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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와 홍순병, 춘우 홍을표 부자 습고 모아
기양정사에 거주하며 후학양성에 매진하고 있는 노강 박래호 선생이 외증조부인 몽와(蒙窩) 홍순병(洪淳柄)선생과 외조부인 춘우(春宇) 홍을표(洪乙杓)선생 두 분의 글을 모아 국역본으로 간행했다.
몽와 선생(1871~1941)은 문춘공 연재 송병선 선생의 제자로 일제 강점기에 고향인 순창군 금과면 매우마을에서 황룡면 아곡리로 옮겨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였다.
그 때 지은 시와 글이 천여 편에 이르렀으나 6`25 전쟁 등을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그의 아들인 춘우 선생(1905~1977) 역시 도의를 닦는 선비로 살면서 주옥같은 많은 글을 집필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대부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춘우 선생의 제자이며 외손이기도 한 노강 박래호 선비학당 학장이 홍씨 문헌록과 당시 양대 선생과 교유했던 선비들의 문집 등에서 두 분의 글과 시를 찾아 한자를 모르는 요즘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 출간하였다.
몽와 선생의 습고(拾稿)에는 용진정사(聳珎精舍: 한말의 도학자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先:1851∼1931선생이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자 망국의 한을 달래면서 용진산에 강당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쓴 곳으로서 한말 호남 의병활동의 본거지이기도 하였다) 십경(十景, 봄,여름, 가을, 겨울 등)과 기(記), 부(賻)등이 있다. 춘우선생의 습고에는 시와 기 그리고 통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노강선생은 “비록 분량은 작지만 유교의 근본인 성리학을 비롯한 충과 효 그리고 열을 밝히고 있어 옛날의 미풍양속을 엿볼 수 있는 책이라고 여긴다”고 발간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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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호 전 성균관 부관장, 유도회장 취임
김영풍 이임회장, ‘문화는 함께하는 삶’ 문집 출간
박래호 취임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박래호 전 성균관 부관장이 성균관유도회 제29대 장성지회장으로 취임했다.
김영풍 이임 회장이 펴낸 기념 문집 ‘문화는 함께하는 삶’
박 지회장은 “유도회는 선비 양성 의무가 있는 만큼 지역 유림에게 하서 김인후 선생 등 장성이 배출한 선현들의 출생, 학업, 정신 등을 알리고, 주변에 전파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또 “유림문화창달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향교를 중심으로 유도회, 여성유도회, 청년유도회가 일심동체로 화합하는 것”이라며 “모두가 ‘향화만사성’(향교를 중심으로 화합하면 안 될 일이 없다)의 마음으로 임해주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장성문화원 이사이자 필암서원 선비학당 학장인 노강 박래호 취임 회장은 성균관유도회 부관장을 지냈으며 사단법인 장성춘추회 16대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김영풍 이임 회장은 이임기념 문집 ‘문화는 함께하는 삶’을 펴냈다. 출간사에는 ‘나는 늘 마음속에 오랫동안 향토문화를 챙겨보고 사랑하는 것이 내 고향을 그리고 내 지역을 가꾸어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는 그의 문화 사랑, 고향 사랑의 마음이 담겼다. 김 이임 회장은 “부족한 점이 많으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라고, 격려와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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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호 전 성균관 부관장, 춘추회 회장 선임
“미풍양속 바로잡고 아름다운 장성 알리겠다”
박래호 전 성균관 부관장이 사단법인 장성춘추회 16대 회장에 선임됐다.
장성춘추회는 1954년 창립(초대회장 김황중)하여 올해 63년을 맞는, 지역에서 가장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모임이다.
6.25 전란 이후 혼란한 사회 속에서 지역민의 결속을 다지고 세대 간 화합을 이끌기 위해 결성된 춘추회는 장성춘추장학회 정관에 따라 지역 인재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으며, 85세 이상 경로해당자에 고령위로금도 지급하고 있다.
한때 회원이 350여명에 이르렀으나, 현재는 100여명이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박래호 회장은 “춘추회는 조선시대 권선징악과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만든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약의 영향으로 창립했다”며 “학문과 인품은 물론 화차(火車) 300량을 제조하여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 만큼 뛰어난 전략과 창의성을 가진 망암 변이중 선생의 뜻을 지역의 젊은이들이 이어받아 장성의 미풍양속을 바로잡고 아름다운 장성을 널리 알리는 데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또 “춘추회의 6대 덕목 즉 덕업상권(德業相勸),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과실상규(過失相規), 산업상조(産業相助), 보건상부(保健相扶) 등을 잘 따르고 정의와 의의를 간직하고 지키는 모임이 될 수 있도록 이끌겠다”고 약속했다.
장성문화원 이사이자 필암서원 선비학당 학장인 노강 박래호 회장은 장성군 청렴교육 전문 강사로 활동하며 성균관 유도회 부관장을 지냈다.
장성춘추회는 올 7월 28일 사단법인 장성춘추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춘추회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장 - 박래호 전 성균관 부관장
부회장 - 이재근 전 장성노인회장
〃 - 이상용 전 장성향교 전교
〃 - 김영풍 전 장성문화원장
〃 - 문영수 장성향교 전교
총무 - 이충원 장성향교 사무국장
재무 - 김도금 전 장성향교 의전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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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경장학회, 장학금 전달식 열어
‘따뜻한 가족애와 바른 인성 기르는데 종자가 되길’
한학에 몰두하는 남편의 뒷바라지와 검소한 삶으로 세인들의 추앙을 받아왔던 故 심경순 여사의 혼(魂)이 담기고, 노강 박래호 선생의 꿈인 교육의 백년대계를 실현하기 위해 2011년 기양정사(岐陽精舍)에서 시작된 호경장학회(회장 택열) 장학금 전달식이 지난 달 27일 열렸다.
이날 장학금은 문향고 김정은, 광주 경신여고 나혜지 학생에게 전달됐다.
김정은 학생이 낭독한 ‘장학생 선서’에는 노강 선생의 청렴, 긍정의 정신과 청심당여사의 근검, 호학의 정신을 따르고 살리겠다는 항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 취직이 되어 돈을 벌면 장학금을 되갚겠다는 약속’이 눈에 띈다.
이는 장학생에게는 심리적 압박이 될 수도 있지만, 이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해 사회에 환원하라는 취지다.
호경장학회는 노강 박래호 선생의 ‘호(鎬)’자와 부인 고(故) 청심당 심경순 여사의 ‘경(敬)’자를 딴 가족 장학회로 자본금은 부부가 어려운 형편에서 평생을 모아온 예금으로 조성됐으며, 박택열 회장은 노강 선생의 장자로 광주금호중앙중학교 한문교사(철학박사)로 재직하며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박택열 회장은 “호경장학회의 장학금은 금전으로 보기보다 따뜻한 가족애와 인성과 품성을 기르고자 한 새싹의 종자(種子)라 할 수 있을 것이다”며 “내년부터는 더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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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장성선비대학과 선비학당 수료식 가져
2004 장성선비대학과 선비학당 수료식이 15일 장성군청 4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올해 수료자는 모두 149명으로 선비대학 118명, 선비학당에서 31명이 각각 수료패를 전달받았다.
장성선비대학은 지난 95년 군민들의 의식을 개혁과 평생교육의 취지아래 개설된 이래 99년부터 3년과정으로 변경됐으며, 올해까지 총 5회 781명의 수료자를 양성했다.
장성선비학당도 99년 개설된 이래 노강 박래호 선생의 가르침으로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 1일 2시간씩 명심보감, 서예, 사자소학 등을 배우고 있다. 올해 수료자 31명을 포함, 총 2회 90명의 수료자를 배출했다.
김흥식 군수는 “장성선비대학과 선비학당은 전국에서 유일한 사회교육의 장으로 타 시·군의 모범이 되고 있다”며, “장성에서는 행정을 교육으로 이끌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군민의식의 선진화에 대단한 일조를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장성군은 해외선진지견학이나 아카데미등으로 꾸준한 군민의식 성장에 노력하고 있음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한편 선비대학·선비학당 수료식에서는 박춘영 등 유공자에게 표창이 주어졌으며, 최연소 수료자는 선비학당의 최성훈(황룡면 장산리, 23) 학생이고, 최고령자는 임기옥(남면 월곡리, 76) 학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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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글방, 토론의 장 펼치는 학숙으로"
"열린 글방, 토론의 장 펼치는 학숙으로" - 장성군민신문 (jsnews.co.kr)
노강 박래호씨의 '기양정사'를 찾아
필암서원에서 수년째 선비학당을 운영하며 문불여장성의 맥을 잇고 있는 노강 박래호 씨. 빛바랜 한복에 망건쓰고 항상 꼿꼿하게 앉아 있던 그 모습 그대로를 떠올리던 지난 5일, 기자가 찾은 박래호 씨는 다소 초췌한 모습이었다.
예의 망건 대신 그는 ‘굴건’을 쓰고 있었다. 자신을 낮춰 ‘복자리’라고 표현한 그는 예의 깔끔한 모습과는 달리 회색의 빛바랜 굵은 수염이 듬성듬성 돋아 있었다. 부친상의 충격이 컸던 까닭일까.
“조금 이른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왕 찾아왔으니 헛걸음이 안되길 바라네”며 반갑게 맞은 그는 새 터가 필암서원의 고터라고 말문을 열었다.
필암서원은 1590년(선조 23년) 기효간, 변성온, 변이중 등 호남 유생들의 발의와 중앙 조정에 있던 윤두수, 정철 등의 노력으로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됐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624년(인조 24년)에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지었다가 1659년(효종 10년) 효종이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주어 1672년 지금의 필암리 자리로 옮겨졌다.
그는 지난 칠월칠석 장성읍 기산리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새로 지은 집에는 기양정사(岐陽精舍)라 쓰여진 현판이 눈에 띈다. ‘산 남쪽에 지어놓은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수양을 하는 곳’이란 뜻이다.
박 씨는 “오래전부터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필암서원의 고터가 일반 사유지에 묻혀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이곳을 장성 사회에 알리고, 열린 글방으로써 토론의 장을 이어가는 학숙이 되길 바라네”라고 설명했다.
현재 박 씨의 집에는 고문서를 포함해 신구서적 5천여점이 소장돼 있다. 그의 장자인 박택렬(44·현 중앙여고 교사) 씨가 4서3경을 비롯 옛 선현들의 문집을 오랜 세월동안 수집해 놓은 장서들이다. 박래호 씨는 ‘기양정사’가 학문을 토론하는 공론의 장이 되길 바람과 동시에 아들이 학문을 닦을 수 있는 터전으로 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 또한 정년 이후에는 이곳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한다.
조상의 얼이 담긴 박수량 백비도 서원의 접경에 있다. 그는 아곡 박수량 선생의 형인 수온의 16세손이다. 청백리의 표상이 박수량 선생이라면, 임난때 이여송 장군과 양호 등과 협력해 전공을 세운 박상의(수온 선생의 손자) 군사는 천문지리에 통달한 지략가였다.
그는 이곳이 필암서원과 가깝고, 아치실과도 가까워 조상을 섬기고, 살피며 학문을 닦는데 더없는 자리로 만족했다.
그의 소망은 한가지다. “학생들이 방학의 굴레를 벗어나 아무 때나 이곳을 찾고, 주변 사람 한 두명이라도 언제든 학문의 연장선에서 맘껏 찾아 신구서적을 활용해 서재에서 잠자는 책이 아닌 지식과 지혜를 듬뿍 전했으면 좋겠다. 그것을 통해 학문을 수양하고 닦아 그 맥을 잇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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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학자 박래호: 흰고무신 두루마기자락에명분과 정리를 휘어감고 사는 ‘21세기 조선인’
퇴계 이황-하서 김인후 학문의 교량역할-장성 필암서원서 한학 가르쳐
2015. 03.18(수) 15:34 |
노강(蘆江) 박래호(72. 朴來鎬) 선생 |
흰 고무신 두루마리 자락에 명분(名分)과 정리(情理)를 휘어 감고 ‘훠어이 훠어이’ 산길을 걷는 사람. 마음 속 아픔 같은 것 두루마리 자락에 감춰놓고 두리번거림 없이 내닫는 발걸음. 그래서 마파람 소리가 나고 어쩌다 ‘으흠’ 소리 한번 할라치면 온 집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지는 말없음의 권위(權威). 우리가 기억하는 선비는 그 정도다.
한학자 노강(蘆江) 박래호(72. 朴來鎬) 선생. 그가 흰 고무신자락에 두루마리 자락을 휘어감고 걷는 것은 맞다. 그러나 큰기침을 하거나 추상같은 마파람소리를 내지는 않는다. 그래도 그가 어디에 나타나면 모두가 조용히 그를 맞는다. 낮아질 대로 낮아진 자에게 보내는 경의다. 경쟁하고 싶은 마음이 애당초부터 없다. 선하디 선한 얼굴에 꾸밈이라고는 없는 ‘벌거벗음’이 만나는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그의 현재의 직함은 성균관 부관장이자 필암서원의 학장이다. 평생을 한학과 함께 살아 왔고 그 학문적 가치를 ‘인간답게 사는 삶’에 두고 살았다. 사실 그는 평생을 글을 읽고 글을 가르치며 살아왔을 뿐 다른 세상을 기웃거려 본 적이 없다.
그는 거동이 불편하다. 스물 두살 때 모내기를 하다가 허리가 뻣뻣해져 치료를 받았으나 좋아지지 않아 그대로 살았단다.
“하나님이 나에게 준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것을 몸 밖으로 밀어내면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아플 것 같아 그냥 살았습니다.”
대명천지에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명의를 만나보았고 한방치료도 받았다. 현대의학으로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데 허리 말고는 매우 건강하다.
“내가 몸이 아프기 전까지는 운동을 잘했습니다. 마을행사 때 배구나 축구선수로 뛴 적도 있습니다.”
그의 눈은 패기에 찼던 10대 소년으로 되돌아갔다.
선조들이 대대로 살아온 곳은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다. 조선시대 청백리이자 장성 백비(白碑)의 주인공인 박수량(1491~1554) 선생의 고향이다. 박수량이 그의 15대조이고 20대조는 단종의 절신이었던 대호군 박연생이다. 13대조 배우당 박상의는 임진왜란을 정확히 10년 전에 예측했던 선비다. 밀양의 옛지명 이 밀성(密城)이어서 밀성박씨 또는 밀양박씨로 불린다. 그 가운데서도 전북 태인으로 내려와 절의를 지키고 살아온 선조를 두고 있어 태인 박씨로 불리기를 좋아한다.
白碑의 주인공 박수량의 후손
부친 일구(鎰求)도 한학을 많이 공부했다. 노강이 훗날 그의 부친이 남긴 시들을 모아 ‘백헌유고’를 발간했을 만큼 학문이 깊다.
그가 태어난 곳은 담양 대전면이다. 3남 2녀의 장남인 노강은 5~6세 때 부친의 무릎 아래서 추구(推句)와 천자문(千字文)을 익히고 서당에 나가 본격적으로 한학을 배웠다. 10대초에는 용암 임종배 선생에게 소학과 대학을, 이후에는 항암 이정순 선생에 사서를 배웠다. 향암은 당시 대문장가이던 효당 김문옥이 이정순의 편지를 읽고 방문했을 정도로 문장에 밝았는데 서예가 학정 이돈흥의 윗대 할아버지다. 그 인연으로 노강과 학정은 지금도 오랫동안 우의를 나누며 매주 한차례 학정서실 제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다.
15세가 넘어 성암 봉학구 선생에 사서를 끝내고 후반에 휴재 공병주 선생으로부터 손자인 공연웅(광주 향교)과 함께 삼경을 뗐다. 20대 초에는 경남 합천 출신으로 필암서원의 초헌관을 맡았던 추연 권용현 선생을 찾아가 집지제자가 되었다. 집지(執贄)란 스승을 처음 뵐 때에 예폐(禮幣)를 가지고 가서 경의를 표함으로써 제자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만큼 학문적 깊이를 갖춰야 가능한 일이다.
노강은 공부를 마친 뒤 곡성 출신의 청송심씨 집안의 동갑네기 규수 심경순과 결혼한다. 훗날 노강이 호를 지어주었는데 청심당(淸心堂)이다. 마음이 정말로 맑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남편 하나 믿고 가난한 선비 집안으로 시집을 왔는데 이듬해 갑자기 몸이 불편해져 집안 살림이 모두 그의 차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노강이 허리병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청심당도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았다. 삯바느질로 3남 1녀를 모두 대학에 보내 훌륭한 사회인으로 길러냈다.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대의 위선사업도 모두 바느질 품삯으로 한 일이다. 몸이 불편한 남편의 손발노릇에서부터 여비를 챙겨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노년에는 2억원을 쾌척, 장학회를 만들어 장남 택열(교사)에게 운영하도록 했다.
淸心堂의 고향에 심씨문중이 찬양비 세워
그러던 그가 지난 2009년 홀연히 세상을 떠나버렸다. 심씨문중에서는 마을 입구에 ‘장한딸 청심당 심경순 찬양비’를 세웠고, 훗날 노강이 직접 아내의 묘비문을 썼다.
이 대목에서 노강의 눈에 눈물이 흐른다. “참 좋은 사람이 가버렸어.” 그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청심당은 생전 신라박씨총본부로부터 효행상을, 장성군에서 효부상을 받기도 했다. 부인이 먼저 떠나면서 자녀들에게 남편을 부탁했고 자녀들은 어머니의 유언을 지키며 매주 당번을 정해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뒷바라지하고 있다. 아내복과 자녀복을 모두 잘 타고난 복인인 셈이다. 잠시 얘기가 다른 쪽으로 흘렀지만 노강은 결혼 후 처자식을 보살펴야 하기 때문에 화순군 북면 곰실마을에서 6~7년간 훈장을 지냈다. 창녕 조씨들이 자작일촌하는 마을로 5효자를 낸 자존심이 강
한 마을이다.
30대로 접어들어 장성 고향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마침 한학자 변시연(邊時淵) 선생이 각 가문을 대표하는 문장가의 대표적 문집을 정리한 문원(文苑)을 제작중이어서 마무리작업에 참여했다. 변시연 선생이 만든 문원은 73권으로 유림사회에 큰 울림을 주었다.
그는 변시연 선생 곁에서 일하면서 선비의 꼿꼿함을 배웠다. 천금을 준다고 해도 고증이 되지 않으면 비문을 써주지 않았으며 동성동본 결혼을 반대하는 등 선비의 목소리를 냈던 분이다. 김영삼 정부시절 국회 이숙종 의원이 허용입법을 추진하자 변시연과 박래호는 유학자들의 서명을 받아 서울까지 올라갔다. 연합통신과의 인터뷰가 나가자 여론이 들끓어 중단되었다.
이런 일도 있다. 변시연선생과 필암서원에서 함께 일하고 있을 때 일본인 대학교수 일행이 필암서원을 방문하겠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변시연과 박래호는 필암서원에서 일본인을 만날 수 없다고 거절해 돌아가게 했다는 것. 국가침탈에 대한 개인적 항의였던 것이다.
동성동본 결혼 문제는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평민당 박영숙 부총재 이희호 여사 등이 다시 입법을 추진한 바 있다. 이번에는 노강 혼자서 장문의 글을 지어 청와대 국회 언론사 등에 900여 통의 편지를 보낸다. 김대중 대통령이 박석무의원으로부터 호남 유림들의 반대문이라는 보고를 듣고 역시 입법추진을 중단한 바 있다. 글의 내용은 ‘동성동본의 결혼 허용은 금수(禽獸)나 다름없다’는 내용으로 당시 지방신문에도 크게 실린 바 있다.
1980년대 향토문화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된 적이 있다. 전석홍 전남도지사 시절로 노강은 반상진 정채균 이종일 김연수 등과 함께 향토문화운동에 깊숙이 참여했다. 노강을 언론에 처음 보도한 이훈씨, 광주일보부설 향토문화연구소 김정호 소장에 대해 지금도 감사의 마음을 갖고 산다.
필암서원에서 수많은 후학길러
민선자치가 시작된 뒤에는 노강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진다. 김흥식 장성군수는 서원에서 글읽는 소리가 그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필암서원에 학당을 열도록 독려했다. 서원의 운영비와 강사비를 책정해주고 읍·면별로 인원수를 할당해 강의를 받도록 한 것. 주로 40대와 50대가 많고 더러는 20,30대의 젊은 사람들도 찾아왔다. 강의를 받는 사람은 1주일에 한 번이지만 강의하는 사람은 주 4회를 가르쳤다. 김흥식 군수가 3선으로 물러난 뒤에는 주 2회 정도로 줄었지만 필암서원의 학당에서 사서를 공부한 사람은 수백 명에 이른다.
필암서원은 이황의 이기 일물설에 반대하고 이기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장성출신의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선생(1510~1560년)을 기리는 곳으로 사적 242호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다.
필암서원에서는 그보다 먼저 전주대학교 한문교육학과 학생들과 원광대학교, 멀리는 상지대 한의학과 학생들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 중에 강습을 받았다. 노강은 당시 전주대학에서 객원교수 위촉을 받았다. 학기마다 40여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공부하러 왔는데 강사는 언제나 노강이 맡았다. 전국적으로 길러낸 제자가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는 서당을 열거나 고전 번역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도 있는데 대표적인 제자가 순천 낙안읍성에서 이화서당을 운영하는 김대중 원장이다. 노강의 장남인 택열도 중등학교에서 국민윤리를 가르치면서 노강에게 한학을 배워 아버지의 뒤를 밟아가고 있다.
노강은 뿐만 아니라 영호남의 학맥을 잇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선생의 학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성균관 명륜당, 거창향교, 김해향교, 김해시청 등 전국 곳곳에서 초청을 받았다. 전라도에 살면서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대로사의 총무, 대전 남간사의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호남 ‘학문의 다리’ 이어가는 사람
그는 지난 2009년 하서 김인후 선생 탄생 50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안동을 방문한 적이 있다. 하서의 9년 선배인 퇴계의 기념행사 자료를 구하기 위한 발걸음이었다. 도산서원에 들렀을 때 강당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제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이들은 선비정신을 체험하기 위해 모인 기업은행 신입행원들이었다. 내빈은 퇴계 종중의 이승필선생, 안동대 총장, 선비수련원 이사장, 김병일 전 예산기획처장관 등이었다.
노강은 불청객으로 행사에 참여했다가 느닷없이 축사를 제의 받았다. 그는 즉석연설로 온고지신을 예로 들어 경상도의 퇴계, 전라도의 하서의 학문이 온고이며 여러분이 대학에서 배운 신시식을 보태 대한민국의 경제를 일으켜달라고 축사했다.
이를 들었던 김병일 장관이 “500년 전의 영호남의 도덕적 다리 위에 박래호 선생이 새로운 학문적 다리를 놓았다.” 고 동아일보에 기고함으로써 우리나라 유림에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노강은 이 일을 계기로 국학진흥원 자문위원을 맡아 수차례 특강을 했다. 전국 공직자, 교육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조상이기도 한 박수량 선생의 백비정신을 교육하고 체험시키는 일도 계속하고 있다.
“모든 교육의 기본은 인성을 바로잡는 것입니다.”
노강은 “언제 우리나라에서 노인을 걱정했던 일이 있었으냐?” 면서 “부모가 장수하는 것은 큰 자랑이었고 몇 달이라도 더 사시도록 하기위해 논밭을 팔아 병구완을 했다.”면서 오늘의 부모경시 풍토를 한탄했다.
옛날에는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학문을 계속하고 그러지 못한 사람이라도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지으면서 사람의 근본을 익혔다고 말한다. 어른들이 마을 입구의 누각에 올라 옷차림과 언행을 살펴 교육했는데 오늘날은 도덕과 윤리를 등한시함으로써 패륜이 범람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강은 평생 동안 30여책을 번역했다. 면앙정 송순의 시집, 옥봉 백광훈시집, 회재문집, 녹천 고광순 문집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오랫동안 문화에 끼친 공로로 장성 향토문화상을 수상했다.
“일본에 가서 漢詩 목에 걸고 1인시위 하고 싶어”
“저도 고희를 넘어 서서히 인생을 정리해야 할 때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천상병의 시처럼 세상에 소풍 나와 잘 살았으니 큰 미련이나 아쉬움은 없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살아온 이야기, 내가 써온 글을 모아 작은 책이나 한권 내고 싶고 또 하나는 우리 민족을 36년간이나 압제하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아베 정권에 맞서 일본정부 청사 앞에서 ‘1인 시위’ 한번 하고 싶습니다. 한학자로서 당당히 한복을 입고 멋진 한시(漢詩) 한 편 써서 목에 걸고 서 있고 싶습니다.”
노강의 항일정신은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 녹천 고광순 문집’ 등을 읽으면서 가슴에서 울분으로 자랐을 것이다.
선비정신의 핵심적 가치는 ‘義’
선비정신의 핵심적 가치는 뭘까. 세속적 이익을 억제하고 인간의 성품에 뿌리 한 ‘의리’(義)이다. 공자는 “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고 말해 의리와 이익을 대립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선비정신은 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충(忠)이 되기도 한다. 고려말과 조선초 왕조 교체기에 절의를 지킨 정몽주와 새 왕조를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의 충돌은 충절로, 세조의 왕위찬탈에 절의를 지켰던 사육신이나 생육신 등은 선비의 의리정신을 실천한 모범으로 추존되었다.
임진왜란 때 선비들은 의병을 일으켜 항전했고, ‘의리’에 따라 죽는 순의(殉義) 정신을 발휘했고 병자호란 때에도 오랑캐에 대한 화친과 항복을 거부하는 척화론(斥和論)이 의리정신으로 나타났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선비의 품격과 지조를 철저히 각성했다.
노강이 평생 손에서 놓지 않은 책이 궁금하다. 노강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맹자와 서경’을 든다. 글방에서 공부하는 선비이면서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가 바로서야한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노강 박래호 선생. 그는 의(義)든 충(忠)이든, 절의(絶義)이든 모두 ‘사람다운 것’에 다름아니냐며 ‘사람답게 살자.’고 강조한다.
<지형원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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