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머위꽃 / 배익천
“실내합니당.” 깜깜한 한밤중에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꺽꺽하고 어눌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누구시오? 이 밤중에.” 할아버지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습니다. 외딴 숲속에 산 지가 10년이 넘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CCTV 화면을 열었습니다. ‘세상에!’ 할아버지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실내합니당-하고 문을 두드린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고 고라니였습니다. 밉고도 미워서 당장 발목을 부러뜨리고 싶은 고라니였습니다. 방문 앞에 떡 버티고 선 고라니는 퍽 점잖아 보였습니다. 송곳니가 눈에 띄게 삐쳐 나온 것을 보면 제법 나이 든 수놈이었습니다. 헐렁한 남방셔츠를 목에 걸쳐 앞다리에 꿰고, 꼬질꼬질한 넥타이도 맸습니다. 간당간당 떨어질까 말까 하게 중절모자도 썼습니다. 구두와 운동화를 뒤죽박죽 네 발에 꿰고 있었습니다. “후훗!” 밉고도 미운 고라니였지만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할아버지는 요즘 고라니와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털머위 때문입니다. 할아버지는 털머위를 참 좋아했습니다. 사철 반짝반짝 윤이 나는 넓고 동그란 잎사귀도 좋았지만, 모든 꽃들이 지는 늦은 가을에 늘씬한 꽃대를 밀어 올려 샛노란 꽃을 피우는 그 늠름함이 좋았습니다. ‘그래. 숲으로 들어오는 길을 털머위 길로 만드는 거야. 초겨울까지 노랗게 털머위꽃이 피는…….’ 할아버지는 숲속에 작은 집을 짓고 꽃을 가꾸며 살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봄이 되기 무섭게 꽃집에 가 털머위 모종을 사 왔습니다. 그리고는 숲속 할아버지 집으로 오는 길 양쪽으로 빼곡히 심었습니다. “멋진 가을이 될 거야. 아니야. 겨울도 노랗게 만들 거야. ‘ 그러나 할아버지의 그 기대는 사흘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털머위 모종을 심은 지 사흘이 되는 아침이었습니다. 어제 오후까지 하나둘 고개를 쳐들기 시작하던 동그란 털머위 잎이 눈에 띄게 적었습니다. 아예 모종이 뿌리째 뽑힌 곳도 있었습니다. ‘이런 고얀 것!’ 할아버지는 허리를 펴고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숲속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으름덩굴꽃 향기만 그윽했습니다. 멧돼지, 토끼, 너구리, 오소리, 두더지……. 할아버지는 털머위 잎자루를 잘라 먹을 수 있는 녀석을 하나하나 떠올렸습니다. ‘토끼? 아니야. 토끼 걸음으로는 이렇게 넓게 뜯어 먹을 수 없어. 맞아. 그 녀석이 야. 고라니야.’ 고라니가 생각나자 숲속 어딘가에서 할아버지를 빤히 지켜보고 있을 반들반들한 눈동자가 떠올랐습니다. “야! 이노무시키들! 이게 무슨 짓이야! 엉! ‘ 할아버지는 숲을 휘둘러보며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둘둘구구 둘둘구구. 나는 알지, 나는 알지, 숲속 어딘가에서 산비둘기가 울었습니다. 화가 몹시 난 할아버지는 하룻밤 하룻낮을 꼼짝 않고 고라니 퇴치법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는 고라니가 다니는 길목에 소독약으로 쓰는 크레솔 비누 액과 물을 섞어 페트병에 넣어두고 곳곳에 하얀 비닐봉지를 나뭇가지에 매달아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펄럭이게 했습니다. 그게 바로 이틀 전의 일이었습니다. “어이쿠, 난, 누구라고? 고선생이시네!” 할아버지는 와르락, 방문을 열며 반가운 척 고라니를 맞았습니다. “우리 여기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할아버지는 마당 한쪽 살구나무 밑에 놓여 있는 탁자 쪽으로 가 의자를 권했습니다. ‘고선생이라니? 나보고 선생이라니?’ 고라니는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예, 선생님, 고맙슴당.” “우리 말이 어렵지요? 이걸 먹으면 많이 부드러워 질 겁니다.” 할아버지는 아까워서 주워 온 털머윗대를 하얀 접시에 담아 내놓았습니다. 고라니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가슴 한쪽이 뜨끔했습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무섭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사실 고라니가 한밤중에 할아버지를 찾아온 것도 털머위 때문이었습니다. “이 귀한 겅을 예쁜 접시에 담아놓으니 더 귀해보입니덩.” 고라니가 코를 벌름거리며 깔끔하게 다듬어진 털머윗대를 요리조리 살폈습니다. “고선생은 그것이 귀하다는 것을 어찌 한눈에 알아보오?” “알아보고 말고용. 이것을 저희들은 하늘이 내려준 약이라고 해서 하늘약이라고 하는데 만병통치약이지용.” “만병통치약?” 무엇인가 짚이는 게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화가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이번 기회에 고라니의 못된 짓을 싹 씻어놓을 생각이었습니다. “예, 만병통치약이징. 열이 날 때나 나쁜 것을 먹었을 때, 상처가 났을 때, 종기가 났을 때, 이가 아플 때 이 하늘약이 없으면 안된당.” 그러면서 접시 위에 있는 털머윗대 하나를 집어 싹둑 잘라 먹었습니다. 싹둑 소리가 유난히 경쾌했습니다. 할아버지 생각도 반짝 빛났습니다. 고라니가 싹둑 자른 털머윗대 끝이 숲길에 온통 잘라진 털머윗대와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 아무리 만병통치약이라 해도 숲길에 있는 내 땅에 내가 심은 것은 내 것이지. 고선생 것이 아니잖소?” 할아버지가 약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아니야, 그거 선생님 꺼 아니양. 우리 땅이양. 옛날부터 우리 땅. 선생님이 마구 들어와 살았어용. 그래서 우리도 많이 화가 났지만 하늘약을 심어줘서 참았성. 그런데 …….” 고라니 말이 무척 빨랐습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목에 걸쳐져 있는 남방셔츠를 펄럭이며 앞발을 쾅쾅 내리치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끊어진 고라니 말을 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고약한 약 뿌렸성! 아주 나쁜 선생님이양!” 고라니는 껑충껑충 뛰면서 탁자 주위를 맴돌았습니다. 후줄그레한 남방셔츠는 벗겨지고 짝이 안 맞는 신발 네 짝도 벗겨졌습니다. 할아버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고라니 말이 다 맞았습니다. 잘 타일러야겠다던 할아버지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고선생.” 할아버지는 방방 뛰고 있는 고라니를 조용히 불렀습니다. “이리 와 앉으시게. 고선생 말이 다 맞네. 내가 잘못 생각했네. 내일 당장 그 약물병 다 치우겠네. 그 대신 고선생네도 약속 하나 해주게. 1년 동안은 거기에 얼씬도 말게. 그사이 내가 고선생네가 실컷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이 심고 가꾸어 놓을 테니까. 그리고 나중에라도 꽃대는 먹지 말게나.” 할아버지는 조용히 다가온 고라니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당. 선생님. 우리도 잘못했어용.” 고라니가 할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간들간들 얹혀있던 중절모자가 툭 떨어졌습니다. 할아버지가 모자를 주워들며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차림으로 왔는가? “히힛! 대접받고 싶어서지용. 협상은 1대1로 하는 거 아닙니깡?” “허허허!” 할아버지가 싱글거리는 고라니 궁둥짝을 아프지 않게 철썩 갈겼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숲길은 털머위로 사철 푸르르고, 늦가을에는 샛노란 꽃이 노랑 물감을 부어 놓은 듯 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해 늦가을이었습니다. 할아버지 집으로 가는 숲길 가득 털머위꽃이 필 때 할아버지가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캄캄한 한밤중이었습니다. 장례식장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노룻빛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상가로 모여들었습니다. 모두 노란 꽃대를 하나씩 물고 있었습니다. 샛노란 털머위꽃이었습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말없이 할아버지 영정 앞에 샛노란 털머위꽃대를 하나씩 놓았습니다. 사진 속에서 할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고맙네. 그러나 꽃은 제 자리에 피어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네. 내 없어도 잘 가꾸며 사시게. 늘 푸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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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인상 깊게 읽었던 글이라
열심히 찾아 올렸습니다.
신건자 선생님 고맙고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