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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 대열 보병병과 현역복무 스토리-이화영
이 회고는 대열임관50주년 기념책자 (가칭: 대열 반세기 여정)에 포함시킬 예정인 대열의 현역시절 활약 약사를 작성하기 위해 편집진에서 병과별 해당 동기들의 대표집필을 통해 제공받은 내용으로서, 책자발간 이전에도 동기생들이 함께 보면서 아! 그랬었구나! 하고 공감해 볼 필요도 있다고 보아, 회고담으로 전재(轉載)해 올립니다.
아래 내용은 보병병과를 대표해 현 회장단 총무이신 이화영 동기가 바쁘신 중에도 수고해서 작성된 것으로서 장장 10 페이지가 넘는 그 방대함과 상세함에 놀라 감탄하며, 그 노고에 경의를 표하며 올립니다. 우선은 집필자의 작성 부분을 거의 그대로 올립니다.
참고로 포병병과 활약 약사는 이미 권안도 동기께서 작성해 여기 올린 바 있으니 유념하며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이후 여타 병과들의 활약 약사도 속속 이어질 것입니다. 관련하여 추가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집필 동기께 개별 연락하시거나 아래 댓글 난을 통해 보충해주셔도 좋겠습니다. -편집위원 김명수 (註)
27기 대열반세기 보병 병과 출신 군 복무회고
이화영
27기 대열동기생 188명은 1971년3월28일 4년간의 육사 정규사관생도로서의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영광스러운 졸업과 동시에 군과 국가의 정예간성으로서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그리고 임관 당시에는 모든 동기생들이 5개 전투병과(보병, 포병, 기갑, 공병, 통신)에 국한해서 본인들이 병과를 선택하였는데, 군 전체의 편제소요를 고려하여 보병이 전체의 약 50%이상을 차지하였다. 소대장 보직을 마치고 중위 계급부터는 육군본부의 인사방침과 본인의 희망에 따라 기술 및 행정병과로 전과를 할 수 있었다.
이렇듯 우리 27기 동기생들도 임관 당시에는 188명 중 125명(66%)의 인원이 보병병과로 임관과 동시에 전방지역 임지에서 소대장으로서 임무를 시작하였다. 선배 기수를 보더라도 원래는 소위로 임관 후에는 먼저 장교 기초보수 과정(OBC 과정)을 육군보병학교에서 이수한 후에 전방지역 임지에서 소대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인데, 특이하게도 유독 우리 27기는 육사 졸업직전인 1971년 1월3일부터 3월13일까지 10주간을 육군보병학교에서 사관생도 신분으로서 OBC과정을 수료하였기에, 임관과 동시에 전방지역 임지에서 첫 보직인 소대장으로서 임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 27기 동기생들은 전방 11개 GOP사단에 주로 배치되어서 GOP지역 소대장으로서 임무인 철통같은 GOP 경계 작전과 DMZ내 수색 및 매복 작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군의 최 일선에서 대치하고 있는 북한군과 마주보면서 초급장교 생활을 시작하였다.
사실 사단 및 연대 수색중대 그리고 대대 특임소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할 당시, 수색정찰은 주간에 움직이면서 활동하니까 그래도 괜찮은 편이나, 비무장지대 내에서 매복 작전 임무수행 시에는 소대원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2~3일에 한 번씩 동계 영하10도 이하의 혹한 속에서도 17시부터 익일 06시까지 장시간 동안 움직이지 않고 한곳에서 인내하면서 정숙을 유지하기란 정말 힘들고 어려웠다.
또한 1971년도에 4월에 전방 사단 예하 소총중대 소대장으로 막상 부임하고 보니 일부 몰지각한 중대장 및 대대장들도 조차 사병용 주·부식을 임의로 관사로 가져 가는 등 부정부패가 만연하였으며, 고참병들이 하급자들을 구타,얼 차려 횡포 등 군 내부 부조리로 군 기강이 해이된 분위기였다.
FEBA지역 중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 시에도 6월말 경 전역을 앞둔 학군7기생 소대장들 중 일부는 소대장으로서 역할을 소홀히 하면서, 야간 중대 일직사관 근무조차 회피하며 마치 전역예정 사병들과 똑같을 정도로 근무기강이 매우 해이된 분위기여서 우리 27기 동기생들은 6월말 경에 학군9기생 신임소대장이 전입하여 소대장으로 보직 시까지 2개월 동안 매일 중대 일직사관을 단골로 맡으면서 나름대로 “육사출신”소대장으로서 중대 및 소대의 군 기강 확립 및 내무부조리 척결에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소신을 가지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다.
영광스러운 산화와 전상(★ 편집자 註)
이 과정에서 최형복 동기가 GP장으로 근무 중 안타깝게도 순직 하였으며, 이진수 동기 역시 GOP지역 소대장 근무 중(★편집자 주: 사단수색중대) 불의의 지뢰사고로 부상을 입고 안타깝게도 조기에 전역을 하게 되었다. (★정상화 동기도 같은 경우)
전상일 동기도 임진강지역에서 도하작전 훈련 중 안타깝게 순직하는 참변을 당하였다.
★월북저지 및 대침투 작전 공헌
또한 부여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군에 크게 기여한 동기도 많이 있었다.
예컨대 이0영 동기는, 양구북방 21사단 GOP대대 특수임무소대장으로 근무시, 1971년 11월16일 23시경 인접중대에서 야간 철책근무 중 써치라이트병(손정호 병장)이 무장한 채로 철책선을 넘어서 월북기도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관할 연대장의 긴급명령에 의하여 월북기도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미확인 지뢰지대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GP와 가까운 DMZ 내 중앙분계선까지 추격, 차단작전 중 발견하여 대치하면서 설득을 하여 아무런 인명사고 없이 성공적으로 생포 검거를 하여서, 그 이튿날 주간에 월북 기도자와 함께 수사관의 현장답사 검사에 임하였으나, 미확인 지뢰발견 등의 안전사고 위험으로 육안으로 현장검사를 하였으며, 임관 첫 부임지인 GOP지역 소대장으로서 험준한 지형과 생명이 위험한 여건 속에서도 부여된 임무완수에 최선을 다해서 군의 작전보안 및 안보태세에 기여한 공로로 1군사령관 개인표창 및 소대원과 함께 단체포상휴가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서0식 동기도 문산 북방 1사단지역에서 사단수색중대 소대장으로서 근무하면서 DMZ 야간매복 작전 중 DMZ 내로 야음을 틈타 침투하는 북한군 2명을 발견하여 지근거리까지 도달할 때에 준비된 크레모아를 터뜨려서 사살하는 성공적인 대침투 작전으로 군의 안보태세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당시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특별 포상휴가를 다녀온 적이 있다.
1971년도만 해도 1968년 1월21일 무장공비 31명의 김신조 일당이 바로 1사단 철책선을 뚫고 청와대까지 침투하였던 ‘청와대습격’기도 사건이 있었던 터라 1사단 지역에서는 북한군 침투가 종종 발생하여 교전이 일어났던 중요한 지역이다.
★ 월남 파병 참전도
이와 같이 어렵고 힘든 소대장 생활을 마치고 1972년 4월1일 중위로 진급해서는 대대 작전장교 등 참모장교로서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였으며, 특히 1972년도에는 당시 월남전으로 한국군도 파병분위기가 고조되어서 보병병과 동기생(김광원, 김근배, 김형석, 문두식, 박인규, 서만식, 성사현, 오용근, 이규섭, 이규진, 이상태, 이태형 등)들도 12명이나 파병을 지원하여 주월(駐越) 한국군사령부 예하 맹호부대 및 백마부대 등에서 전투소대장으로서 안케패스 작전에 참가하는 등 월맹군 베트콩들과 싸우며 소중한 전투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포병: 김기환, 김준섭, 김종혁, 박태경,유명규, 정재수, 진봉진, 황의봉, 공병: 이상돈 등도 월남파병)
★장교고등군사반 6개월 교육과정(OAC과정)
1974년 4월1일부로 대위로 진급하고서는 육군본부 인사운영 방침 상 “先 교육, 後 보직”원칙에 따라, 우리 보병병과 출신 동기생들은 광주 상무대에 위치한 육군 보병학교에서 장교고등군사반 6개월 교육과정(OAC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나를 따르라! 라는 육군보병학교 교훈이 말해 주듯이, 야전 전투의 핵심역할을 하고 있는 위관급 지휘관(자)인 보병병과 전투 중·소대장들은 어떠한 어렵고 힘든 상황과 역경 속에서도 부여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부하들을 직접적으로 대하면서 진두 지휘해야 되는 위치에 있기에, 부하들보다 먼저 앞장서며 모범적인 자세를 보이는 자기희생은 물론 부하에 대한 진정어린 사랑이 담긴 ”솔선수범“ 정신이 더욱 중요한 지휘의 요체임을 강조하는 중요한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처럼 “나를 따르라!”는 육군보병학교에서 장차 중대장 및 연대급 제대의 참모장교로서 필요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지휘통솔을 비롯한 전술지식과 참모업무”등 제반 군사교육인 장교 고등군사반 교육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와 같은 OAC교육과정을 수료하고서, 대위 1차직위인 전투부대 소총중대장(18개월 이상)을 전·후방지역에서 역임하게 되었다.
★ 후방지역 방어 취약점 보강 및 특수전 역량 강화 기여
특히 1974년도 당시 2군 지역에는 현역병과 방위병으로 혼합된 인원구성으로 편성되어 광활한 해안경계 임무와 예비군 교육훈련 등 복잡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군 기강이 해이되고 빈번한 대민사고가 발생하는 등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서 부대 지휘 및 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던 터라, 육군본부의 인사지침에 따라 OAC 교육수료 후 2군지역 사단에 우수한 육사출신 중대장(27기 동기생들도 각 사단 당 2명씩 보직)을 보직토록 하여서, 대민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부대관리 및 군 기강 확립은 물론 보다 완벽한 후방지역 방어태세 및 해안경계 테세등을 확립하는데 대열동기생들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우리 대열동기생들도 최선을 다해서 중대장 임무를 수행하였지만 각종 사건 사고들이 많이 발생하다 보니 불가피 지휘책임을 져서 피해를 본 동기생도 몇몇 있었다.
또한, 이 당시에는 특전사도 중부 및 남부권 지역의 예하 공수특전여단 증편 등으로 중대장 소요가 증가함에 따라 육사출신인 대열동기생들도 OAC교육수료 후, 특전사 중대장 요원으로 많이 보직되어서 특수전 분야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었는데, 김윤석 동기(특전사령관)와 유상훈동기(1공수특전여단장)는 위관 급부터 특전사 예하부대에서 다양한 직책과 경험을 쌓는 등 “특전사 베테랑”맨으로서 특수전 분야에서 권위적인 동기생들이다.
★ 부하사랑 살신성인 산화
특히 故 정경화동기도 OAC수료 후 특전사 중대장 요원으로 일단 보직되었으나, 병력이 적은 기간 편성된 특전사 중대장보다는 최전방 GOP 사단에서 힘들고 위험하지만, 병력이 많은 실병 지휘 중대장을 하고 싶다고 상관에게 간곡하게 건의하여, 마침내 화천북방 7사단 GOP부대 철책선 중대장으로 전속하여 열심히 근무하던 중, 1976년 6월21일 비무장지대에서 작전 시 부하가 미확인지뢰를 잘 못 건드려서 폭발하게 되자, 주저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부하들을 살리려고 중대장 자신의 몸으로 막아내고 산화한 살신성인의 정신은, 강재구선배와 함께 육사인의 표상이 되어 늦게나마 2019년도 “자랑스러운 육사인”으로 추대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그리고 대위 2차직위는 중대장을 하던지 또는 교육기관에서 교관을 하면서 지휘관이나 교관으로서 경험을 쌓아 갔다. 그리고 대대급 이상 부대에서 작전장교 등 참모장교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육군대학 정규교육과정
1978년 6월1일부로 소령으로 진급하고서는 “先 교육,後 보직”방침에 따라 영관급 장교로서의 지휘관 및 참모로서 임무수행 시 필요한 지휘관리, 참모업무, 전략전술과 합동 및 연합작전등 사단급 이상 부대의 전술, 전기를 연마시키는 육군대학 정규교육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필수과정 코스인 육대 정규교육과정을 약 1년 동안 받기 위해서 대부분의 동기생들은 진해 소재 육군대학에서 당시 낙후된 관사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동기생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영관급 지휘관 및 참모로서 필요한 전술 및 제반 군사교육을 받았다.
또한 정규 육사출신들은 중위, 대위 및 소령시절에는 대부대 장관급 지휘관들의 비서실장 또는 전속부관들로 많이 발탁되어서 개인 참모로서 또는 보좌관 역할을 하면서 군의 대부대 지휘관들의 임무수행 모습들을 측근에서 조기에 접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야전 보병 연대급 작전과장 등 주요참모로서도 핵심적 역할을 다하였다.
★ 지휘관 및 참모 특기제도 적용
그리고 당시의 육군의 장교인사관리는 003지휘관 특기장교(소령 때부터 예 003 지휘관 주특기 잠정 부여, 중령진급 후 003특기 확정: 전체의 50% 점유)와 참모특기장교(50%)로 구분하여, 지휘관 양성자원과 참모 양성자원으로 분리하여 계급별로 장교인사관리를 해 왔던 것이다.
그러다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인사운영감실)에서는 선진 군사대국인 미군의 인사 및 교육시스템을 본 받아서 “先 교육 後 보직”제도와 함께, “전문성을 갖춘 참모특기제도”를 발전시켜서 우리 군도 참모특기별로 보다 전문화된 인재를 양성해서 계급별 대대장 및 연대장 등 지휘관 경험과 동일 참모특기에서 반복 참모 및 정책경험을 쌓도록 하는 취지에서, 510(인사),520(정보),530(작전),540(군수),550(동원),560(기획)등 참모특기를 중령 진급 시부터 적용하여 전문화된 참모특기제도를 정착시켰다.
이때부터 소위 작전 통, 인사통, 군수 통, 정보 통이라는 말이 나왔다.
★ 군 위탁교육제도 수혜
또한 1978년도 이때부터 육군본부에서는 미국 웨스트포인트 육사출신장교들 처럼 장차 고급장교가 되어 정책부서 등에서 임무수행을 잘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석사학위 자격은 있어야 한다면서, 현역시절에 고려대 및 연세대등 민간대학 석사과정 군 위탁교육제도를 인사정책으로 수립하여, 1차로 동기생들도 8명(김우식, 석용문, 이동남, 이종은, 이화영, 임창희, 정재수 ,황종구 등)이나 2년간 석사과정을 이수하고 육본 및 국방부등 정책부서에서 정책수립에 기여하기도 했다.
★ 대령 진급 및 주요 보직
1982년8월1일 중령으로 진급하고서는 보병대대장(24개월이상) 및 사단 주요참모와 상급부대 참모장교로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전방 사단급부대의 주요 핵심지휘관 및 참모로서 야전군의 중추적인 역할수행을 다 하였다.
그리고 동기생 중 1차로 1987년 12월에 15명(보병 12명, 포병 3명)이 대령으로 진급을 시작으로 1988년도에 2차, 1989년도에 3차 진급으로 모두 97명(보병 60명)이 대령으로 진급하였으며, 대령 1차 보직으로 국방대학원 안보과정에 입교하든지 또는 보병사단 참모장등 직위를 역임하였다.
★ 국방대학교 교육
국방대학교는 최고의 안보교육 및 연구기관으로서 안보과정에 입교는 필수과정이 아니고 선택과정이지만 대열동기생들도 대령으로 진급하는 1988년도에 1차로 입교를 시작하여 2차, 3차 연도, 그리고 다른 보직을 먼저 역임하다가 1997년도에 까지 입교하여 육. 해. 공군 장교를 비롯하여 정부기관 서기관급 이상 및 공공기관 부장급 이상 일반직 간부들이 함께 1년 동안 국가의 안보 및 국내외 정세분야 등을 교육받고 토론하며, 군과 정부기관을 상호 이해하며 친교활동도 돈독히 함으로써, 수료 후에는 국방부 및 육군본부 정책부서 등에서 근무할 당시에 국대원 안보과정 출신 정부기관 일반직 고위간부들과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상호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군과 국가의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 연대장 직위 수행
그 후 특히 대령 2차직위로서, 보병 병과계급으로는 최고의 지휘관이며 중요한 전투부대 연대장(여단장) 직위를 수행하게 되어 있어서, 육군본부에서는 부임 1년전에 “연도별 전투부대 연대장 가용자 선발 및 보직부대를 선정”하는 인사위원회를 소집하여 대상자를 심의 및 결정하고 육군참모총장의 최종 승인을 받도록 인사규정에 되어 있다.
★ 2군 지역 방어능력 강화방침에도 부응
그런데 이와 같은 최종승인을 받아서 예하부대까지 전파되었던 “1989년도 연대장 가용자 및 보직분류 선정” 결과에 일부장교들이 비선호지역인 2군 후방지역 보직에 불만을 제기하게 되자, 육군본부에서는 “1군 및 3군 전방지역도 중요하지만 2군 지역도 역시 중요한 곳이라고 하면서 많은 육사출신 장교들이 2군지역 연대장을 하도록 재 심의하라”는 2군사령관을 역임한 바 있는 이종구 육군참모총장의 특별지시에 따라, 우리 동기생 중 2군 무경험자 중 수도권 지역부대에 보직 예정이었던 5명(김윤석, 노행환, 이광희, 이희원, 이화영 등)이 1차로 2군 지역 광활한 해안부대 연대장을 역임하면서 완벽한 해안 경계태세와 민관군 총력 방위태세 확립 등에 기여하면서 2군 지역 군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개인적으로도 소중한 지휘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긍정적인 효과로 그 이후에도 2차, 3차 계속해서 매년 육사출신 후배들이 2군 지역에 많이 근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대령 3차 직위인 대부대 및 정책부서 핵심 참모직위 장교로서 임무에 최선을 다하면서 정예 직업군인 간부로서 “先公後私” 정신과 확고한 국가관과 사명감을 견지하면서 “과연 육사출신답다”라는 주위에 평을 들으면서 우리 27기 대열 동기들은 군 복무를 해왔다고 자부하고 있다.
★ 각종 부대훈련 테스트 및 한미연합작전 성공리 수행
이와 더불어 특히 보병병과 출신 지휘관들이라면 누구나 개인 및 부대의 명예를 위해서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소총 중대장 시는 “중대훈련 시험(중대ATT) 우수중대와 연대 선봉중대장 및 사단에서 선발되는 재구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를 바라고 있으며, 보병 대대장 근무 시에는 “사단에서 주관하는 대대훈련 시험(대대ATT) 우수대대 및 사단 선봉 대대장”을, 그리고 보병 연대장 근무 시에는 “군단에서 주관하는 보병 연대전투단 훈련 시험(RCT)우수연대 및 군단 선봉 연대장”에 선정되기 위해서, 평소 부대관리는 물론이고 교육 및 전투력향상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인접부대 동료 지휘관들과 선의에 경쟁을 하면서 많은 대열동기생들은 영광스러운 수상과 함께 전투력 향상과 군 발전에 크게 기여해 왔다.
또한 보병병과 지휘관 및 참모들은, 대부대 훈련에 참가할 기회가 많았었는데, 3월에 실시해 왔던 “팀 스피리트” 연합작전 훈련, 5월경 적 침투가 예상되는 녹음기에는 “대침투 작전훈련”, 그리고 7월, 8월경에는 “을지 포커스”훈련, 10월, 11월경에는 “독수리훈련”등을 계획하고 준비하며 훈련하면서 군사대비태세 완비 및 전투력 증강에 크게 기여 해 왔다.
더욱이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대열동기생들이 1971년도 3월에 임관하여 1994년 7월8일 북한 김일성이가 심근경색에 의한 심장마비로 돌연 사망할 때까지만 열거를 해도 소대장· 중대장·대대장 및 연대장 등 지휘관으로서 전·후방 지역에서 근무할 당시에 북한은 육상 및 해상 침투 등 전·후방 각지에서 수 없이 많은 대남도발을 빈번히 일으켰던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예컨대, 소흑산도 근해 간첩선 격침사건(1971.6.1.), 철원군 비무장지대 총격사건(1973.3.7.), 추자도무장공비침투사건(1974.5.20.), 해경863경비함 격침사건(1974.6.28.),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사건(1974.8.15.), 휴전선 남침용 땅굴 4회 발견사건(제1땅굴 :연천군 백학면 소재,1974.11.15. 제2땅굴:철원군동송읍소재,1975.3.24. 제3땅굴:파주시 군내면소재,1978.12.17. 제4땅굴: 양구군 해안면 소재, 1990.3.3.), 판문점 도끼만행사건(1976.8.18.), 광천지구 무장간첩 침투사건(1978.11.4.), 필승교 무장공비침투사건(1981.6.29.), SR-71정찰기 피격사건(1981.8.26.), 문산 임월교 무장공비 침투사건(1983.6.19.), 월성 해안 무장공비 침투사건(1983.8.4.), 독도근해 간첩선 격침사건(1983.8.13.), 아웅산 묘소 전두환 대통령 일행 폭탄테러사건(1983.10.9.), 다대포 침투무장공비 매복 생포 작전(1983.12.3.), 청사포 간첩선 격침사건(1985.10.19.), 김포국제공항 폭탄테러사건(1086.9.14.), 대한항공 858기 폭파사건(1087.11.29.), 임진강 무장공비 침투사건(1995.10.17.)등을 들 수가 있는데, 오죽했으면 이 시기에 합참에서는 대간첩대책본부까지 조직을 편성하면서 북한의 대남침투에 대비할 정도였다.
이처럼 북한의 무차별 만행과 대남침투공세로 인하여 우리 군의 군사대비태세도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우리 대열동기생들은 보병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으로서 근무하면서 어려운 여건과 환경 속에서도 전·후방 각 지역에서 북한의 육상 및 해상을 통한 대남침투에 대비하여 전방철책선 경계 작전은 물론 비무장지대 내 주도권확보를 위한 주야간 수색정찰 및 매복 작전과 후방지역 광활한 해안경계 작전 등 보다 철두철미한 계획과 준비를 하고 일부 동기생들은 직접 작전에 참가하면서까지 부여된 임무수행에 최선을 다하였다고 자부하고 싶다.
이와같이 우리 27기 대열동기생들은 1971년도 3월에 임관한 이후 조국의 산업근대화 및 민주화 과정 등 두 번씩이나 큰 격변의 혼란 속에서도 자유 대한민국의 수호를 위해 30~35년 이상 정예 직업군인으로서 군 본연의 임무에 전념하며 몸과 마음을 받쳐 헌신해 왔다.
특히 야전에서 보병 병과 츨신 동기생들은 전·후방 및 산간 오지지역 등에서 군 복무기간 중 1~2년에 한번씩 이삿짐을 꾸려가면서 20~25회 정도 잦은 이사를 해야 했기에 불편한 주거생활은 물론 자녀교육 등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 대망(待望)의 장군 진급과 군 수뇌(首腦) 진출
이와 같은 힘들고 어려운 역경을 슬기롭게 극복하면서 오직 “내 생명 조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가면서 부여된 임무완수에 매진해 온 결과, 대열 동기생 중에 45명(보병 25명)이 장군으로 진출하여 사단장 및 군단장급 지휘관(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기무사령관 포함) 그리고 참모총장, 국방장관 등 군의 최고 직위까지 승진하면서 명예스럽게 군 생활을 마치고, 현재도 70중반 노병(老兵)의 예비역 신분으로서도 조국 자유 대한민국의 국가 안보를 걱정하면서 지내고 있다.(끝)
★ 이 밖의 각종 중요 통계(동기생들의 확인 및 추가보완 요망사항 포함)
1. 임관당시 보병 병과 명단 (125명)
강신득 구재림 권일상 김광원 김국남 김근배 김근식 김기성 김동윤 김명수
김부명 김상원 김상태 김영찬 김용석 김우식 김원현 김유성 김윤석 김장수
김정규 김제형 김종구 김종윤 김형만 김형석 김홍찬 나종화 나채수 남재철
노행환 문두식 문충실 민병노 민봉한 박상영 박석용 박수환 박승춘 박양우
박영한 박인규 박정주 박정학 박종규 박찬규 박창규 서만식 서삼섭 서원식
서재석 석용문 성사현 성유경 손정준 송석열 송영근 송요태 신대식 신용수
신해권 안병한 안봉진 양상현 양태호 염휴석 오면수 오용근 위윤형 유길주
유상훈 유선준 유용호 유우종 유제웅 윤석천 이광길 이광형 이광희 이규섭
이규진 이기원 이동남 이동훈 이병우 이삼룡 이상태 이대걸 이성원 이성일
이용선 이원종 이재영 이정섭 이종은 이준홍 이진수 이태형 이택호 이해호
이형후 이화영 이계성 이효진 이희원 임광택 임필락 장하부 전상일 전장하
전현철 정경화 정북실 정상화 제정관 차성근 채은묵 최주영 최태철 최형복
하삼석 한광문 홍갑식 황종구 황철준
2. 월남파병 명단(72년도부터, 보병 12명)
보병: 김광원 김근배, 김형석, 문두식, 박인규, 서만식, 성사현, 오용근, 이규섭, 이규진, 이상태, 이태형 등
포병: 김기환,김준섭,김종혁, 박태경, 유명규,임상수, 정재수, 진봉진,황의봉,
공병: 이상돈
3. 보병병과 주특기별 명단(중령, 대대장 보직 후 확정,)
인사(510):
구재림 김영찬, 박상영, 박정주, 서삼섭, 오용근, 이화영, 최주영, 홍갑식,황철준(이상 10명)
정보(520): 문두식,박승춘,박정학,오면수(이상4명)
작전(530):
강신득, 권일상, 김근식, 김동윤, 김용석, 김원현, 김윤석, 김장수, 김형석 , 노행환, 민병노, 박영한, 박찬규, 박창규, 송영근, 신용수, 신해권, 안병한, 양태호, 염휴석, 유길주, 유선준, 유상훈, 유우종, 이기원, 이계성, 이상태, 이해호, 이희원, 임필락, 제정관, 차성근, 한광문, 황종구 (이상34명)
군수(540):
김기성, 김부명, 김정규, 긴홍찬, 남재철, 석용문, 성사현, 성유경, 이광길, 이대걸, 이종은, 이형후, 임광택(이상13명)
동원(550): 신대식, 이삼용,(이상2명),
기획(560): 서원식, 이광희, 이재영(이상3명)
4. 보병 병과 특기별 대령진급자(60명)
인사(510): 9명
정보(520): 4명
작전(530): 32명
군수(540): 11명
동원(550): 2명
기획(560): 3명
5. 보병 장군진급자 (25명)
인사(510): 3명 정보(520): 3명 작전(530): 13명 군수(540): 4명 동원(550): 1명 기획(560): 1명 §
2021.6.10.
이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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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월남파병명단추가요
보병 : 오용근
포병 : 박태경, 정재수
협조바라던 수정보완 지적 대단히 감사합니다.
대열동기생들 글 쓰는것 보면 누구나 할것없이 문장력이 대단합니다. 이화영 동기가 보병 자료 정리도 잘 했고 잘 요약해서 썼네요.
이제 본인 회고록도 한번 써 보시오.
초급 장교 시절 다들 힘들었지만 특히 보병 병과가 제일 고생했다고 생각합니다. 보병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