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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4)_산행친구들, 밀양 영남루,위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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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코스]
부산발. 2021.2.20. 09시 발.
1.영남루 일원 ;
영남루, 천진궁, 밀성대군비, 박시춘 작곡가 옛집, 역사문화공간, 사명대사 동상, 사명대사 필적. 아랑전설, 밀양아리랑, 무봉대 밀양읍성, 무봉사(태극나비, 무봉사와 천자봉 전설), 아랑사, 석화
2.위양지 ; 일주, 완재정, 점심
3.사명대사 생가. 사당, 유적지공원
4.사명대사 무안 표충비. 누운 향나무
5.점필재 김종직 생가(추원재)
6.예림서원. 김종직 향사, 저녁식사.
밀양 영남루/무봉대
영남루 약사
1) 영남루는 원래 8세기 중엽 신라 경덕왕 때 영남사라는 절이었다. 영남루는 영남사의 한 부속건물이었다.
2) 고려말 공민왕 때 1365년 밀양부사 김주가 비로소 크게 중수하여 영남루가 된 것이다.
3)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4) 현재의 건물은 1844년 조선말 헌종10년에 밀양부사 이인재가 다시 지은 것이다.
* 영남루는 주 누각 양 가에 딸린 작은 누각이 있는데 익루라고 부른다. 날개같다는 것이다. 좌측은 능파각으로 같은 바탕이고, 우측은 주누각보다 지대가 낮다. 침류각(밀양강 강물을 베개 삼는다는 의미)이다.
* 능파각 ; 凌波란 미인의 가볍고 우아한 걸음걸이를 일컫는다. 같은 이름의 누각이 곡성에 태안사라는 절이 있다. 그 입구에 다리요 누각 역할을 하는 능파각이 있다. 절 경내에서는 조용히 사뿐사뿐 다니라는 것일 것이다.
영남루는 진주 촉석루,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함깨 웅장힌 3대누각이라고 한다.
만덕문은 천진궁의 정문이다.
천진궁은 어떤 시설인가?
우리나라 역대 중요국가 시조의 위패를 모신 민족정신 앙양 시설
1) 조선 현종 때 1665년 객사 공진관(사신, 출장관리 숙소)
2) 경종때 전패(왕을 성징)를 모시는 객사로 활용
3) 일제시대 ; 헌병 감옥
4) 1952년 이승만 대통령 때 단군 봉안회가 대덕전으로 단군을 모심
5) 1957년 이승만 대통령 때 수리후 천진궁 현재 모습
* 중앙 ; 단군 영정, 위패 모심
* 동쪽 ; 부여, 고구려, 가야, 고려 시조 위패 모심
* 서쪽 ; 신라, 백제, 발해, 조선 시조 위패 모심
* 천진궁 오른쪽에 있는 석상. 단군 할아버지인지? 태상노군인지?
* 천진궁 오른쪽에 있는 비석
* 태상노군 ; 노자, 도교의 시조
* 칠원성군 ; 북두칠성
* 삼신제왕 ; 봉래, 방장, 영주 세 신선
도교적 시설이네. 노자, 칠성, 삼신~
* 밀성대군의 단 이라는 비석이 왜 여기에 있는가?
* 밀성대군은 밀양박씨 시조, 물론 박혁거세의 후손이다. 신라 54대 경명왕의 장자. 밀양박씨 가문 시설
* 원래 영남루 부근에 밀성대군 묘가 있었다. 위치는 확실치 않았다.
* 1922년 대홍수 때 땅이 패여서 구덩이가 나타났고 묘의 윤곽이 부분적으로 나타났다. 밀양박씨 가문에서는 밀성대군묘로 확신하고 일제의 당국에 허가를 얻고 15평 정도의 땅을 허락받아 여기에 밀성대군의 단을 세운 것이다. 1925년 경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돌의 조각이 왜풍이 나타나는 것이 흠결이다.
* 영남루를 관리하는 문화재 당국은 어디에도 안내판 하나 세우지 않았다. 안내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안내도판에서 시설명을 쓰지 않았다. 존재하기는 하나 완전 투명시설로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 안내판을 설치해야 한다. 그것도 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 밀성대군을 그렇게 대접해서는 안된다. 밀양이라는 지명 조차도 밀성대군에게서 나왔다. 처음 밀성이라고 하다가 나중에 밀양으로 바뀐 것이다.
통일신라때 현재의 영남루에는 영남사라는 절이 있었고,
그 절에 속했던 암자가 현재의 무봉사이다.
무봉사에 있는 석조여래 좌상은 원래 영남사에 있언던 것인데
영남사가 폐사되면서 무봉사로 옮겨진 것이다.
* 예로부터 무봉사에서는 나비의 전설이 내려왔다.
* 1954년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태극나비 우표가 제작되었다.
* 장자의 글에 호접지몽, 나비는 사랑의 실현, 기쁨의 행복을 뜻한다.
* 서양에서는 나비가 큐피드의 화살(사랑의 화살)
* 나비는 신사임당 그림 등 민화에서 부부의 금실과 사랑을 뜻했다.
밀양 무봉사와 진해 천자봉의 전설
의창군에서 발행한 <내 고장의 전설>에 전하는 지금부터 1,200여년 전 신라 혜공왕 때 법조(法照)라는 한 도승이 밀양의 무봉사(舞鳳寺)를 세울 당시의 일이다.
하루는 선사가 급한 용무로 뒷간에 갔더니 호랑이가 뒷간 앞에 있는지라 다른 곳에서 용무를 마쳤다. 그런데 이 날 밤, 또 뒷간을 갔더니 이번에도 호랑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화가 치민 선사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호랑이의 이마를 쳐버렸다. 그랬더니 호랑이의 이마에서 흰나비 한마리가 날아나오고 호랑이의 몸은 사라져버렸다.
선사는 하도 이상하여 흰나비를 따라 나섰다. 나비는 하늘하늘 앞장을서 가더니 새벽녘에 어떤 산봉우리에 앉았다. 흰나비의 동정을 지켜보니 이번에는 날아서 산 아래 어떤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을 찾아들어가니 슬하에 자식이 없는 쉰살 가량의 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부부도 간밤에 매우 이상한 꿈을 꾸었다. 부부가 꾼 꿈이 똑같은 내용인지라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법조선사가 흰나비를 따라 이 집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선사가 두 사람의 꿈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꿈의 내용은 간밤에 선사가 겪은 흰나비와도 관련에 있는 꿈이었다. 이윽고 선사가 “ 오늘부터 열달후에 소승이 다시 찾아 주인장에게 청을 하나 드리겠으니 절대로 청을 거절하지 마시길 미리 약조해 주십시오.”하고 다짐을 하여 주인 남자에게 허락을 얻고 떠났다.
열 달 후 이 집 부인이 해산하여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날 아침 약속대로 선사가 찾아와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액이 있어 이 집에 있으면 머지않아 죽게 될 것이요. 소승이 데려가 길러야 하겠으니 맡겨주십시오,”하고 청하였다. 주인 부부는 열달 전 약속도 있고, 아이가 죽는다는 말에 선사에게 아이를 주고 말았다. 선사를 따라간 아이는 절에서 공부와 무예를 닦았다. 이 아이는 비범하여 보통의 아이들과는 달랐으며 사람이 보는 앞에서는 항상 왼쪽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버릇이 있었다. 이 버릇은 놀 적에도 그러하고 잠잘 때에도 왼쪽 주먹은 펴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선사는 아이가 잠든 틈을 타서 왼쪽 주먹을 펴보고 그만 깜짝 놀라 물러앉았다. 아이의 손금에 三 자와 1자기 뚜렷한 王자의 손금이 선명한게 아닌가? 그런데 선사가 미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아이가 벌떡 일어나 앉으며, 절간이 떠나갈듯 일갈을 하였다. 에잇! 요사스러운 중놈아! 그와 동시에 아이의 손이 선사의 따귀를 한대 쳐버렸다. 이어서 아이는
“내 여태 감추고 있던 비밀을 어느새 네놈이 눈치를 챘구나, 그렇다면 내가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 말을 남기고 절을 나간 아이의 행방은 묘연했으며, 뒷날 이 아이가 중국으로 건너가 천자가 되었다하고 그런 연유로 부부가 살던 뒷산 봉우리를 천자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밀양 아동산 기슭에 자리한 무봉사와 천자봉의 전설은 법조선사라는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특이한 이야기이다. 무봉사에는 국성접(國成蝶)이라 부르는 태극나비 이야기가 있어 더욱 신빙성을 갖게한다.
밀양아리랑 ; 언제 형성됐는지는 모른다.
1.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 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후렴생략)
2.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후렴생략)
3. 옥양목 접저고리 연분홍치마 열두 번 죽어도 못 내놓겠네. (님을 향한 마음을 놓을 수 없네)
4. 담 넘고 갈 때는 큰 맘을 먹고 문고리 잡고서 발발 뜬다.
박시춘 곡은 우리가 익히 부르고 애창곡으로 하였던 그런 친숙한 곡이다.
신라의 달밤,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서울, 전선야곡, 전우여 잘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등 300여곡
석화
아랑각 입구 옆 담장가에 석화가 나타난다. 납석이 풍화되면서 나타나는 돌꽃. 비온 후 더욱 선명하게 볼 수있고 한다.
석화
아랑사
아랑전설
아랑 ; 본명 윤동옥, 시기 조선 명종 때
밀양 윤부사 딸, 어머니가 일찍 죽고 유모손에 자랐다.
유모가 영남루에 달구경 가자고 권유하여 왔다가 연정을 품은 관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대밭에 묻혔다.
사정을 하소연하려고 나타난 원혼을 보고 부사마다 죽었다. 한 담이 큰 부사가 사연을 듣고 범인을 찾아내어 치죄하였다.
아랑전설
무봉대
영남루가 있는 이 작은 산의 정상이다. 아동산 혹은 무봉산이라고 하고 여기를 무봉대하고 부른다.
舞鳳臺란 밀양의 지형이 봉황새가 춤을 추는 지형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영남루 옆 낮은 산이 아동산 또는 무봉산이라 부른다. <무봉>이란 '밀양의 지형이 봉황새가 춤을 추는 모습' 이라고 무봉대, 무봉사 등의 명칭이 생겼다.
밀양 아동산 무봉대,무봉사, 사명대사 동상, 밀양아리랑, 박시춘 작곡가 동상과 옛집, 연리지 (영남루 부근) * 2021.2.20. ▣ 부봉산 무봉대 영남루가 있는 이 작은 산의 정상이다. 아동산 혹은 무봉산이라고 하고 여기를 무봉대하고 부른다.舞鳳臺란 밀양의 지형이 봉황새가 춤을 추는 지형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영남루 옆 낮은 산이 아동산 또는 무봉산이라 부른다. <무봉>이란 '밀양의 지형이 봉황새가 춤을 추는 모습' 이라고 무봉대, 무봉사 등의 명칭이 생겼다. 현재 이 성은 밀양읍성이며, 1479년에 쌓았다. 1910년일제가 철거령을 내리며 허물어졌다. 성곽의 석재는 건설자재로 활용되었다. 아동산에 읍성의 일부가 부분적으로 남아있거나, 복원된 것이다. |
밀양 위양지
◈ 신라시대 만든 저수지, 임진왜란 때 훼손된 것을 1634년 밀양부사 이유달이 다시 만들었다.
◈ 위양(位良)은 백성을 위하다는 뜻이다.
◈ 섬 5개, 완재정(宛在亭)은 안동권씨 집안 정자이다. 5월 이팝나무(이밥,쌀밥 의미, 입하에 핀다는 의미도 있음)
위양지 완재정
위양지 완재정
위양지 완재정
▦ 완재정 ;宛완은 완연완, 굽을 완.
* 완연하게 있다는 의미. 시경에 나오는 말.
* 1900년에 세운 안동권씨 정자. 임진왜란 시에 포로가 됐다가 돌아온 권삼변 입향조를 추모하여 후손이 세움.
위양지 완재정
위양지 완재정
이팝나무꽃이 피었을 때 5월의 위양지 완재정, -홍보자료에서
위양지 완재정
위양지 완재정
위양지 완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