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좌랑(吏曹佐郞) 조원(趙瑗) 선조 11년(1578,무인)
선조수정실록 12권, 선조 11년(1578,무인) 5월 1일 辛亥 2번째기사 1578년 명 만력(萬曆) 6년
직제학 정철을 동부승지로 승진시킴에 두 번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다
직제학 정철(鄭澈)을 동부승지로 승진시켰는데 두 번 사직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동인(東人)·서인(西人)하는 당파의 설이 더욱 무성하여, 심의겸(沈義謙)의 무리들을 서인이라 지목하고 김효원(金孝元)의 무리들을 동인이라 지목하였다. 【심의겸의 집은 성(城)의 서쪽에 있고, 김효원의 집은 성의 동쪽에 가까왔다. 당초에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말하고자 아니하여 이렇게 지목하였었다.】 그리하여 조신(朝臣)중에 주관이 뚜렷하고 행실이 독자적인 자이거나 주견없이 남의 의사만을 따르는 명망이 없는 사람이 아니면, 모두 동·서인의 지목 속에 들어 있었다.
정철은 서인으로 지목받고 있었는데 이이는 정철에게 권고하여 연소한 사류(士類)들과 교분을 두텁게 해서 동인·서인의 설을 타파해야 한다고 하자 정철이 처음에는 그 말을 따라서 임금의 명령을 선포하고 정책을 진달할 즈음에 자못 사기(士氣)를 펼쳤다. 그런데 그때 지평 홍가신(洪可臣)이 천거를 받아 대관이 되어서
이조 좌랑 조원(趙瑗)이 사정을 따른 잘못이 있다고 탄핵하였다. 홍가신은 젊어서부터 조원과 친한 벗이었는데도 그를 논박하여 스스로 공론에 맞추니 이이는 그를 풍력(風力)016) 이 있다고 칭찬하였으나 정철은 편하게 여기질 않았다. 이는 가신이 서인과 맞지 않아 옛 친구를 생각하지 않고 먼저 조원을 공격하는 것인가 하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이이와 정철 두 사람이 지향하는 뜻이 동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보합(保合)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註 016] 풍력(風力) : 사람을 굴복시키는 위력.
○以直提學鄭澈陞同副承旨, 再辭不許。 時, 東西之說益盛。 以沈義謙儕輩, 目爲西人, 金孝元儕輩, 目爲東人。 【沈家在城西, 金家近東城。 當初人不欲斥言, 有此指目。】 朝臣苟非特立獨行及碌碌無名者, 皆入東、西指目之中。 澈則目爲西者也。 故珥勸澈, 與年少士類交厚, 以破東西之說。 澈始從其言, 出納復逆之際, 頗張士氣。 時, 持平洪可臣, 以薦爲臺官, 劾吏曹佐郞趙瑗徇私之失。 可臣少與瑗親友, 而論駁自協公論, 李珥則稱其有風力, 澈則不能平。 蓋疑可臣與西人不協, 不計故舊, 而先攻瑗也。 二人指意亦不同, 人知保合之難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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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2권, 선조 11년(1578,무인) 6월 2일 壬午 1번째기사 1578년 명 만력(萬曆) 6년
사헌부가 아뢰기를,
"이조 좌랑 조원(趙瑗)은 처음으로 입사한 사람으로서 혐의를 생각하지 않고 외람되어 친척들을 끌어들였으니 체직시키소서. 그리고 이조 낭관은 한두 명의 관원이 있을 뿐이어서 매우 구차하니 속히 전차(塡差)하게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壬午/司憲府啓: "吏曹佐郞趙瑗, 以初入仕之人, 不計嫌疑, 濫引親戚, 請遞。 吏曹郞官只有一二員, 極爲苟且, 請命急速塡差。" 答曰: "依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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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2~1687년 남계서원경임안(蘫溪書院經任案)
院長幼學鄭摯 仲尹
癸酉(선조 6년,1573,계유)十一月十五日代盧公差出
甲戌(선조 7년,1574,갑술)六月二十五日奉玉溪先生始定堂齋之號
丁丑(선조 10년,1577,정축)九月九日吏曹佐郞趙瑗來頒文獻公諡號是日會鄕儒請生員盧欽(1527~1602)改題位板
是年始定典穀有司三年準朔法
戊寅(선조 11년,1578,무인)十一月十五日以病辭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