 보지 않고 '준 기독교적'인 것으로 봅니다.
이들은 배교한 자들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는 사실이 예수의 가르침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저버린 자들이 받게 될 고통의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서까지 인간들의 죄를 용서하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자들의 죄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져야 함을 예수께서 치히 밝히고 있는 바입니다(막 9:43, 48;눅 16:19-31). 짐승을 경배하며 그를 끝까지 따라간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한 것입니다.
4. 성도의 인내와 복(12~13절)
1) 성도의 인내(12절)
“[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짐승과 함께 그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아 영원한 고난에 처하게 되는 반면에(10, 11절) 성도들은 믿음을 끝까지 지킴으로 인해 짐승으로부터 핍박을 받아 고통을 당하게 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는 받지 않으며 새 예루살렘성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본절에서 성도들에게 인내로 하나님과 예수님께만 충성할 것을 권면합니다.
그 충성은 어떠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에 대한 믿음을 굳게 붙잡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믿음'에 해당하는 헬라어 '텐 피스틴 예수'는 예수님이 공급하시는 믿음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예수께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바벨론과 같은 세속주의에 빠지지 않고, 세상의 것들을 우상화하지 않으려면 인내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마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히10: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히6: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약5:10,11 “[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눅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눅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히10: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살전5:14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우리가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아 아는 사실입니다.
잠16: 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마음을 다스르기 위해서는 각성하여 깨어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안식 - 주안에서 죽은 자들의 복(13절)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본절은 본서에 등장하는 일곱 가지 복 중 두 번째 복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내용상 12절과 연결되어 성도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지켜 인내할 때 순교를 각오하였음을 아실만합니다.
믿음을 지켜 순교하였다면 그들에게는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이 보장되어 있기에 그들은 복 있는 자들입니다.
(1) “기록하라”는 말씀의 의의(意義).
본절(14:13)만 기록하라는 말씀인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벌쩌 1:11에 “네 보는 것을 책에 써서”라는 말씀도 있으니, 계시록 전책(全冊)이 기록하라는 명령에 의하여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나 계시록 말씀 중에는, 특별히 고조되는 의미에서 “기록하라”는 하늘로부터 오는 명령이 붙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기록하라는 명령이 무엇을 고조하는가?
그것은 그 말씀 내용의 불변성을 고조하는 동시에, 신자들이 그것을 굳게 붙잡아야 할 것과 그것에 대하여 확신해야 될 것을 고조합니다.
(2) “지금 이후로”란 말씀의 의미
즈안은, 이 말이 계시록의 이 부분이 보여주는 심판 직전 시기와 연락시킵니다.
그러나 그리한다면,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그 시기 전에도 있었는데, 그들의 죽음은 그렇게 복되지 못하다는 뜻인가?
그러므로 이 행한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반 델 모일렌도 그런 이유로 즈안의 해석을 받지 않았습니다.
슬라테르도 즈안과 비슷한 처지로 말하였습니다.
곧, “지금부터 다시 말하면, 기독교를 위한 전투가 어려워졌고 신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그 때부터는 그 죽는 자들이 애석히 여김이 될 처지에 있지 않고 칭찬 받을 처지에 있다”고 했습니다.
크레다너스에 의하면, 여기 “지금 이후로”라는 말이 신약 시대의 “시작부터”를 가리킵니다.
곧, 구약 시대에는 죽음에 대하여 막이 가리운 듯이 명백하지 않았으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또한 승천하심의 결과로, 죽음에 대하여 광명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근심거리가 될만한 근거가 없습니다.
본절의 '지금 이후로'는 '죽는'을 수식하고,
'지금 이후로'에서 '지금'이 어느 때를 가리키는가하는 문제입니다.
① 혹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 때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② 혹자는 성도들이 죽는 순간을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③ 혹자는 사도 요한이 본 환상, 즉 최후의 심판 때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Alford).
세 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닙니다.
(3)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라는 말씀의 의의.
살전 4:14의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과 같습니다.
살전4:14의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헬라원어의 뜻은 “예수로 말미암아”입니다.
그러면, 예수로 말미암아 잔다는 뜻은 곧,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평안히 세상 뜨도록 도와주심과 장차 부활에서는 깨워 주실 것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별세할 때에 주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은, 성경 다른 구절도 같이 말합니다.
특히 눅 16: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라고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의 품 안에 들어간 듯이 그와 연합한 자를 의미합니다.
주 안에서 죽는 것은 소망 있는 죽음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잔다”라는 말로 묘사 되었습니다.(마9:24,요11:11참조).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는, 죽음을 비애(悲哀)로 대하지 않고 부활할 소망과 또는 그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는 소망으로 대합니다.
성도가 죽을 때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십니다.
스데반도 순교할 때에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5)하였고,
그가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행7:55)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도가 죽을 때에는 하나님의 영화로우신 영적 간섭이 있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눅16:19~31 말씀을 보아도 거지 나사로가 별세했을 때에 그 영혼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낙원)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22절).
눅12:20 보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씀은 분명히 사람이 별세할 때에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특수 간섭이 있음을 확증(確證)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별세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간섭하시며 처분하신다는 것은, 에녹의 승천 사건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에녹이 승천한 것은, 그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를 옮겨 가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히11:5)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시체를 간섭하여 감추신 것을 보아도, 그 개인의 별세에 대하여 무관심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신34:6, 유1:9).
*신34: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유1: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4) 안식-성도는 사후(死後)에 복된 세상에 들어감
본문에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주 안에서 별세한 자들은 안식하는 복을 받으며 또 그들의 일에 대한 보상의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소극적 방면 곧, 어려움에서 해방되는 복 뿐 아니라,
적극적 방면 곧, 그들의 일의 열매로 오는 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익(Dr.K.Dijk)에 의하면, 이것은,
① 죄악의 고통에서 완전히 떠나 안식함이고,
② 마귀와의 투쟁을 마치고 쉬는 것을 의미하고,
③ 모든 고통거리와 적대 행위를 당하지 않는 안식이고,
④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방면에서 애쓰는 괴로움에서 떠나서 평안을 누림이고,
⑤ 이 세상에서 살기 위한 모든 사업의 고통에서 떠나 안식함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안식은 전연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뒤에 안식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안식은, 그의 무활동(無活動)을 의미하지 않고,
그의 섭리 사역(攝理使役)을 포함하는 것입니다(요5:17).
*요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인간도 역시 안식한다는 것이 무활동을 의미하지 않고 그들이 주님의 날에 하나님 말씀을 받음과 성례를 사용함과 기도와 찬송 등으로 예배드리는 일을 의미합니다.
천당에 간 성도들의 안식도 역시 예배의 활동을 가집니다.
그것이 안식입니다.
그러면 몸 없는 영혼이 그런 활동을 하는가가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문제가 안 됩니다.
천당에는 육체적 활동은 없고, 거기는 영적 세력으로 되는 활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활동은 이 세상에서처럼 죄악의 방해를 받지 않는 것이니 만큼, 이상적으로 실현됩니다.
*“쉬리니”란 말은 헬라원어로 ‘아나파에손타이’라고 하는데 안식을 의미하고,
무사(無事)무위(無爲)의 상태를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시17:15,37:37,116:15, 잠14:32,빌1:23,)
(5) 일이 따름.
크레다너스(Greijdanus)는 이 점에 있어서 말하되,
“그들이 행한 바가 그들에게 영원한 열매를 준다. 그러나 여기 일이라는 말이 그것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 생활의 필연적 표현이라는 의미를 쓰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에서 성도들이 행한 '일'(에르가)은 핍박에 대한 '인내(忍耐)'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順從)'과 예수님께 대한 '믿음'(12절)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그들의 일은 수고와 동일한 것으로 그들이 사단의 핍박과 고난 가운데서 지치도록 인내하고 믿음을 지켰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켰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수고를 통해서 믿음을 지킨,
그들은 죽은 후에 온전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성도가 죽은 뒤에 그의 행한 일 때문에 보상을 받습니다.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들이 행한 대로 상급(賞給)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수고스럽게 행한 업적(業績)은 내세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성구에 대하여 주의할 것은, 우리의 행실이, 우리의 구원 문제에 까지 관계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행위로써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신구약 성경이 일률적으로 증명합니다. 곧,
*욥9: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욥25: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시143: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사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와 같은 말씀은 신약에 얼마든지 있습니다(행13:39, 롬3:28, 4:14,15, 9:11,16, 11:6,갈3:10, 4:9, 5:2,4,11,18, 엡2:9,딤후1:9,딛3:5).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줄 알면 그것도 불신앙입니다.
갈5:4에 말하기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함은, 성도가 그 행한 대로 내세에서 상급(賞給)을 받을 것을 가리키는 것 뿐입니다.
신자의 선행이 그의 구원 공로는 못되나, 내세에 이르러서 반드시 상급을 받습니다.
성경은 행한 대로 보상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였습니다.
전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마16: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롬2:6, 고전3:13, 고후5:10, 히9:27, 계2012 참조.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주 안에서 수고하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의 수고가 없는 자에게는
주 안에서 죽는 죽음 역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 안에서의 수고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12절)입니다.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누가 주안에 사는 자입니까?
그것은 능력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자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배척받고 거절당하신 것이 예수님의 모습이라면 나 또한 세상으로부터 거절당하고 배척받는다고 해도 주님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음을 굳게 하는 자입니다.
아담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인간이 되었는가를 알기 때문에 다시는 그 실패의 길을 가지 않기 위해서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주인에 사는 것이고 이러한 삶이 곧 수고하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이 수고를 그치고 안식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라 안식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사는 신자에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복이 있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복이란 이미 주 안에서 살고 죽는 것 자체를 말합니다.
말씀의 능력 안에 사는 자가 된 것 자체가 이미 충족된 복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복입니다.
끝을 안다면 인생을 의지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끝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인생을 의지하고 현재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상관없이 살고 죽는 실패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과연 주 안에서 산다고 말씀할 수 있습니까?
말씀이신 주님 안에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알고 주님만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소원하십니까?
비록 세상으로부터 거절을 받는 사고방식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주님만 의지하고자 하십니까?
그것이 수고하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의 죽음은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수고를 그치고 쉬는 안식의 시작일 뿐입니다.
수고란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뭔가 고생된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수고하는 삶입니다.
이들이 주 안에서 살다가 주 안에서 죽는 복있는 신자입니다
성도들이 사후에 들어가는 세계는 왜 행복 된가?
(1) 그 곳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신 고로 복됩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영안으로 이따금 주님을 보는 것도 기쁘거든, 하물며 하늘에서 그를 계속적으로 모시고 있는 생활이야 얼마나 기쁘fi(3:4).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2) 그 곳은 성도가 좋아하는 의인들 만이 있는 곳이니 그 얼마나 기쁘랴(히12:22~24).
(3) 그 곳은 거룩한 천사들이 영광 가운데서 성도를 수종드나니 그 얼마나 영광이랴!(히12:22~24).
(4) 그 곳은, 생명강과 생명나무가 있는 곳이며(계22:1~5), 성도가 받을 면류관이 있는 곳이니 그 얼마나 기쁘랴!(딤후4:8).
(5) 그 곳에서 우리가 앞서 간 친구들을 만나 볼 수 있으니, 그 얼마나 기쁠 것인가!(삼하12:23, 눅16:19).
(6) 그 곳은 죄가 없는 곳이니 그 얼마나 기쁠 것인가!(계21:27).
(7) 그 곳은 사랑이 충만한 곳이니 그 얼마나 기쁠 것인가(고전13:13).
(8) 거기는 즐거운 찬송이 있으니 그 기쁨이 한량 없습니다(계4:8).
(9) 그 곳에 가서는 이때까지 모르던 것을 다 알게 되며 깨닫게 될지니, 그 얼마나 기쁠 것인가(고전13:12).
(10)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곳이니 즐겁다는 것입니다(계22:3).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섬김을 최대의 즐거움으로 타고 난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고로, 하나님 섬기기를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관계에서 얻는 즐거움은 내세에 이르러서 더욱 큽니다.
그 이유는, 거기서는 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섬기겠기 때문입니다.
스펄죤은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관계함에도 기쁨이 크거든, 내세에서는 면대하는 관계에 들어가니, 그 얼마나 더욱 기쁘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섬기는 하나님 때문에 즐겁거든 고통과 환난 없는 내세에 가서야 하나님이 그 들에게 얼마나 더욱 기쁨이 되랴!” 고 하였습니다.
묵상 Point
1) 자기 백성 곁에 서신 예수님
어린양 예수는 자신 따르는 백성(십사만 사천)과 함께 시온 산에 서셨다.
용과 두 짐승의 거센 핍박과 미혹속에서(12-13장) 영적 사투를 벌인 자기 백성을 하나도 잃지 않고 다 지키셨다.
세상이 갈수록 악해지고 박해는 격해지고 신원의 부르짖음은 높아져 가지만,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은 우리를 능히 보호하시고 구원과 승리와 영광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그러니 식어진 전의를 다시 불태워 바다 위에 선 용(12:17)과 끝까지 맞서자.
2) 새 노래를 부르는 하나님의 백성
음녀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신랑이신 예수를 향해 정절을 지킨 사람들,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 어린양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른 사람들, 모래 위에 선 용(12:17)과 영적 전투에서 이긴 사람들만이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다.
이것은 지금도 어린양을 따르는 이 땅의 교회와 성도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과 위로를 주고, 악한 세력들의 거센 도전 앞에서 끝까지 저항할 것을 격려한다.
‘오늘’고난 앞에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신앙을 보일 때, ‘내일’ 주 앞에서 정결한 모습으로 찬양하는 자로 서게 될 것이다.
3) 심판을 맞을 우상숭배 하는 자들
성도들을 박해하고 모든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바벨론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다.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도 안식(구원)을 얻지 못한 채 불과 유황으로 세세토록 고통을 받을 것이다.
짐승의 표를 받아 세상에서의 안전과 안락을 꿈꾸던 자들을 영원히 쉼을 얻지 못하지만, 주님을 섬기고 따르다가 죽은 성도들을 잠시 고난을 당하지만 영원한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주님과 그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은 아무리 크고 강할지라도 영원한 파괴와 파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믿음을 지키고 주를 따라온 삶의 결과가 내 기대와 다를지라도 성급하게 불평하지 말고, 그 너머를 바라보자.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8-11절 큰 성 바벨론과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큰 성 바벨론은 당시 ‘로마’를 상징합니다.
바벨론은 모든 나라를 그들의 술에 취하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실 뿐 아니라, 그들의 술에 취해 음행한 사람들에게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십니다.
세상이 주는 달콤한 술에 중독되지 않도록 늘 말씀을 따라 행위를 점검합시다.
12,13절 성도에게 인내를 요구하십니다. 짐승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계명을 지키고 믿음을 지키는 일은 많은 인내와 수고가 필요합니다.
죽음을 불사해야 할 순간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땅의 수고를 그치고 하늘에서 쉼을 얻을 것이니, 성도에게 죽음도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에게 인내의 시간은 짧고(삼 년 반), 안식의 시간은 영원합니다.
반대로 심판받을 이들은 밤낮 수고하고 영원히 고통 받을 것입니다(11절).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3절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어린 양의 이름을 새긴 십사만 사천의 성도가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섰습니다.
땅에서 구원받은 이들이 하늘에서 영원히 부를 새 노래를 배우는 중입니다.
많은 물소리 같고 큰 우렛소리 같으며 거문고를 타는 소리 같기도 한 노랫가락이 들려오고, 천상의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선창합니다.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우리도 그들 중에 속해 함께 새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4,5절 구원받은 십사만 사천 성도는 땅에서 신앙의 순결을 지킨 사람들입니다. 여자(바벨론)와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오직 어린 양의 인도를 따르며, 입에는 거짓이 없고 행위에도 흠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이마에 새긴 어린 양의 이름은 땅에서 그들이 살아내야 할 삶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 삶을 인내하며 살아냅시다.
6,7절 ‘영원한 복음’을 든 천사가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요청합니다.
심판이 임박한 순간에도 회개를 요청하며 복음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 얻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기도]
공동체-복음을 위한 비방 외에는 어떤 비난도 받지 않도록, 말과 행위에 흠이 없게 하소서.
열방-전 세계적으로 광견병 사망자가 약 6만 명에 이르는데,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빈민지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각국 정부가 빈민을 위한 의료혜택을 향상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