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파 군위문중 입향 내력(文正公派軍威門中 入鄕來歷)
<봉훈랑(奉訓郎) 광흥창사(廣興倉使) 홍계강 공(洪季康公)의 입향>
휘 계강공(季康公)은 시조 태사공(太史公)의 15세손이며 고려
문하시중(門下侍中) 문정공 휘 언박공(彦博公)의 손자로서 아버지
공조전서(工曹典書) 휘 사원공(師瑗公)의 셋째 아드님이다.
고려 말엽은 정쟁이 극심하였을 뿐 아니라 우리 가문에도 불의의
화(禍)가 닥쳐 큰 해를 입게 되었으나 휘 사원공(師瑗公)은 천행으 로 화(禍)를 모면하였다. 그 뒤 고려는 곧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서게 됨에 휘 사원공(師瑗公)은 조선 태조(太祖)조에 공조전서 (工曹典書)벼슬을 지낸뒤 녹권(錄券)과 궤장(机杖)을 하사받고 은 퇴 생활을 하였다.그러나 왕자들의 왕위 다툼과 고려 유신의 반란
으로 도성(都城)은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이에 뜻한 바가
있어 아들들로 하여금 모두 부귀영화의 꿈을 버리게 하고 도성
(都城)에서 먼 곳으로 낙향(落鄕)하여 살게 하였다.
큰아들 휘 윤강공(允康公)은 호남으로, 둘째아들 휘 중강공
(仲康公)은 평안도로 셋째아들 휘 계강공(季康公)과 넷째아들
휘 숙강공(叔康公)은 영남으로 각각 낙향케 하였다.
휘 윤강공은 호남을 거쳐 제주도(濟州道)로 입도 한 것이 1402년
(조선조 태종 2년)이라 하니, 휘 계강공은 1388년(고려조 우왕
14년) 출생 이때 겨우 15세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총각 신분으로 남쪽 땅에 내려 왔다”하고
“송포(松圃)홍공 문집에도 견기남하(見機南下)하여 처음 금릉 사령
(金陵四靈)에 잠깐 머물다가 군위(軍威)에 입향(入鄕)하니 금구
(金鳩) 마을이라“하였다. 여기서 소윤(小尹) 효령사공씨 휘 민공
(敏公)의 따님과 혼인하여 살았다.
그 뒤 현손 증 공조참의(贈工曹參議) 휘 의동공(義仝公)때 비로소
지금의 군위읍 외량 마을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으니 태항산 한
자락이 동(東)에서 서(西)로 뻗어 내린 그 모양이 양(良)자 모양
이라 그 끝을 위천이 휘감아 돌면서 양천(良川),내량(內良) 외량
(外良)마을이 형성되었는데 합쳐서 “어리실”이라고 하고 또한
양곡(良谷)마을이라고도 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입향(入鄕) 200여 년이 될 무렵 1592년(조선조
선조24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 바, 그 때까지 보지 못한
큰 전란, 7년을 겪고 난 뒤 살아남은 후손은 오직 휘 위 서담공
(瑋西譚公)과 휘 박공(璞公) 두 형제 뿐으로 이때 서담공의 아버지
와 두 분 숙부님도 외적에 항거하다가 돌아 가셨다.
이 때 서담공은 비장한 마음으로 분발하여 영남북부 의병대장
김해(金垓)장군과 의병을 일으켜 식량 보급 총 책임을 맡은
가운데 안동,의성,군위,인동등지에서 왜적과 싸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왜란(倭亂)이 끝나자, 서담공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을 사사(師事)하고 학문을 더 익혀 문과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시고, 또한 자질(子姪)에게는 학문을 권장하고 가정에는 효자
우애(孝慈友愛) 가범을 세워 가문을 부흥케 하는데 온 힘을 기울
였다. 그 뒤 어느덧, 또 200여 년이 되어 문호가 제법 번창하고
자손들이 모두 착하고 영리하여 학문에 힘써서 큰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경제력도 좋아져서 관계(官界)에도 많이 진출하게
되었다. 이에 다시 합심 노력하면서 그 옛날 도성(都城)에서
명성을 떨치고 영화를 누리던 시대를 회상하고 새로운 각오로
배근 지달(培根枝達) 즉 뿌리를 북돋우어야 가지와 꽃이,
성해진다는 신념으로 숭조 돈친(崇祖敦親)의 사업을 시작하여
학문, 덕행, 충의, 훈공이 뛰어나신 선조 할아버지, 충평공,
문정공, 서담공의 문집을 편찬하고 이어서 각판(刻板)을 만들어
인간(印刊) 반포(頒布)하였을 뿐 아니라, 다시 또 1786년(조선조
정조10년)에 양천서원을 건립하여 세 분 할아버지 위패(位牌)를
사우(祠宇)에 모시고 제향을 받들었다.
이 서원은 남양홍씨 문중에서 가장 먼저 된 서원이라 스스로
자긍심을 가진다. 뿐만 아니라, 다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니
그 높이가 196센치미터, 폭 60센치미터, 뚜께 47센치미터이다.
이 지방은 사암(砂巖)지대라 좋은 돌이 없으므로 저 먼 경남
진해 바다 쪽 해석(海石)을 구해 낙동강을 거슬러 배로 상주
낙동까지 와서는 다시 위천(渭川) 구불구불 200리를 뗏목으로
끌어당겨 운반해 와서 쪼고 갈고 곱게 다듬어서 글씨를 쓸 수
있게 하였으니 그 당시 운송 수단과 돌 깎는 기술이전, 인력
에만 의존한 것을 감안하면 그 정성 그 수고 어떠하였겠는가?
신도비 글씨는 서담공 후손 휘 택주 공(宅疇公)이 썼으니 모두
명필(名筆)이라 한다. 청나라 원세개(袁世凱)가 우리나라에
왔다가 돌아갈 때 다른 선물은 거절하면서 오직 휘 택주공이
쓴 천자문 한 권을 가지고 북경에 가니 모두 보물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또한, 대원군도 탁본(拓本)을 했고 지금도 탁본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한편 1629년(조선조 인조7년)에 건립된 칠탄숙(七灘塾)에는 항상
수학하는 유생(儒生)들이 만원으로 성황을 이루고 외지 손님들의
행렬도 빈번하였으나, 지금은 공당(空堂)으로 텅 비어있고 다만,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1603년(조선조 선조36년) 서담공이 족보(族譜)의계통을 확인하여
처음으로 남양홍씨 세보(南陽洪氏世譜)를 손수 만드시고 스승
유성룡(柳成龍) 선생께 서문을 청하여 이 보(譜) 첫 장에 실었고
이 다음 족보(族譜)를 만드는데 근간(根幹)이 되었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1612년(조선조 광해군4년) 서담공이 수석(水石)을 사랑하여 학우
(學友)들과 더불어 자연을 음미(吟味)하면서 도학(道學)을 연마
하기 위하여 세운 고반지소(考槃之所)인 양암정(兩岩亭)도 또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이 사이가 입향(入鄕) 이후 가장 활력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었
으니, 또 이때 타성(他姓)문중에서는 우리 문중을 가리켜 “양곡
문한가(良谷文翰家)“ 즉 양곡집네는 선비가 많다는 것이고,
이어서 “홍무 둔필(洪無鈍筆) 즉 ”홍씨는 글씨 못 쓰는 이 없다“
는 말로 칭송이 많았다고 한다.
이후 지금까지 군위 문중 세가(世家)는 널리 퍼져 수백 호로
늘어났으나, 오늘날은 산업사회 시대라 자손 대다수가 각기
생업을 위해 도시로 진출, 이사하고 남은 후손들이 고향을
지키면서 매년 음력 2월 마지막 일요일에 서원 향사로 제향을
행하니 전국 각지 먼 거리를 불사하고 뜻있는 종친 후손들이
지극한 숭조 돈족(崇祖敦族)의 성의를 다해 많이 참석하니 이
날은 보기 드문 성황을 이루고 있다.
서기 2013년 5월 일
후손 영두(永斗) 삼가 씀
* 자료제공 ; 남양홍씨 대구 화수회 65년사
* 작성자 ; 대구화수회 전 감사 홍 현 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