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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교회(The Church)
본문 : 에배소서1장22~23절
성경 교리 연구가 60번째에 이르렀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떤 단계들을 밟아 왔는지 한번 돌아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 대한 고찰로 출발해서,
우리 자신의 이해력에만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하지 알게 된 후,
우리는 사람들이 늘 그래왔듯 계시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 살펴보고, 이어서
성경이 사람들과 그들의 필요에 대해, 그리고 그 필요의 원인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 고찰했으며, 이로부터 죄의 교리가 도출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엇으며,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는 성령의 작용을 알아봄으로써 구원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고의 편의를 위해 몇 가지 구분을 한다는 것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각 교리가 얼마나 놀라울 만큼 필연적으로 다음 교리와 연결되는지 다시 한 번 인식하여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이며, 하나님의 목적은 총체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교리를 모두 다루고 나면 반드시 다음 교리가 이어지게 됩니다.
1.교회론을 고찰해야 하는 이유
지난 강의에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교회에 사도와 선지자, 목사와 교사 등 필요한 은사들을 갖춘 사람들을 주셨는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특별한 은사들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졌던 일시적인 은사도 있고,
모든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지는 더 지속적인 다른 은사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은사가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교리를 고찰하는 것은 논리상 필연적이며, 성경의 진리 자체도 그렇게 하도록 강권합니다.
1) 성경의 교회론을 강조한다.
교회론은 성경의 교리를 다루는 책에서 완전히 빠져 있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성령에 등장하는 교리들을 알아보는 일에 관심이 있다면 교회에 관한 교리를 다루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신약서신들은 교회를 대상으로 씌어진 것이며, 그 가르침은 교회에 대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더 개인적인 필요와 체험을 다루는 성경의 교리들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교회론이 중대한 것이 아니라면 신약성경이 교회에 대한 진리에 그처럼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 자체의 특성이 이 교리를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2) 교회사가 교회론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교회사에서도 이 교리가 대단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역사에서도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대전환점인 종교개혁과, 17세기에 일어난 모든 사건-청교도 혁명의 일부 측면도 여기에 포함됩니다-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적 관점으로 이 사건들을 바라보더라도, 교회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그것을 정말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교회의 본질에 대한 교리를 지켜내개 위해서라면 큰 역경을 견디고 모든 것을 잃을 각오까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교리는 대수롭게 여길 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어떠한 핍박이 와도, 심지어 목숨을 걸고라도,
비밀 집회소를 만들어 함께 모일 것을 고집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리를 살펴볼 만한 다른 이유가 없다 해도, 옛 선조들의 이름과 위대함을 존중한다면 그것을 연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의 진리와 대의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이 그토록 고난을 당하지는 않습니다.
3) 오늘날 교회의 상황 때문에 교회론이 필요하다.
오늘날의 교회는 소위 에큐메니칼 운동이라고 하는 것을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잡지들은 이 운동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으며, 이 운동의 대표자들은 20세기 교회의 특별한 기능은 교회의 본질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과의 토론에 뛰어들려 한다면, 그리고 이런 토론에 지적 흥미를 가질 수 있으려면 우리는 교회에 대한 신약의 교리를 알아야 합니다.
4) 바른 복음 증거를 위해 교회론이 필요하다.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의 원인은 복음주의자들이 특히 지난 육, 칠십 년 간 교회의 본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우리의 직전 세대들은 단체를 조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고, 교회적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큰 교단들의 복음 증거는 희석도었고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아닌 단체에서만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교회에 관한 교리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복음의 메시지와 그것이 오늘날 세상에서 가진 중요성에 깊은 관심이 있다면, 교회론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교회론
교회론은 대단히 논란이 많은 주제입니다.
교회론 이야말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주제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해서 어떤 주제를 다루지 않고 피하는 것은 대단히 비겁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떤 배경에서 자랐든,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든, 가능하면 열린 마음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보려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쉽게 빠져드는 편견들로부터 건져 주시길 기도하면서 우리 모두 이 일을 해봅시다.
1)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
첫 번째로 다루어야 하는 질문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 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교회에 대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이 두 주제에 대해 상당히 혼란을 느낍니다.
이는 대체로 로마카톨릭 교회가 이 둘을 동일시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카톨릭의 가르침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로마카톨릭은 또한 교회가 모든 면에서 삶 전체를 지배하고,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일관성 있게 주장합니다.
우리는 중세시대 때 어떻게 로마교회가 자신이 하나님 나라이며 최상의 존재라는 주장을 근거로 왕과 군주와 방백과 나라들을 통치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어느 정도 남아 있습니다.
(1)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다.
하나님 나라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곳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자신의 활동과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눅11:20절에서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으로 간주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주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을 때 여기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으로 인정되는 곳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모든 사람과 만물이 우리 주님의 주 되심을 인정해야만 하는 그 때 더욱 충만히 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왔으며,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또한 하나님 나라가 장차 오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교회와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표현이지만 그 둘이 동일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보다 더 넓고 더 큽니다.
참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인정되고 인식되며, 주님은 거기 거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순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일부분이지만 단지 부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훨씬 더 넓습니다.
하나님은 교회 바깥,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도 통치하십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역사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와 동일하지 않습니다.
2) 교회의 의미
(1) 교회는 부름 받아 주님께 속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이며, 이것은 “불러 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것만이 아니라,
특별한 기능과 목적을 위해 사회로부터 불러 냄 받은 것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함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에클레시아는 “집회”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Church)”라는 단어는 “주인”을 의미하는 헬라어 퀴리오스(kurios)에서 유래했으며 “카이저(kaiser)”나 “시저(Caesar)”도 같은 어원에서 나왔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두 가지 의미를 한데 결합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는 주님께 속했으며, 함께 모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 지역적 모임으로서의 교회
성경에서 교회에 대해 말하는 몇몇 구절을 살펴보려합니다.
성경에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되었을 때는 일반적으로 지역적인 모임을 지칭합니다.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교회와 지역적이고 개별적인 개념으로서의 교회를 구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거의 언제나 이런 지역적 의미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16장에서 바울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에게 문안인사를 할 때,
그는 “저의 집에 있는 교회”(5절)를 언급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모였으며,
사도 바울은 그러한 지역 모임을 주저 없이 교회라 부릅니다.
*롬16: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그는 교회를 거대한 것으로 보는 현대의 에큐메니칼적 이상에 따라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예, 바울은 그의 편지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보냅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가 아닌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갈1:2)을 향해 기록했습니다.
*갈1: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바울은 교회를 여러 개의 지부로 나누어진 하나의 단일체로 보지 않고,
여러 교회들, 즉 수많은 단일체가 갈라디아에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의미 있고 중요한 점입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이것이 사도가 교회라는 주제를 다루는 일반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28절에도 “하나님의 교회 중에(in the church)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을 “교회들 중에”가 아니라 “교회 중에”세우셨다고 말합니다.
(3) 하늘에 있는 교회
“교회”라는 용어는 또 다른 식으로도 사용됩니다.
예베소서의 저 위대한 구절들과 같은 몇몇 본문에서 바울은 분명 교회가
지상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사람들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장 끝부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엡1:22~23 “[22]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23]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같은 서신서에 비슷한 구절이 더 있습니다.
엡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엡5:23~32절에도 바울은 같은 내용을 다시 기록합니다.
(4) 보다 큰 의미로서의 교회
지금까지 우리는 일반적으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가 복수로 사용되며, 저자들은 명백히 개별적 교회들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몇몇 경우에는 “유일한 교회(the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해 더 광범위한 개념을 보여 주기도 합니다.
3) 교회를 설명하기 위한 성경의 예화들
(1) 그리스도의 몸
첫째는 몸의 유추입니다.
몇몇 신약 서신서에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나옵니다.
고전적인 예는 물론 고전12장이지만 로마서12장, 에베소서 4장 및 다른 곳에서도 그런 개념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전12:12,27 “[12]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롬12:4~5 “[4]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5]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엡4:15,16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2) 건물
교회에 대한 또다른 묘사는 성전 혹은 건물의 비유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지혜로운 건축자에 비교합니다(고전3:10).
*고전3: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엡2:20절에서는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지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교회를 세워지고 있는 건물로 생각합니다.
*엡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3) 그리스도의 신부
또 에베소서 5장에서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말하는데, 그 이미지는 요한계시록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는 그리스도께 복종합니다.
이런관계 속에서 교회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됩니다.(엡5:22, 25, 27)
교회가 영광스럽다는 것은
①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하시고(엡3:10)
*엡3: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② 하나님께서 교회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받으십니다(엡3:21)
*엡3: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③ 교회가 영광스럽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엡1:23).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4) 제국
또 한가지 개념은 제국이라는 개념입니다.
에베소서 2장19절에서 바울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분명 사도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유추였습니다.
이 서신을 쓸 때 바울은 아마도 로마의 감옥에 수감되어 이 훌륭한 로마 제국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로마 제국의 각 부분이 널리 흩어져 있으면 서도 중앙의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교회와 유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5) 승리하는 교회
수세기에 걸쳐 사용되어 온 다른 용어를 사용해 말하자면 우리는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혹은 “승리하는 교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상의 교회는 자신의 생명과 교회와 그 모든 것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휘장을 지난 교회는 기뻐하며 승리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것을 장엄하게 표현한 히브리서12장22~24절의 예를 살펴보십시오.
*히12:22~24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23]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24]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4) 결론과 요약-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영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단어가 단수로 사용된 모든 예는 교회가 보이지 않지만 영적 실재로 존재함을 알려 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교회는 가시적이어서 외부에서 바라볼 수 있고,
고린도나 로마, 혹은 다른 특정한 장소에 존재한다고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염두에 두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회가 지역적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좋은 유추는 영혼의 유추입니다.
사람은 영혼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각 사람이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실이 몸을 통해, 행동과 삶을 통해 표현된다는 것을 압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스스로를 보이는 것을 통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역의 교회들과는 별도로 유일한 교회가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실체이며, 참으로 살아 있는 생명체입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영적이고 보이지 않는 유일한 교회의 일원이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당신은 눈에 보이는 교회의 일원이 될 수는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으로 나타난 교회의 일원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영적인 교회의 일원은 아닌 경우도 마찬가지로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와 그것의 눈에 보이는 지역적 나타남을 구분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요약하면,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교회”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임재와 주권이 인정되는 성도들이 지역별 모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에 더하여, 지역 교회에 있는 참으로 거듭나고 신령한 사람들은 동시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 즉 그리스도의 참된 몸의 일원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오늘날 이루어지는 교회에 대한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사실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5) 교회의 연합
(1) 교회의 연합은 영적 연합이며 생명의 연합이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21~21절 “[21]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2]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것은 모두 영적인 연합입니다.
주님은 성부와 성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성부와 성자 안에 있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몇 가지를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17: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그러므로 연합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은 특정한 교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됩니다. 그 연합은 영적인 연합입니다.
엡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린도전서12장도 같은 내용을 말합니다.
몸의 유추가 옳은 것이 되려면, 본질적이고, 유기적이고, 영적인 연합이 있어야 합니다.
엡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첫째로 강조해야 할 것은 성령입니다.
연합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기관들의 합병이나 서류상의 합의가 아닙니다.
성경에는 그런 개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연합은 신비하고, 영적인 연합입니다.
지극히 중대한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2) 교회의 연합은 교리적 연합이다.
교회의 연합은 반드시 교리적이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17:7~8절
“[7]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8]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는 “말씀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성육신에 대한 말씀,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이 된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요8:58).고 주장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기적적으로 세상에 오신 동정녀 탄생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주님의 기적들에 대해 말합니다.
주님 자신이 자신의 기적들을 언급하시기 때문입니다(요14:11).
*요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사도행전 2장42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다시 말해, 교제가 있기 전에 교리적 공통성이 있어야 합니다.
교제는 같은 믿음, 같은 진리, 같은 이해에 기초한 것입니다.
교회의 연합 문제를 논의할 때, 언제나 연합의 영적 교리적 특성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특별하게 믿는 것이 없는 사람들과 연합하는 것은 전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연합이 아닙니다.
연합이란 적극적인 것입니다.
연합은 무엇을 말하는지, 무엇을 믿는지에는 신경쓰지 않고 모여드는 것이 아닙니다.
연합은 생명이며, 능력이며, 열정입니다.
연합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해 결합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교회의 연합은 그런 연합입니다.
교회의 긴 역사를 되돌아보면, 하나님이 영적으로 그리고 교리적으로 마음을 같이한 소수의 사람을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 크게 사용하신 사건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붙잡아 사용하셔서 큰일을 행하셨습니다.
하지만 서유럽 전체에 단 하나의 교회만 존재했을 때,
그 교회가 사람들을 어디로 인도했습니까? 암흑 시대입니다.
6) 교회와 국가의 관계
(1) 로마가톨릭과 에라투스주의자들의 견해
로마가톨릭의 개념은 교회가 국가이며 국가의 모든 일을 주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라투스주의자 에라투스라는 사람이 처음 주창한 견해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는 의사였습니다.
에라투스는 교회가 국가의 한 부분이라는 해로운 교리를 창안한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영국이 국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입니다.
영국 국교회는 에라스투스주의를 신봉하며,
대부분의 루터파 교회들도 같은 견해를 채택합니다.
독일의 루터파 교회도 에라스투스주의였는데 독일 루터파 교회의 에라스투스주의가 없었다면 히틀러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말도 대단히 훌륭한 가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면 에라스투스주의는 교회가 국가의 한 조직이며,
국가에 의해 통치되고 지배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수반이 주교 등의 고위 성직자들과 관리들을 임명합니다.
1928년 영국에서는 새 기도서 채택에 대해 하원에서 큰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채택하기로 결정했으나 국회는 그 결정을 뒤집을 수 있었습니다.
국회가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렇지만 다른면에선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옳은 결정과 그른 결정을 모두 할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2) 개혁주의 견해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로마가톨릭과 에라스투스주의의 견해 이외의 제 삼의 견해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소유하셨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국가는 하나님의 정신인 것입니다.
바울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바라”(롬13:1)라고 말합니다.
권세 잡은 자들과 모든 다스리는 자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라고하는 다른 영역이 존재합니다.
이 두 영역은 나란히 존재 합니다.
전자가 후자를 주관하지 않습니다.
그 둘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둘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약 성경이 묘사하는 국가와 교회의 모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약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교회를 암시하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초대 신자들은 정부와 독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임재 안에서 모였습니다.
모임의 바깥에는 그들이 속한 큰 국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 국가의 시민이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국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영역에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지난 수 세기 동안 국가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개혁주의적 견해였습니다.
(3) 성경은 민족 교회를 지지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민족교회”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와 정반대입니다.
바울은 골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고 기록합니다.
교회는 뭔가 다릅니다.
그것은 거듭나고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 보았듯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머리로하여 지역적으로 함께 모이는 것-
그것을 교회라고 부를 수도 있고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입니다.
사회적 인종적 구분이나 국적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교회에서는 그런 것들을 절대 언급하면 안됩니다.
그런 자격조건들을 덧붙이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이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똑같습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민족 교회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영적인 견해에 관심을 갖는다면, 다시 말하건대 그런 상태의 교회는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교회였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한 논증이 아닙니다.
그 때는 그러했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21:43) 시대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남았습니까?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2장에서 입증하듯이, 교회입니다.
베드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말씀을 교회에 적용시킵니다.
교회는 이제 초국가적입니다.
모든 민족 안에 교회의 백성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의 다양한 나라에 살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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