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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초의 혼혈왕인 충선왕
ㅡ충선왕은 고려왕과 동시에 심양왕을 겸임하였다.
충선왕 (고려 26대 왕.1275-1325.재위 1308-1313)
충선왕은 고려 25대왕 충렬왕과 원나라 공주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이다. 고려 이름 왕장, 원나라 이름은 이지르부카이다.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고 태어난 첫 혼혈왕자였다. 1275년 태어나 1277년(충렬왕3) 세자에 책봉되었고 1291년(충렬왕17) 원나라로부터 특진상주국 고려국 왕세자의 호를 받았다.
충선왕 가계도
충선왕의 1왕비는 원나라 진왕 카말라의 딸 계국대장공주로 이름은 보탑실린이다. 1296년 원나라에서 혼인하였다. 충선왕이 자신보다 조비를 더 총애하자 시기하였다고 한다.
2왕비는 원 출신의 후궁으로 의비 야속진이다. 충선왕이 세자 시절 원나라에 자주 머물렀는데 그 때 혼인한 것으로 보인다. 의비 소생의 둘째 아들 충숙왕이 1294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계국대장공주보다 일찍 혼인했을 것이다. 충선왕과의 사이에서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광릉군 왕감으로 세자에 책봉되었다가 1310년(충선왕2) 부왕 충선왕에 의해 살해당했다.
충선왕은 원나라 출신 부인인 의비와 계국공주대장과 혼인하기 전, 허원후 왕영, 홍문계, 조인규의 딸을 비로 맞이했었다.
제3비
3비인 왕영의 딸 정비 왕씨는 1287년(충렬왕13) 공녀로 선발되었는데, 공녀는 약소국이 강대국에 조공의 하나로 여자를 바치는 것을 말한다. 고려는 1232년부터 원나라에 공녀를 보냈고, 훗날 조선 세종 때 폐지되었다. 왕씨가 공녀로 선발된 사정을 들은 세자는 왕씨의 공녀 차출을 면하게 해주었고, 왕씨는 1289년 세자비로 책봉되었다. 가장 먼저 혼인했지만 원나라 공주와 의미에 밀려 3비가 되었다. 당시 원 세조는 근친혼이라 이들의 혼인을 비난했고, 충선왕은 1308년 동성끼리 혼인할 수 없도록 하고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15개의 가문을 선정하였다.
4비인 조비는 조인규의 딸로 충선왕의 세자 시절에 2비로 책봉되었다. 조비는 충선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 때문에 계국대장공주의 질투를 받게되었다.
5비인 순화원비 홍씨는 남양부원군 홍규의 셋째딸로 그녀의 동생은 충숙왕 비인 공원왕후이다.
6비인 순비 허씨는 전남편이 제안공 왕숙의 아들 평량공 현이었던 과부 출신이다. 충선왕과 사이에 자녀가 없으나 전 남편 사이에서 3남 4녀를 두었다.
7비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후궁이 있으며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인 덕흥군 왕혜는 훗날 1364년 기황후, 최유 등과 모의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국왕 자리를 노려 고려에 침입하였는데 최영과 이성계의 방해로 실패했다. 이후 원에서도 비행을 저질러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갔다.
1297년(충렬왕23) 어머니인 제국대장공주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그 원인을 충렬왕의 애첩인 무비 때문이라 생각하고 원나라에서 고려로 귀국하여 충렬왕의 애첩 무비와 측근들 40여 명을 죽였다. 이 일을 계기로 충렬왕은 왕위를 아들인 충선왕에게 선위하였다. 충선왕은 원나라 공주인 계국대장공주와 함께 고려로 왔고, 충선왕은 왕위에 올랐다.
3비 정비 왕씨
1298년(충선왕 즉위) 공주는 원나라 태후에게 "조비가 저를 저주하여 왕이 저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얼마 후 궁궐 문에 익명서가 뭍었는데 익명서에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시켜 저주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자기 딸만 사랑하게 해달라고 했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 익명서로 인해 공주는 조인규와 처, 조인규의 아들, 조인규의 사위와 딸들을 모두 가두었다. 원나라에 이 사실을 고하였고, 이 일로 조비를 가두었다. 조인규의 처가 국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을 했고, 조씨 가족은 모두 원나라에 압송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 오르자 정방을 폐지하고, 권신이 소유한 광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군제, 세제를 정비했다. 조비의 일로 계국대장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원나라 사신에게 국새를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지며 원나라에 불신을 받아 7개월만에 왕위는 다시 충렬왕에게로 돌아갔다. 충선왕은 원나라로 소환되어 돌아갔는데, 당시 간신 왕유소 등이 충선왕을 폐하고 서흥후 왕전을 후사로 삼으려는 모의를 꾸몄다.
'왕은 사랑한다' 고려 26대 충선왕
1305년(충렬왕31) 원나라의 성종이 죽고 황휘 쟁탈전이 일어났는데 충선왕은 승자가 된 무종을 도왔다. 무족은 충선왕을 도와 왕유소 일당과 서흥후 등을 제거하였다. 1308년 심양왕에 봉해졌고, 충렬왕이 죽자 귀국하여 왕위를 이었다. 복위 후 조세의 공평, 인재 등용, 공신자제의 중용, 농.잡업 장려, 동성결혼 금지, 귀족의 횡포 억제 등 혁신정치를 단행했으나 얼마 못가 정치에 싫증을 느끼고, 제안공 왕숙에게 정치를 대행하게 하고 원나라로 갔다.
충선왕이 즉위 후 얼마 안되었을 때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와 정을 통하고 그녀를 숙비로 진봉시켰다. 몽고에는 부왕이 사망할 경우 모후를 제외한 부왕의 후궁들을 그 아들이 취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충선왕은 이러한 풍습을 따랐을 것으로 추측된다. 숙창원비는 몽고 고유의 머리 장식인 고고를 황후에게 선물받고 연회를 열며 의복 또한 공주와 같이 하고 다녔다고 한다. 1312년(충선왕4) 충선왕은 삼현에 숙창원비의 집을 짓게 하고, 1325년(충숙왕12) 원나라에서 충선왕의 시신이 고려로 왔을 때 그 빈소를 숙창원비의 숙비궁에 차리기도 했다.
1313년(충선왕5) 아들 강릉대군 왕도(=충숙왕)에게 전위하고 삼양왕 왕위는 충선왕의 조카이며 강양공(=충렬왕 장남)의 아들인 연안군 왕고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고려왕과 심양왕은 서로에게 정통성을 주장하며 다투게 되는데, 고려말에 한때 고려의 태자였던 심양왕이 고려 왕위를 요구한 횟수가 잦았다. 뒷날 심양왕은 줄곧 고려 왕족에게 이어졌으며 고려 왕족의 후예였던 마지막 심양왕 탈탈불화가 후계자가 없이 죽자 요동 정벌론이 고려에서 일어나며 이를 위해 진군하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고려가 멸망했다.
충선왕은 왕위를 물려준 후 중국 연경에 머무르며 만권당을 지어 고금서적을 수집하였다. 이제현, 조맹부 등 대학자를 초빙하여 고전 연구에 몰두하였다.
1320년(충숙왕7) 원나라의 인종이 죽자 고려 출신 원나라 환관 임파이엔토그스와 틈이 생겨 그의 참소로 토번에 귀양갔다가 매부인 원 태정제가 즉위하고 이제현 등의 소청으로 3년 만에 풀려났다. 1325년(충숙왕12) 5월 원나라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고려로 옮겨왔다.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의 전락 - 고려 충렬왕
충렬왕 (고려 25대 왕) 1236-1308 재위 1274-1308 고려 25대 왕 왕거는 원종과 순경왕후 김씨의 맏아들로,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렬왕이다. 원종 때에 원나라에 굴복된 고려는 충렬왕부터 원나라에 충성을 한다는 의미로 '충'자로 시작하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충렬왕 이전의 왕인 고종과 원종 또한 원나라에서 시호를 받았다. 고종은 충헌왕, 원종은 충선왕이었다. 왕의 칭호가 '종'보다 낮은 단계가 '왕'이었는데 충렬왕부터는 '종'의 시호를 받지 못하였다. 또한 원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는데, 충렬왕은 원나라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과 결혼하였다. 쿠빌라이는 칭기스칸의 손자로 1279년 남송을 정복하고 금나라와 거란족을 토벌하였으며 고려를 부마국으로 편입하였다.
고려 원종편 마지막 무신정권, 원나라에 굴복
태-혜-정-광-경-성-목-현-덕-정-문-순-선-헌-숙-예-인-의-명-신-희-강-고-원 -충렬-충선-충숙-충혜-충목-충정-공민-우-창-공양 원종 (고려 24대 왕) 1219-1274 재위 1259-1274 원종은 23대 왕 고종과 안혜태후 유씨의 맏아들이다. 원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충경왕이다. 1235년(고종22) 관례를 올리고 태자에 책봉되었다. 1259년(고종46) 강화를 맺기 위해 원나라에 갔다가 그해 고종이 죽자 이듬해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1259년 몽고제국의 4대 칸인 몽케가 죽자 차기 후계 게승을 두고 그의 아우들인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케가 대립하였다. 당시 태자였던 원종은 쿠빌라이를 지지하였다. 쿠빌라이는 그 해에 고종이 죽자 원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얼마 후 쿠발라이는 5대 원나라 세조에 등극했다.
◇ 고려 충선왕(忠宣王)과 만권당(萬卷堂 )
고려 제26대 충선왕(忠宣王)은
제25대 충렬왕과 원나라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쿠빌라이의 공주)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충선왕의 몽골식 이름은 '이지르부카'이며
충렬왕 22년(1296년)에 몽골 황실의 진왕(晋王) '감마라'의 딸 보탑실린공주(계국대장공주)를 정비(正妃)로 맞아 혼사를 올렸다.
앞서 조인규(趙仁規)의 딸을 비(妃)로 맞아 들인 바도 있고 훗날 몇 차례의 비(妃)를 더 맞기도 했다.
그는 1277년(충렬왕 3년)에 세자로 책봉되고
다음해 원나라에 가서 몽골 이름을 받았다.
1298년(충렬왕 24년)에 왕위에 오르고
구폐와 관제를 개혁하고 정국의 쇄신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려 하였으나 권문세가의 저항을 많이 받았다.
그는 처음 즉위를 하였다가 폐위된 후
다시 복귀한 군주이기도 하다.
그의 6남 덕흥군은 기황후, 최유 등과 모의하여
공민왕을 폐하고 국왕의 자리를 노려, 고려에 침입하나
최영과 이성계의 방해로 실패하고 원에서도 비행을 저질러 관직을 삭탈 당하고 유배가기도 했다.
24대왕 원종이 오랜 대몽항쟁을 접고 강화도에서 출륙환도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몽골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고려시대의 권력 싸움에서 희생양이된 충선왕은
원나라의 불모로 이역의 대도(大都)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생애 후반에는 귀국을 기피하고 원나라에 체류하며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고금의 많은 진서를 수집하고 독서와 학문 연구, 서화그리기에 전념하기도 했다.
고려에서 이제현(李齊賢) 등과 원나라의 조맹부 등의 학자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며 원(元)에 고려문화 수입에 힘을 썼다.
충선왕은 원나라에 살면서 끝내 귀국을 피하였다.
그는 본국에 대한 애착결여, 원황실의 우대 등의 이유도 있고, 본성이 담백하여 불교를 좋아하고 글을 즐기며 그림도 잘 그리는 등 정치와 권력에는 애착이 적었던 까닭도 있었다.
그가 만권당에 초빙한 익제(益齊)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충렬왕 14년(1287년)에 검교정승 이건의 아들로 태어나 충렬왕 27년에 열 다섯살의 나이로 장원급제하여 백이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후일 문하시중에 오르기도 했으며 평론서 '역몽해설'을 남겼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그의 제자이다.
또 만권당에서 충선왕, 그리고 이제현과 만난 조맹부(趙孟. 1254-1322)는
당시 61세로 시(詩), 서(書), 화(畵)에 삼절을 이루었으며
학식으로도 중국 제일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절강성 호주(湖州, 지금의 오흥) 태생인 그는
본래 송나라 황실의 핏줄로
송 태조 조광윤의 넷째 아들의 11대 손이다.
책을 한 번 읽으면 줄줄외우고 붓을 들면 바로 뛰어난
시를 써냈다고 하니, 특출한 재능으로 촉망받는 신진관료라는 점에서 이제현과 닮은 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해, 즉 이제현이
원나라로 불려오던 나이와 비슷할 때 남송이 멸망했다.
그 후 관직을 잃은 조맹부는 한 동안 집에 은거하며
책과 붓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조맹부는 벼슬을 할 때에도 민감한 정치문제에는 관여하지 않으면서
급속하게 사라져가고 있던 중국의 문화유산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또 시,서, 화에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여 당대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특히 고대의 왕희지가 썼던 필법을 본 받으면서 개량한
서예필체는 그의 호를 따서 '송설체(松雪體)'(일명 조체)라 불리며 이 후 수백 년간 동아시아의 서예계를 풍미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미 전설이 되어 있던 조맹부와 충선왕,
그리고 이제현이 만권당에서 만난 그들 사이에는
묘한 공감과 우정이 싹텄다.
세 사람은 모두 문(文)의 재능이 뛰어 났으며
나름대로 여유로운 생활을 누렸지만,
제 각기 일종의 유감을 품은 채 살아가는 처지였다.
그의 글씨나 그림을 많은 사람들도 부터 극찬의 칭찬을 듣던 조맹부는 원나라 황제를 비롯한 고위층에게도
한껏 우대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원나라에서 선비의 지위는 10개 직업군 중 9위로 꼴치인 거지 보다 조금 나을 정도였다. 자신이 배운 것을 정치에 직접 쓰지 못하고 오직 문화예술 쪽 일만하고 있는 조맹부로서는 자신의 삶에 유감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충선왕도 절반은 몽골인으로서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고려보다 몽골이 더 편안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하늘로 부터 받은 사명은
고려의 임금이라는 의식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이 두 사람의 풀 수 없는 한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이제현도 유학을 배운 사람으로서 세상을 바꿀 포부를
감히 품을 수 없는 상황, 즉 고려에 태어난 사람으로써
늘 원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개탄하고 있었다.
서로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통한을 꿰뚫어보고,
비슷한 처지와 성격으로 통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세 사람은 서로에게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 고려와 원나라 지도
이제현은 충선왕을 따라 종종 중국의 산천을 유람했는데 항주에 들렀을 때는 조맹부의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일정을 변경하여 조맹부의 집에 문상을 가기도 했다.
이제현과 조맹부의 만남은 1320년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토번(지금의 티베트)으로 유배되면서 약 6년 만에 끝났다.
고려로 돌아온 이제현도 조맹부에게 배운 '송설체'를 널리 보급 했으며, 그리하여 고려, 그리고 조선의 서예는
조맹부의 서체를 바탕으로 발전해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보다 훨씬 중요했던 것은 성리학의 보급과 반원 의식의 은근한 함양이었다.
이색, 정몽주, 이숭인, 길재, 정도전, 권근 등
이른바 신진 사대부들이 그의 영향을 받아 학문과 포부를 세우고 고려 말부터 조선 초에 이나라를 성리학 중심으로 다시 세우는 과업을 수행했으니, 이제현과 조맹부의만권당에서의 만남은 결국 한국사의 큰 흐름이
갈라지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