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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1:9- 내가 땅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종노릇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
일단 신분이 종이라고 하면 무시당하고 멸시 천대받으며 노예로 살게 된다.
종은 자기 목숨까지도 자기 것이 아니다. 자신의 권리는 없고 순종만 있다.
그럼에도 종이 된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종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들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 된 것을 영광으로 안다.
그래서인지 주님의 종이라고 불러주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서로 부를 때 어르신 종들은 젊은 종들에게 어린 종, 젊은 종이라고도 부른다.
젊은 종들은 어르신 종을 부를 때에 노종이라고 부르거나 아무개 종님이라고 부른다.
또는 교회가 크거나 이름이 알려진 종들은 큰 종이라고 부르고 스스로 자신을 겸손한
종이라고 표현하기 위해서 작은 종, 불초 소 종이라고 부른다.
또한 존중하는 표현으로 종님이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노종이나 큰 종께서는 님자를
붙이지 않는다고 안색이 변하든지 호통을 치기도 한다. 종의 종류가 많은 것 같다.
종에 따라서 크기와 소리도 다른 것 같다. 같은 종인데 격이 다르게 행세한다.
종들의 모임에 가보면 큰 종의 소리와 작은 종의 소리가 다르고 어린 종, 젊은 종과
노종의 목소리 억양이 다르게 들린다. 그리고 태도 행실도 다르게 보인다.
종님이라고 높여 부르는 소리를 듣기 좋아한다. 그런데 종으로 보여지지는 않는다.
종이 무슨 행세를 해야 하는지 몰라도 종들이 갑질하는 경우도 본다.
왜 그럴까? 종들끼리도 차별이 있나? 계급이 있는 것인가? 존귀한 종과 천한 종이 따로 있는가?
뜻풀이를 좋아하는 분들은 종은 종이지 무슨 종님이냐? 종놈이라고 해야지“라고 말한다.
글쎄 어떤 말이 옳은 것인가? 꼭 그렇게 불러야 하는가? 그토록 중요한가?
누구의 종이라는 것인가? 주인이 누구인가? 진짜 주인이 있기는 한가?
그 주인의 종이 맞나? 정말 종이라면 주인이 누군가? 종으로 살고 있는가를 묻고 싶다.
사실 종으로 사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다. 말로만 종이라고 하고, 받는 것만 좋아하고,
행세하는 것을 보면 종이 아니라 고약한 주인처럼 보인다. 믿지 않는 착한 아저씨만도
못한 종들 같다. 노종은 종노릇을 가장 오랫동안 하였으니 종으로 사는 것이 익숙해졌을
것인데 주인 행세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어린 종, 젊은 종은 아직 경험이 많지 않으니까 자신을 알고 노종이 종노릇 하는 것을 보며
배워야 할텐데 부르기는 종이라고 하면서 주인 행세하는 것을 보면서 그대로 배울 것 같다.
큰 종은 작은 종들에게 본을 보이며 배울 수 있도록 하고 작은 종은 큰 종들에게 본을 받으며
배우기를 사모해야 할텐데 과연 종노릇을 제대로 하는 것인가? 본이 되어주고, 본을 받고 있는가?
나의 경험으로는 진짜 종의 모델링이 되는 선후배들이 있는가 하면 주인보다 더 큰 주인 노릇
하는 종들이 있어서 안타까웠다. 나는 어떤 쪽에 가까운가?
나는 종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종소리가 맑고 깨끗하지 못해서 실격을 당해야 마땅할 것 같다.
노종들과 큰 종들이 뒤에 따라오는 어린 종, 작은 종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뒷모습은 숨길 수도, 가릴 수도 없다. 왜냐하면 발자취이고 흔적으로 그 실체를 남기기 때문이다.
얼굴이야 얼마든지 꾸미고 위장하여 가장 아름답고 인자하고 거룩하게 보일 수 있을른지 모른다.
항상 미소지으며 따뜻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것은 속사람의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뒷모습은 겉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드러내어 자국을 남기게 된다.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 받으라.
나는 주님을 만난 후 주님의 종이 된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종이다, 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하였다.
주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난 후 오직 예수, 오직 말씀, 오직 순종으로 산다고 좌우를
두리번 거리지 않으려 하였다. 쟁기를 잡은 자로 앞만 보고 돌파하였다.
그래서 모든 범사가 극단적이었다. 그래서 함께하는 가족들이 참 많이 힘들게 따라
다녀야 했고 성도들도 산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고 밀어붙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말씀에는 조건 없는 아멘으로 응답한다 왜? 우리는 모두 주님의 종이니까.
게다가 사람의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이라는 명분으로 성도들을 주님께 굴복시키려고
강권하였다. 사실은 그것이 주님의 종이라는 나에게 굴복하도록 한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발자취 흔적을 살피며 나의 행실을 생각해 본다.
유대인들의 고르반(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만 하면 그만이라)사상을 적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는 수직적 권위주의였다.
오직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행함 있는 믿음이라고 우겼다. 주님은 나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는데 이 사실을 믿는다면
최소한 의리를 지키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나를 바쳐서 죽도록 충성해야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라고 힘주어 아멘을 외쳤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에 내면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다. 나는 너에게 강제 순교를
말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네가 그렇게 한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느냐? 물으셨다.
이 무슨 청천병력 같은 말씀인가? 뒷머리가 찌릿찌릿 번개를 맞은 것처럼 쑈크가 왔다.
대단한 충격이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시지? 어떻게 된 거야?
그러면 이제까지 달려온 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당연히 주님을 위해 달려온 것 아닌가?
가슴이 멍해졌다. 마음이 바싹 메마르고 냉냉 해졌다. 멍하게 앉아 있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종아 네 마음이 많이 힘들고 어렵구나?
그러나 괜찮아, 일하는 것은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잖아?
내가 너의 마음을 알고 있어. 네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좋아서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나하고 함께 가자.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알려주고, 보여주는 것을 본 대로 가르쳐 준 대로 하면 된다. 주인님의 말씀이었다.
너는 나의 제자이고 나의 종이야 알았지.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은 변함없다.
종아 이제부터는 일보다 우선 너 자신을 소중히 여겨라. 그리고 나를 믿고 함께하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고 여기거라. 내가 항상 네 곁에 있다는 것을 잊지말고...
그날 새벽 메마른 나의 마음에 샘물이 터져 눈으로 흘러내렸다. 한참을 멈추지 않았다.
종으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한마디로 주인의 말씀을 듣고 주인의 뜻과
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고. 또 주인을 위해서 충성하며 사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정말 종이라면 권리는 없고 순종만 있다고도 할 것이다. 종은 노예와 같고, 목숨까지도
주인에게 위임이 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단어의 뜻을 풀어 답안지에 기록한 것은 만점이다.
그렇게 만점을 받았으니까 마땅히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노 종, 소 종, 어린 종, 젊은 종, 큰 종, 작은 종들이 지금도 여전히 처음처럼 변함없이
그렇게 종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얼마 전에 주님께 종노릇 하는 것 정말 어렵네요. 고백했다.
어느 날 딸 아이가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그동안 아버지로서 제대로 도와준 것이
없어서 그래 가서 몸으로 도와주어야지 이번에 철저하게 종노릇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도우러 갔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아니고 주인과 종의 관계로 주인인
딸이 하는 일을 돕기로 하였다. 그래서 하라는 대로 하면 되겠지. 가자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고, 오라고 하면 오고,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고, 청소도 하고 밥을 주면
먹고 굶기면 굶고, 자라면 자고,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포장을 하라면 하고 철저히
주인의 뜻을 따라서 하기로 마음에 다짐하였다. 혹시 잘못되지 않게 하려고 신경을
쓰면서 노력하였다. 일주일쯤 되니까 하는 일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가까운 곳이나 몇 번 다닌 도로는 파악이 되었다. 집안에서도 쌓여있는 물품들을 알아가게 되었다.
무엇인가 조금씩 알아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문제가 처음에는 경미 하였고 융통성과 배려로 넘어갔다.
도와준다고 왔으니까, 처음이고. 잘 모르니까 라고 봐준 것이다.
그런데 점점 문제가 자주 생기고 일에 지장을 주기 시작하였다.
해 놓은 것을 다시 해야 하고, 길을 잘못 들어가서 한참을 돌고 돌아야 하고,
당황하여 급하게 가려다가 사고의 위험을 겪기도 하고, 신호를 어기거나 잘못 가다가
카메라에 찍히고, 점점 크고 작은 일들이 자주 생기게 된다. 집에서도 내가 알아서
포장하고, 정리하고, 이것저것 옮겨놓기도 하였는데 헛수고를 하였다.
포장을 뜯어서 다시 해야 하고, 물건 찾느라고 집안을 다 뒤집어야 했다.
왜 그런 일이 생겼나? 조금 알게 되었고 안다고 알아서 했기 때문이다.
조금 보인다고, 이제 좀 아는 길이라고, 묻지 않고도 할 수 있고, 가고 올 수 있다고,
내가 알아서 하고, 앞서서 하고, 멋대로 하고, 내 생각에 좋은 대로 하면서 인생 경험을
앞세워 주인님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다가 어느덧 종이 아니라 인도자가 되었고,
안내자가 되어 있고, 동역자가 되었다가 선생이 되고, 주인 행세를 한다.
보다 못해 드디어 주인의 태클이 엄하게 들어왔다. 아빠! 아빠! 지금까지 목회를 그렇게
하신 거야? 움찔!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 어. 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머뭇거렸다.
딸이 한 마디 더한다.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해야지! 모르면 묻고, 아는 길 같아도 다시 확인
하며 가야지, 정말 도움이 안 되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다. 미안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하다.
이게 무슨 소리야! 도와주러 왔는데 그리고 열심히 했는데 도움이 안 된다니. 알았어, 미안해
그게 아니었는데, 잘하려고 미리 미리 했는데, 주인님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내가 알아서
잘하려고 그랬지. 이유도 많고, 핑계 대고, 변명하기 급급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말
나는 목회를 그렇게 해 온 것을 보게 되었다.
목회만 아니라 제자훈련학교에서 20년을 섬기면서 가장 강조한 것이 음성 듣고 사는 삶,
아버지 마음 알기, 말씀의 원칙을 따라서 종으로 충성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종노릇을 잘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아! 종노릇 하는 것이 말로 하는 것도 아니고, 종이란 단어의 뜻을
가르치기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종이라면 종답게 사는 것인데 그것이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래, 다시 잘해보자. 하고 처음에 다짐한 대로 좀 기다리면서 물어보고 다시 확인하면서
도움이 되도록 노력을 하였다. 옛말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을 내가 실제로 적용하고 있었다.
잘하다가 몇일 지나면 다시 나의 경험, 지식, 내 의견과 생각이 앞서고 더 잘하려고 집착한다.
더 많이 도와주고, 더 잘되게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일을 많이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열심히 하려고 했다. 나의 사고방식, 고정관념은 일이 더 잘되어야 하고, 많이 해야 한다는데
가치를 두었던 것 같다. 놀면 안 된다. 노는 것은 시간 낭비다. 뭔가를 해야 한다. 일에만 집착하였다.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내 마음에 맞도록, 내가 생각하던 대로 되어야 한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나에게 익숙하게 배어있다. 목회를 하면서도 DTS를 섬기면서도 그렇게
달려온 것이다. 종으로 산다고 하면서 권리를 가지고 주장하려 했던 것이다.
종이 지켜야 할 원칙을 지키지 못한 것 같다. 딸과 함께하는 기간 동안 제자로 제자답게 사는
근본을 진단받게 되었다. 나의 종노릇이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 드러났다.
나는 그래도 나름 종으로 잘하고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폭로되었다.
아! 내가 종으로 종답게 종노릇 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 종노릇 하는 것이 만만한 것이
아니구나, 종노릇 하기 정말 어렵구나. 완전히 나를 깨뜨리고 철저하게 주인님의 마음을 알아가며
말씀에 복종해야 하는구나. 주인이신 아버지 마음에 드는 순종이어야 한다.
주인의 마음에 합한 종이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 일방적인 충성, 무리하게 과한 열심과 헌신은
오히려 주인과 상관없이 자신을 위한 것일 수 있다. 신분은 종이라고 하면서 주인 행세한 것이다.
오늘 우리는 어떤가? 정말 종노릇 하기 괜찮은가? 잘하고 있나? 노종인가? 어린 종인가?
큰 종인가? 작은 종인가? 우리는 모두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분의 종이다.
우리의 얼굴이 주님의 얼굴이고 우리의 뒷모습이 주님의 발자취와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뒤에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주님의 행렬을 따라가고 있다.
그리고 계속 우리의 뒤를 따라오는 다음 세대가 늘어서 있다. 그들이 우리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우리를 본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뒤를 바짝 붙어서 따라가면서
주님으로부터 종으로 사는 것을 배우고 본받아야 한다.
주님의 종노릇 하는 것이 정말 보람이고 의미이고 목적이 되기를 소원하며 기대한다.
주님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만이 나의 주인님이십니다. 주인님을 사랑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