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현동 롯데마트 건너편 정문부장군의 묘를 찾아왔습니다.
이곳은 경기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된 곳으로
임진왜란 때 함경도 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 정문부(鄭文孚, 1565-1624)의 묘입니다.
정문부 장군은 해주 정씨로 한양에서 태어나 선조 21년에 과거에 급제,
승정원 사헌부 등에서 문관으로 있다가, 선조 24년에 함경도 북평사에 부임하였습니다.
이듬해(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대장이 되어
명천 길주 등에서 왜군과 싸워 승리하여 관북지방을 수복하였습니다.
이 때의 공으로 길주목사가 되었고,
광해군 2년에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습니다만
인조 때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고문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묘역 하단에 위치한 북관대첩비에 먼저 다가갑니다.
북관 대첩비는 정문부장군께서 임진왜란때 의병들을 이끌고 함경도 일대를 지키고
왜병을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함경도 의병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거느린 왜군을 무찌른 것,
왜란이 일어나자 반란을 일으켜 함경도로 피난한 두 왕자를 왜적에게 넘긴 국경인(鞠敬仁)을 처형한 전말 등이
1,500자 비문에 소상히 적혀 있는
높이 187cm, 너비 66cm, 두께 13cm의 비석입니다.
조선 숙종 때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로 부임한 최창대(崔昌大)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臨溟)에 건립한 비석이지만
1905년 러·일 전쟁 때 함경지방에 진출한 일본군 제2예비사단 여단장 소장 이케다 마시스케[池田正介]가 비석을 파내
일본으로 옮겨 군국일본'의 상징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1978년 도쿄[東京]에 있는 한국연구원장 최서면(崔書勉)이 밝혀내어
비문에 이름이 있는 의병의 후손들이 일본 정부에 청원서를 내는 등 반환운동을 벌이고
정부간 오랜 교섭 끝에 2005년 10월 한국으로 반환되었습니다.
2006년 북한에 전해져 함경북도의 원래 위치에 다시 세워졌고
우리나라는 원래의 비를 그대로 복원하여
경복궁과 독립기념관 그리고 이곳에 복제비를 세워 놓았습니다.
문득 북관대첩비에 적혀있는 내용 중 ...
왜란을 피해 피난온 두왕자를 잡아 일본에 넘겨주고
결국 정문부에 의해 죽임을 당한 국경인등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이 듭니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 일본군이 북상해 오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피난을 갑니다.
파천이라고 써야겠지요.
그런데
선조는 장남 임해군(臨海君)과 5남 순화군(順和君)은 함경도로 가라고 지시합니다.
아마도 조선 왕업의 발상지였던 함경도로 왕자들을 보냄으로써
그 지역에서 병력을 규합해 전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임금의 뜻과는 상관없이 두 왕자와 그들과 동행해온 외척들은
지역 수령과 백성들을 닦달했고,
그들의 접대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궁노들을 동원해 매질을 자행했습니다.
이들이 끼치는 민폐 때문에 결국 민심이 돌아서고야 말았습니다.
후일 쓰여진 『선조수정실록』과 『용사일록(龍蛇日錄)』에 의하면
“임해군과 순화군이 함경도로 들어가 회령에 머물며 사나운 노복들을 풀어 백성들을 침학하고 수령들을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거나
“순화군의 장인 황정욱(黃廷彧)이 궁노(宮奴)들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가는 곳마다 침탈하고 소란을 피워 인심을 잃고 반란을 재촉했다”는
기록이 쓰여있을 정도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국경인 같은 인물의 선동이 백성들에게 먹혀들었던 것이지요.
반역자로 돌아선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지역의 유력자와 지방 수령도 대다수 돌아서있었습니다.
그래서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로 들어오자 회령에 귀양 와 있던 전주 출신의 아전, 국경인이 주동한 일반 민중들이
회령의 객사(客舍)를 습격해 두 왕자 부부와 그들의 외척들,
수행했던 신료들을 모두 결박해 가토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반역의 무리 에 포함된 어느 수령은
일본군에게 항복을 결심하면서 작성한 맹세문에서
“나를 위무해 주면 임금이며 나를 학대하면 원수이니, 누구를 부린들 신하가 아니며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랴”라며
노골적으로 가토 기요마사에게 아첨하는 자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북평사로 있다가 일시 피난한 정문부가 의병을 규합합니다.
일본군에게 항복하지 않은 함경도의 관리들 대부분이
일본군이나 지역의 반란군에 의해 체포된 상황입니다만
정문부는 천만다행으로 탈주할 수 있었습니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정문부는 평소 무장으로 있으면서 형장(刑杖)을 사용하지 않고
지역의 교생(校生)들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제자들의 비호를 받아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정문부는 경성(鏡城)의 유생인 지달원(池達源)의 집에 숨어있다가
이붕수가 의병을 일으킨다는 말을 듣고 달려와 창의대장을 자원하여
처음에는 300여명 그리고 최대 3000여 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정문부는 일본군과 싸우기에 앞서 반역자를 처단합니다.
그리고 일반 반민(叛民)들이 저질렀던 죄는 불문에 부쳐 민심을 얻었습니다.
그 후 의병을 이끌고 명천(明川)을 수복한 뒤 길주(吉州)에 웅거하고 있던 일본군을 포위했습니다.
정문부의 의병이 땔감 공급로 등을 차단하며 압박을 가하자 가토는 마침내 길주성을 버리고 남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북관대첩(北關大捷)은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지요.
참고그림 한장 올립니다.
고려대학교도서관에 보관중인 고려 예종대에서 조선 선조대까지
북관, 즉 함경도에서 용맹 또는 지략으로 무공을 세운 행적이나 일화를 8폭으로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글로 설명해 놓은 북관유적도첩 중 마지막 장 "창의토왜도"입니다
그림 속 대장기가 꼽힌 성루에는 정문부장군이 앉아 있으며,
왜군에 협력한 반도를 참수하는 모습,
성문밖에서는 말을 타고 왜군을 추격하는 의병들과
화살을 맞아 쓰려졌거나 패퇴하는 왜군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민심을 자극하니 백성들이 반역자가 되었지만 민심을 다독이니 의병이 되었습니다.
정문부장군 신도비입니다
헌종 9년인 1655년 처음 세운것을 철종 12년인 1861년에 후손이 추록하여 다시 세운 비입니다.
북관대첩에 관한 내용과 장군의 일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묘역으로 올라갑니다
부인 고령신씨가 함께 묻혀 있는 합장묘이며
봉분앞에 묘비,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앞 좌우로 1쌍의 문인석이 서있습니다.
나라를 구한 혁혁한 전과도 소용없이 반역죄로 문초받았고
풀려나와서도 또다른 이유로 고문을 받아 60세에 최후를 맞았습니다.
사후 41년(현종 6년)이 지나서 신원되어 선무원종 1등공신으로 책록되고 좌찬성.대재학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충의공시호와 부조전이 내려 경성(鏡城) 창렬사(彰烈祠), 부령 청암사(靑巖祠) 등에 제향되었습니다.
남한에는 해방후에 지은 진주 충의사와 이곳 충덕사에서 제향을 합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원주형의 초석에 원기둥을 세웠습니다.
이곳 충덕사는 그의 묘와 위패, 영정이 모두 모셔져 있는 곳입니다.
이 일대의 지명을 효자동이라고 하는 것도 정문부장군과 관계가 있습니다.
정문부장군은 1604년 부친상을 당하자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 간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부친 살아 생전에도 그의 효성은 지극하였고
부친사후 시묘살이를 하며 모든 것을 삼가하는 장군의 모습을 보고
이곳 사람들이 어룡굴 뒤에 있는 봉우리를 효자봉(孝子峰: 의정부시 용현동 어룡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1612년 형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외읍을 청하여 노모를 봉양하였습니다.
그 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부친의 묘가 있는 어룡마을에 은거하다가
험한 일로 세상을 떠났고 그가 만년에 살던 이곳에 묻힌 것입니다.
충덕사를 돌아나오다가
재사의 현판에 쓰인 수양고가라는 글을 봅니다.
해주 정씨들로서는 참 애증이 고인 수양(首陽)이라는 말일겁니다.
해주 정씨의 시조 정숙(鄭肅)은 고려 신종 때 전법정랑을 지냈습니다.
그의 선대가 해주 수양산 아래에 오래 살았다 하여 후손들이 해주를 본관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해주정씨는 수양정씨(首陽鄭氏)라고도 합니다.
정역은 조선 초 고관에 올라 해주정씨의 번성을 가져온 인물입니다.
고려 말 우왕 때 후에 태종이 된 이방원과 같은 과거에 함께 급제한 동방(同榜)입니다.
조선 개국 후 두문불출했으나 이방원의 간곡한 부탁으로 관직에 나아가고 이방원과 사돈까지 맺었습니다.
그의 큰 딸이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과 결혼한 것입니다.
정역의 두 아들 충경, 충석은 각각 형조참판. 동지중추에 이르렀습니다.
정충경의 아들 정종(鄭悰)은 문종의 딸 경혜공주와 결혼하여 영양위에 봉해졌습니다.
그는 단종 초 형조판서가 되어 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제거를 도모한 금성대군과 친교가 있다 하여 영월에 유배되었고
그 후 사육신 사건으로 죄가 가중되어 광주에서 사사되었습니다.
그의 부인 경혜공주는 순천 관비가 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수령이 그에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자
그는 “비록 귀양은 왔지만 나는 왕의 딸이다. 수령이 어찌 내게 관비의 일을 시키려 하느냐”고 했다는 말이
지금도 전해집니다.
정종의 아들 정미수는 아버지의 유배지 광주에서 출생했습니다.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소환 된 뒤 어렵게 벼슬길에 나섰습니다.
죄인의 자식으로 임관되었다 하여 수차 탄핵을 받았으나
성종의 무마로 무사했고 그 후 해주 정씨가문의 초석을 닦았지요.
수양산과 수양대군
그래서 수양이라는 말에 애증이 교차할 것이라고 표현해 보았습니다.
참으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 정문부장군 묘역 답사를 마칩니다.
첫댓글 이런곳엔 역사 공부좀 하구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세히 포스팅 해주시니까, 조금은 이해가 되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항상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역사를 좀더 알게 되었던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