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보존을 위한 것
A. 세상에 대하여
ㄱ. 홍수 심판 없음 = 땅이 있을 동안에(11, 12, 15 절)
ㄴ. 언약 표시(13, 16, 17 절)
ㄷ. 자연이 인간을 거부함으로 인간발전을 억제 (지연, 2 절)
B. 인간의 질서에 대하여
ㄱ. 인간 질서를 위한 권한 축소 = 법칙 (1, 7 절)
ㄴ. 생명 존중 (4, 5 절)
ㄷ. 인간의 죄에 대한 시간 단축 (기한이 120세)
2> 제10장
*전 세상에 대한 끝으로서 노아와 새 세상으로서 시작한 노아*
종족을 통한 인류의 분산을 꾀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3 인종으로 온 세계가 나누어 지게 된다.
구약성경이 한 사람으로 집중하고 나아간다. 그것은 처음 셋 에서부터 노아의 방주사건으로 옛 세상을 일단락 짓는다. 이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심판과 구원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에서 그 중간에 어떤 구원의 주인공도 없이 노아에게로 향함으로서 노아의 위치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에녹도 의인이지만 하나님이 대려가신 그 이유는 아직 세상을 심판할 때가 되지 않았고 그 일이 노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에 에녹은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노아 한사람으로 세상의 심판과 구원의 모습은 하나님의 장차 오는 인류의 심판과 구원이 예수 한 사람에 의해서 되는 것과 극히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창세기의 노아 사건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장차 이 땅에 있을 심판 곧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여주는 모형이라고 볼 수 있다. 노아와 예수의 상관성은 이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좀더 구체적으로 논한다면 전체성을 갖는 것과 함께 논해야만이 이 사건을 의미있게 이해할 수 있다.
3> 시대적 배경:죄악의 관영
4> 하나님의 개입:ㄱ. 심판하실 계획 ㄴ. 심판을 위한 선택과 구원 계획
ㄷ. 심판을 위한 노아의 선택 ㄹ. 과정
① 노아는 심판을 위해서 먼저 구원받을 방주 건조 명령을 받는다.
② 방주 건조 = 구원준비 (예수의 사역)
③ 방주 완성과 적용= 구원준비끝 (예수의 사역 완성으로 진행)
④ 방주 문 닫고 심판 시작 = 구원받음과 심판 진행(중생과 안식)
⑤ 심판 후 방주에서 나옴 = 완전히 구원받음 (종말 끝)
5> 노아의 홍수에서 그 전과 후의 차이
① 수명의 차이 - 노아 전 수명은 수 백년 까지 살았다고 추정하더라도 그것은 그때의 환경이 사람의 수명을 길게 만든 것이었다. 긴 수명에 맞는 자연의 세계는 자연의 식물이 거대했다는 것과 또한 동물 역시 거대한 것들이 즉 수백년 사는 존재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긴 수명의 사람,큰 식물과 큰 동물의 세계가 있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 원시 고대 이전의 세계와 이후의 세계는 노아로 말미암아 갈라지게 된 것이다.
노아 홍수 이후의 시대에서 사람의 수명이 점점 줄어든 것은 환경의 변화가 홍수심판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홍수 전에는 평평한 곳이 많고 또 땅도 갈라지지 않았고 강도 끝과 처음이 연결되는것과 함께 모든 세계가 하나로 통하는 것에서 홍수로 땅이 갈라지고 산이 높아졌으며 지진과 지각 변동으로 말미암아 자연의 환경이 급격히 변화된 것이다.
큰 나무에서의 충분한 산소 공급에서 나무들이 작아졌다는 것에서 수명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지구의 환경이 사람의 짧은 수명으로 말미암아 지식의 축적이 어려워지고 다시 시작하는 것에서 원시적인 문화로 새롭게 나타날 수 있다.
노아 이후의 시대가 다시 발전되는 시대라고 본다면 하나님의 섭리로서 장차 구원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열된 땅에서 그리고 언어로써 더더욱 흩어진 세계가 된다. 이 원시 문화의 시작이 노아 홍수 이후 그 아들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인류에 있어서 새로운 조상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가장 긴 역사의 생을 우리에게 전수한 사람이다. 노아 홍수로 하나님의 계획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손에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개입이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그 개입의 적극성은 노아 이후 아브라함에서 발견된다. 노아의 시대의 타락상은 아담으로 죄가 들어온 이후 그 끝이 온갖 죄로 말미암아 전체사회를 오염시켰다. 오늘의 시대가 다시 하나님의 심판의 날로 다가선다는 사실에서 노아의 시대와 다를바 없다.
이세상이 끝나는 날에 이세상은 매우 큰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이 지상세계가 소망이 없는 이유는 그 끝이 멸망이라는 사실이다. 그 예언이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물로서 심판이 된 이후에 불 심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노아의 시대 상황과 현재의 영적 상황이 비슷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6> 전체 개요
홍수사건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과 연결해서 보는 것이다. 노아가 예수로 본다면 예수는 그 사역에서 노아 사건을 비교해야 한다.
(5) 노아의 방주 구원과 구약 인물과의 적용
A. 방주를 짓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다.(방주 완성)
B. 홍수로 말미암아 방주로 구원을 얻는 것은 신약시대의 구원의 적용이다.(방주로 구원)
기독론적 입장에서 이 방주 사건은 예수 한 사람의 사건(A)과 그로 말미암는 우주적 적용(B)으로 구분되나 서로 연결 된다는 것이다. 즉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연속성은 [방주를 짓는 것=A]이 [예수의 사역의 모판]이라면 홍수로 말미암아 [방주로 구원이 적용=B]되는 것은 그 모판(A)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불 연속성은 [방주를 짓는 예수의 사역]과 [교회의 적용]이 서로 다른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사역(방주를 짓는 것)이 교회의 적용(방주로 사람들이 구원)을 시작 한다는 의미에서 예수 사역의 은혜를 그대로 교회에 적용되는 것에서 또한 연속성이 나타난다.
그것을 전체적으로 설명 한다면 [예수의 사역]과 [예수로 말미암는 교회]와 그리고 [안식]과 이후 [부활재림]이다.
이상과 같이 서로 연속성이 있으면서 예수 사역(A)의 것으로 교회에 적용이 된다는 의미에서 불 연속성이 나타난다.
이와같이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영역과의 관계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그리스도에게 모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신약에서 물로써 심판한는 것이 장사 지낸다는 의미로써 사용될 수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중심이 되며 그로 말미암아 새로운 가족이 형성 된다는 것이다. 그 가족이 곧 교회이다.
하나님은 먼저 구원자로 등장 한다. 개인 소명은 그로 말미암아 온 백성이 구원을 얻는 것과 같다. 노아와 모세와 함께한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로 함께 하시고 그 사역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구원을 이룬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이전의 모든 개인 소명은 예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것을 예수 홀로 그 일을 감당하는 것이며 그 사역이 구약의 사건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사실상 노아의 구원과 심판이 예수의 구원과 심판의 예표가 되는 것은 복음적으로 노아와 그 사건을 예수와 예수의 사역의 예표로 하나님께서 역사한 것이다.
노아와 예수의 이러한 구원의 관계보다도 모세와 다윗등은 예수의 예표로써 아주 친밀한 흡사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노아와 예수가 간접적으로 예표된 관계인 반면 그 이후에 오는 이스라엘의 구원에서는 직접 관계되어 예표 된다는 사실이다.
모세의 사건 다윗의 사건 역시 예수와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모세와 다윗의 예표로는 그 흡사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그 소명자들이 예수를 예표하기에 더욱더 예수안에서 그들의 신앙의 여정이 비슷할 수 밖에 없고 그 예표자들의 길을 하나님이 친히 인도 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임이 드러난다.
성경구약 전체적 흐름에서의 중요한 예표는 아브라함에서 다윗과 솔로몬 등이 있다
그 각각의 인물이 연결되면서 그것은 구약의 전체 예표가 신약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구약의 그림자적인 것이 신약에서 실체로서 밝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 전체 맥락에서 아브라함 이전의 노아 사건은 전체적 접근을 통해서 전체적 이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노아의 전체적 접근은 사실상 다른 아브라함 이외의 모든 개인에게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와 같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요셉의 경우가 예수그리스도와 그 구원을 드러내는 예표적 인물로 등장한다.
만약 아브라함과 요셉등에서 그리스도 생애를 보지 못한다면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 세계라는 것이 과장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처음부터 예수를 통한 구원의 목적이 분명했다는 것이 창세기의 여자의 후손 약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 약속 이후 사건이 점점 드러나게 된다는 계시의 발전이 허구가 아님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다. 하나님이 부른 자들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낸다는 그 목적을 위해서 그 예표적 인물들을 부른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스라엘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였다.
(6)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와의 비교
성경의 주제중에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주제가 사실상 가장 큰 주제임이 분명하다. 그 안에는 거의 모든 소주제에서 대주제까지 포함된다.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나라 약속과 성취 언약 등 모든 주제가 구원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신약과 구약에서 이보다 더 큰 주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 주제의 범위가 처음에서 끝까지 해당된다는 것이다.(구속사)
이 구원이라는 주제와 바꾸어서 사용될만한 것이 있다면 신약에서 찾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나라 역시 성경전체에 해당되며 특히 예수의 사역에서 중심되고 지금까지도 그 나라가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과 바꿀만한 넓은 의미의 세계관이 되며 그 나라가 구원의 전체성을 갖는 것이다.
성전이 하나님의 나라와 분리되어서 이해하는 것보다 그 안에 종속되어야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전과 성막의 그 모든 것을 포함시킨다. 예수가 그 나라의 왕으로써 나라의 대제사장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이 하나님의 나라를 포함시키는 것이 무리가 되는 것은 성전과 성막이 분명한 성격을 가진다.
그 것이 대제사장과 왕을 동시에 포함시키기가 무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성전을 포함시키는 데는 전혀 무리가 될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구원이 성막을 포함시키는 것과 같다. 이는 성막이 하나님의 구원을 포함시키는 것이 아닌 그 구원의 방법이 성막이라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이라는 것으로써 성전과 성막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나라
하나님의 구원의 방주
그러므로 예수의 예표인 노아는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예표적인 사역이며 이는 그 하나님 나라와 구원을 위한 방주와 성막을 짓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방주 사건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구원의 나라] 라는 것에서 [성전=방주자체]보다 큰 주제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성전(방주)을 일으킨다.(자신의 육체의 부활) 그 이전에 그는 성막의 기능과 같이 산제사를 드린다. 이는 성령이 우리를 성전삼고 성막으로 구원의 나라에 인도하여서 참 성전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초청에 의해서 나온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그 마음이 성전됨과 그리고 그 안에서 참 장막인 성소와 지성소로 우리가 정함을 받는다.
이는 먼저 예수의 성전됨과 성막의 성취로 우리가 성전됨과 성막으로 거룩함을 입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나라에서는 예수가 왕과 대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왕이 우리를 백성삼고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제사장 삼아서 그의 나라(구원)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과 그 나라의 제사장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적용 된 자들은 그 나라의 왕과 그나라의 대제사장에 의해서 된 자들이며 그신분이 백성과 그리고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성막은 하나님 나라는 성막(방주)으로 백성을 인도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그 나라를 위한 희생이 먼저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과 백성은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기 전에 먼저 그 나라를 위한 예수의 희생이 있으며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성막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의 부활로서 새 성전이 시작된다.(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희생하듯이)
이는 그의 이런 대제사장적인 제사인 죽음으로 성막이 성취되고 그리고 그의 성전인 육체의 부활로써 그가 나라의 왕이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을 그가 찾는데 그는 왕으로써 자신이 일으킨 성막과 성전에 의해서 백성을 찾는다. 그의 죽음은 성막과 대제사장으로써의 희생이라면 그의 부활 역시 성전의 세움과 왕으로서 나타난 것이다.
그는 십자가로써 제사을 이루고 부활로써 왕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을 찾는다.
그 방법은 그가 왕으로써 자신이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것이며 이는 먼저 그 나라의 인도라는 훈련이 있다. 그것은 그의 죽음으로 이루어던 성막에 의해서 우리가 생되어 그 하나님의 나라로 정복해 간다는 것이다. 이는 방주에 들어간 이상 그의 구원이 확실한 칭의의 믿음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이중성에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인도인 성막에서의 정결과 그리고 그결과 하나님의 통치의 나라라는 영역인 그 나라에 믿음으로 들어간다. 그가 백성이며 성전이다.
성도이며 새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람이며 사장이며 그리고 양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를 얻기 위해서 예수의 죽음과 희생으로 그가 거듭나야 되며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된다는 사실이다.
의식적인 세례가 단 시간적인 의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세례와 같은 구원의 적용은 단 시간적인 것으로 출발하지만 노아의 사건에서 세례의 의미가 마치 40일 비가 온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원을 얻는 과정도 이 세례에 포함되어야 한다.(세례의 이중성 참고)
또한 출애굽에서의 홍해 탈출이 주는 교훈은 홍해에서 모두 수장 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이 세례라는 것이라면 또 다시 광야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사실상 홍해의 세례와 광야의 세례가 대치되게 보인다. 그러나 이는 서로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홍해가 세례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즉 구원의 출발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홍해의 의미는 사탄을 이긴 것이다. 이는 사람을 더 이상 종으로 삼는 것이 끝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광야에 나와서 가나안 약속의 땅에 들어갈수 있는 것이다.
먼저는 홍해로 사탄의 종에서 탈출한 것이며 그 후에 그는 광야에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삶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 되는 것이다. 이 일이 광야의 훈련에서 이루어진다. 마치 우리가 믿음으로 세례를 받고서 광야교회가 성령으로 인도되는 훈련으로 살아가는 자라는 것이다.
이는 불세례가 홍해와 같이 뒤에서 쫓는 바로에서(사탄에서 <악>)는 벗어났으나 또 다시 광야에서 자신이 성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와 함께 모두 홍해에서 죽은 것이다. 홍해의 죽음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옛 세상에 대해서 끝났다는 것이다.
과거와의 단절이다. 홍해전에는 우리의 적인 사탄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모두 패했으나 유월절 피과 홍해로 사탄과의 싸움에서 예수로 이기고 완전히 탈출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홍해 후에는 광야에서 사탄과 싸우는 것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자신안에 있는 사탄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이다.(육체의 죄) 이는 그가 이 싸움에 승리하면 그는 가나안의 영적 전투로써 그가 믿음으로 땅을 얻는다는 것이다.
사탄과의 결별이 홍해로 끝이난 것은 옛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며 그 결과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에 훈련된다는 것이다. 홍해로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가 거듭나고 새 사람이 된 것이다. 구원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도착을 위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믿음으로 교회에 오는 자에게 세례를 초기에 베푸나 이것 자체가 구원이 아니다. 장차 이 세례와 같이 그가 죽고 장사되고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예수와 함께 죽고서 장사 된다는 것은 믿음으로 초기에 그리스도로 적용되는 것이다.
즉 애굽에서 유월절 죽음과 그리고 홍해인 장사지냄과 그리고 광야로 나온 첫 부활과 같이 사실상 홍해 이후 가나안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활했다. 이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에(세례 받을 때) 영적으로 예수와 죽었다는 것이다. 또 바로 장사 지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바로 부활 한 것이다. 처음 믿을 때에서부터 우리는 예수와 죽고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앙의 훈련으로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요단강의 건너감과 그리고 가나안의 천국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홍해가 불세례와 같은 중생이라면 그 이후는 광야의 시험을 이기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이와같이 그의 구원에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구원에 들어가려는 자에게 교회가 그의 신앙의 고백으로 의식인 세례를 주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홍해라는 세례를 받고서 애굽에서 나온 것이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을 얻은 자가 자기 구원을 끝까지 얻기 위한 출발이 세례이다. 그에게는 광야의 훈련이 있으며 요단강이 있으며 가나안이 있다.
만인이 그리스도인 이듯이 우리가 교회에 있는 모든 자를 만인 제사장으로 바꾸어서 사용한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으로서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인 제사장이라도 또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교회의 구성원 그들 모두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개인의 믿음으로 얻어야 되는 문제이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이 구원을 얻고 시작하는 제사장 백성인 것은 사실이다.
그 나라의 복음으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일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는 서로 분리되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를 다스린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통치라는 사실과 그리고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통치한다는 그 대상은 교회를 말한다. 교회가 그 나라에 들어가야 되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그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로 말미암아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교회 위에 있다는 사실이며 교회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통치는 개인 개인마다 각각 다르게 나타난다. 그것은 복음과 그 복음에 순종에 의해서이다. 특히 그 나라의 복음으로 양육 받은 다는 것에서 지도자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성도라는 것이 교회 안에서 모두 같은 신분으로 부르는 것이다. 형제 자매 또는 보편적 호칭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로 인도되어 양육되어서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모두가 얻는 것보다는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이다. 모두가 제사장으로 부름 받았으나 모두가 참 제사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신부이나 모두가 기름을 준비한 것은 아니다.
기름 준비는 믿음이다. 예수는 먼저 제자 삼으라고 말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해당된다.
예수가 제자들을 처음부터 제자라고 부른 것이다. 긴 시간 동안의 훈련으로 제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다. 이미 제자 삼고서 그들에게 도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도 역시 제자 삼아야된다. 이는 교회가 하는 것이다. 누구나 자기 제자를 임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사도와 같은 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제자 삼아서 그리스도를 가르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지금도 제자 삼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는 그들에게 예수를 가르치는 것으로 예수의 제자를 삼는 것이다. 제자 삼고서 그들에게 구원의 표로 세례를 준다.
이는 초기에 받는 것이며 믿음으로 세례 받는 자에게는 누구나 성령이 찾아 오신다. 그리고 성령은 그에게 함께 한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것은 그 후로 계속된다. 그것은 성령으로 인정이 되기까지 그가 믿음으로 순종하면서 나가야 된다.
이렇게 출발이 누구나 같다는 것에세 세례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가 세례와 같이 예수와 함께 죽음으로 장사 지내게 된 것이다. 성령이 그에게 함께 한다.
세례의 공통점은 그것이 완전한 것이 아니다. 시작에서의 이해이다.
그리고 그 세례로써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원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로 제 2 출애굽과 사람의 아들로써 제 2 출애굽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장자 죽음이라는 유월과 장사지냈다는 홍해와 그의 부활로써 나온 것이 홍해에서 살아난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이 제 2출애굽에서 이루어지고 영적 제 3 출애굽으로 향한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로써는 제 1출애굽의 과정을 그가 제 2출애굽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걸어가고 이스라엘의 결국은 실패하고 만다. 유대의 왕은 사람의 아들로써 유대인의 왕이다.
그러므로 제 2 출애굽에서 이중성이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의 아들로써 유대의 왕이며 유대의 과정을 걸어간 것이며 그리고 최종적인 이스라엘의 실패라면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써 사탄과의 영적인 출애굽을 걸어간다.
그리고 승리하여서 제 3 영적인 출애굽으로 광야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제 2 출애굽의 인자로써 유대인의 왕으로써 걸어간 과정은 이스라엘의 실패의 과정으로 이스라엘이 최종적인 실패가 된다면(십자가) 또 한 가지는 제 2 출애굽의 시작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써 사탄과 싸우는 것이고 그 승리가 부활이다. 그리고 새로운 영적 3 출애굽으로 광야 교회가 탄생한다.
출애굽은 먼저 세례로써 된다는 사실에서이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영적 출애굽의 시작이며 그리고 그것은 시작한다는 영적인 세례를 의미한다. 이들이 중생이된 것이며 성령으로 광야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인정 되기 위해서 광야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가나안 땅인 하나님의 나라에 침노해 가야 된다는 것이다.
세례의 의미는 우리의 과거가 끝났다는 것이다. 우리의 과거의 죄가 모두다 사함 받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과거 옛 세상의 사탄의 종에서 벗어나서 성령으로 그가 자신을 십자가에 연합시키는 세례인 영적 중생으로 말미암아 현재 구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례가 그리스도로 우리의 과거에 대해서 이미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새로운 출발로 순례자가 되어 광야를 거처서 가나안에 들어가고 있다. 이는 세례가 옛 세상을 벗어난 것이라는 의미하며 또한 세례는 자신의 옛 사람을 벗고서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례가 옛 세상으로 우리를 만든다. 우리가 세례 전에는 옛 세상의 사탄의 종이라면 세례 후는 그 사탄의 종에서 벗어나서 광야에 나온 자라는 것이다.
그가 세례로 이제는 옛 세상은 벗어났으나 옛 사람의 모습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새 옷을 입어야 한다. 사탄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예수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현재 세례로 광야에 나온 자는 그의 과거가 예수의 죽음과 함께 과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영적으로 육체가 죽었다는 것보다는 그가 의식적인 세례를 받기 전에는 자신의 영육이 사탄의 종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탄의 영역에서 자신이(영육이 모두) 세례로 말미암아 광야로 나온것이다. 과거에는 내가 지은 죄와 그리고 사탄의 종의 상태에 있었던 것에서 믿음의 고백과 함께 세례로 말미암아 그가 이미 옛 세상과 사탄과 결별 한 것이다.
그리고 중생의 세례로 그가 사탄에서 벗어났지만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이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아가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정복해 가는 자이다. 그전에는 광야의 훈련이라는 과정을 믿음에 의해서 통과해야 된다. 모든 교회에서 이런 광야의 과정을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또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으면 않된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자가 거룩한 자이다. 하나님이 구원한 것에서 거룩한 무리라는 것이다.
백성도 하나님의 나라에 의해서 구별된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 다고 부를 수 있다. 그들이 실재로 거룩한 백성으로 되는 성화는 이후에 따른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자는 제자들이다. 그들이 제자 되는 시점이 처음에 믿기로 작정한다는 것이고 그것의 표가 세례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증거가 사행2장 41절에서 나온다. 성경에서 세례는 이와 같이 회개하고 믿기로 작정하는 그때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세례 주는 오늘의 이해는 세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세례는 신앙의 출발에서부터 그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나아가는 것이다.
이 죽음은 바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그가 하나님의 영적인 훈련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결국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그대로 반영 된 것이며 그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다. 그는 믿음으로 계속 영적 전투를 하여야 하며 끝까지 이미 얻은 구원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성령으로 그가 안식에 인도되고(낙원) 성령으로 장차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이다. 성경에서 구약의 백성이 광야에서 모두가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는 신약의 교회가 광야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교회는 영적 훈련과 영적 전투가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교회가 모두 광야로 나왔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광야에서부터 예수의 유월절에 참여한다는 것이며 그 모두가 예수의 죽음을 그때부터 기념할 수 있는 것이다. 성찬을 나누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한 가족이 된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한다는 이 성찬은 사실상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것에서 모두의 참여로 이끌어야 된다는 것이다. 믿음이 초보도 믿음이 장성한 자도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에서 하나의 식사를 갖는다는 신앙의 영적 가족이며 영적 공동체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만찬시에 문제가 일어난 것이다. 그 문제는 모두가 참여하는 것에서 나타난 것이다.
예수의 피가 효험이 되는 것은 교육 후나 기타의 것으로써가 아닌 처음 믿는 그때부터 효험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사람들이 믿으려는 그때부터 사죄의 은총이 된다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교회에 들어 왔다는 것에서 바로 예수 죽음의 상징인 그 성찬에 모두 참여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