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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211 연중5주간 금 – 133위 058° 최천여 베드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마르 7,37).
133위 058° ‘하느님의 종’ 최천여 라자로
이름 : 최천여 베드로
출생 : 1812년, 경상도 출생, 천안 목천 소학골 거주
순교 : 1866년 12월 14일, 교수, 공주
최천여 베드로의 본관은 강릉(江陵)으로,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은 ‘문석’(文錫)이다.[1] 그의 부모는 경상도 출신으로 일찍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이후 이곳저곳으로 피신해 다니다가 충청도 목천 소학골 교우촌(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하였고, 최천여 베드로도 이곳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1866년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최종여 라자로는 그의 아우이고, 1868년 경기도 죽산에서 순교한 최제근(崔濟根) 안드레아는 그의 조카이다. 또 1910년에 사제품을 받은 최문식(崔文植, 베드로) 신부는 최천여 베드로의 후손이다.
최천여 베드로와 최종여 라자로 형제는 소학골 교우촌에서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자식들을 열심히 가르치고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교리를 실천하였다. 또 1866년 병인박해 이전까지 페롱(S. Féron, 權 스타니슬라오) 신부와 칼래(N.A.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 등에게 성사를 받는 은총을 누리기도 하였다.[2]
병인박해가 소학골 교우촌을 휩쓴 것은 칼래 신부가 이곳을 떠난 직후인 1866년 11월 14일(음력 10월 8일)이었다.[3] 목천 포교들이 들이닥쳐 최천여 베드로와 최종여 라자로 형제를 비롯하여 이웃에 사는 배문호 베드로, 고의진 요셉 등을 체포하였다. 이들은 곧바로 목천으로 압송되었다가 공주 진영으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66년 12월 14일(음력 11월 8일)이요, 최천여 베드로의 나이는 54세였다.[4]
최천여 베드로와 동료들이 순교한 뒤 그 시신을 강치운이 수습하여 소학골 인근에 안장하였다고 한다.[5]
[註]__________
[1] 최천여의 보명(譜名)은 후손 최병기(崔秉基, 시몬)가 기록한 「최씨 일가 순교자 가계도」(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소장)를 따랐다.
[2] 차기진, 「천주교 성거산 교우촌과 목천 순교사」, 『성거산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2007[2.1], 10-16면.
[3] 『병인치명사적』, 6권, 2면. 이 내용은 전주 대성동(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살던 배경집 베드로가 증언하였다.
[4] 『치명일기』, 정리 번호 509번; 『병인치명사적』, 1권, 62면과 6권, 2면. 『병인치명사적』 1권의 내용은 진산 저귀골(현 충남 금산군 복수면 구례리)에 살던 배 안드레아가 증언한 것이다.
[5] 『병인치명사적』, 6권, 2면. 강치운은 그 뒤 청주 절골(현 충북 청원군 강내면 사곡리)에 살았다. 최천여 베드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무덤은 현재 성거산성지 경내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차기진, 『성거산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2007, 32-35면).
[2.1] 차기진, 『성거산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성거산성지, 2007
<차례> I. 천주교 성거산 교우촌과 목천 순교사 II. 목천(성거산)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관련 자료 |
I. 천주교 성거산 교우촌과 목천 순교사
1. 머리말
성거산(聖居山, 해발 579m)은 천안시 북면 납안리(納安里, 옛 목천현 북면)와 목천읍 송전리(松田里, 옛 목천현 읍내면), 그리고 성거읍 천흥리(天興里, 옛 직산현 이남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이 지역의 교통로는 지금의 납안리 도촌(사리목)에서 입장면 호당리(虎堂里)·시장리(侍壯里)로 넘어가는 우물목고개[井項峴]와 천흥리로 넘어가는 사리목고개, 송전리 만일동(매일골)에서 천흥리로 넘어가는 만일령(晩日嶺, 매일고개)이 있었으며, 지금은 입장의 호당리․시장리에서 성거산 정상에 이르는 도로(우물목고개)가 닦여 있다.
이 성거산 자락에는 일찍부터 천주교의 비밀 신앙 공동체, 즉 교우촌(敎友村)1)이 형성되어 있었다. 또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기간에 성거산 교우촌을 포함하는 목천(木川) 지역에서 여러 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데다가 공주에서 순교한 이들의 시신이 성거산 자락의 ‘소학골 교우촌’(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 일명 씨아골 혹은 쇠약골)에 안장됨으로써 이 교우촌, 넓게는 목천 지역이 순교 사적지로서의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점도 기존의 연구를 통해 어느 정도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전교 자유기 이후 성거산 자락과 목천 지역에 설정되는 공소(公所)2)와 그 변모 상황도 어느 정도 자세히 설명되었다.3) 그러나 위의 연구에는 몇 가지 오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성거산 교우촌이 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역사적 의미를 폭넓게 설명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성거산 자락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언제부터였고, 특히 소학골이 지역 본당의 사목 중심지로 설정된 것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였는지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목천 지역의 순교사는 물론 이와 관련된 순교자들의 행적과 무덤 소재지 등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을 자세히 규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거산 교우촌이 교회사 안에서 지니는 의미를 종합적으로 이해해 보려고 하였다.
2. 천주교 박해기의 성거산 교우촌
1) 교우촌 형성 시기
1784년 말에서 1785년 초까지 천안 여사울(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거주하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에 의해 내포(內浦) 천주교회가 설립된 이후 천주교 신앙은 내포와 그 인근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그러다가 1797년의 정사박해(丁巳迫害)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내포 교회가 큰 타격을 받고, 1811~1813년에도 연이어 박해가 일어나면서4) 내포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인근의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 멀리는 서울과 경상도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내포 신자들의 본격적인 이주는 신유박해 이후로 설명되고 있다.5) 1813년 무렵 결성 덕머리(현 홍성군 은하면 덕실리) 출신인 원(元) 베드로 형제가 박해를 피해 홍주와 연산 옹기점으로 이주해 살다가 박해가 일어나자 진천 ‘질마로’(Tsil maro au district de Tsin tsaon, 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의 질마재로 추정됨)로 피신하였고, 이곳에서 은거해 살다가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압송된 사실도 그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6)
물론 이존창의 활동 초기에 이미 그와 이웃해 살던 천안의 최구두쇠(崔去斗金)와 아들 천명(千明)·억명(億明) 등이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실이 나타난다.7) 그러나 이는 성거산 교우촌사와는 하등 연관이 없다. 왜냐하면 이존창이나 최씨 일가가 성거산 지역에 전교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거산 교우촌사는 초기의 내포 교회사가 아니라 신자들의 이주가 시작되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우촌이 형성되는 과정 안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성거산 자락에서 첫 교우촌으로 형성된 마을은 ‘목천 서들골’(현 천안시 목천읍 송전리의 西德洞, 일명 서덜골)로 알려져 왔고, 그 시기는 1830년대 초로 추정되어 왔다.8) 왜냐하면 다음의 기록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의 백부 최영렬(崔榮說)이 1827년 무렵 고향 다락골(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의 다래골)을 떠나 서울 낙동(駱洞)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목천 서들골로 이주한 것이 대략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서울 낙동에서) 이와 같이 파산하고 수십 명 식솔이 졸지에 방향 없이 나서니……삼형제분이 상의한 끝에 각각 교우촌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이때 맏형 되는 영렬 씨는 목천 서들골로, 둘째 되는 영겸(榮謙) 씨는 용인 한덕골(현 용인시 이동면 묵리)로, 막내인 영눌(榮訥, 즉 최양업 신부의 부친 崔京煥 프란치스코) 씨는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안양시 만안구 안양 9동의 담배촌)로 가 우접하시게 되었다.9)
최영렬과 영겸․영눌 형제가 서울을 떠난 것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최영렬이 목천 서들골로 이주하기 이전에 이미 그곳에는 또 다른 신자들에 의해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고, 최영렬이 새로운 거처를 이곳으로 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서들골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의 이주기에 신자 가족들이 하나둘 모여 들여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정은 다음의 소학골 관련 기록에 의해서도 뒷받침되고 있다.
서들골과 이웃해 있으면서 그와 함께 성거산 자락의 대표적인 교우촌으로 꼽혀 온 것은 ‘목천 소학골’이다.10) 이 소학골에는 일찍부터 천주교 신자들이 정착한 것이 분명한데, 이러한 사실은 다음에 인용한 '기해․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의 기록을 통해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소학골 내용은 1884년 4월 24일에 개정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법정에 출두하여 증언한 오(吳) 바실리오의 진술에 들어 있다.
제2조목(증인의 성명과 태생, 입교와 신앙생활 등을 확인함)대로 물은 즉, 답 왈 죄인의 성은 오씨요 본명은 바실리오요, 태생은 목천 씨아골(즉 소학골)이요, 부친은 오 암브로시오이고 모친은 황 루치아요. 죄인의 나이는 임신생(1812년생) 73세요. 태중(胎中) 교우로서 17세에 오 페루페투아와 혼배하여 양지 은이에서 살다가 20여 세에 류 신부(즉 중국인 劉方濟 신부)께 영세하고, 여러 번 이사한 후에 아내는 정축년에 죽으니 홀로 되어 아들에게 의지하여 공주 땅에서 사니 가세가 극빈하외다.11)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오 바실리오는 1812년 목천 소학골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따라서 소학골 교우촌은 적어도 그 이전에, 공동체 형성 기간을 고려한다면 1800년대 초에 이미 신자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1817년 10월 해미에서 순교한 민(베드로) 첨지도 결성 태생으로 목천 쇠악골(즉 소학골)에서 살다가 배나다리(현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로 이주해 살던 중에 체포되었다고 하므로,12) 그가 소학골 교우촌에 살던 시기는 적어도 1817년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설명하겠지만, 면천 배관겸(프란치스코)의 가족, 즉 1866년의 순교자 배문호(베드로)의 집안이 소학골로 이주해 온 것도 신유박해 이후였다. 따라서 서들골 교우촌의 형성 시기도 이 소학골의 형성 시기와 거의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학골과 서들골 등 성거산 자락의 마을들은 1830년대가 아니라 1800년대 초, 즉 신유박해 이후의 신자 이주기에 천주교 신자 가족이 하나둘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으로 형성되었다. 또 이들 교우촌은 마을을 형성한 구성원에서 볼 때는 신자 공동체형이었고, 형태상으로는 정주형 교우촌이었다. 특히 후자의 성격은 전교 자유기 이후까지도 변함없이 신앙 공동체가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잘 설명해 준다.13) 다만, 기록상으로는 이곳에 정착한 신자들 중의 일부에 대해서만 그 출신지를 알 수 있을 뿐인데, 이는 다음에서 차례로 설명할 것이다.
한편 박해 기록을 살펴보면 성거산 교우촌 외에도 목천지역 이곳저곳에 신자들이 거주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목천 장자동(현 천안시 목천읍 신계리의 신흥리), 목천 복구정(현 천안시 북면 연춘리), 목천 공심리(현 천안시 병천면 매성리의 공시미), 목천 북면 베장골(현 천안시 북면 양곡리) 등에서도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기 때문이다.14) 그러나 이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비신자들 사이에서 비밀리에 생활하고 있던 혼거형 공동체요 전이형 교우촌으로, 신분을 숨기고 살던 신자들이 체포됨으로써 그 실체가 드러난 경우로 볼 수 있다. 위에 열거한 마을의 신자들은 좀 더 늦은 시기에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사람들인 것 같다.
2) 사목 중심지 소학골 교우촌
성거산 교우촌의 이름이 다시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직후였다. 최양업 신부의 둘째 동생 최선정(崔善鼎, 안드레아)이 목천 서들골의 백부 최영렬의 집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성장하였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때 최 신부의 첫째 동생 최의정(崔義鼎, 야고보)은 겨우 열세 살(1827년생)로, 부친 최경환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가 모두 순교하면서 어린 동생들의 양육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모두 친척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15) 한편 1839년 10월 말경(음력) 전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송인원(야고보)은 목천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전주 체포자의 밀고로 그곳에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타나는데,16) 그가 살던 목천의 교우촌도 서들골이나 소학골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이후 성거산 교우촌은 오랫동안 교회사에서 그 이름을 감추게 된다. 그 이유는 외딴 산간 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비밀 공동체로 유지된 때문일 것이다.
1845년 한국인 사제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한 이후 성거산 교우촌와 관련을 맺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로는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신부와 최양업 신부, 메스트르(J. A. Maistre, 李 요셉) 신부, 페롱(S. Féron, 權 스타니슬라오) 신부, 그리고 프티니콜라(M. A. Petitnicolas, 朴德老 미카엘) 신부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최양업 신부는 첫 번째 사목 순방을 마친 1850년 7월부터 1852년 여름까지 2년 동안 진천의 동골(진천군 백곡면 용덕리 혹은 진천읍 문봉리)을 사목 중심지로 삼고 전국 다섯 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순방했는데,17) 이 기간 동안 인근에 있던 ‘진천 배티’(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는 물론 성거산 교우촌도 방문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다블뤼 신부는 1850년에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J. J. Ferréol, 高 요한) 주교의 명에 따라 조선교구 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임하다가 그해 10월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신학교 교사로 사용할 집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1851년 말 신학교 전담 사제로 임명된 후 1853년 여름까지 배티 교우촌에서 정주형(定住形) 신학교를 운영하였다.18) 다블뤼 신부의 뒤를 이어 1853년 여름부터는 최양업 신부가 배티의 교구 신학교를 맡아 신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인근의 교우촌을 순방하다가 이듬해 봄에 3명의 신학생을 말레이시아의 페낭(Penang, 彼南) 신학교로 보내게 된다.19) 최 신부는 이후 1856년 여름까지 3년 동안 배티와 인근의 동골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다가 광주 소리울(미상)로 거처를 이전하는데,20) 그때까지 ‘진천 삼박골’(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과 이웃한 성거산의 소학골·서들골 교우촌도 순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메스트르 신부는 1852년 8월에 입국한 뒤 조선어를 배우자마자 ‘성모승천구역’으로 불리는 지역, 즉 충청도 해안에서 경상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덕산의 황모실(지금의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활동하다가 1857년 12월 20일에 선종하여 황모실에 묻혔다. 그리고 메스트르 신부가 선종한 뒤에는 페롱 신부가 이 성모승천구역을 이어받게 된다.21) 아마도 메스트르 신부는 황모실에 있으면서 성거산 교우촌도 순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다음에 설명하는 것과 같이 메스트르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을 인수한 페롱 신부가 훗날 성거산과 배티 교우촌을 순방한 사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페롱 신부는 1857년 12월 메스트르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을 인수받은 다음 해인 1858년의 봄 판공 때 성거산 교우촌을 방문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제주 표류인으로 홍콩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이 배티 교우촌을 찾아갔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배티에서 40리 떨어져 있던 지역에 있는’ 페롱 신부를 찾아가 만났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최양업 신부도 같은 지역 안에 있는 다른 교우촌에서 머물고 있었다.22) 당시 페롱 신부는 배티 출신의 장 시몬 회장을 복사로 두고 있었으며, 서천 산막골(현 충남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을 사목 중심지로 정하고 충청도 해안 지역에서 경상도 서부 지역까지 광활한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다.23)
1858년 10월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정하고, 충청도 북부와 경상도․강원도․경기도 일부 지역을 순방하였다. 성거산 교우촌도 이때 그 사목 관할 구역 안에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어 프티니콜라 신부는 1859~1860년의 경신박해(庚申迫害)로 고초를 당하고는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1861년 10월 배론(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의 舟論)의 새 교구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 교사로 임명되었다.24)
<표 1> 성거산 교우촌 순방 사제 추정 현황(1851~1866년)
① 1851년 말~1861년 10월
사제명 | 시 기 | 소임 및 사목 관할 구역 | 사목 중심지 |
최양업 | 1850년 7월~1852년 여름 | 전국 다섯 개 도 순방 | 진천 동골 |
1853년 여름~1856년 여름 | 교구 신학교 및 전국 순방 | 진천 배티․동골 | |
다블뤼 | 1850년 10월경~1853년 여름 | 교구 신학교 전담 | 진천 배티 |
메스트르 | 1857년 이전(추정) | 충청도, 경상도(추정) | 덕산 황모실 |
페롱 | 1858년 | 충청도에서 경상도 서북부까지 | 서천 산막골 |
프티니콜라 | 1858년 10월~1860년 5월경 | 충청․경상․강원․경기 일부 | 진천 배티 |
② 1861년 10월~1866년 10월
사제명 | 시 기 | 소임 및 사목 관할 구역 | 사목 중심지 |
조안노 | 1861년 10월 이후(추정) | 공주와 인근 지역(추정) | 공주 둠벙이 |
페롱 | 1862년 9월 이후 | 경상도 남부와 충청도 일부 | 배티, 기타 |
칼래 | 1863년 4월 | 경기․충청 일부, 경상도 서부 | 목천 소학골 |
1864년 여름~1866년 10월 | 경상도와 충청․경기 일부 |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주교는 1861년 4월에 입국한 선교사 4명이 조선어의 초보 학습을 마치자, 그해 10월 전국을 8개 지역 본당으로 구분하면서 각각의 선교사들에게 사목 관할 구역을 정해 주었다.25) 이때 충청도 지역에서는 모두 4개 공소가 본당 사목 중심지로 설정되는데,26) ‘성모 영보 구역’으로 이름이 붙여진 공주와 그 인근 지역은 공주 둠벙이(현 공주시 신풍면 조평리)에 있던 조안노(P. Joanno, 吳 베드로) 신부가 담당하였다. 이 지역은 페롱 신부가 맡고 있던 지역의 일부로, 조안노 신부는 이후 둠벙이와 서천 산막골을 오가면서 사목 순방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성거산 교우촌도 조안노 신부의 방문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862년 이후에는 페롱 신부가 성거산과 배티 교우촌의 사목을 담당했던 것이 확실하다. 실제로 페롱 신부는 1862년 9월에 다시 배티 교우촌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얼마 동안 거처했는데,27) 그 이유는 베르뇌 주교가 병으로 허약해진 페롱 신부로 하여금 기존의 넓은 지역에서 훨씬 축소된 일부 지역과 최양업 신부의 선종(1861년 6월 15일)으로 전담 사제가 공석이 된 일부 지역(충청도 일부 지역으로 추정됨)을 아울러 맡도록 했기 때문이다.28) 같은 해 10월에 그는 배티 이웃인 동골 교우촌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하기도 했다.29)
1863년 4월 13일 조안노 신부가 병으로 선종하자, 베르뇌 주교는 경기도 손골(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경기도 일부 지역에서 경상도 서부 지역까지 순방해 오던 칼래(N. A. Calais, 姜 니콜라오) 신부로 하여금 조안노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을 겸해서 맡도록 하였다. 칼래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이 경기도․충청도 일부 지역, 그리고 경상도 서부 지역까지 넓게 확대된 것이다.30)
1864년 여름에 베르뇌 주교는 다시 한번 사목 관할 구역을 조정하였다. 이때 오메트르(P. Aumaître, 吳 베드로) 신부가 경기도 서남부와 충청도 일부 지역을,31) 페롱 신부가 칼래 신부의 관할 지역 일부였던 충청도 공주와 인근 지역, 즉 이전에 페롱 신부 자신이 담당했었고 후에는 조안노 신부가 담당했던 지역을 다시 맡게 되었다. 그리고 칼래 신부는 페롱 신부가 사목했던 험난한 지역, 즉 경상도를 비롯하여 충청도․경기도 일부 등 아주 넓은 지역을 담당해야만 했다.32) 이를 전후해서 성거산 교우촌과 진천의 배티․삼박골 교우촌(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은 칼래 신부의 사목 관할 아래 들어간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칼래 신부는 이 무렵에 자신의 거처를 손골에서 성거산 소학골 교우촌으로 이전하였으니, 이후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소학골은 칼래 신부의 본당 사목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의 소학골 교우촌에 대해 칼래 신부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저는 제 담당 지역 사목 방문을 마치고 나면 여름 한 철에는 서울에서 220리 떨어진 충청도 목천현 소학골 마을에서 쉬었습니다. 소학골은 독수리 둥지처럼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매우 좋은 피신처입니다. 따라서 마치 들짐승처럼 사방에서 쫓기는 선교사가 평화로운 이곳에서만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누구에게 들킬 염려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여기저기 절경을 찾아 눈앞에 듬뿍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또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33)
성거산 자락에 위치해 있는 소학골 교우촌은 이와 같이 그 자체로 선교사와 신자들의 피신처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칼래 신부는 이후 소학골을 사목 중심지로 삼고 경기도에서 충청도, 경상도 전역에 산재해 있는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이상의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1840년대 후반부터 성거산 교우촌은 이웃한 배티 교우촌과 함께 최양업․다블뤼․메스트르․페롱․프티니콜라 신부의 사목 순방을 받아왔다. 그러다가 지역 본당이 설립되는 1861년 10월 이후로는 조안노․페롱․칼래 신부 등이 이들 교우촌을 방문하고 성사를 집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거산의 소학골 교우촌은 1864년 여름 이래 칼래 신부의 사목 중심지, 즉 경상도와 충청도․경기도 일부 지역을 사목 관할로 하는 본당 중심지로 선정되어 병인박해 때까지 안전한 피신처요 여름 휴식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병인박해기의 목천 순교사
1) 병인박해 발생과 칼래 신부의 행적
병인박해(丙寅迫害)34)는 1866년 2월 23일(음력 1월 9일) 서울의 베르뇌 주교가 체포되면서 시작되었고, 충청도에서는 1866년 3월 11일(음력 1월 25일) 거더리(현 당진시 합덕읍 신리 105-2 도촌)의 손(孫)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처음으로 체포되었다. 이어 충청도 관찰사가 있던 공주, 병영이 있던 청주, 진영이 있던 홍주와 해미 등지에서 포교와 군사들이 파견되어 충청도 전역을 염탐하고 다니면서 신자들을 체포하였다.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성거산과 배티 교우촌은 아직 신앙 공동체의 존재가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비교적 안전했던 것 같다. 반면에 성거산과 배티에서 멀지 않은 진천 지장골(현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에서는 병인박해 초기, 즉 1866년 1월(양력 3월)에 오반지(吳盤池, 바오로)가 체포되어 2월 11일(양력 3월 27일) 청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35) 칼래 신부와 페롱 신부도 이후 오반지의 순교 행적을 전해 듣고는 이를 기록으로 남기는데,36) 그 시기는 다음에 설명한 것과 같이 그들이 소학골 교우촌에 함께 은신해 있을 때였을 것이다.
그에 앞서 소학골에 거처하던 칼래 신부는 1865년에 경상도 남부에서 순방을 시작하여 중부 지역으로 올라왔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는 역으로 중부 지역에서 시작하여 남부 지역의 교우촌을 순방하기로 하고 소학골을 출발하였다. 왜냐하면 1865년 10월 초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칼래 신부를 방문하고, 역으로 교우촌을 순방하도록 충고해 주었기 때문이다.37) 칼래 신부가 이처럼 프티니콜라 신부의 조언을 수용한 결과,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남부 지방의 교우촌을 순방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체포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칼래 신부가 베르뇌 주교의 체포 소식을 접한 것은 두 번째 교우촌을 순방할 때였다.38)
칼래 신부는 세 번째 교우촌에 가서야 순방을 중단하였다. 그리고 3월 초부터는 문경 한실(현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 교우촌과 문경․함창․연풍, 한실 인근의 바위굴 등을 전전하면서 은거하다가 5월 10일경에는 소학골을 마지막 목적지로 정하고, 한실을 출발하였다. 그런 다음 연풍을 거쳐 이틀에 200리를 걸은 끝에 5월 12일경 배티의 삼박골 교우촌에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세례와 성사를 집전하면서 10여 일을 은거해 있다가 5월 말에는 마침내 소학골에 도착하여 최대한 성대하게 미사를 집전했는데, 그의 서한에서 이에 관한 기록을 발췌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열심한 교우들이 눈물을 쏟았지만 저는 한실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갈 길은 줄잡아도 200리나 되는데, 대낮에 외교인 마을들을 지나가야 할 뿐 아니라, 외교인들 주막에서 먹고 자야만 했습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제가 포졸들에게 붙잡혔다가 간신히 달아났던 연풍읍을 지나가야만 했으니 실로 어려운 여행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번 두드러지게 손을 써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주막에서 먹고 자면서 낮에만 걸어 이틀에 200리를 갔습니다. 주막에서 한 방에 열 명이 잤는데, 방이 어찌나 좁던지 서로 바짝 붙어서 잤습니다. 저는 진천현에 속한 삼박골 교우촌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판공성사를 주고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교회를 조금도 멀리하지 않은 어른 몇 분에게 세례를 집전했습니다. 그리고 5월 말경 마침내 소학골 여름 휴식처에 이르러 최대한 성대하게 미사를 집전했습니다.39)
당시 조선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다만, 칼래 신부와 공주 진밭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있던 리델 신부, 충청도 북부 지역을 순방하던 페롱 신부는 박해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리델과 페롱 신부는 먼저 공주 버시니(현 공주시 신풍면 선학리) 교우촌에서 멀지 않은 한 과부댁에서 상봉하였고, 이곳에서 소학골의 칼래 신부 소식을 접하였다. 페롱 신부는 이때 세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장상(長上)으로서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키기로 작정하고, 7월 1일에는 아산 용당리(현 아산시 선장면 佳山里)에서 신자들이 가져온 배에 그를 태웠다.40)
페롱 신부는 리델 신부의 탈출 이후 칼래 신부가 있던 소학골 교우촌으로 와서 함께 생활했는데, 두 신부가 청주 순교자 오반지의 행적에 대해 듣게 된 것은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칼래와 페롱 신부는 1866년 10월 11일(혹은 12일, 음력 9월 3․4일) 조선을 떠나 10월 26일 산동 반도의 체푸(芝罘)에 도착하였다.41) 이로써 소학골 교우촌이 갖고 있던 본당 사목 중심지로서의 의미는 소멸되었다.
2) 목천(성거산) 출신 순교자의 탄생
소학골과 서들골 교우촌은 이처럼 칼래 신부와 페롱 신부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안전한 피신처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한 달 뒤인 1866년 10월(음력)에는 소학골 교우촌이 발각되어 포졸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쳤고, 10월 8일(양력 11월 14일)에는 배문호(베드로)와 고 요셉이, 이틀 뒤인 10일에는 최천여(베드로)·종여(나자로) 형제, 채 서방 며느리42) 등 5명이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목천현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다시 공주 진영(즉 충청도 우영)으로 압송되어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뒤 11월 8일(양력 12월 14일)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43) 이 내용에서 볼 때, 소학골은 배씨와 고씨, 최씨, 채씨 등이 신앙 공동체를 이룬 교우촌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이 무렵 목천 흑성산 자락의 장자동에서도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1866년 말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서완순(徐琓淳, 스테파노)과 청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그의 아들 서상욱(徐相彧, 프란치스코) 등 2명이 그들이다.44) 따라서 박해 초기인 병인년에 성거산 소학골과 이웃 장자동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이들은 모두 7명이 된다.
<표 2> 병인년의 소학골·장자동 출신 순교자
성 명 | 출생지 | 거주지 | 순교일(나이) | 순교지(형식) | 기 타 |
배문호 베드로 | 목천 소학골(쇠약골) | 1866.11.8(24세) | 공주(교수) | 배화첨(베드로) 회장의 장손 | |
최천여 베드로 | 경상도 | 1866.11.8(45세) | 최종여(라자로)의 형 | ||
최종여 라자로 | 1866.11.8(42세) | 최천여(베드로)의 동생 | |||
고 요셉 | 1866.11.8 | ||||
채서방 며느리 | 1866.11.8 | ||||
서완순 스테파노 | 강원도 | 목천 장자동 | 1866.말(44세) | 서상욱(프란치스코)의 부친 | |
서상욱 프란치스코 | 1866.12.(약 20세) | 청주 | 서완순(스테파노)의 차남 |
이처럼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소학골과 인근의 서들골 교우촌, 장자동에 거주하고 있던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학골 교우촌에는 여전히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병인년의 박해가 정묘․무진년으로 이어지면서 소학골은 물론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도 계속해서 체포되었다. 다음의 <표 3>에 정리한 것과 같이 정묘년 이후 소학골과 인근 지역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수는 모두 8명에 달한다.
<표 3> 정묘년 이후의 목천(성거산) 출신 순교자
성 명 | 출생지 | 거주지 | 순교일(나이) | 순교지 (형식) | 기 타 |
배 오로 | 목천 소학골 | 1867.6.19(61세) | 서울 (교수) | 배문호(베드로)와의 관계는 미상 | |
김성회 바오로 | 진천 | 목천 복구정 | 1868.4(45세) | 서울 (교수) | 김 사도 요한의 형 |
김 사도요한 | 진천 | 목천 복구정 | 1868.4(33세) | 서울 (교수) | 페낭 신학교 유학생, 김성회의 동생 |
배 안드레아 | 목천 소학골 | 1866.6.23(35세) | 서울 (교수) | 1867년 서울 순교자 배 바오로의 아들 | |
배화첨 베드로 | 면천 | 목천 소학골 | 1868.5.17(56세?) | 서울 (교수) | 회장, 1801년 순교자 배관겸(프란치스코)의 손자. 배문호(베드로)의 조부 |
조덕삼 시몬 | 목천 공심리 | 1870?(38세) | 서울 (교수) | 1868년의 죽산 순교자 조치경(타데오)의 형. 1866년의 청주 순교자 조대여(방그라시오)의 사촌 | |
김 도미니코 | 북면 베장골 | 1869. | 죽산 | 김인원과 함께 순교 | |
김인원 | 공주 | 북면 베장골 | 1869. | 죽산 |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박해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지만, 이들 가운데는 포교들의 추적을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서들골에서 안성 성남을 거쳐 진천 퉁점(현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으로 이주해 살던 윤 바오로는 1867년에 체포되어 청주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 다니던 최 안드레아는 죽산에서 체포되어 1868년에 순교하였다. 또 면천 가새울 출신으로 일찍이 목천 서들골로 이주해 살던 이씨 집안의 이 요한, 이 베드로, 이 프란치스코 3대는 그 후 전라도, 경기도 손골, 용인 남성골 등을 거쳐 아산 쇠재(현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의 金城)에 정착하였다가 1871년에 체포되어 서울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45)
장자동에 살던 서씨 집안은 서완순 부자가 체포된 뒤 다른 곳으로 이주하였으나, 그의 동생 서윤순(徐閏淳, 아우구스티노)과 장남 서상빈(徐相彬, 베드로)은 훗날 체포되어 순교했으며, 서윤순의 아내 손 루치아는 산속의 굴에서 살다가 사망하였다.46) 이 밖에도 진천 배티의 성재(현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순교자들은 ‘목천에서 고개 너머 안성 땅 잿님골로 이주해 살다가 순교한 이들’이라는 전승이 있다.47)
<표 4> 목천 출신 중 타지역 이주 순교자
성 명 | 거주지 | 이주지 | 순교일(나이) | 순교지(형식) | 기 타 |
윤 바오로 | 목천 서들골 | 진천 퉁점 | 1867 | 청주(교수) | |
최 안드레아 | 목천 소학골 | 1868. 7 (21세) | 죽산(교수) | 1866년의 공주 순교자 최종여의 아들 | |
이 요한 | 목천 서들골 | 아산 쇠재 | 1871. 3. 19 | 서울(교수) | 3대 순교, 이 베드로의 부친 |
이 베드로 | 목천 서들골 | 아산 쇠재 | 1871. 3. 19 | 서울(교수) | 3대 순교, 이 요한의 아들 |
이 프란치스코 | 목천 서들골 | 아산 쇠재 | 1871. 3. 19 | 서울(교수) | 3대 순교, 이 요한의 손자 |
서 아우구스티노 | 목천 장자동 | 타지 피신 | 1871(45세) | 서울(교수) | 1866년의 순교자 서완순(스테파노)의 동생 |
서 베드로 | 목천 장자동 | 타지 피신 | ? (26세) | 서울(교수) | 1866년 순교자 서완순(스테파노)의 장남 |
김 아가타 | 목천 | 홍산 방고개 | ? (36세) | (교수) | 조카와 함께 체포됨 |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성거산 교우촌과 인근 지역에 거주하다가 병인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이들은 모두 7명이고, 정묘년 이후에 체포되어 순교한 이들은 8명이었다. 그중에서 소학골 거주자가 8명으로 가장 많고, 장자동 거주자는 2명, 복구정 거주자는 2명, 베장골 거주자는 2명, 공심리 거주자는 1명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서들골·소학골·장자동 등지에 거주하다가 타지로 피신한 신자들 중에서도 8명이 정묘년 이후에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성거산 교우촌을 포함하는 박해기의 목천 순교사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은 초기에 체포되어 1866년 11월 8일(양력 12월 14일) 공주에서 순교한 배문호와 최천여·종여 형제, 고 요셉 등이다. 이들은 그 순교 행적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순교 후 교우들이 시신을 찾아 안장하였다는 기록도 전하기 때문이다.
4. 소학골 출신의 주요 순교자 이력
1) 배문호(베드로)
배문호의 본은 성주(星州)48)로, 1868년 5월 17일 서울에서 순교한 배화첨(베드로) 회장의 장손이다. 그런데 배화첨 회장은 “본디 충청도 면천 사람이라. 그 조부가 신유년(1801년)에 청주에서 치명하고”49)라는 사실이 나온다. 따라서 배 회장의 조부는 1800년 1월 7일(음력 1799년 12월 13일) 청주에서 약 60세로 순교하는 면천 출신의 배관겸(프란치스코)이 거의 확실하다. 배관겸은 당진의 진목(현 충남 당진시 석문면 장항리) 태생으로 일찍이 신앙을 받아들였으며,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서산을 거쳐 면천의 양제(현 충남 당진시 순성면 양유리)에 정착하였고, 이곳에서 1798년에 체포되었다.50) 현재 교황청 시성성에 의해 ‘하느님의 종’으로 인가되고 시복을 위한 법정이 개정되어 재판이 진행 중이다.
교회 순교록에서 배문호의 행적과 관련 내용들을 발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치명일기', 정리 번호 511번
- 배문호(베드로) : 목천 소학골 거주, 공주 치명(교수), 1866년 11월 8일, 24세.
② '병인치명사적', 1권 19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6번(증인 : 용인 검은정이51) 거주하는 배명중의 딸 막달레나)
- 배화첨(베드로) : 면천 사람, 목천 소학동 거주, 서울 치명(교수), 1868년 5월 17일, 56세(?)
- 배명중(바오로) : 배화첨의 차남, 목천 소학동 출신, 공주 질울 이주, 서울 좌포도청 치명(교수), 1878년(원문에는 1868년) 5월 23일, 54세
- 배문호 : 배화첨의 손자, 목천 소학동 거주, 공주 치명
- 배문보(요한) : 배명중의 아들, 목천 소학동 출신, 공주 질울 이주, 서울 좌포도청 치명(교수), 1878년(원문에는 1868년) 5월 23일, 19세
③ '병인치명사적', 1권 27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20번(목격자 : 배 안드레아)
- 배 회장 부자(즉 배명중과 배문보) : 공주 질울 거주, 서울 포청 옥사, 1878년.
④ '병인치명사적', 1권 30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24번(목격자 : 전주 대성동 거주 배경집 베드로(증언자 안드레아의 삼촌), 증언자 : 진산 저귀골 거주 배 안드레아)52)
- 배 바오로(목격자의 부친, 증언자의 조부) : 목천 소학동 거주, 청주 재수(在囚), 서울 치명, 1867년(혹 1868년) 6월 19일, 62세
- 배 안드레아(배 바오로의 아들) : 목천 소학동, 서울 치명, 1868년 6월 23일, 35세.
⑤'병인치명사적', 1권 31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24번(목격자 : 은진 거주 박도일, 증언자 : 진산 저귀골 거주 배 안드레아)
- 배 바오로(즉 배명중 회장) : 공주 질울, 서울 치명, 1878년 4월 10일, 50여 세.
- 배문보 : 공주 질울, 부친 바오로와 함께 서울 치명.
⑥ '병인치명사적', 1권 60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48번(목격자 : 박 체칠리아(증언자 마르코의 모친), 증언자 : 고산 한대골 배 마르코)
- 배 바오로(증언자의 부친) : 목천 거주, 청주 3일 재수, 서울 치명, 1867년 6월 19일, 61세
⑦ '병인치명사적', 1권 62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52번(목격자 : 고 배 안드레아(증언자 안드레아의 삼촌), 증언자 : 진산 저귀골 거주 배 안드레아)
- 배 베드로(즉 배문호) : 목천 거주, 공주 치명
⑧ '병인치명사적', 6권 2쪽(전언자 : 전주 대성리 거주 배경집 베드로)
- 배문호 : 목천 소학골 거주, 순교 원의 간직해 옴, 동정 부부 생활, 강 신부(즉 칼래 신부)에게 고신극기하는 법을 배움, 1866년 10월 8일 고 요셉과 함께 체포되어 목천 문초, 공주 이수 후 교수 치명, 1866년 11월 8일, 24세. 강치운(청주 절골 거주)이 네 사람(배문호 베드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 요셉)의 시체를 찾아 묻음.
배씨 집안의 신앙은 1800년의 순교자 배관겸에 의해 당진 진목에서, 적어도 1791년 이전에 수용되었음이 확실하다. 그리고 면천 양제에 살던 그의 가족은 배관겸이 1798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뒤 어느 시기에 성거산 소학골로 이주했을 것이다. 다만, 1797년 이후 2~3년 동안 지속된 충청도의 정사박해 때는 신자들의 이주 사실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볼 때, 그 이주 시기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로 추정된다. 다시 말해 신유박해가 시작되자, 배씨 가족들도 이를 피해 면천을 떠나 소학골로 이주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순교록에 나오는 배씨 집안 사람들 중에서 가장 어른은 배관겸(1800년 순교 당시 약 60세)이고, 다음으로는 1868년의 순교자요 그의 손자인 배화첨(베드로)이다. 또 소학골 순교사가 시작되었을 때는 배화첨이 가장 어른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1866년의 공주 순교자 배문호(베드로)가 그의 장손으로 나온다. 배화첨의 맏아들, 즉 배문호의 부친 이름은 순교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도 1> 소학골 성주 배씨 집안의 순교 계보
다음으로 배명중(바오로)과 배문보(요한) 부자는 배화첨의 차남(즉 배문호의 숙부)과 손자로, 소학골 교우촌에서 거주하다가 홍주, 직산을 거쳐 공주 질울(현 공주시 정안면 고성리의 基洞, 일명 질우리)로 이주해 살았으며, 부자가 함께 체포되어 1878년 서울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혹은 옥사)하였다. 문호 개방 이후인 1876년에 입국한 드게트(Deguette, 崔東鎭)53) 신부의 추적 과정에서 체포된 것이다. 배명중은 1878년의 '우포도청등록(右捕盜廳謄錄)'에 나오는 배원성(裵元成)이고, 배문보는 같은 기록에 나오는 배일룡(裵一龍)이 거의 확실하다.54)
한편 이들 순교자와는 별도로 1867년(혹은 1868년) 목천 소학골에서 살다가 청주 포교에게 체포되고, 청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된 후에 순교한 배 바오로(순교 당시 61~62세)와 배 안드레아(순교 당시 35세) 부자가 나온다. 앞의 증언 ④․⑥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이들 부자는 질울 거주자 배명중(바오로)·배문보(요한) 부자와는 또 다른 배씨 집안 순교자인데, 순교 당시의 나이로 볼 때 배 바오로는 배화첨과 배 안드레아는 배명중과 같은 항렬로 보인다. 그리고 목격자인 전주의 배경집(베드로)과 증언자인 고산의 배 마르코는 배 바오로의 아들이었고, 증언자인 진산의 배 안드레아는 배 바오로의 손자였다. 또 증언 ⑦에 나오는 것처럼 진산의 배 안드레아에게는 또 다른 삼촌 배 안드레아가 있었다. 이상 교회 순교록을 통해서 살펴본 성주 배씨 집안이 순교 계보를 정리해 보면 위의 <도 1>과 같다.
1866년의 순교자 배문호(베드로)의 후손이라고 하는 성주 배씨 집안에서는 가승에 있는 배시경(裵時慶)이 순교자 배문호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음의 <도 2>에서와 같이 가승에 있는 배정준(裵庭俊)이 순교자 배화첨(베드로)의 보명이 되며, 순교자 배명중(바오로)의 보명은 배태현(裵泰賢)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도 2> 배문호 집안의 가승과 순교자55)
2) 최천여(베드로)와 최종여(라자로) 형제
최천여와 최종여 형제 순교자 집안의 전승에 따르면, 이 형제의 본은 강릉(江陵)56)이었다. 교회 순교록에서 이 형제 순교자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들을 발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치명일기' 정리 번호 509~510번
- 최천여(베드로) : 목천 소학골 거주, 공주 치명(교수), 1866년 11월 8일, 55세.
- 최종여(라자로, 최천여의 동생) : 목천 소학골 거주, 공주 치명(교수), 1866년 11월 8일, 42세.
② '치명일기', 정리 번호 420번
- 최 안드레아(최종여 라자로의 아들) : 목천 소학골 거주, 죽산 치명, 1868년 7월, 21세.
③ '병인치명사적', 1권 62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52번(목격자 : 고 배 안드레아(증언자 안드레아의 삼촌), 증언자 : 진산 저귀골 거주 배 안드레아)
- 최 베드로 : 목천 거주, 공주 치명
- 최 라자로 : 목천 거주, 공주 치명
④ '병인치명사적', 6권 2쪽(전언자 : 전주 대성리 거주 배경집 베드로)
- 최천여 베드로 : 목천 소학골 거주, 1866년 10월 10일 동생과 함께 체포되어 목천 문초, 공주 이수 후 교수 치명, 1866년 11월 8일. 강치운(청주 절골 거주)이 네 사람(배문호 베드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 요셉)의 시체를 찾아 묻음.
- 최종여(라자로) : 목천 소학골 거주, 1866년 10월 10일 형과 함께 체포되어 목천 문초, 공주 이수 후 교수 치명, 1866년 11월 8일, 40세. 강치운(청주 절골 거주)이 네 사람(배문호 베드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 요셉)의 시체를 찾아 묻음.
⑤ '병인치명사적', 23권 73~74쪽(증언자 : 공주 서재 요골[현재 '서재'는 유구읍 명곡리 1구, '요골'은 명곡리 2구] 거주 최 안드레아)
- 최천여(베드로, 증언자의 백부) : 경상도 출신, 목천 거주, 병인년에 형제가 함께 체포되어 목천 문초, 공주 이수 후 교우들과 함께 교수 치명.
- 최종여(라자로, 증언자의 부친) : 경상도 출신, 목천 거주, 병인년에 형제가 함께 체포되어 목천 문초, 공주 이수 후 교우들과 함께 교수 치명, 나이 40여 세.
- 최 안드레아(증언자의 형) : 목천 거주, 병인년 이후 타지 전전, 1868년 4월 죽산 포교에게 체포, 1868년 7월 교수 치명, 21세.
강릉 최씨 순교자들의 선대는 경상도 사람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목천 소학골 교우촌으로 이주해 살았고, 병인박해 때 최천여·종여 형제가 순교하게 된다. 최씨 집안의 가승과 전승에 따르면, 다음의 <도 3>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최천여의 보명은 문석(文錫), 최종여의 보명은 가석(嘉錫)으로 볼 수 있다. 이후 그들의 막냇동생(보명 崔禧錫) 가족은 그대로 소학골(정확히는 소학골 아랫마을인 사리목)에 눌러살았지만, 순교자의 직계 후손들은 타지를 전전했으며, 그 와중에 최종여의 아들 안드레아가 1868년에 다시 순교하게 된다. 안드레아의 동생 가족은 언제부터인가 공주 요골(현 공주시 유구면 명곡리)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최천여의 며느리가 이들 형제와 함께 순교했다는 가승의 기록은 믿기 어렵다. 또 죽산 순교자인 최 안드레아의 아내 ‘방 데레사’(최 안드레아에게 개가)가 1868년 7월 25세로 죽산에서 순교(교수)한 사실이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데, 목천 출신 순교자는 아니다.57)
<도 3> 최천여·종여의 가승과 순교자58)
한편 최씨 집안의 가승에는 1868년 8월 13일 죽산에서 순교한 최성첨(29세)과 그의 장남이 공주 순교자 최천여(베드로)의 아들과 손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1878년 4월 10일 순교한 최 요한(27세)과 그의 동생 또한 최천여의 손자들(최성첨의 차남과 삼남)로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교회 순교록에는 최성첨과 최천여와의 관계가 전혀 나타나지 않고, 최성첨의 출신지도 목천이 아니라 내포로 나오며, 최성첨과 장남·차남·삼남의 순교 행적을 증언한 사람은 용인 조희골에 거주하는 형수 이 마리아로 나온다.59) 따라서 위의 4명 순교자를 최천여의 아들과 손자로 추정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3) 고 요셉
병인년에 공주에서 순교한 소학골 출신의 고 요셉도 주목할 만한 순교자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교회 순교록에서 그의 행적과 관련된 내용들을 발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치명일기', 정리 번호 512번
- 고 요셉 : 목천 소학골 거주, 배문호와 함께 공주 치명(교수, 1866년 11월 8일).
② '병인치명사적', 1권 62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52번(목격자 : 고 배 안드레아(증언자 안드레아의 삼촌), 증언자 : 진산 저귀골 거주 배 안드레아)
- 고 요셉 : 목천 거주, 공주 치명
③ '병인치명사적', 6권 2쪽(전언자 : 전주 대성리 거주 배경집 베드로)
- 고 요셉 : 목천 소학골 거주, 순교 원의 간직해 옴, 1866년 10월 8일 배문호와 함께 체포되어 목천 문초, 공주 이수 후 교수 치명, 1866년 11월 8일, 강치운(청주 절골 거주)이 네 사람(배문호 베드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 요셉)의 시체를 찾아 묻음.
현재 고씨 집안에서는 1866년 11월 8일 공주에서 순교한 고 요셉을 ‘고의진(요셉)’으로 보고 있다. 또 순교자의 부친은 현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즉 박해기의 유명한 교우촌인 ‘원머리’)에서 신앙을 받아들인 ‘고시수’이고, 순교자 고 요셉의 아내는 ‘해주 최씨’였다고 한다. 고 요셉의 아들로는 제영․제환․제화 3형제가 있었는데, 부친 순교 후 목천 소학골을 떠나 제영․제화 가족은 천안 광덕면 부언골(즉 부원골)로, 둘째 제환 가족은 공주 유구면의 사기정골(현 유구면 명곡1리의 사기점골)로 이주해 살았다고 한다.60) 부원골과 사기점골은 박해 후 공주 본당의 공소로 설정된 교우촌이다.
한편 교회 순교록에는 내포 출신으로 공주·수원·죽산에서 순교한 또 다른 고씨 가족 3명이 기록되어 있다.
① 고 요셉(야고보의 아들) : 1866년 공주 순교(교수), 24세.
② 고 야고보 : 내포 사람, 산곡 이주, 1867년 죽산 체포 수원 순교(교수), 50세.
③ 문 막달레나(요셉의 아내) : 시아버지(야고보)와 함께 체포됨, 1867년 죽산 순교(교수), 19세
<이상 증언자 : 천안 부언(원)골 사는 고 필립보, 38세>61)
여기에서 앞서 언급한 ‘소학골 출신의 공주 순교자 고(의진) 요셉’과 ‘내포 출신의 공주 순교자 고 요셉’은 일단 다른 순교자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둘의 거주지가 다르고, 증언자가 다르며, 아내(해주 최씨와 문 막달레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학골 출신 고(의진) 요셉의 아들들(첫째와 셋째)이 훗날 천안 부원골로 이주해 살았다는 집안의 전승이 있고, 내포 출신의 고 요셉을 증언한 고 필립보도 같은 부원골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 소학골 출신 고 요셉의 순교 당시 나이는 동료 배문호의 나이(24세)와 비슷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내포 출신 고 요셉의 나이(24세)와도 거의 같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 두 요셉 순교자를 동일 인물로 볼 수도 있고, 같은 집안의 다른 신자로 거주지가 소학골과 내포 지역으로 달랐다고 볼 수도 있다. 둘째, 동일 인물로 본다면 소학골 출신 순교자 고 요셉의 집안 전승과 교회 순교록의 증언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5. 순교자 시신의 소학골 안장과 이장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것처럼 소학골 출신의 배문호(베드로), 최천여(베드로)·종여(라자로) 형제, 고 요셉 등 4명의 시신은 공주 순교 후 강치운이라는 신자에 의해 수습되어 소학골에 안장되었음이 분명하다. 또 이 사실은 목천 소학골에 거주하다가 훗날 전주 대성리로 이주한 뒤 전주 회장으로 활동하는 배경집(베드로)이 전한 사실이고, 그는 순교자 배문호의 당숙이므로 거의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네 사람(배문호 베드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고 요셉)의 시체는 지금 청주 절골 사는 강치운이가 찾아 묻으니라. 이 사적도 전주 대성동 배 베드로 경집에게 듣고 기록하나이다.62)
순교자 시신을 수습하고 안장했던 강치운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훗날 청주 절골(현 청원군 옥산면 동림리의 상동림인 듯)63)에 거주한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다만, 소학골과 사리목에 대대로 거주해 온 순교자의 후손들 사이에서는 순교자의 무덤이 ‘치명자 산소’로 알려져 왔고, 소학골과 사리목의 위에 있는 ‘궁형지(弓形地, 현재의 행정 구역은 성거읍)’에 위의 4명 순교자와 채 서방 며느리 등 모두 다섯 기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한다.64) 물론 강치운이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할 때 채 서방 며느리의 시신까지 찾아왔을 가능성은 있지만 기록에는 4명만이 나올 뿐이다. 따라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채 서방 며느리의 무덤은 최천여 며느리의 무덤이 와전되어 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공주 순교자 4명의 시신은 다음 <도 4>와 같이 궁형지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가 1959년 성거산의 미 군사기지를 위한 도로가 순교자 묘역 사이로 개설되면서 궁형지 북쪽(현 천안시 북면 납안리 방향)에 위치해 있던 공주 순교자들의 무덤 4기는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 및 소학골 출신 신자들의 무덤과 함께 모두 도로 아래의 동쪽(납안리 산 46-1, 현 성거산 제1줄무덤)으로 이장되었다. 동시에 그 반대 방향(납안리 반대 방향)인 남쪽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던 무덤들도 이장되어 별도의 묘역(현 성거산 제2줄무덤)이 조성되었다.
<도 4> 소학골 순교자들의 본래 무덤 위치도65)
1959년 당시 무덤 이장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의 훗날 증언과 소학골 출신 신자들의 전승에 따르면, 이장된 무덤은 모두 200기가 넘었다고 한다. 또 이장 당시의 시신들은 대부분 ‘삭아서 새까맣다’고 했으며, 도로 아래의 동쪽(제1줄무덤)으로 이장한 유해들 중에는 ‘두상이 없거나 두상과 몸체가 따로 묻혀 있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묵주와 십자고상이 많이 나왔다’는 증언도 도로 아래의 동쪽으로 이장한 무덤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납안리 반대 방향에서 이장된 시신들의 묘역(제2줄무덤)에서는 ‘두상이 없거나 묵주․고상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66)
다만, 이러한 증언 중에서 ‘두상이 없거나 두상과 몸체가 따로 묻혀 있었다’는 증언은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병인박해기의 순교자들은 대부분 교수형이나 옥사로 순교했지 참수형으로 순교한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위의 전승은 ‘천주교 순교자들의 시신은 목이 없다’는 일반적인 인식에 따라 와전된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묵주와 십자고상이 많이 나왔다’는 전승을 토대로 현존하는 무덤들을 모두 순교자의 무덤으로 보기는 어렵다. 순교자가 아닌 교우촌 신자들의 무덤에서도 묵주나 십자고상 등이 부장품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현재 성거산의 줄무덤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두 곳에 위치해 있는데, 이 줄무덤은 성역화 사업을 시작하면서 1997년 10월 26일에 각각 38기(제1줄무덤)와 36기(제2줄무덤)로 재조성되었다. 그중에서 공주 순교자 무덤 4기가 이장되어 있었던 제1줄무덤 재조성 과정의 상황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997년 10월 26일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 제2줄무덤 묘 봉분을 올리는 포크레인 작업 과정에서 시신들로 확인되는 검고 흐느적거리는 물체(뼈)들이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분명히 사람의 뼈였다. 한 무덤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많은 뼈와 같은 흔적들을 발견하였는데, 한 사람의 시신으로 보기에는 검고 흐느적거리는 뼈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하여 한 분 한 분 시신의 묘 봉분을 만드는 작업을 포기하고, 묘 봉분을 크게 하여 현재 제1줄무덤은 38기, 제2줄무덤은 36기로 만들어 놓았다. 사실은 더 많은 묘 봉분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67)
이와 같이 1997년 줄무덤 재조성 당시에는 이미 하나의 봉분 안에 몇 구의 시신이 이장되었는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였고, 따라서 각각의 유해를 구분하기란 불가능하였다. 1959년의 처음 이장시에 ‘200기 이상의 무덤’을 이장하면서 각각의 유해를 구분하거나 별도의 봉분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공주 순교자 4명의 무덤과 유해도 구분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다만, 처음 이장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이들 4명의 유해는 제1줄무덤에 안장되어 있을 것이 거의 분명하다.
6. 맺음말 : 성거산 교우촌과 목천 순교사의 의의
목천의 성거산 자락에 비밀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였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교우촌은 현 북면의 소학골과 목천의 서들골로, 이들은 박해기는 물론 전교 자유기 이후까지 변함없이 신앙 공동체가 유지된 정주형 교우촌이요, 구성원에서 볼 때는 신자 공동체형 교우촌이었다. 반면에 그 인근에 있던 목천의 장자동, 북면의 복구정, 병천의 공심리, 북면 베장골 등에도 신자들이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전이형 공동체요 혼거형 교우촌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처럼 성거산의 소학골과 서들골은 보기 드문 박해기의 정주형․신앙 공동체형 교우촌이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할 때, 성거산의 소학골과 서들골은 1850년 이후 사제들의 사목 순방을 받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1861년 10월 전국이 8개의 지역 본당으로 구분되기 이전까지는 최양업 신부, 다블뤼 신부, 메스트르 신부, 페롱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등이 이들 교우촌을 방문하여 성사를 집행했는데, 메스트르․페롱 신부와는 달리 최양업․다블뤼․프티니콜라 신부는 사목 중심지를 소학골에서 가까운 진천 배티와 동골 교우촌에 두고 있었다.
다음으로 지역 본당 설정 이후(1861년 10월~1863년 4월) 성거산 교우촌들은 공주 둠벙이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있던 조안노 신부의 사목 관할 구역에 속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862년 9~10월에는 페롱 신부가 한때 이들 교우촌을 방문해서 성사를 집전했으며, 조안노 신부 선종(1863년 4월) 이후로는 칼래 신부가 이들 교우촌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성거산의 소학골 교우촌은 1864년 여름 이래 칼래 신부의 사목 중심지, 즉 경상도와 충청도․경기도 일부 지역을 사목 관할로 하는 본당 중심지로 선정되어 병인박해 때까지 안전한 피신처요 여름 휴식처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두 번째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성거산의 소학골․서들골 교우촌은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에도 얼마 동안 안전한 곳으로 생각되었다. 이 때문에 경상도 순방을 중단한 칼래 신부는 1866년 5월 말 진천의 삼박골 교우촌을 거쳐 소학골 교우촌에 도착하여 미사를 집전하였고, 7월에는 페롱 신부와 함께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0월(음력 9월)에 조선을 떠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성거산 교우촌과 목천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한 것은 그 직후인 11월(음력 10월)부터였다.
목천지역의 순교사는 1866년 음력 10월부터 1871년 무렵까지 지속되었으며, 기록상으로는 모두 23명의 순교자가 목천 지역과 관련이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중에서 성거산의 소학골과 흑성산의 장자동에 거주하다가 병인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신자들이 7명이고, 정묘년 이후 소학골·복구정·공심리·베장골 등지에서 체포된 순교자들이 8명이었다. 그리고 성거산의 서들골을 포함하여 목천지역에 거주하다가 타지로 피신한 신자들 중에서는 모두 8명이 정묘년 이후에 순교하였다.
이들을 다시 출신 교우촌별로 구분해 보면, 소학골 출신이 9명(거주자 8명, 이주자 1명)으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서들골 출신이 4명(이주자), 장자동 출신이 4명(거주자 2명, 이주자 2명), 복구정·베장골 출신이 각각 2명(거주자), 공심리 출신이 1명(거주자), 기타 1명이었다. 특히 병인년 10월 소학골에서 체포되어 공주에서 순교한 배문호(베드로)와 최천여(베드로)·종여(나자로) 형제, 고 요셉 등 4명의 시신은 순교 후 고향에 안장되었으며, 따라서 소학골 교우촌은 손꼽을 수 있는 순교자들의 고향이요 영원한 안식처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소학골 출신의 4명 순교자 시신은 본래 성거산 소학골·사리목 위에 있는 궁형지의 북쪽에 안장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59년의 도로 개설 때 그 아래쪽, 즉 도로 아래의 동쪽(납안리 산 46-1)으로 모두 이장되기에 이르는데, 이곳이 지금의 성거산 제1줄무덤이다. 따라서 제1줄무덤은 성거산 성지중에서도 순교자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장시의 인식 부족으로 순교자들의 무덤과 유해가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록 1>
목천 거주 서(徐)씨 집안의 순교 계보68)
1. 순교 기록
교회 순교록에는 목천의 장자동에 거주하다가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순교한 대구 서씨(즉, 달성 서씨)69) 집안의 신자들은 모두 4명으로 나타난다. 이 집안은 본래 강원도에서 신앙을 받아들였지만 박해 때 신자인 것이 탄로가 날까 두려워 고향을 떠났고, 이후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가 목천의 흑성산(黑城山) 산곡에 있는 장자동에 정착한 것 같다. 서씨 일가의 순교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서 스테파노
- '치명일기', 정리 번호 479번 : 본래 강원도 사람으로, 충청도 목천 장자동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고향 포교에게 잡혀 잠깐 배교하는 뜻을 나타냈으나 곧 통회하고 공주로 압송되어 치명하니, 나이는 44세요 때는 병인년(1866년)이다.
- '병인치명사적', 23권 54쪽 : 스테파노는 본래 강원도 사람이다.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착실히 교리를 지키다가 고향을 떠나 산곡으로 다니며 농사로 생활하였다. 본성이 순량하여 이웃이 모두 칭찬하였는데, 병인년 박해 때 목천 포교에게 잡혀 신문을 받고 배교하여 석방되었다. 후에 또 목천 포교에게 잡혀 “교회 책 있는 곳과 교우들을 말하라.”고 하였으나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지만, 아들이 책이 있는 곳을 말함으로써 포교들이 이를 관가로 가져오는 것을 보고는 “이제 살아나갈 방도가 없다.” 하고 천주를 위하여 죽기를 결심하였다. 그리고는 전에 배교했음을 원통히 여겨 여러 사람이 듣는 데서 “내가 전에 한 말은 살고자 한 것이지만 이제 이전의 잘못을 뉘우친다.” 하면서, 전에 헛되게 말함을 보속하는 증거로 돈을 내어 포교들에게 술을 먹이며 “전의 잘못함을 뉘우치니, 이후로는 뜻을 변치 않고 죽으리라” 하였다. 옥에 갇힌 지 며칠 후에 공주로 압송되었고, 약 15일 후에 교수형을 받고 치명하니, 나이는 44세였다.
증인은 그 조카로 신창 간양골 사는 서 루수(루도비코)요, 나이는 39세이다.
② 서 프란치스코
- '치명일기', 정리 번호 749번 : 공주에서 치명한 서 스테파노의 둘째 아들이다. 부친이 치명한 후 청주 포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원하여 청주로 끌려가 치명하니, 나이는 18세요 때는 병인년 12월이었다. 어떤 이는 충주에서 치명하였다고 한다.
- '병인치명사적', 23권 55쪽 : 프란치스코는 서 스테파노의 둘째 아들이다. 앞서 부친이 잡혀 공주에 가서 치명하니, 피하여 산으로 다니다가 “부모가 죽고 혼자만 살아서 무엇에 쓸 것인가?” 하고 잡히면 천주를 위하여 죽겠다고 작정하였다. 이에 집에 돌아와 있는데, 다른 교우들이 함께 피하자고 하였으나 “그런 말 하지 말라. 이런 좋은 기회에 어찌 피할 것이냐?” 하고 있던 중 마침 포교가 와 잡으니 기꺼이 응하는 낯이었다. 충주 포교에게 잡혀간 지 얼마 안 되어 교수형을 받고 치명하니, 나이는 18세였다.
증인은 그 사촌으로 신창 간양골 사는 서 루수요, 나이는 39세이다.
③ 서 아우구스티노
- '치명일기', 정리 번호 181번 : 강원도 사람이다. 박해 때 고향 포교에게 잡혀 배교하였다가 신미년(1871년)에 다시 서울 포교에게 잡혀 이전에 한 배교의 잘못을 설명하고 서울로 압송된 지 오래지 아니하여 교수형을 받고 치명하니, 나이는 45세였다.
- '병인 치명 사적' 23권 56쪽 : 아우구스티노는 서 스테파노의 동생이다. 병인년 박해 때 형은 먼저 치명하고, 피해 다니다가 고향 포교에게 잡혀 배교하고 나왔다. 그 후 신미년에 서울 포교에게 잡혀갈 때 전에 잘못함을 뉘우치고 좋은 낯으로 “이제는 천주를 위하여 죽을 것이니, 전에 잘못함을 위우친다” 하였다. 함께 잡힌 동네 교우들이 혹 그릇된 말을 하면 위로하면서 “이런 좋은 기회를 잃지 말고 주님을 위해 치명하여 영혼을 구할 것이니, 어찌 죽기를 겁내는가”하고는 “나도 일찍이 살 뜻이 있어 배교하는 지경에 떨어졌었으나, 지금은 이전의 잘못을 한탄한다.” 하였다. 서울로 간 지 얼마 안 되어 교수형을 받고 치명하니, 나이는 45세였다.
증인은 그 아들로 신창 간양골 사는 서 루수요, 나이는 39세이다.
④ 서 베드로
- '치명일기', 정리 번호 182번 : 강원도 사람으로, 서 아우구스티노의 조카이다. 어느 날 장에 갔다가 서울 포교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된 지 얼마 안 되어 교수형을 받고 치명하니, 나이는 65세였다.70)
- '병인치명사적', 23권 58쪽 : 베드로는 서 스테파노의 맏아들이다. 그 부친은 첫 박해(즉 병인박해) 때 치명하고, 베드로는 모친과 함께 피하여 외교인들이 사는 지방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모친께 효도하였다. 그러던 중 장날 서울 포교에게 잡혀 서울로 갈 때, 도중에 능욕하는 외교 인들이 있자 “성교(聖敎)는 진실한 가르침이니 너희들은 상관할 일이 없다” 하였다. 서울로 간 지 얼마 안 되어 교수형을 받아 치명하니, 나이는 26세였다.
증인은 그 사촌으로 신창 간양골 사는 서 루수요, 나이는 39세이다.
⑤ 손 루치아
- '병인치명사적', 23권 56쪽71) : 루치아는 본래 충청도 홍주 신리(新里, 현 당진시 합덕읍 신리)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양선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잘 받고, 경문을 배워 부모께 순명하였다. 부모가 일찍 사망하자 오라버니 슬하에서 자란 뒤에 출가하여 시부모께 효도하며 본분을 지키고, 아들 3남매를 잘 가르치며 지냈다. 병인년 박해 때 남편(서 아우구스티노)이 잡혀 고향 관아로 끌려간 뒤 “관가 비록 먼 곳이나 한 그와 한 식구 되므로 이곳에 살지 말고 피해 나가라” 하니, 갈 곳이 없으므로 산속에 굴을 파고 오래 생활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병이 들어 죽게 되자, 마음 안에 있는 말을 하고 또 자신의 임종을 도와 달라고 하기 위해 사촌 시동생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이에 그 아들이 가서 당숙을 데려오니, 루치아는 그에게 “평소에 후회될 만한 말이 있었을 것이나 분별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그러자 사촌 시동생이 분별하여 죄 되는 일을 깨치도록 하고 임종을 도와 산의 굴속에서 선종토록 하니, 때는 정묘년(1867년) 3월 18일요, 나이는 39세였다.
증인은 그 아들로 신창 간양골 사는 서 루수요, 나이는 39세이다.
2. 서씨 집안의 기록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4명의 순교자는 분명 한 집안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증언한 “서 루도비코”가 과연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다.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하기 위해 현재 후손들에게 전해 오는 가승에 기록되어 있는 가계도를 살펴보면 다음에 수록한 <도 1>과 같다.
한편 후손이 소장해 오고 있는 3종의 <호구 단자>(戶口單子) 중 하나는 서윤순(徐閏淳)의 <호구 단자>로 병인박해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1869년(기사년) 목천읍 내면 신흥리(新興里, 현 천안군 목천읍 신계리의 장자동)에서 받은 것이다. 여기에는 서윤순이 1827년(정해년)생으로 나온다.
다른 2종은 모두 그의 아들인 서상언(徐相언)의 <호구 단자>이다. 이것은 박해가 완전히 끝난 1879년(기묘년)에 받은 것(지명 미상)과 1888년(무자년)에 신창 남상면 건양동(建陽洞, 현 예산군 예산읍 간량리의 간양골)에서 받은 것으로, 이에 따르면 “서상언은 1850년(경술년)생”으로 되어 있다. 또 서상언은 박해가 끝난 후(혹은 부친이 순교한 후) 목천에서 다른 지역으로, 그리고 다시 신창 간양골로 이주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신창 간양골은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요 그 후 재건된 교우촌으로 유명한 곳이다.
한편 서중석 씨는, 첫째 “집안 할아버지 가운데 공주에서 치명한 순교자가 한 분 있었고, 그 시신을 한 신자가 매장한 다음 장소를 후손들에게 일러주었지만, 박해가 두려워 찾지 못했다”는 말을 전해 들어왔다고 한다. 그리고 둘째로는 “순(淳)자 할아버지 가운데 순교자가 있던 것이 확실하지만, 지금까지는 살기가 어려워 그 자세한 내용을 찾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따라서 족보에도 이름을 실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또 “집안의 <가승>을 작성한 분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서)상언 할아버지가 틀림없다.”고 한다.
<도 1> 목천 거주 서씨 집안의 가계
3. 기록 검토와 순교 계보
이상에서 살펴본 순교 기록과 <가승>, <호구 단자> 및 증언을 토대로 할 때 상호 일치되는 순교자는 바로 서윤순(徐閏淳, 아우구스티노)이다. 왜냐하면 그는 1871년에 순교하였는데, 당시의 나이가 45세였으므로 1827년생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사년의 <호구 단자>에서 정해(1827년)생이라고 한 기록과 일치하며, 또 <가승>에도 그가 정해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다른 순교자들도 출생 연도가 맞는가 문제이다. 우선 <가승>에는 윤순의 형인 서완순(徐琓淳, 스테파노)이 갑신(1824년) 생으로 나오는데, 그가 1866년에 44세로 순교했으므로 일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완순의 맏아들인 서상빈(徐相彬, 베드로)은 <가승>에 신해(1851년)생으로 나오지만, 순교한 해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 연도가 정확한지는 알 수 없다.
결국 서윤순은 서 아우구스티노가 분명하고, 형인 완순은 공주에서 순교한 서 스테파노, 서상빈은 서 베드로, 서상욱은 서 프란치스코임이 분명하다. 다만 <가승>에는 서상욱이 백부인 서서순(徐瑞淳)의 양자로 간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출계가 순교 이전이라면 서 프란치스코를 서상표(徐相彪)로 볼 수도 있다. 이로써 증언자인 “서 루도비코”는 서 아우구스티노의 아들인 “서상언(1850년생)”임이 분명해졌다. 그러므로 '병인치명사적'에 나타난 순교 사실은 서 루도비코가 39세 때인 1888년경에 증언한 것이 된다.
여기서 남는 또 하나의 문제는 그의 모친이자 서윤순의 아내인 “손 루치아”이다. 서윤순의 <호구 단자>(1869년), 서상언의 <호구 단자>, <가승보>에는 그의 모친이 손씨가 아니라 “해주 오씨”(海州吳氏)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손 루치아가 박해 시대인 1867년에 사망하자 서윤순이 얼마 안 되어 후실(해주 오씨)을 맞아들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도 2> 목천 거주 서씨 집안의 순교 계보
이렇게 볼 때 서윤순(아우구스티노)은 정해(1827)생으로 가족과 함께 강원도에서 목천 장자동으로 이주한 뒤 이곳에서 병인박해를 당했으며, 첫 부인을 잃고 후실을 얻은 뒤인 1869년에 <호구 단자>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이에 앞서 그의 형인 서완순(스테파노)이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함에 따라 서윤순 자신도 체포되었으나, 배교하고 풀려났다가 1871년에 다시 서울 포교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II. 목천(성거산)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관련 자료
1. 칼래 신부의 서한
1) 칼래 신부가 부모님께 보낸 1866년 6월 8일 자 서한
소장처 : A-MEP, vol. 579, ff. 884~891
발신처 : 소학골
사랑하는 아버님, 어머님께 올립니다.……
틀림없이 부모님께서는 머나먼 조선에서 선교사로 일하는 이 아들의 소식을 오랫동안 기다리셨지요. 지난 마지막 편지 이래 이제까지 앓아누운 적이 없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는 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님, 어머님, 하마터면 순교자 아들을 두실 뻔하셨습니다.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인해) 조선의 12명 선교사들 가운데 3명만 살아남았으니까요. 신부 일곱 분, 주교 두 분이 순교하셨습니다. 제가 순교자들 반열에 들었더라면 우리 모두를 위해서 참 좋고 참 영광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순교할 차례도 조만간 오겠지요. 아마도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올지도 모르지요. 지금도 누구든 저를 알아보고 고발만 하면 외교인 임금(즉 고종)으로부터 큰 포상금에 높은 벼슬자리까지 받게 됩니다. 유럽인의 얼굴을, 그리고 선교사들의 이름을 적은 방(榜)을 한 달 내내 전국에 돌렸습니다. 선교사 여섯 명이 살아 있었을 때에는 주로 다블뤼(A. Daveluy, 安) 주교, 위앵(L. Huin, 閔) 신부, 저, 이렇게 세 명을 적어 수배했었습니다.……
(1866년 2월) 외교인 임금이 온 나라에 전국적인 박해령을 내리기 직전에72) 지역 박해가 제 전교 지역에서 일어났습니다. 제 교우 중 문경현의 전(全) 하비에르와 이(李) 요한 두 사람이 순교하고 나서73) 곧 병인년 대박해가 전국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베르뇌) 주교님께서는 체포되시기 여드레쯤 전에 제게 주신 서한에서, 친히 외교인 800명에게 세례를 집전했으니 만족한다 하시고, 마음 놓고 온 백성에게 전교할 수 있는 신앙의 자유를 곧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
베르뇌 주교님께서 제 동료 신부 다섯 명과 함께 투옥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교우촌에 다니면서 성사를 주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미사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복사도 돌려보내고, 잘 때 겨우 발을 뻗을 수 있는 골방에 숨어 지냈습니다. 제가 숨은 교우촌(즉, 경북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의 ‘한실 교우촌’)은 보스즈(Vosges)보다도 더 높은 고산준령으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거기에 며칠 있다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포졸들 또는 군졸들이 길마다 어슬렁거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방에서 쇠사슬을 쩔렁거리면서 선교사들을 붙잡기만 하면 얽어매려고 했습니다. 포졸들이 교우촌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조리 수색하는 바람에, 저는 밤에 (한실) 교우촌에서 30리 떨어진 외교인들만 사는 (문경) 고을로 가서 숨었습니다. 그 고을에는 현감이 있었는데, 그는 제 조선 이름 ‘강’(姜) 신부를 지목하면서, 어명인 만큼 꼭 체포하라는 영을 내렸습니다. 그 고을에서 제가 숨었던 집은 가족은 모두 외교인이고 남자(즉, 박 마티아) 혼자만 교우였습니다.
제가 거기서 지낸 이튿날 밤에 고을 외교인 한 사람이 저를 보았습니다. 그가 포졸들에게 가서 고발할까 두려워서 자정이 지나, 이틀 전에 떠났던 (한실) 교우촌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도중에 외교인 마을이 여럿 있었기 때문에 많이 돌더라도 그것들을 피하려고 높은 산을 넘고 넘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밤새도록, 그리고 그다음 날에도 걸었습니다. 문경에서 저를 따라나섰던 교우(즉, 박 마티아)를 도중에서 돌려보내고, 저는 농부처럼 입고 등에 봇짐을 지고 20리쯤 가서, 마침내 목적지 (한실) 교우촌을 둘러싼 꼭대기에 이르러 부락을 바라보니, 모든 집의 문들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락에서 좀 외진 한 집 근방에는 여교우 셋, 남교우 넷이 있기에, 저는 산을 내려가 거리로 갔습니다. 저는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네댓 발짝 가까이 이르러 보니 그 남자들은 교우들이 아니고 포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곳으로 가는 척했으나, 그들이 뒤쫓아와서 저를 붙잡고 봇짐을 낚아채고 등을 치면서 집안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세 여자들은 저보다 먼저 붙잡힌 여교우들인데, 그 가운데서 매우 민첩한 여교우(즉, 전 바르바라)가 포졸들에게 이르기를, ‘제가 자기 시아버지인데 먹통귀머거리인지라 아무것도 듣지 못하니 말을 걸어봐야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교우는 산으로 가서 거기 숨은 사람들을 불러내고 자기 시아버지가 왔다는 소식을 알려도 좋다는 허락을 포졸들에게 받았습니다. 여교우가 산으로 가 제가 왔다는 소식을 알리니, 교우들은 ‘신부님이 잡히셨다니 우리도 함께 잡히는 게 도리다’라고 하면서 하산했습니다. 교우들이 하산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이들은 진짜 포졸들이 아니고 포졸로 위장한 도둑들이었습니다. 교우들은 과감히 힘을 내어 도둑을 잡아 묶어 때려 준 다음 멀리 쫓아버렸습니다. 신기한 결말이지요.
(한실) 교우촌에 며칠 머물고 나서, 포졸들의 습격이 너무 염려스러워 또다시 다른 곳으로 피했습니다. 밤에 50리를 걸어 외교인들만 사는 큰 마을에 도착했는데 교우는 딱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집에 가서 방에 숨어 보름쯤 지냈는데, 기침 소리도 다른 어떤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조선의 집 구조는 서로 통해서 무슨 소리나 잘 들립니다. 집이라야 짚으로 덮은 작은 오두막이요, 방과 방 사이의 벽이라야 나뭇가지로 엮은 데다 진흙을 바른 것입니다. 외벽을 칠 때조차 돌을 쓰지 않습니다.……
그놈들이 저를 추적하거나 말거나 저는 산을 내려와서 다시 작은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집이 두 채 나왔습니다. 교우들 집인지 아닌지는 모르고 거기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느님께서 인도하신 덕분에 제가 찾아 나섰던 교우집이었습니다. 나를 추적하던 그놈들은 제가 교우집 쪽으로 가는 것을 보고 돌아서 가버렸습니다. 교우집에선 저를 환대했습니다. 곧 날이 밝았습니다. 낮에 외교인이 찾아와서 묻기를, 혹시 새벽에 누군가가 이 집에 오지 않았느냐고 하자, 아무 손님도 오지 않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부터 주변 외교인들 사이에 귀신이 난동을 부렸다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았습니다. 저를 귀신으로 본 것입니다. 피투성이에다 부어오른 제 손발을 고치는데 보름도 더 걸렸습니다.
저는 불길한 소문 때문에 그 교우집에 더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침에 해가 뜨기 전에 교우들이 저를 업고 산으로 올라가 바위굴에 내려놓고, 저녁이면 그 집으로 업고 가서 자도록 했습니다. 계속 이렇게 하는 게 너무 번거로워서, 저는 한 주간 내내 심산유곡 속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사람도 들짐승도 들어갈 수 없는 원시림으로 둘러싸인 매우 깊고 매우 넓은 개울가에서 지냈습니다. 교우가 늘 저와 함께 있으면서 밥을 지었습니다. 여기서도 잠은 맨땅에서 자기도 하고 거대한 바위 아래서 자기도 했습니다. 하루 종일 저는 몸을 쪼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지냈습니다.
(연풍)읍에서 저와 함께 포졸들에게 붙잡혔던 교우(즉, 유 토마스)가 하느님과 성모님의 각별한 도우심으로 건강하고 무사하게 (한실) 가족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다블뤼 주교님과 신부님 두 분(즉, 오메르트와 위앵 신부)이 선교사들로서는 맨 나중에 순교하신 다음부터74) (나라에서는) 포졸들이 촌락이나 한길에서 교우들을 추적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실 교우촌에서) 지금 머물고 있는 이 교우촌(즉,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의 ‘소학골 교우촌’)으로 왔습니다. 여기서는 미사를 드릴 수 있어 좋습니다.……
J.M.J.X.
Sohakol, 8 Juin 1866
Mes bien chers Père et mère,……
Vous désirez sans doute recevoir depuis longtemps des nouvelles de votre enfant missionnaire en Corée pays si éloigné de vous enfin en voici : depuis que je vous ai écrit jusquà présent je nai pas été malade, et maintenant encore je me porte bien, cependant peu sen est fallu, bien chers père et mère que vous nayez un enfant martyr car de 12 que nous étions nous ne sommes plus que trois de vivants, sept missionnaires et nos deux si vénérables et si chers Evêques ont été martyrisés.
Il eut été très beau et bien glorieux pour nous tous nest-ce pas que jaie été du nombre, cependant je pense que mon tour viendra tôt au tard et peut être plus tôt que je ne pense ; maintenant encore si quelquun me voyait et quil me denonça[dénonça]-t-il recevoir du roi payen une grande somme dargent plus une haute charge pendant deux mois entiers on a envoyé partout dans tout le royaume une caricature européenne, avec les noms écrits de Mgr Daveluy, Mr Huin et le mien dans un temps où nous étions encore 6 de vivants, 3 surtout parmi lesquels je me trouvais étaient lobjet des plus grandes pour suites.……
Avant que le roi payen nordonna la persécution générale dans tout le royaume, une persécution particulière avait commencé dans le canton que jadministre ; deux de mes Chrétiens furent martyrisés aussitôt après commença la grande persécution ; 8 jours à peu près avant dêtre arrêté mon très vénérable et très bien aimé Evêque mavait écrit une lettre laquelle il me disait quil avait baptisé 800 payens, il était content et pensait que nous aurions bientôt la liberté de nous faire connaître à tout le monde,……
Puis apprenant que Monseigneur lévêques était en prison avec 5 prêtres missionnaires mes confrères, jai cessé daller dans les villages donner les sacrements, jai même cessé de dire la Ste messe et renvoyant mon domestique chez lui je me suis tenu caché dans une toute petite chambre dans laquelle je pouvais à peine métendre pour me coucher, le village chrétien où jétais caché était entouré de très-hautes montagnes plus hautes que les Vosges. Après avoir resté là quelques jours, il fallut aller ailleurs parce que les satellites ou soldats courraient de tous les côtes sur tous les chemins, fesant[faisant] sonner des chaines[chaînes] de fer pour enchaîner les prêtres missionnaires quon navait pas encore pris, comme ils visitaient tous les villages chrétiens sans en manquer un, jallai la nuit à trois lieues du villages[village] où jétais caché dans une ville toute payenne où il y avait un mandarin payen qui me désignant par mon nom Kang Simbou disait quabsolument il fallait quon me prit parce que le roi payen me connaissant de nom lordonnait ainsi, je me cachai dans une maison où toutes les personnes étaient payennes excepté un homme qui était chrétien, la seconde nuit que jétais là un payen de la ville me vit, alors de crainte quil nallât chercher les satellites de la ville je partis de suite après minuit, je retournai au village que je venais de quitter deux jours auparavant, mais comme il y avait beaucoup de villages sur la route, je passai par de hautes montagnes fesant[faisant] de grands de tours pour fuire toutes les maisons. Je voyageai la nuit et tout le jour suivant sans manger, vers midi je renvoyai le seul Chrétien qui maccompagnait, et seuls sous lextérieur dun payen, avec un paquet au dos je voyageai près de 2 lieues, arrivé au sommet des montagnes du village où jallais toutes les maisons étaient vides avec les portes ouvertes, cependant près dune maison séparée du village je vis trois femmes chrétiennes et 4 hommes, je descendai la montagne, jallai là parce que jétais bien fatigué, 4 à 5 pas avant darriver à la maison, je vis que les hommes nétaient pas chrétiens mais que cétaient des satellites, alors je fis semblant daller ailleurs mais ils coururent après moi, me saisissent, marrachèrent mon parquet et me frappant au dos me conduisirent à la maison. Là il y avait parmi les trois femmes chrétiennes qui avaient été prises avant moi, une entrautres qui avait beaucoup desprit, elle dit aux satellites que jétais son beau père, et que jétais très-sourd que par conséquent cétait inutile de me parler que je nentendrais pas, puis elle demanda la permission daller à la montagne avertir les hommes du village qui étaient cachés que son beau[-]père était venu, elle alla et lorsque les chrétiens surent que jétais pris, ils vinrent dans disant entreux : si notre prêtre missionnaire est pris nous ne pouvons que dêtre pris avec lui. Ils vinrent et après avoir beaucoup examiné, ils virent que ce nétaient point de vrais satellites mais des valeurs qui se disaient satellites alors les batirent[bâtirent] et les chassèrent au loin tout arriva à merveille. Etant resté là plusieurs jours, il fallut encore aller ailleurs car on craignait trop. La nuit jallai à 5 lieues plus loin dans un gros village payen où il ny avait quun seul chrétien jallai chez lui et je restai près de 15 jours toujours enfermé dans une chambre, fesant[faisant] les plus grands efforts pour ne pas tousser et ne faire le moindre bruit possible, car tout sentend dans les maisons coréennes, ce ne sont que de petites cabanes couvertes de paille, et les chambres ne sont séparées que par une cloison de bois mastiquée de terre, aucune pierres nentre dans les murs mêmes extérieures.……
Voyant quils me poursuivaient je descendis néanmoins puis montai quelques instants un petit gorge et me trouvai en face de deux maisons, je my dirigeai sans les reconnaître, Dieu mavait conduit car cétait la maison que je cherchais, les payens qui me poursuivaient mayant vu aller vers ces maisons, sen retournaient, le jour alors commençait et jétais alors sous un toit hospitalier, on vint demander dans le jour si quelquun nétait point venu de grand matin à la maison, on répondit quon mavait point vu dhôtes extraordinaires et alors le bruit couru parmi mes payens que le démon avait fait la nuit beaucoup de vacarme, cest moi quon prenait pour le démon Mes pieds et mes mains toutes ensanglantées et anflées[enflées], furent plus de quinze jours avant dêtre guéris ; pendant ce temps cependant je ne pouvais rester à la maison à cause de mauvais bruits, alors on me portait au dos à la montagne dans une fente de rocher avant que le jour ne parut et le soir on me rapportait de même pour dormir à la maison, ce moyen nayant pas put[pu] se pratiquer longtemps jai été vivre pendant une semaine entière à la montagne près dun énorme ruisseau très profonde et très large tout couverts de bais impraticable aux hommes et aux lêtes(?) là quelquun était toujours avec moi, il fesait[faisait] la cuisine, là aussi on couchait sur la terre ou sous en enorme[énorme] rocher et tout le jour je restai blotti dans quelque coin. Enfin lhomme qui avait été pris avec moi à la ville et revenu sain et sauf au milieu de sa famille par une protection très-sensible de Dieu et de la Ste Vierge, après le martyr venu en dernier lieu de Monseigneur Daveluy et de deux autres missionnaires, on a défendu aux satellites de courir les chemins et les villages alors je sui[suis] revenu au milieu dun pays chrétien, où je suis maintenant et où jai le bonheur de dire la Ste messe.
2) 칼래 신부가 알브랑 교장 신부께 보낸 1867년 2월 13일자 서한
소장처 : A-MEP, vol. 579, ff. 1265~1292.
발신처 : 상해
경애하올 교장 신부님.
하느님께서 저희에게 내리신 시련의 때에 저희 전교 지역을 꾸미신 새로운 영광에 관해서 제 힘자라는 데까지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바친 바 있습니다. 마지막 서한에서 약속드린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제게 지우신 작은 고난들, 곧 외적 시련들에 관해서 이제 말씀드리게 된 것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저의 첫 번째 임지는 서울이 있는 경기도(즉,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의 ‘손골 교우촌’)였는데, 서울과 그 주변 교우촌들의 사목은 베르뇌(S. Berneux, 張) 주교님께서 친히 맡으셨습니다. 그러니 진심으로 존경하고 마치 어머니 같아서 이끌리는 주교님의 눈앞에서 저는 1861년 가을 처음으로 무대에 섰던 것입니다. 저는 한 해에 1,200여 명의 고백을 들었는데, 그러려면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작은 그룹별로 고해성사를 주어야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1863년에) 랑드르(J. M. Landre, 洪) 신부님과 조안노(P. Joanno, 吳) 신부님께서 마치 무르익은 이삭들이 거두어지듯이 비참한 죽음(병사)을 당하신 이래, 중노동을 위해 살아남은 신부님들의 노고는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1864년에는, 조안노 신부님께서 열심히 가꾸다가 그만 영원히 쉬려고 훌쩍 떠나신 포도원 지역(즉, 공주와 그 인근 지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그분의 발자취를 샅샅이 밟았습니다. 그분의 수많은 교우들뿐 아니라, 다블뤼 주교님과 랑드르 신부님의 교우들도 찾아보고, 베르뇌 주교님께서 오랫동안 돌보신 지역의 4분의 1을 방문했습니다. 1864년 한 해 동안에 2,500명도 넘는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베풀었고, 그에 비례해서 다른 성사들도 증가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메트르(P. Aumaître, 吳) 신부가 후임으로 부임하여, 저는 마치 다 자란 아들처럼 어머니의 품을 떠나고 제 동료가 그 품에 안기도록 했습니다. 즉, 그는 제가 맡았던 지역(즉, 경기도 일부 지역)을 떠맡았던 것입니다. 페롱(S. Féron, 權) 신부님께선 2~3년 전부터 병을 앓아 매우 허약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담당한 지역(즉, 경상도와 충청도 지역)은 전교 지역 가운데서 가장 험난한 곳들 중 하나였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언제고 일꾼들을 살피시는 가장 같은 분이시라, 그동안 제가 돌보았었던 고 조안노 신부님의 지역으로 페롱 신부님을 보내셨습니다. 사실 이 지역의 길들은 훨씬 짧고 다니기도 더 쉽습니다. 대신 저는 페롱 신부님께서 물러난 험난한 지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꾸어야 할 지역으로 말하면 4개 도에 걸쳐 있으니 충청도, 경상도, 남으로는 경상도 남부, 중부로는 경기도입니다.
1865년에는 별로 피로를 느끼지 않고 전 지역을 방문했습니다. 1866년에는 미처 절반도 방문하기 전에 박해의 폭풍이 휘몰아쳤습니다. 저는 제 담당 지역 사목 방문을 마치고 나면 여름 한 철에는 서울에서 220리 떨어진, 충청도 목천현 ‘소학골’ 마을에서 쉬었습니다. 소학골은 독수리 둥지마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호랑이가 득실거리고 숲이 우거진 산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찾아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조용히 숨어 살기에는 매우 좋은 피신처입니다. 따라서 마치 들짐승처럼 사방에서 쫓기는 선교사가 평화로운 이곳에서만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어느 누구에게 들킬 염려 없이 초가집에서 나와 여기저기 절경을 찾아 눈앞에 듬뿍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또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1866년 사목 방문은 1865년에 했던 것처럼 남부 지방에 있는 도(道)들로부터 시작해서 중부로 올라올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그러나 (1865년) 10월 초순 프티니콜라 신부님께서 소학골로 저를 찾아와 충고하시는 바람에, 중부에서 시작하여 남부 도(道)들에서 마치기로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이렇습니다. 처음 계획대로 전교 여행을 했더라면 박해가 폭발했을 때 저는 중부 어느 도에 있었을 것이요, 그랬더라면 서울 근처에 있던 동료들이 모두 체포된 것처럼 저도 체포되었을 것입니다. 박해가 일어났을 때 저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부에 있었기 때문에 때마침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고, 박해의 노도가 전국을 휩쓸 무렵 저는 (소학골) 은신처로 잠적했던 것입니다. 마치 폭풍이 휘몰아칠 때 물고기가 바닷속으로 잠적하듯이 말입니다.
(1865) 10월 넷째 주일, 성모님 축일에 전교 여행을 떠나, 12월 초순에는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성요셉 신학교에 들러 푸르티에 신부님과 프티니콜라 신부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동료 신부님들과 함께 열흘 동안 즐겁게 지냈습니다. 오렌지가 입에 감칠맛이듯 기쁨은 마음에 감칠맛이라고 하더니, 그분들과 함께 보낸 나날이 바로 그랬습니다. 저희 희열은 얼마나 넘쳤던지 이승에서 마지막으로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서로 헤어지는 순간, 곧 재회해서 유쾌한 대연회를 갖기로 약속하는 친구들의 마지막 웃음 같은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마지막 상봉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1866년) 1월에는 저 시원하고 감미로운 휴식처(즉, 배론 신학교)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그 무렵 환란의 불길이 다가와서 곧 우리를 에워싸고 온통 꿰뚫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여러 번 언급한 바 있는 황(黃)이라는 못된 양반은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을 데리고 강도질한 금품으로 생활해 왔습니다. 그는 제 담당 교우촌들 중 몇 곳을 약탈했습니다. 그는 탐욕스러운 독수리처럼 이 교우촌 저 교우촌을 덮치곤 했습니다. 그의 습격으로 전 사베리오와 이 요한 두 교우는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종려 가지를 얻었으나 다른 두 교우는 배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많은 교우들은 저 굶주린 늑대의 참해(慘害)와 울부짖음을 보고 듣고선 겁을 먹은 나머지 주님께서 보낸 선교사를 받아들이기 주저합니다. 저는 아무런 소문도 내지 않고 슬그머니 교우촌들로 들어가 상처를 치료해 주고 여러 교우들에게 생기와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창궐하는 전염병에 걸려 그만 전교 여행을 중단했습니다. 남자 교우도 꽃다운 나이에 전염병에 걸려 제 앞에서 죽었습니다. 프티니콜라 신부님께서 소식을 듣고 제게 오시어 보살피신 덕분에, 허약한 몸이나마 일으켜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866년) 2월 20일경, 첫 번째 교우촌을 방문하고 있을 때 베르뇌 주교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정월에도 한 차례 편지를 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2월 23일 체포되셨으니 제가 2월 20일경에 받은 편지가 그분의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저는 전교 여행을 중단했습니다. 그때 저는 서울에서 400리, 그리고 이틀 전에 성사를 집전한 문경읍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마을은 ‘한실’인데, 경상도 문경읍에 속했습니다. 소백산맥 허리에 자리 잡은 한실에는 초가 15채가 있는데, 15채는 다섯 동네로 나뉘어 소백산맥 굽이와 줄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한실 다음에 방문하기로 예정한 교우촌에서는 저를 영접하려고 심부름꾼을 보내왔습니다만, 저는 조심스러워서 그들을 따라나서지 않고 돌려보냈습니다. 저는 성사들을 다 받은 한실 교우들과 작별하고 여름 은신처인 소학골로 가는 척했습니다. 그렇지만 실은 한실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실의 회장 및 지각 있는 교우 두 사람과 짜고 다른 교우들 몰래 (한실의 다섯 동네 중) 가장 깊숙한 동네로 잠입하여 숨어 버렸습니다. 내가 든 오두막 골방은 넓이에 따라 누우면 몸을 4분의 1쯤 굽혀야 되나, 길이에 따라 누우면 발을 뻗칠 수 있었습니다.……
3월 15일경 문경읍내 교우 박(朴) 마티아가 예비자인 매형과 함께 좁쌀을 사러 제가 숨어 살던 동네에 왔습니다. 저는 세 교우들과 상의해서, 제가 3~4일 정도 문경으로 피신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문경읍 내에는 교우 15명이 숨어 살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이 모두 교우들이고 그 사실이 인근에 즉시 알려진 한실 교우촌보다는 문경읍 내에서 숨는 것이 더 쉬웠습니다. 박 마티아의 매형인 예비자는 좌중 맨 마지막으로 저를 자기 집에 영접하기로 작심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만일 제가 자기 집에서 체포된다면 그는 목숨을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결심한 까닭에 우리 셋은 밤 11시경에 문경으로 떠났습니다.
짙은 어둠 덕분에 도중에 4~5개 외교인 마을을 무사히 통과하여 새벽 3시쯤 문경 읍내 (박) 마티아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제가 거처할 방은 빈방이었는데, 단지들과 가재도구들이 차곡차곡 가득 차서, 제가 겨우 누울 자리만 남아 있었습니다. 박 마티아와 그의 매형은 양반들이 아닌 까닭에, 조선 풍습에 따라 그 집에는 누구나 마음대로 오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한실로 돌아가겠소. 그러나 해가 뜨기 전에 절반도 못 갈 터이니, 도중에 통과할 외교인 마을들을 피하려면 많이 돌더라도 서둘러 산꼭대기로 올라가야겠소. 저녁때는 한실에 도착할 것이오.” 저희 둘은 문경을 떠나기를 잘했습니다. 왜냐하면 문경읍 포졸들이 제가 읍에 잠입한 사실을 알아채고 소란을 피우면서 저를 붙잡으러 나섰지만, 그때 저는 이미 읍을 빠져나왔던 것입니다.……
오후 3시경 마침내 한실 산꼭대기에 다다랐습니다. 거기서 한실의 다섯 동네를 바라다 볼 수 있었습니다.…… 세 집에서 함께 쓰는 마당으로 들어서면서 문득 보니 거기 있는 남자들은 영락없이 포졸들이었습니다. 제가 모르고 사지에 들어섰다가 빠져나와 산으로 도로 올라가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게 섰거라, 어디로 가느냐?”라고 외치면서 그들이 달려와 저를 붙잡았습니다. 한 남자와 함께 하산하던 두 여자는, 달아나다가 그 남자에게 붙들린 여교우들이었습니다. 포졸들은 제가 지닌 작은 봇짐을 빼앗고 때리고 밀쳐서 저를 방에다 가두었습니다.…… 제가 포졸들에게 대답하지 않고 꾸물거리는 것을 보고, 전(全) 바르바라라는 여교우가 나서서, “이 분은 제 아버님인데, 보시다시피 귀가 먹었습니다. 나리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제게 하시면 제가 아버님께 여쭙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전 바르바라가 포졸들에게 “아버님은 이 동네 분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마련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아버님을 산으로 모시고 가서, 거기 숨어 있는 사람들을 불러내면 금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니, 한 포졸이 “좋소” 하고 찬동했습니다.……
산꼭대기로 또는 바위 틈새로 숨었던 교우들이 전 바르바라의 소리를 듣고는 “신부님이 붙잡혔으니 우리가 여기 이대로 있을 수 없지. 나가서 신부님과 같이 죽읍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포졸 한 명과 먼저 내려와 집에 있는데 곧이어 내려온 교우들이 포졸더러 ‘귀머거리하고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해서 저는 혼자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교우들도 제가 있던 곳으로 오기에 저는 교우들더러 “이 포졸들은 좀 이상합니다. 돈만 요구할 뿐 종교는 거론조차 하지 않으니까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교우가 “포졸처럼 굴지만 실은 도둑놈들일지도 모르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모두 의심하는 눈치였습니다. 행색으로 봐 더욱더 의심이 갔기에 “당신네가 포졸들이라면 이런 때 포졸들이 으레 갖고 다니는 쇠사슬이나 포승줄이 왜 없습니까? 포졸들이 임무 수행 때 지니는 증명서를 보여주시오.” 이렇게 해서 사기는 탄로가 났습니다. 그들은 포졸들을 가장한 도둑들이었던 것입니다. 교우들은 기세등등해서 멍청한 도둑들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저는 2~3일간 제 골방에서 휴식을 취했습니다. 한실이 교우촌이라는 사실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포졸들이 찾아오지 않기를 모두 간절히 바랐습니다. 3월 19일경 함창현 문산(현 경북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75)이라는 외교인 마을의 교우 이(李) 요한이 한실에 왔습니다.…… 이 요한이 자기 집에 제 은신처를 마련하겠다고 기꺼이 제의하기에, 저는 골방에 모인 교우들과 상의해서 한동안 이 요한 집에 가는 것이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그 집은 한실에서 60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희는 밤에 출발해서 여러 마을을 지나 이튿날 다행히 문산 이 요한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동안 동료 선교사들은 순교의 영광을 얻었습니다.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님께서는 서울에서 고문을 받은 다음 지방(즉,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지 유럽 출신 신부들을 체포하려는 목적으로 교우들을 괴롭힌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저는 관장에게 자수할까 하고도 생각했습니다.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상(五傷)을 공경하는 뜻으로 닷새를 정해서 매일 예수 수난사를 읽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또한 우리 구세주를 본받을 힘을 얻고자 했습니다. 마지막 날은 성수요일이었는데, 저는 네 복음서에 실린 수난사들을 모조리 봉독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으로 자수하려던 마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날 저녁때 유 토마스라는 한실 교우가 찾아와서는 ‘한실 교우들이 저를 보기 원하고 아울러 위험도 다 사라졌다’고 하면서 그동안 겪었던 일은 차차 이야기하겠노라고 덧붙였습니다. 성수요일에서 성목요일 사이의 밤에 단지 토마스와 함께 한실로 떠나 길을 가다가 문산에서 상당히 떨어진 언덕에 이르러 갖고 온 과일을 먹었습니다. 자연에 파묻혔습니다.…… 저와 토마스는 몇 마디 짤막한 말을 더 주고받은 다음에 다시 길을 갔습니다. 한실에 도착하니, 즉시 교우들이 엎드려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보속을 정해 주고 이튿날 고해성사를 주었습니다. 바로 그날(즉, 1866년 3월 30일)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님께서 (보령) 수영에서 신앙을 위해 피를 쏟으셨습니다만, 그때에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저는 제 골방에 틀어박혀 부활 축일을 지냈는데, 한실에서 60~70리 떨어진 작은 교우촌 자치골은 포졸들의 습격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교우촌에는 지난 20개월 동안 성사를 주지 못했습니다. 한실에 눌러 있을 게 아니라 다른 교우촌들을 보살펴야지 하는 생각에서 자치골로 가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고생고생하면서 많은 시간을 허비한 다음에야 겨우 오솔길을 되찾고 두 번째 산봉우리에 올라섰습니다. 여기가 바로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선이라 저희는 충청도로 들어섰습니다.…… 한 길은 연풍읍 내로 들어가고, 저희가 가는 또 한 길은 연풍읍을 비껴가는 갈림길에 주막이 하나 있었는데, 지나가면서 보니 처마 밑에 무슨 흰 것이 보였으며 알고 보니 흰옷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를 보자 즉각 “어디로 가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포졸들이었는데, 둘은 서울에서 내려온 경포요 셋은 연풍 포졸들이었습니다. 토마스는 변명하려 했지만 소용없습니다. 그럴 때가 아니었습니다. 저희 둘을 붙잡고서는 도망을 다니는 천주교인들이라고 여러 차례 몰아세웠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제 어깨를 밀면서 “주막으로 가서 조사해 보자”고만 했습니다. 그동안 토마스는 먼저 가서 주막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토마스는 세 포졸과 치고받고 했지만, 포졸 다섯이 그를 붙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저는 고분고분 조용히 토마의 뒤를 따랐습니다.……
저는 저를 둘러싼 이들더러 ‘먼저 앞서가면 조금 뒤처져 따라가겠다’고 하고선 떨어지자마자 저는 날라버렸습니다. “저자가 도망친다.” 하고 모두 소리쳤고, 여러 사람이 저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엽전 550닢이 든 전대 끈이 풀리게 하셨습니다. 말씀드리거니와, 전에는 여행할 때 제가 돈을 지닌 적이 없었습니다. 저와 동행한 교우들이 늘 돈을 관리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제 목숨을 구하시고자 그때만은 제 스스로 돈을 지니게끔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눈으로 엽전들을 볼 필요도 없지요, 엽전들이 돌멩이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어도 알지요. 사람들은 서로 엽전들을 주우려고 저를 내버려 두었습니다. 토마스는 연풍 현감에게 천주교인으로 끌려가 투옥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어느 골짜기로 들어섰는데, 제가 지나간 적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한실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기운이 솟아서 걸음을 성큼성큼 내디뎠습니다. 한실 방향 골짜기로 불과 반 시간도 못 갔는데, 온통 깜깜해서 소백산맥 산속에서 다시 길을 잃고 밤새 이리저리 헤매면서 산을 기어오르고 내려가곤 했습니다.…… 새벽에 어느 산을 한 바퀴 돌아 집 세 채가 있는 동네에 이르렀는데, 저는 교우촌이라는 사실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너무 탈진했기 때문에 무조건 그쪽으로 가서 열 발짝쯤 다가가 보니 그게 제 골방이 있는 초가였습니다. 제가 들어서니까 그 집 가족들이 깜짝 놀란 것은 물론이요, 제 처참한 몰골을 보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여긴 때에, 하느님께서는 틀림없이 죽음의 마수를 물리쳐 주셨던 것입니다. 제 삶이 하느님의 영광을 현양하고 저와 이웃들의 구원을 이룩하는 데 보탬이 되기를 빕니다.
제가 도중에 만난 외교인 세 명은 저를 귀신으로 여겼습니다. 귀신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한실 주변 여러 외교인 마을에 두루 퍼져 나갔습니다.…… 교우들은 온갖 정성을 다해 저를 보살폈습니다. 그렇지만 유 토마스가 (연풍에) 갇혔으니 교우들이 겁을 먹고 지냈습니다. 토마스의 아내는 매우 고지식한 데다 매사 무능하기 짝이 없는 부인이라, 어린것들 셋을 데리고 이제 혼자 사는 것을 보니, 제 한평생 당한 어떤 고통보다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교우들도 그 일을 매우 민망스레 여겼습니다. 날이면 날마다 울고불고하니 제 마음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제가 신앙으로 위로하는 말을 하면 잠시는 잠잠하지만, 곧 다시 울기 시작하고, 그러면 세 어린이도 함께 울어댔습니다. 유 토마스를 위해서, 그리고 의지할 친척 한 사람 없는 그 부인과 세 아이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간구하도록, 저는 여러 번 마을 교우들에게 당부하곤 했습니다. “천주님께 강요하다시피 해서라도 유 토마스가 석방되는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주일 아침 프란치스코 노인은 아들더러 집에서 먹이는 개를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노인은 개를 잡도록 해서 그날 보신 잔치를 벌였습니다. 저도 먹었고 교우들도 모두 먹었습니다만, 프란치스코 노인이 아주 맛있게 들었습니다. 저희가 한실에 도착한 지 이틀째인가 사흘째인가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크나큰 위로를 베푸셨습니다. (연풍에 갇혔던) 토마스가 배교하지도 않고 하느님의 특별한 보살피심으로 풀려나 한실 가족에게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실에 숨어 있다는 소문이 주변에 나돌았습니다. 여러 교우들이 제가 있던 동네로 찾아와서 그 사실을 알려 주고 경고했습니다. 열심한 교우들이 눈물을 쏟았지만 저는 한실을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갈 길은 줄잡아도 200리나 되는데, 대낮에 외교인 마을들을 지나가야 할 뿐 아니라 외교인들 주막에서 먹고 자야만 했습니다. 더군다나, 얼마 전에 제가 포졸들에게 붙잡혔다가 간신히 달아났던 연풍읍을 지나가야만 했으니 실로 어려운 여행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시 한번 두드러지게 손을 써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주막에서 먹고 자면서 낮에만 걸어 이틀에 200리를 갔습니다. 주막에서 한 방에 열 명이 잤는데, 방이 어찌나 좁던지 서로 바짝 붙어서 잤습니다. 저는 진천현에 속한 ‘삼박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 교우촌에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판공성사를 주고, 박해에도 불구하고 성교회를 조금도 멀리하지 않은 어른 몇 분에게 세례를 집전했습니다. 그러고서 5월 말경 마침내 소학골 여름 휴식처에 이르러 최대한 성대하게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얼마 후에 페롱 신부님이 오시어 저희는 조선을 떠나는 날(즉, 1866년 10월 11일 또는 12일)까지 함께 지냈습니다.……
J.M.J.X.
Shang-haï 13 février 1867
Très Vénéré et Bien cher Supérieur,
Après avoir terminé les quelques notes, quil était en mon pouvoir de recueillir sur les temps dépreuves que Dieu nous a envoyés, et sur les nouvelles gloires dont il a illustré notre mission ; jai lhonneur, Très-Vénéré et Bien cher Supérieur de vous envoyer, ainsi que je vous lavais promis dans mes dernières lettres, le narré des petites peines ou croix extérieures dont Dieu mavait chargé……
Mes premières courses dans la mission de Corée eurent lieu dans la province de Kieng-Kei, province de la capitale quadministrait Sa Grandeur Mgr Berneux avec quelques chrétientés environnantes. Sous les yeux du pontife pour lequel jétais saisi dun grand respect, et auquel jétais attaché comme à ma mère, je fis mes premières armes et commençai à lautomne de 1861. Ma tâche nétait environ que de douze cents confessions annuelles quil fallait aller recevoir par petits groupes sur une assez grande étendue de terrain comme vous savez quil se pratique. La cruelle mort ayant moissonné comme deux beaux épis murs[mûrs], MrMr Landre et Joanno, une tâche plus forte que par le passé pesa sur ceux qui restaient à la brêche[brèche]. Lannée 1864 nous vit dans le coin de la vigne que Mr. Joanno cultivait avec tout de zèle et de laquelle il senvola pour léternel repos.
Nous parcourûmes toutes les trâces[traces] de ses pas, et après avoir visité de plus six chrétientés as-[assez] considérables qui se trouvaient sur notre passage, lesquelles appartenaient soit à Mgr Daveluy soit à feu Mr. Landre ce cher et excellent confrère, nous visitâmes encore le quart de notre district accoutumé que Mgr Berneux avait parcouru aux trois quarts. Cette année le chiffre de nos confessions annuelles sélevait à plus de deux mille cinq cents et le nombre des autres sacrements administrés avait accru en proportion. Mr. Aumaitre nous ayant été donné ; censé devenu grand je dûs[dus] quitter les ailes de la Mère et laisser ce cher confrère sy glisser avec bonheur, il eut le district que je visitais. Depuis deux à trois ans la maladie diminuait singulièrement les forces de Mr. Féron, sa besogne était une des plus rudes de la mission. Le père de famille qui avait toujours l il ouvert sur ses ouvriers envoya Mr. Féron au district de Mr. Joanno que nous venions de visiter tout entier, là les routes étaient moins longues et beaucoup plus faciles, la place laissée vacante par Mr. Féron fut occupée par nous. Notre territoire à cultiver sétendait sur quatre provinces, Tchiong-Thieng et Kieng-sang au midi Kang-ouen et Kieng-Kei provinces centrales. En lannée 1865 nous le visitâmes tout entier sans trop de fatigues, en 66 nous nen navions encore vu quun peu plus de la moitié lorsque lorage éclata. Notre humble habitation dans les temps de lété pendant les loisirs de ladministration était à 24 lieues de la Capitale, dans la province de Tchiong-tchieng, canton de Mok-tchieun, au petit hameau appelé Soi-ha-kol. Situé sur une grande hauteur, comme un nid daigle, ce village est encadré par une couronne de montagnes boisées, peuplées de tigres et dun accès très-difficile ; aussi la solitude et la retraite y sont complètes, le missionnaire traqué partout comme une bête fauve, peut-il en ce lieu de paix, au souffle dune brise pure, sortir sans témoins dehors sa chaumière, aller jouir dans quelque site charmant, des beautés de la nature étalées et prodigués sous ses yeux, ou de la contemplation de la voute[voûte] céleste. Pour ladministration 1866 nous voulions tenir la même route quen 1865 cest-à-dire commencer par les provinces du midi pour terminer par les provinces centrales, mais M. Petitnicolas qui était venu nous rendre visite au commencement doctobre, en notre asyle de Soi-ha-kol nous fit changer didées et nous commençâmes par les provinces centrales pour finir par celles du midi. Je fais cette observation parce que si nous avions entrepris notre route ainsi que nous lavions déterminée, en nous même nous nous serions trouvée dans les provinces centrales quand la persecution[persécution] éclata et nous eussions été pris indubitablement comme tous les confrères des environs de la Capitale, tandis que léloignement où je me trouvais alors, minstruisit à point sur létat des choses, et quand la fureur des flots inonda mes parages, jétais au fond du secrêt[secret] com-[comme] le poisson au fond de la mer en temps de tempête. Notre administration commença au quatrième dimanche doctobre fête de la Pureté de la Ste Vierge. Au commencement de décembre nous étions rendu au collège St. Joseph de Pairon auprès de Mr. Pourthié et Petitnicolas, les montagnes et la petite vallée de Pairon étant enclavées dans notre district. Pendant dix jours entiers je me délassai dans la délicieuse compagnie de ces Vénérés et bien chers confrères ; ce que lorange est au gant, ce que la joie pure est au c ur, ainsi fût notre halte auprès deux. Notre gaieté était dun tel entrain quil semblait quon se réjouissait pour la dernière fois ici bas, cétait comme le dernier sourire damis partants et se donnant rendez vous pour une grande partie de plaisirs qui bientôt va avoir lieu ; Jusquà ce jour je ne puis me rappeler cette dernière entrevue sans émotion. Au mois de Janvier une grande distance nous séparait déjà du lieu de ce frais et suave repos, lorsque le feu de la tribulation commença à sapprocher de nous, bientôt nous enveloppant il nous pénétra tout entier. Un malheureux noble nommé Hoang dont nous vous avons déjà mainte fois entretenu, ne vivait que de més des mêmes sentiments que lui, il ravageait quelques unes de mes chrétientés, sabattant tantôt sur celle-ci tantôt sur celle là comme le rapace vautour. Si à la suite de ces maux deux de nos enfants Tjieun Xavier et Ni Jean remportèrent la glorieuse palme des martyrs deux autres succombèrent, et terrifiées par les ravages et les hurlements du loup affamé plusieurs chrétientés redoutaient de recevoir le ministre envoyé du Seigneur. Enfin nous pouvons nous glisser sans bruit au milieu delles verser le baume sur plus dune blessure, donner le Vin de la force à un grand nombre. Tout-à-coup Dieu nous arrête par une maladie régnante, un chrétien à la fleur de lâge qui en était attaqué meurt sous nos yeux. Mr. Petitnicolas appelé auprès de nous, nous prodigua ses soins et grâce à son expérience, un mois après notre maladie quoique nous fussions encore bien faibles, nous reprenions nos travaux.
Vers le 20 février lorsque nous nous trouvions dans notre 1ère chrétienté, nous reçumes[reçûmes] une nouvelle lettre de Mgr Berneux, car Sa Grandeur nous avait déjà écrit sur la fin de Janvier, dans cette nouvelle mission qui fut la dernière, Mgr fut arrêté le 23…… Le souffle qui précède lorage déjà se fesait[faisait] entendre, alors nous nous arrêtâmes. Nous étions à quarante lieues de la capitale, à trois lieues de la ville de Moun-Kieng où deux jours auparavant nous avions donné les sacrements, cétait dans le district de cette ville de la province de Kieng-sang, Hansil était le nom du village où nous nous trouvions ; bâti sur les flancs de la longue chaine[chaîne] de montagne appelée So-Paik-San, composé de quinze chaumières, ce hameau était divisé en cinq petits grouppes[groupes] de trois cabanes chacun perdus dans les sinuosités ou ramifications des So-Paik-San.……
Nous parûmes prendre congé des chrétiens de Hansil qui avaient tous reçus les sacrements, pour nous rendre à Soi-ha-Kol notre résidence dété, mais en réalité nous ne les quittions point, ayant mis dans notre confidence le catéchiste et deux hommes des plus pregidents[présidents] du village, nous allions en secrêt[secret] des autres dans le grouppe[groupe]de maison le plus reculé pour nous y tenir en retraite. Notre petite case un quart trop petite pour sy coucher dans sa largeur, était suffisante pour nous y étendre dans sa longueur……
Vers le quinze mars un chrétien de la ville de Moun Kieng nommé Pak Mathias, et son beau frère qui nétait que cathécumène[catéchumène] vinrent en notre village pour acheter du millet. On crut dans notre petit conseil que cétait une occasion que Dieu envoyait pour nous retirer ailleurs, pendant trois à quatre jours seulement. La ville de Moun-Kieng ne compte guère que quinze chrétiens qui y vivent inconnus, lasyle y était beaucoup plus sûr que dans un village tout chrétien et connu comme tel dans les environs. Le cachecumène[catéchumène] fut le dernier à se resoudre[résoudre] à me recevoir chez lui, cest quen effet il y allait de sa vie si jy eusse été pris, cependant il se résolut et nous partîmes tous trois la nuit vers onze heures ; favorisés par une demi obscurité, nous traversâmes heureusement les quatre à cinq villages payens qui étaient sur notre route et vers deux heures du matin nous entrions à Moun-Kieng dans la maison de Mathias. La chambre où je me tins nétait point habités, elle était remplie de grands vases de terre et de meubles, on entassa ces objets les uns sur les autres jusquà ce que jeus une place suffisante pour my étendre. Pak Mathias et son beau frère nétaient point nobles, et selon les usages de Corée, tout le monde pouvait entrer et pénétrer dans leur maison…… Retournons à hansil lui-dis-je, mais comme il nous est impossible de faire même la moitié du chemin avant que le jour ne paraisse, gagnons au plutôt le sommêt[sommet] de quelques montagnes et par un long circuit qui nous fera éviter tous les villages qui sont sur la route nous arriverons le soir à hansil. Nous avions bien raison de sortir de Moun-Kieng, car les satellites de cette ville y connurent notre arrivée, ils en parlèrent beaucoup, mais quand ils vinrent pour me prendre jétais parti.……
Enfin jarrivai vers trois heures du soir sur le sommêt[sommet] des montagnes de Hansil, ci et là on voyait les différents grouppes[groupes] de maisons de ce hameau……Enfin jallais entrer dans la cour commune qui sétend devant ces trois maisons, lorsque levant les yeux je maperçois que les hommes qui étaient là étaient des payens des satellites sans doute, je voulais sortir de limpasse où jétais déjà entré en retournant à la montagne, il était trop tard, on me cria : arrête... où vas tu. Ils coururent à moi et marrêtèrent. Les deux femmes que javais vues descendre de la montagne avec un homme étaient deux Chrétiennes quil avait pu saisir dans leur fuite. Ils marrachent le petite paquet que je portais, ils me poussent en me frappant aux épaules, et menferment dans une chambre.…… Voyant que je différais de répondre à leurs demandes, une chrétienne Tjieun Barbe, se présenta aussitôt et dit : cet homme est mon père, il est sourd ne le voyez-vous pas, dites moi ce que vous lui voulez et je me charge de le lui faire entendre.…… Tjieun Barbe leur dit : mon père ici présent nétant point de ce village ne peut rien arranger, mais emmenons le à la montagne et appelant les hommes qui y sont cachés nous réglerons cette affaire.……
Les chrétiens qui étaient cachés sur la cîme[cime] ou dans le creux des rochers, entendant les paroles de Tjieun Barbe ; dirent, notre père est pris nous ne pouvons rester ici, allons et sil le faut sachons mourir avec lui ; et ils descendirent. Les premiers qui arrivèrent se rendirent à la maison avec mon gardien et je fus laissé seul, quavait-on besoin dun homme qui ne parlait point ? Dautres chrétiens, arrivant à lendroit où jétais nous causâmes ensemble. Je leur disait ces satellites sont bien singuliers, ils ne demandent que de largent et ne parlent point de religion. Tout en se disant satellites ne seraient-ils point des voleurs dit quelquun, ce mot fut comme un désillement[dessillement ?] des yeux pour tout le monde, les apparences et les probabilité se fortifient : on demande à ces hommes puisque vous êtes satellites, dites-vous, pourquoi navez vous pas apporté avec vous des chaines[chaînes] ou des cordes selon lusage des satellites en pareille circonstance, veuillez aussi nous montrer les signes que portent tous les satellites pour preuve de leur mission. La fourberie fut découverte cétait les voleurs travestis en faux satellites. Les chrétiens prennent alors le dessus, ils châtient en imprudents, et les laissent aller en liberté.……
Je restai deux à trois jours dans ma petite cellule et on sétonnait toujours grandement que hansil ne fut point visité, il était connu cependant pour village chrétien. Vers le 19 mars un chrétien Ni Jean du village payen de Moun San au district de Ham-Tchiang vint à Hansil.…… Pour suivre les règles de la prudence il fut décidé dans notre petit conseil que jirais pour quelque temps chez Ni Jean lequel moffrait de grand c ur sa maison pour asile, elle était à six lieues de distance. Nous partîmes la nuit et quoique nous traversâmes plusieurs villages payens nous arrivâmes heureusement le lendemain au matin à Moun-san chez Ni Jean.……
En ce temps-là six missionnaires déjà avaient reçu la palme du martyre et Mgr Daveluy avec Mr. Aumaitre et Huin après avoir été torturés à la Capitale descendaient en province pour y être martyrisé. Jusqualors ayant seulement entendu dire que cétait pour prendre les prêtres Européens que tout le monde, et chrétien et payens souffraient, jeus quelques pensées de me livrer moi-même au mandarin ; cependant je déterminai cinq jours en lhonneur des cinq plaies de N.S. pendant lesquels je lisait tous les jours la passion de Jésus Christ, jeûnais et fesais[faisais] quelques prières pour connaitre[connaître] la volonté de Dieu, et pour obtenir la force dexecuter[dexécuter] mon dessein si Dieu ny mettait obstacle ; le mercredi saint dernier jour je lus même la passion selon les quatre évangelistes[évangélistes], après cela je fus étonné de la manière dont le désir de me livrer disparaissait en moi. Vers le soir un chrétien de Hansil, que tout danger y avait disparu mais quil me raconterait plus tard comment tout sétait passé : cest quen effet il était très-difficile de causer où jirai. Cette nuit même du mercredi au jeudi saint, accompagné seulement de Thomas je partais pour Hansil. Chemin fesant[faisant] arrivés à un petit monticule doù nous étions déjà assez loin de Moun-san nous nous assîmes pour manger quelques fruits secs que nous avions apportés. Tout était silentieux[silencieux] dans la nature……Après quelques courtes paroles nous continuâmes notre route. Arrivé à hansil, on vint aussitôt shumilier et demander pardon. Je les punis et un jour après, le vendredi Saint je les recevais de nouveau au tribunal de la confession. Cétait en ce grand jour que Mgr DAcônes et Mr. Mr. Aumaitre et Huin versaient leur sang pour la foi à Sou-rieng, mais je lignorais.
Dans les fêtes de Pâques que je passai enseveli dans ma cellule, jappris que The-tji-kol petit village chrétien éloigné de 6 à 7 lieues navait pas été visité par les satellites. Ce village navait pas reçu les sacrements depuis dix-huit à vingt mois. Croyant que lédification ces autres chrétientés demandait que je ne restasse point à hansil, je songea à aller à The-tji-kol.…… Après avoir traversé la première nous nous égarames[égarâmes] en montant la seconde et ce fut avec assez de peine et avec une perte de temps que nous retrouvâmes le sentier et que nous arrivâmes au sommêt[sommet] de la deuxième montagne ; Celle-ci est la limite qui sépare la province de Kieng-sang de celle de Tchiong-tchieng, nous entrions dans cette dernière.……
Dans langle de deux routes dont lune droite allait au milieu de la ville, et lautre à gauche, celle que nous suivions, passait a[à] côté, il y avait une auberge. En passant devant elle nous apercevons quelque chose de blanc sous le toit cétait un homme et nous le sûmes bientôt car il nous écrit : où allez vous?……Bientôt il est suivi de quatre autres cétaient des satellites deux de la Capitale et trois de Nieun-phong. Thomas voulait sexpliquer mais il nen était plus temps nous étions saisis tous deux et on nous accusa plusieurs fois dêtre des chrétiens qui fuyaient.… Mais ils ne se prononcèrent point et dans une suspense de jugements, ils me poussèrent à lépaule disant : viens à lauberge quon texamine. Pendant ce temps Thomas avait marché, il était déjà près de la maison, lorsque je le vis se débattre au milieu de trois satellites, ils se réunissent tous cinq pour ne point léchapper, pour moi qui semblait de meilleur accord je les suivais tranquillement……
Sur cette pensée je fais signe à ceux qui mentouraient daller en avant, comme si je voulais rester un peu en arrière aussitôt que jeûs un pas sur eux, je pris le large. Lautre qui se sauve, cria tout le monde. Plusieurs courent après moi, je les entends, mais Dieu intervient encore en fesant[faisant] tomber une ceinture contenant 550 sapeques[sapèques] que je portais autour de mes reins, jamais auparavant je navais porté de largent dans mes voyages cétait toujours ceux qui maccompagnaient qui en étaient chargé, Dieu me lavait fait prendre parce que cela devait me servir, en effet le son de sapèques tombant sur les pierres fut parfaitement connu de ces gens ; ils navaient pas besoin dy voir ils se jettent dessus et me laissent à ce prix. Thomas fut emprisonné traduit devant le mandarin comme Chrétien nous parlerons de lui dans la suite.……
Grâces à Dieu, étant entré dans une autre vallée je la reconnus pour y avoir passé autrefois, jétais à deux lieues environ de Hansil, je sentis renaître mon courage et je marchai même dun bon pas. Le jour touchait à son déclin lorsque jentrais dans la gorge qui conduit à Hansil, mais lorsque la nuit commença elle devint tellement obscure, que quoi quà une petite demi-heure de lendroit où je me rendais je mégarai de nouveau dans les ramifications de la montagne appelé So-Paik-san, je passai la nuit toute entière à aller dun côté et de lautre, à grimper et à descendre les montagnes…… Le jour commençait lorsquaprès avoir tourné une petite montagne je tombai sur un grouppe[groupe] de trois maison je ne le reconnaissais point comme jétais, mais entièrement épuisé je my dirigeai et arrivé à dix pas delles je reconnus la chaumière où je voulais me rendre là où était ma petite cellule ; jy entrai avec la plus grande surprise des gens de la maison qui se mirent à pleurer en me voyant dans létat pitoyable où jétais. Dieu certainement mavait rétiré[retiré] des bras de la mort au moment où je ne my attendais pas ; que ce soit pour sa plus grande gloire, pour mon salut et le salut des autres.
Quand aux trois payens, ils me prirent pour le démon et le bruit courut dans les villages payens des environs…… Les chrétiens me prodiguèrent leurs soins avec le plus grand dévouement, mais laffaire de Jou Thomas emprisonné jeta leffroi dans le village, sa femme personne très-simple et fort incapable pour toutes sortes de choses, laissée seul avec trois enfants en bas âge, fut pour moi une croix plus pénible que celle dont javais été chargée, et ne fit quaugmenter le malaise des habitants ; ses cris et ses pleurs journaliers me perçaient le c ur, les paroles de consolation et de foi que je lui donnai très-souvent la remettent peur quelques instants, puis comme un enfant elle se remettait à pleurer et ses trois enfants pleuraient aussi. Je dis et fis dire plusieurs fois aux chrétiens du village ; de recommander à Dieu cette affaire de Jou Thomas, et la position de sa femme et de ses trois enfants qui navaient aucun parent auprès desquels ils pussent se réfugier……
Japportai mon fardeau le dimanche matin François envoya son fils chercher le sien quil avait laissé avant de descendre la ravine. Pour nous dédommager des peines que nous avions eues, ce dimanche nous fîmes banquet, le bon vieux ordonna de tuer le chien de la maison, jen mangeai et tout le monde de la famille mais surtout François sen régalèrent. Deux à trois jours après notre arrivée Dieu nous donna une grande consolation, Thomas fut élargi sans apostasie par une protection toute spéciale de Dieu, et revint au sien de sa famille.
Cependant le bruit courait dans les environs que je demeurais à hansil, plusieurs chrétiens vinrent pour en avertir ceux de ce village. Je jugeai à propos de partir malgré les larmes de ces chrétiens dévoués, le chemin que javais à faire était de vingt lieues au moins, je devais voyager de jour, dans des pays entièrement payens manger et coucher dans les auberges payennes, je devais même repasser par cette ville de Ieun-phong où javais été pris, lentreprise était très-difficile mais Dieu y mit encore la main dune manière sensible.
Je fis nos vingt lieues en deux jours, sans voyager la nuit, mangeant, couchant au milieu des payens, nous couchaient jusque dix personnes dans une même chambre, nous étions tous côté à côté car la local était petite. Jarrivais sans grand accident au village chrétien de Sambakol, canton de Tchin-tchieun, après y avoir donné les sacrements annuels et avoir baptisé quatre payens adultes que la persécution était loin déloigner de notre sainte religion je me rendis à ma résidence dété, Soi-hakol, vers la fin du mois de mai jy fis la clôture de ce beau mois avec autant de pompe que je pus, quelque temps après Mr. Féron vint demeurer avec moi jusquà notre départ de Corée.…
2. 병인박해기(1866~1871년)와 무인년(1878년)의 목천 출신 순교자
○치명일기 : '치명일기', 서울교구, 1895. * 번호는 '치명일기' 수록 일련 번호. ○증 언 록 : 드브레 주교 정리,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필사본),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 * 번호는 필사본의 정리 번호. ○치명사적 : '병인(박해)치명사적'(필사본), 절두산순교기념관 소장. * ‘치명사적 23-45’는 ‘병인치명사적 권23, 45쪽’을 말함. |
1) 병인년(1866년) 순교자 : 7명
(1) 배문호(베드로)
① 치명일기, 511번
목천 소학골에서 살더니 본읍 포교에게 잡혀 이에 공주로 옮겨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 24세요, 때는 병인 11월 초 8일 이러라.
② 증언록, 16번
배 베드로 화첨은 본디 충청도 면천(沔川) 사람이라. 그 조부가 신유년(1801년)에 청주에서 치명하고 여러 곳으로 이사하여 살더니, 목천 소학동에서 살 때 병인년을 당하여 산으로 피하여 있다가 무진년 4월에 산에서 온 식구가 다 잡혀 서울로 와서 교하여 죽고, 그 손자 배문호는 공주에서 치명하였으니, 베드로 나이 56세요, 때는 무진년 5월 17일이라. <목격자 : 용인 검은정이76) 사는 배화첨의 손녀 배 막달레나>
③ 증언록, 52번
'치명일기' 509에 있는 최 베드로(천여)와 510에 있는 최 라자로(종여)와 511에 있는 배 베드로와 512의 고 요셉, 네 사람이 함께 목천 포교에게 잡혀 공주에서 치명함을 죽은 죄인의 삼촌 배 안드레아가 친히 보았나이다. <증언자 : 배 안드레아의 조카 진산 저귀골77) 사는 배 안드레아>
④ 치명사적, 1-19
배 베드로 화첨이
배 베드로는 본디 충청도 면천 사람이라. 그 조부 신유년에 청주서 치명하고, 여러 곳에 이사하여 살더니 목천 소학동서 살 때 병인년을 당하여 산에 피해 있다가 무진년 4월에 산에서 온 식구가 다 잡혀 서울로 와서 교하여 죽고 그 손자 배문호는 공주서 치명하였으니, 베드로 나이 56세요, 때는 무진년 5월 17일이라.
④ 치명사적, 1-62
진산 저귀골 배 안드레아가
'치명일기' 509에 있는 최 베드로와 510에 있는 최 라자로와 511에 있는 배 베드로와 512에 있는 고 요셉, 네 사람이 함께 목천 포교에게 잡혀 공주로 가 치명함을 죽은 죄인의 삼촌 배 안드레아가 친히 보았나이다.
⑤ 치명사적, 6-2
배문호와 고 요셉은 충청도 목천 소학골 살며 열심 수계하고 서로 화목도 잘하여 서로 노끈으로 목을 매고 이르되 “이 모양 치명하면 곧 천당 가겠다.” 하고 치명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문호는 아내와 의존하고 동정을 지키며 강 신부(즉 칼래 신부) 주신 철사 띠를 주야로 허리에 띠고 강 신부에게 나아가 고신 극기하는 법을 배우더니 병인년 10월 초 8일에 목천 포졸에게 요셉과 함께 잡혀갈 때 다 홍역병으로 거의 사경이라. 관전에 들어가니 관가 (관원이) 묻되 “너희들이 천주학 하느냐?” 하자 대답하되 “하나이다” 하였다. 또 “배주(背主) 배교하라.” 하거늘 함께 대답하되 “만만코 죽사와도 배반치 못하겠나이다.” 하고 (배)문호가 십계를 자세히 풀어 이르자 “누구에게 배웠으며, 일당은 얼마나 되느냐?” 하자 대답하길 “부모에게 배우고 일당은 대지 못하겠나이다” 하였다. 즉시 하옥한 후 두세 차례 문목에 형벌이 무수하고 천주를 배반하라 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조만과를 서로 통경하니 노령배가 이르되 “도가 다 되었다.” 하더라.
순장 분부에 공주로 이수시키라 하기로 10월 초 8일에 영문으로 갈 때 소리를 높여 경문을 화답하여 외우니 장교배도 즐겨듣고 배교한 두 사람도 이 모양을 보고 즉시 통회하고 자원으로 따라 함께 공주 진영에 들어갔다. 영장 첫 추열에 “성교하느냐?” 하며 일당을 대라 하며 형벌이 본관에서보다 더욱 심하였으나 도무지 대지 아니하였다. 즉시 옥에 내려 병인 11월 초 8일에 교하여 치명하니 문호 나이 24세요, 세 사람의 나이는 알지 못한다 하더라. 문호 영문으로 갈 때 그 모친에게 편지하여 이르길 “어머님, 아무쪼록 수계하여 내 뒤를 따라오소서.” 하고 또 이르되 “동곳을 보내오니 나를 보는 듯이 이 동곳을 보시며 나와 고 요셉은 목마름을 오줌으로 푸나이다.” 하였더라. 이 네 사람의 시체는 지금 청주 절골78) 사는 강치운이가 찾아 묻으니라.
이 사적도 전주 대성동79) 배 베드로 경집에게 듣고 기록하나이다.
⑥ 치명사적, 8-47
목천 쇠악골(즉 소학골) 배 회장의 큰 손자는 대대로 열심 수계하더니 중년에 강 신부 훈계를 듣고 더욱 열심히 더하여 병인 첫 군난에 치명하지 못함을 항상 말하였다. 병인 11월 군난에 잡히매 고 서방과 함께 사사로운 문목에 곧 두 사람이 “천주 성교를 봉행하노라” 하니 의심 없이 공주 감영으로 들어올 때 서로 억지로 엇메고 감영까지 이르도록 흔연한 모양으로 치명에 대해 강론만 하더라. 진영에 이르러 영장 문목에 “천주 성교를 봉행하노라.” 하니 즉시 상영으로 올려 상영 문목에도 하노라 하였다. 옥으로 내려올 때 서로 위로하고 즐기다가 즉시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둘이 다 20세요, 때는 강생 1866년 병인 11월이더라. 쇠악골 사람이 많이 잘 죽었다 하나 자세함을 몰라 기록하지 못하노라.
(2) 최종여(라자로)
① 치명일기, 510번
최(천여) 베드로 아우러니, 목천 소학골에서 잡혀 먼저 본관으로 갔다가 이에 공주로 옮겨 형과 함께 치명하니 나이 42세러라.
② 증언록, 52번 :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③ 치명사적, 1-62 :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④ 치명사적, 6-2
최 라자로 종여도 최 베드로 천여의 아우라. 목천 소학골서 그 형과 함께 살면서 열심 수계하더니 병인 10월 초 10일에 목천 포채에게 잡혔는데, 마침 홍역병으로 거의 사경에 이르러 스스로 걸어가지 못하니 포교들이 목을 매어 끌고 본관으로 가 며칠 갇혔다가 공주 진영으로 가 그 형 베드로와 함께 11월 초 8일에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 40세라.
이 말도 배 베드로 하더라.
⑤ 치명사적, 23-73
라자로는 본디 경상도 사람이라. 선대에 문교함으로 부모의 교훈을 받아 성교에 열심히 있고 본성이 순량하여 이웃 사람이 모두 일컫더니 그 부모 고향을 떠나 산곡에서 농사하여 생활하며 여러 해를 지내더니 병인년 군난에 목천 살 때 본관 포교에게 그 형제 잡혀가 본관 문목에 “너 천주학을 하느냐?” 하자, 대답하길 “하나이다” 하였다. 하옥한 지 10일 후 영문으로 올려 또 영장 문목에도 전과 같이 성교를 봉행하노라 하매 이 두 사람 외에 다른 교우와 함께 대개 15일 후 병인년 23일에 모두 교하여 죽이니 나이 40여세요, 증인은 그 아들 공주 서재 요골([현재 '서재'는 유구읍 명곡리 1구, '요골'은 명곡리 2구)80) 사는 최 안드레아니 나이 32세라.
(3) 최천여(베드로)
① 치명일기, 509번
목천 소학골 사람이러니, 병인년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공주 영문으로 올려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 55세요, 때는 11월 초 8일이러라.
② 증언록, 52번 :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③ 치명사적, 1-62 :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④ 치명사적, 6-2 : 최종여(라자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⑤ 치명사적, 23-73 : 최종여(라자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4~5) 서 스테파노와 그의 아들
① 치명일기, 479번
본디 강원도 사람으로서 목천 장자동 살더니 본관에 잡혀 잠깐 유감을 입었다가 이에 통회하고 공주로 들어가 치명하니 나이 44세요, 때는 병인년이러라.
② 치명사적, 6-56
서 스테파노는 목천 장자동 사람으로 본읍 포졸에게 병인년 10월 20일에 잡혀 본관에 들어가 배교한 고로 형벌을 받고 영문에 올라가며 동 교우의 권면으로 마음을 돌리고 공주 진영에서 교하여 치명하니라.
이 말은 청주 절골 사는 강치운이에게 들었노라.
서동(徐童, 즉 서씨 아들)은 치명한 스테파노의 아들이라. 그 부친 치명 후에 마침 청주 포교 지나감을 보고 자원하여 잡혀 청주에서 교하여 치명하니 때는 병인 12월이요, 나이는 한 20세러라.
이 말도 청주 절골 강치운이에게 들었노라.
③ 치명사적, 23-54
스테파노는 본디 강원도 사람이라. 부모의 교훈함을 받아 착실히 수계하며 고향을 떠나 산곡으로 가 농사하여 생활하며 본성이 순량함은 이웃 사람이 모두 칭찬하지 않은 이 없더라. 병인년 군난에 목천 본관에 잡혀가 관장 문목에 굴하고 나왔더니 후에 또 본관에서 잡아 책과 일당을 대라 하되 하나도 대는 일이 없더라. 그 아들이 책을 일러 포교들이 가다가 관가에 드림을 보고 생각건대 “이제는 살아나갈 보람이 없다” 하며, 위주하여 죽기를 결단하고 전에 굴함을 원통히 여겨 여러 사람 듣는 데서 “내 전에 대답한 말은 살기를 뜻한 일이니 이제 전의 잘못함을 뉘우친다. 나, 전에 헛말 함을 보속하는 빙거(憑據)로 돈을 내어 포교에게 술을 먹이며 전에 잘못함을 뉘우치니 이후로는 뜻을 변치 아니하고 죽으리라” 하고 옥에 갇힌 지 몇 날 후 공주로 간 지 대개 15일 후에 교하여 죽이니 나이 44세요, 증인은 그 조카 신창 간양골81) 사는 서 루도비코니 나이 39세라.
(6) 채 서방의 며느리
① 치명일기, 513번
배문호와 함께 치명하였다 하더라.
② 치명사적, 8-47
채 서방 며느리는 그중에 뛰어나는 치명이라 하나 자세히 알지 못하노라.
(7) 고 요셉
① 치명일기, 512번
목천 소학골에서 살더니 배문호와 함께 잡혀 치명하니라.
② 증언록, 52번 :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③ 치명사적, 1-62 :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④ 치명사적, 6-2 :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2) 정묘년(1867년) 순교자 : 2명
(1) 배 바오로
① 증언록, 24번
'치명일기'에 불참한 배 바오로는 죄인 조부로서 본디 목천 소학동 살더니, 청주 포교에게 잡혀 청주로 가 재수(在囚)하였다가 서울로 가 치명하였으니, 그 잡혀간 사연과 서울로 가 치명한 사연을 지금 살아있는 전주 대성리 죄인의 삼촌 배 베드로가 친히 보았나이다. 때는 무진 6월 19일이요, 나이 62세. <증언자 : 배 안드레아의 조카 진산 저귀골 사는 배 안드레아>
② 증언록, 48번
'치명일기'에 불참한 배 바오로는 죄인의 부친으로, 본디 목천서 살다가 청주 포교에게 잡혀 청주서 3일 후에 서울로 가 치명한 사연을 죄인의 모친 박 체칠리아에게 자세히 들었나이다. 때는 정묘 6월 19일이요, 나이는 61세. <증언자 : 배 마르코,82) 목격자 : 박 체칠리아>
③ 치명사적, 1-30 : 증언록 24번과 동일
④ 치명사적, 1-60 : 증언록 48번과 동일
(2) 윤 바오로
① 치명일기, 748번
목천 사람으로서 진천 퉁점리83)에 와서 살더니 정묘년에 청주 포교에게 잡혀 옥중에서 10여 교우와 함께 통경하다가 치명하니라.
② 치명사적, 23-188
윤 바오로라 하는 이 충청도 목천 성가산(즉 성거산) 서들골에서 살다가 이사하여 안성 성남서 병인 풍파에 피신하여 소솔을 데리고 진천 퉁점이에 와서 유하였다. 본디 당대 교우로되 열절한 마음과 초성한 지위가 타인에 뛰어나는 고로 외교간 모르는 사람이 없더니 정묘년을 당하여 청주 포교에게 잡혀 청주 중영(中營)에 가 치사할 때 각처 교우 10여 인이 함께 법장에 나가 관원이 분부하되 “너희들이 천주학을 한다 하니 천주학 글을 외우라” 하였다. 여러 교우 모두 두려운 마음으로 경문을 외우나 분명치 못하거늘 바오로 일어서며 하는 말이 “너희들이 이런 때를 당하여 어찌 이렇듯이 경문을 똑똑히 외우지 못하느냐?” 하고 고성하여 주모경을 외우니 좌우의 관광 제인(諸人)이 모두 이르되 “이는 진실로 천주학의 괴수라” 한 후 용맹한 다짐을 올리고 초성함으로 치사하니라. 그 아들이 하나 충청도 천안 땅에 있으나, 본명은 또한 바오로이되 아직 수계는 하지 아니한다 하고 자세히 말하기는 원주 부흥골84) 사는 이 요셉이니라.
③ '박순집 증언록', 136번 : 치명사적, 23-188과 동일
3) 무진년(1868년) 순교자 : 5명
(1~2) 김 사도 요한과 김성회(바오로) 형제
① 증언록, 10번
(김백심) 암브로시오85)의 큰아들 바오로와 셋째 아들 사도 요한 형제는 진천 굴티86)서 살다가 정묘년에 피신하여 목천 복구정으로 이사하여 매양하고 살더니, 무진 4월에 경포에게 잡힐 때에 성경과 성물을 포교가 탈취하여 갔고, 서울로 가서 치명하니라.
4부자의 이름은 암브로시오는 백심, 그 아들 바오로는 성회, 파비아노는 성서, 바오로 나이 46세, 파비아노는 38세, 사도 요한은 30세로 신품 공부하던 사람이라.87) 잡힐 때 본 이는 충주 배야티88) 사는 조 프란치스코라.
② 증언록, 129번
김(성회) 바오로는 본디 진천 굴티 살다가, 피신하여 목천 복후경(복구정의 잘못) 살더니, 경오(무진의 잘못) 4월에 동생 (사도) 요한과 함께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서 치명하니라.
잡힐 때 본 이는 바오로의 아들 (김) 야고보니, 살기는 공주 서재([현재 '서재'는 유구읍 명곡리 1구),89) 똑똑히 들은 이는 조 프란치스코니 살기는 충주 배(야)티.
③ 치명사적, 1-11 : 증언록, 10번과 동일
④ 치명사적, 2-126 : 증언록 129번과 동일
(3) 배 안드레아
① 증언록, 24번
'치명일기'에 불참한 배 안드레아는 이 위의 배 바오로의 아들이라. 그 아비가 잡혀 서울로 갔다는 말을 듣고, 서울로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수원에서 유다스를 만나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 치명하였으니, 그 잡힘과 서울로 가서 치명함을 이 위에 있는 (전주 대성리 사는) 배(경집) 베드로가 친히 보았나이다. 때는 무진 6월 23일이요, 나이 35세. <증언자 : 배경집 베드로의 조카 배 안드레아>
② 치명사적, 1-30 : 증언록 24번과 동일
(4) 배화첨(베드로)
① 증언록, 16번 :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② 치명사적, 1-19 :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행적과 동일
(5) 최 안드레아
① 치명일기, 420번
치명한 (최종여) 라자로의 아들이러니, 무진(1868)년에 죽산 포교에게 잡혀 치명하니, 나이는 21세요, 때는 7월이러라.
② 치명사적, 23-74
안드레아는 최(종여) 라자로의 아들이라. 그 부친은 병인년 군난에 치명하고 피하여 외교집에 다니며 일하고 생활하더라. 무진년 4월에 죽산 포교에게 잡혀 책과 일당을 대라 하며 혹형이 무수한데, 의연히 참고, 한 사람도 대지 않았다. 죽산으로 가 여러 달을 지내더니 후에 아우에게 편지하되 “나도 아직 살아 있으나, 위주(爲主)하여 죽을 터이니, 너희 부디 주명 대로 혹 살아나거든 열심히 수계하며 본분을 잃지 말고 서로 우애하여 화목을 잃지 말고 지내다가 죽은 후 천국에서 반가이 만나자” 하였다. 국령이 지엄한 고로 7월에 교하여 죽이니 나이 21세요, 증인은 그 아우 공주 서재 요골(현재 '서재'는 유구읍 명곡리 1구, '요골'은 명곡리 2구) 사는 최 안드레아니 나이 32세라.
4) 경오년(1870년) 순교자 : 1명
(1) 조덕삼(시몬)
① 치명일기, 186번
(조치경) 타대오90)의 형이라. 목천 칠안면 공심리에서 살더니, 경오 2월 23일에 경포에게 잡혀 치명하니 나이 38세러라.
② 증언록, 109번
'치명일기' 186의 조 시몬 덕삼은 타대오의 형이라. 목천 칠안면 공심리 살더니, 경오 2월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 가 치명하니라. <목격자 : 용인 사리티91) 사는 시몬의 동생 바오로>
③ 치명사적, 1-146 : 증언록, 109번과 동일
④ 치명사적, 6-64
조 시몬 덕삼이는 타대오의 형이라. 병인년에 두 번 잡혔다가 두 번 도망하였더니 경오 2월 23일에 경포와 본읍 포채에게 잡힌지라. 때에 목천 칠안면 공심이 사니라. 포졸이 묻되 “너, 천주학을 하느냐?” 하니 “하노라” 하고 본관에 들어가 첫 추열에 고복하니 옥에 내렸다가 며칠 후에 서울로 보내는지라. 관령 대로 가다가 온양읍에 들어 그 고을에 갇힌 여러 교우와 함께 서울로 간 후 다른 사정은 모르고 치명한 소문만 들었노라. 나이 38세러라.
이 말은 그 당질 청주 만월문92) 사는 야고보가 하더라.
5) 신미년(1871년) 순교자 : 3명
(1) 이 요한
① 치명일기, 164번
면천 가새울 사람으로서 기해년에 전라도로 피신하고 이미 아산 일북면 쇠재93)로 도망하였더니, 신미년에 본읍 포교에게 잡혀 서울로 올라와 그 아들과 손자 함께 상대하여 좌포청에서 치사하니 때는 신미 3월 19일이러라.
② 증언록, 34번
이 요한,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 3대가 경기 손골94)에서 병인 첫 군난에 쫓기어 용인 남성골로 내려와, 베드로가 용인 포졸에게 9인이 함께 잡혀 일곱 사람이 배교하고 다 나오고 베드로하고 다른 사람하고 둘만 갇혔더라. 포졸 행수가 원 모르게 놓아 또 그곳에 살더니, 정묘 10월에 또 삼대가 잡혔더라. 그 포교하는 말이 “다 누구냐?” 하되, 베드로 말이 “다 내 식구라” 하니, 그 포교 말이 “지금 영(令)은 엄하나, 그럴 수 없으니 하나만 가자” 하니, 베드로가 “가자” 하였다. 베드로의 부친 요한의 말이 “하나만 갈 테면 내가 가겠다.”고 부자 다투니, 그 포교 익히 생각하다가 다 놓고 간 후에 충청도 아산 일북면 쇠재 가서 살았다.
경오년 2월 23일 야경에 서울 좌변 포교와 본골 장교하고 와서 잡으며 묻는 말이 “성교하느냐?” 한즉, “물을 것 없다. 성교 아니하면 내가 너에게 잡힐 것 없다” 하고 그 길로 본읍에 들어가 하루 묵고, 본골 장교하고 요한․베드로․프란치스코 3대가 함께 서울 좌포청으로 들어가서 문목할 때 대답이 한결같다 하더라.
그때 본 사람은 김 서방인데 자(字는) 치서라. 살기는 전라도 진안 턱골95)이요, 그 사람이 잡힐 때는 충청도 신창 남방재96) 살고, 또 한 사람은 그때 천안 송산 사는 정 서방이라. 그 사람의 자는 모르고, 그 사람 부친의 자는 관지라. 그 군난 후에 살기는 안성 청룡 가련이97) 부근 점터에 가서 산다 하더라. 베드로 아들 형제 요셉․야고보는 강원도 원주 부흥골 산다.
본 고향은 충청도 면천 가새울. '치명일기' 번호는 이 요한 164, 아들 베드로 165, 손자 프란치스코 166.
③ 치명사적, 1-46 : 증언록, 34번과 동일
④ 치명사적, 23-182
이 요한이라 하는 이의 아들의 본명은 베드로요, 손자의 본명은 프란치스코라. 본디 충청도 면천 가새울에서 나서 자랐으며, 양반의 후예로 구교 집 자손이라. 본성이 강직하여 고향에 있으면 수계하기 조당된다 하고 목천 성가산(즉 성거산) 서들골로 이사하여 와 살았다. 신분을 감추고 중인 행세를 하자, 모든 교우들이 말하되 “어찌 중인 행세하느냐?”한 즉 대답하되 “만일 양반 행세를 하면 내게도 해로울 뿐 아니라 이후 자손에게도 요긴하지 아니하겠기로 그리하노라”하고 이 모양으로 10여 년을 지냈다.
기해(1839년) 풍파 때에 좋은 표양으로 열심 수계할 뿐 외에 또한 회장 소임이라 각처의 포졸이 잡으려한 즉, 도망하여 쫓기어 다닐 때 한 번은 피하여 칡덤불 속에 묻혔더니 포졸이 지나가며 지팡이로 덤불을 두드리면서도 모르고 지나갔다. 그 후에도 극히 잡으려 하니 그곳에서 견딜 수 없어 전라도로 피신하였더니 상처하고 자녀 남매를 데리고 도로 올라오며 좌우 친구가 면환(免鰥 : 아내를 얻어 홀아비의 처지를 면함)하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하는 말이 “자녀를 다 키운 후에나 어찌할지 모르겠다.” 하고 미루다가 자녀를 성취한 후에도 환부로 지내더라.
병인 대란을 당하여 이리저리 지나다가 정묘 10월에 아들 둘까지 식구 다섯을 데리고 산곡에 숨었더니 포졸이 좌우로 옹위(擁衛)하고 오거늘 다시 피할 법이 없는지라. 안연히 앉아 보매 장교 중 수두와 극친한지라. 묻는 말이 “이 다 누구이뇨?” 하니 둘째 아들이 대답하되 “저 댁은 노 생원님이요, 그 다른 사람 둘은 나의 아들 형제라” 하니 도수자 하는 말이 “만일 다른 사람 같으면 모두 잡아갈 것이로되 이왕 정친(情親)한 터에 차마 할 바 아니로다. 모두 잡아가게 되면 다 죽을 것이니 이 일을 어찌하리오? 위의 영(令)이 지엄치 아니하면 그저 가겠으나, 할 수 없이 한 명만 갑시다” 하였다. 아들 형제 일시에 답하되 “그리하라” 한즉 요한이 먼저 말하되 “그러면 내가 가리라” 하니, 아들 베드로가 말하길 “내가 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부자 서로 정선(定先)하므로 포졸이 보다가 하는 말이 “이 생원댁네는 가면 단단히 죽고 아니 가면 죽지 아니할 것이오, 또한 댁을 잡지 아니하여도 우리는 죽지 아니할 것이니 그냥 가자” 하고 당부하되, “이후에 만일 댁 일로 우리가 죽을 터이면 댁에서 오시오” 하였다. 아래 포졸이 “여러 해 못 할 일이라.” 하매 수두가 가로되 “이 양반은 결단코 그렇지 아니할 것이니 다시 말하지 말라” 하고 부탁하되, “이곳에 있다가는 잡힐 것이니 바삐 어디로 가시오” 하고 갔다.
수개월 후에 충청도 아산 일북면 소재(즉 쇠재) 살더니 신미년 2월 24일 삼경에 본관 포졸에게 요한과 베드로와 프란치스코 3대 일시에 잡히매 모두 탄평(坦平)한 마음이라. 포졸이 묻되 “천주학 하느냐?” 하자, “아니하면 어찌 너희에게 잡혔으리오?” 하고 본관에 갔다가 서울로 가는 길에 본집에 돌아와 점심을 시킬 때 비록 내 집이나 방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 앉아 있었다. 프란치스코의 어린 아들이 나오매, 요한이 안고 눈물을 흘리거늘 프란치스코가 여쭙되 “조부께옵서 어찌 이런 대사를 당하여 경천한 육정을 생각하시나이까?” 하고 아내를 불러 바삐 제 아이를 데려가라 하고 3대가 같이 본관으로 갔다. 그 아내 따라가 같이 치명하고자 하거늘 재삼 당부하되 “아무리 가도 잘 죽기를 예탁치 못할 것이니 부질없다.” 하고 지성으로 만류하니 할 수 없이 아내는 도로 집으로 갔다.
법정에 가 문목할 때 본관이 묻되 “너희가 천주학을 하느냐?” 하자, 요한과 베드로 대답하되 “물을 것이 없나이다. 천주학을 아니 할 양이면 어찌 이곳에 잡혀 왔사오리까?” 하니 다시는 묻지 아니하였다. 프란치스코는 그때 나이 21세요, 인물이 지묘한고로 관원이 죽이기를 아까워하며 프란치스코더러 묻는 말이 “네가 천주학을 한단 말이냐? 아니한다고 말 한 번만 하면 방송하겠다. 무슨 연고로 3대가 함께 죽으려 하느냐?” 하였다. 대답하되 “아무리 3대라도 몫이 다 각각인 즉, 어찌 경천한 육신을 돌아보아 지존지대한 대군대부를 배반하오리오?” 하자, 관원이 왈 “그놈 미친놈이니 말할 수 없다” 하였다. 또 좌수와 절친한 고로 가만히 기별하였으되 아무쪼록 한 말만 하면 죽기를 면할 법이 있다 하고 부탁이 자자하매 여일(如一)한 말이 “아무리 만 번을 죽는다 하기로 우리 대은주(大恩主)를 모른다 하리오?” 하였다. 모두 말하되 “아마 약을 많이 먹었나보다. 아무리 죽이기 아까우나 할 수 없다” 하고 그 이튿날 본관이 교졸(校卒)로 압령(押領)하여 서울 좌포도청으로 압송하였다. 즉시 좌포도청에 간 즉, 군졸의 말이 “애처롭다. 3대를 함몰할 수 없으니 프란치스코는 도로 돌아가 부모 처자와 동생들을 데리고 잘 살라” 하니, 대답하되, “내가 이런 좋은 때를 항상 바라고 기다렸거늘 어디로 가겠느냐?” 하니, 모두 말하길 “미쳤다” 하였다. 옥에 가두지 아니하고 놓아두니 밖으로 다니며 구경도 하며 세월을 보내다가 3월 19일에 3대 일시에 치사함을 목도하고 말한 이는 그때 한 목에 함께 갇혔다가 방송된 두 사람이니, 지금 살기는 전라도 진안 덕골(터골의 잘못) 김치서요, 경기 안성 가련리 사는 정 서방이니라.
프란치스코의 아들 바오로, 지금 살기는 원주 부흥골이니라.
(2) 이 베드로
① 치명일기, 165번
요한의 아들이니 부친과 함께 치명하니라.
② 증언록, 34번 : 이 요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③ 치명사적, 1-46 : 이 요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④ 치명사적, 23-182 : 이 요한의 순교 행적과 동일
(3) 이 프란치스코
① 치명일기, 166번
요한의 손자니, 조부와 부친과 함께 치명하니라.
② 증언록, 34번 : 이 요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③ 치명사적, 1-46 : 이 요한의 순교 행적과 동일
④ 치명사적, 23-182 : 이 요한의 순교 행적과 동일
6) 무인년(1878년) 순교자 : 2명
(1~2) 배명중(바오로)과 배문보(요한) 부자
① 증언록, 16번
배 바오로 명중은 배(화첨) 베드로의 둘째 아들이라. 그 부친과 한 동네서 살다가 군난을 피하여 공주 질울98)서 살 때인 정축년(1877년) 정월에 경포에게 온 식구가 다 잡혔더니, 그 부자만 서울로 와서 좌변에서 부자 함께 교하여 죽으니 나이는 54세요, 때는 무진 5월 23일이라. 그 아들은 배(문보) 요한으로, 그 부친과 함께 치명하니 나이는 19세라. 증인은 (배명중의) 딸 용인 검은정이 사는 배 막달레나라.
② 증언록, 24번
'치명일기'에 불참한 배 바오로와 그 아들 문보 부자 두 사람이 공주 질울에서 살다가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 치명함을 지금 살아있는 은진 박도일이 함께 잡힌 고로 그 치명함을 친히 보았나이다. 때는 무인년 4월 초 10일이요, 나이 50여세. <증언자 : 진산 저귀골 사는 배 안드레아>
③ 치명사적, 1-19 : 증언록, 16번과 동일
④ 치명사적, 1-31 : 증언록, 24번과 동일
7) 순교 연도 미상 순교자 : 3명
(1~2) 김 도미니코와 김인원
① 증언록, 95번
김 회장 도미니코는 본디 경기 용인 병목골 살다가 병인 군난을 당하여 열세 식구를 데리고 산중으로 피신하여 여섯 달 동안을 근근이 지내더니, 근동 외인 10여 명이 작당하여 와서 17세 된 여식을 겁탈코자 하거늘, 도미니코 셋째 아들 요한이 본디 여력이 있는지라, 제 누이를 데리고 뒤로 물러가며 대답하기를 “만일 범수(犯手)한 자면 이 돌로 쳐 죽이리라” 하니, 저놈들 말이 “여자를 내어주지 아니하면 포교를 불러 너희를 몰살시키리라” 하였다. 할 수 없어 도미니코가 허락하여 보내고 주야로 탄식하는 말이 “내가 치명을 하여야 이 죄를 벗겠다.” 하더니, 그 산에서 목천 북면 베장골로 가 살더니, 기사 10월 초 7일에 죽산 포교에게 잡혀갔으나,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며, 그때 함께 잡힌 김인원은 본디 공주 사람으로 죽산 백해서 살더니, 병인 군난에 피신하여 도미니코와 함께 살다가 같이 잡혔으나, 어떻게 되었는지 또한 알지 못하니라. 이상은 진안 동장 김 회장 요한이 기록함이라.
② 치명사적, 1-120 : 증언록, 95번과 동일
(3) 김 아가타
① 치명일기, 439번
본래 목천 사람이러니 홍산 방고개에서 살 때 공주 포교에게 잡혀 다른 교우와 함께 치명하니 나이 36세러라.
② 증언록, 120번
김 아가타는 본디 충청 목천 사람이라. 본성이 순량하여 부모께 효양하며 본업을 극진히 하여 열심 수계하더니, 군난을 피하여 다니다가 홍산 방고개 살 적에 공주 포교에게 그 친조카와 함께 잡혀 형벌하며 배주하라 하나, 만만코 배주는 못 한다 하니, 공주로 가 영장이 묻거늘 전같이 죽기로 다짐하여 굴치 아니하고 함께 잡힌 교우를 권면하여 옥에 있은 지 오래지 아니하여 교하여 죽이니 나이 36세요, 증인은 정산 솔티 사는 그 장부 박 요셉이니 나이 63세라.
③ 치명사적, 2-17 : 증언록, 120번과 동일
<부록 2>
병인박해기와 무인년의 목천 출신 순교자 일람표(교회 순교록)
<병인년(1866년) 순교자> : 7명
이름 | 출생지 | 거주지 | 체포일 | 순교일(나이) | 순교지 (형식) | 기 타 |
배문호 베드로 | 목천 소학골 | 1866.10.8. (치명사적 1866.11월) | 1866.11.8 (24세) (치명사적 20세) | 공주 (교수) | 배화첨 베드로(회장)의 장손. 칼래 신부와 교류한 후 아내와 동정을 지킴 시신은 충주 절골 사는 강치운이 묻었으며, 현재 무덤은 사리목에 있다. | |
최종여 라자로 | 경상도 | 1866.10.10 | 1866.11.8. (42세) | 최천여 베드로(509)의 동생. 처음에는 배교하였다가 후에 통회함. 시신은 충주 절골 사는 강치운이 묻음 | ||
최천여 베드로 | 1866.11.8. (45세) | 최종여 라자로(510)의 형. 시신은 충주 절골 사는 강치운이 묻음 | ||||
서 스테파노 | 강원도 | 목천 장자동 | 1866.10.20 | 1866 (44세) | 1차 배교 후 곧 통회함 |
이름 | 출생지 | 거주지 | 체포일 | 순교일(나이) | 순교지(형식) | 기 타 |
서 스테파노 아들 | 미상 | 목천 | 1866.12 (약 20세) | 청주 | ||
채서방 며느리 | 1866.11.8 | 공주(교수) | 배문호 베드로와 함께 순교 | |||
고 요셉 | 목천소학골 | 1866.10.8 | 배문호 베드로 및 최천여·종여와 함께 순교. 시신은 충주 절골사람 강치운이 묻음 |
<정묘년(1867년) 순교자> : 2명
이름 | 출생지 | 거주지 | 체포일 | 순교일(나이) | 순교지(형식) | 기타 |
배 바오로 | 목천 소학동 | 1867. | 1867. 6. 19 (61세) (증언록·치명사적1868년) | 서울(교수) | 청주 포교에게 체포되고 3일 후 서울로 압송되어 치명 | |
윤 바오로 | 목천 | 목천서들골, 진천퉁점이 | 1867. | 1867. | 청주(교수) |
<무진년(1868년) 순교자> : 5명
이름 | 출생지 | 거주지 | 체포일 | 순교일(나이) | 순교지(형식) | 기 타 |
김 사도 요한 | 덕산 방축골, 진천 굴티, 목천 복구정 | 1868.4 | 1868.4(30세) | 서울(교수) | 1866년 서울 순교자 김백심 암브로시오의 3남. 페낭 유학생, 배론 신학생 | |
김성회 바오로 | 1864.4(46세) | 1866년 서울 순교자 김백심 암브로시오의 장남. 막내 김 사도 요한과 함께 순교 | ||||
배 안드레아 | 목천 소학동 | 1868.6.23 (35세) | 1867년6월19일 서울에서 순교한 배 바오로의 아들 | |||
배화첨 베드로 | 면천 | 1868.5.17 (56세) | 회장. 조부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청주에서 치명. | |||
최 안드레아 | 1868.7(21세) | 죽산(교수) | 1866년에 순교한 최종여 라자로(치 510)의 아들 |
<경오년(1870년) 순교자> : 1명
이름 | 출생지 | 거주지 | 체포일 | 순교일(나이) | 순교지(형식) | 기 타 |
조덕삼 시몬 | 목천 칠안면 공심리 | 1870.2.23 | 1870(?) (38세) | 서울(교수) | 조 타대오의 형. 1866년에 2번 체포되었다가 도망함 |
<신미년(1871년) 순교자> : 3명
이름 | 출생지 | 거주지 | 체포일 | 순교일(나이) | 순교지(형식) | 기 타 |
이 요한 | 면천 가새울 | 목천 서들골, 손골, 용인 남성골, 아산 쇠재 | 1871.2.24 (치명사적1870.2 23) | 1871.3.19 | 서울(교수) | 구교우, 양반 출신, 子베드로, 孫프란치스코 같은날 3대 순교 |
이 베드로 | 1871.3.19 | 父요한, 子프란치스코와 같은 날 순교 | ||||
이 프란치스코 | 1871.3.19. (21세) | 祖요한, 父베드로와 같은 날 순교 |
<무인년(1878년) 순교자> : 2명
이름 | 출생지 | 거주지 | 체포일 | 순교일(나이) | 순교지(형식) | 기 타 |
배명중(배원성) 바오로 | 목천 소학동, 공주 질울 | 1877.1 | 1878.4.10(50세?) | 서울(교수) | 배화첨 베드로의 차남, 子배문보(요한) 함께 순교 | |
배문보(배일룡) 요한 | 1878.4.10(19세) | 배화첨 베드로의 孫배명중 바오로의 子, 父와 함께 순교 |
<순교 연도 미상 순교자> : 3명
이름 | 출생지 | 거주지 | 체포일 | 순교일(나이) | 순교지 | 순교형식 | 기 타 |
김 도미니코 | 용인 병목골, 목천 북면 베장골 | 1869.10.7 | 회장. 김인원과 함께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추측됨 | ||||
김인원 | 공주 | 죽산 백해, 목천 북면 베장골 | 김 도미니코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추측됨 | ||||
김 아가타 | 목천 | 홍산 방고개 | (36세) | 교수 | 친조카와 함께 잡힘 |
<주>······································
1) 천주교사에서 말하는 ‘교우촌’이란, 그 구성원들이 천주교 신자 즉 교우(敎友)들만으로 이루어진 비밀 신앙 공동체 즉 신자 공동체형(信者共同體形)으로서의 자연 부락을 의미한다. 다음에 설명한 ‘공소’(公所)들은 주로 이들 교우촌 중에서 설정되었으며, 그중에서도 중요한 공소는 넓은 ‘지역 본다(本堂)’의 사목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반면에 박해기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비신자들 사이에 섞여 사는 혼거형(混居形) 공동체도 많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공동체는 교우촌으로 볼 수 없다. 한편 박해기의 교우촌을 형태별로 구분하면,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공동체가 유지되는 정주형(定住形) 교우촌과 신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처음에 형성된 공동체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전이형(轉移形) 교우촌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2) 교회법에 따르면, ‘공소’란 본당(本堂)보다 작은 교회 단위를 의미하는데, 때로는 그 지역 신자들이 모이는 집회 장소로서의 ‘공소집’ 즉 ‘경당’(經堂, 혹은 講堂)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따로 공소 예절이 행해지며, 사제의 방문으로 성사가 집행되거나 미사가 봉헌되는데, 사제의 첫 순방 날짜가 공소 설립일이 된다.
3) 차기진, <天安 일대의 敎友村과 公所> II․III, 『교회와 역사』 188․189호, 1991; <목천 거주 徐氏 집안의 순교 계보>, 『교회와 역사』 238호, 1995.
4) 『日省錄』, 순조 신미 4월 7일~12월 20일(『承政院日記』, 가경 16년 동일); 순조 임신 4월 27일~10월 15일(『승정원일기』, 가경 17년 동일) ;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조선 순교사 비망기』, 필사본), 1859~1860,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pp. 223~225.
5) 내포 지역의 천주교 전파와 이존창의 활동, 내포 신자들의 타지 이주 현황 등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을 참조.
- 兪炳基․朱明俊, <忠淸道의 天主敎 傳來>, 『崔奭祐神父華甲紀念 韓國敎會史論叢』,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車基眞, <조선 후기 內浦天主敎會의 變貌와 그 性格>,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제30회 백제 연구 공개강좌), 1997.
- 김수태, <사도 이존창과 내포 신앙 공동체의 형성>, 『내포 천주교회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천주교 대전교구 솔뫼성지, 2002.
- 차기진, <내포 지역의 복음 전파와 사목 중심지 조사>, 위의 책, 2002.
- 차기진, <이존창의 생애와 신앙>, 『교회사연구』 19집, 2002.
6) A. Daveluy, op. cit., p. 224. 원 베드로 형제는 홍주의 비신자 옹기점에서 일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된 적이 있었다. 진천에서 체포되어 공주 감영으로 압송된 후 원 베드로의 형은 배교함으로써 유배형을 받았으나, 베드로만은 끝까지 형벌을 이겨내고 신앙을 증거한 뒤 옥사 순교하였다.
7) 『邪學懲義』 권1, 來關秩, 1801년 3월 29일. 한편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단성에 도배된 천안의 최두거(崔斗去)가 나오는데, 그가 최구두쇠인지는 알 수 없다(『사학징의』 권1, 各道罪人作配秩, 충청도 천안).
8) 류한영·차기진,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 양업교회사연구소, 2000, 36쪽.
9)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최 바시리오 우정 씨 이력서>, 필사본 ; 배티 사적지 편,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3집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천주교 청주교구, 1996, 72~73쪽. 당시 영렬․영겸 형제는 서울을 떠난 직후 곧바로 서들골과 한덕골에 정착한 것으로 보이지만, 셋째 영눌 즉 최경환은 즉시 수리산으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강원도 김성, 경기도 부평을 거쳐 수리산에 정착하였다(절두산순교기념관소장, 『기해․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101, 1886년 11월 4일, 최 베드로의 증언). 이 자료의 증언자 최 베드로는 곧 최양업 신부의 첫째 동생인 최의정(야고보)으로 1827년 서울 공덕리(혹은 낙동)에서 태어났다. 위의 수속록은 1839년과 1846년의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82명의 시복을 위해, 즉 교황청 조사를 위해 1882년~1905년 사이에 조선교구에서 증인들을 불러 순교자들의 생애와 순교 행적을 조사하고 검토하면서 작성한 재판 기록으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목격 증언록』이라고도 한다.
10) 서들골은 성거산 남서쪽 자락에, 소학골은 그 동쪽 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목천읍 석천리의 산방이와 먹방이[墨方里]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편 소학골 북쪽에는 사리목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동되었다.
11) 『기해·병오박해 시복 조사 수속록』 회차 69, 1884년 4월 23일. 위의 내용 중에서 ‘20여세에 류 신부께 영세하고’는 본래 ‘17세에’라는 구절 앞에 기록된 것이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순서를 바꾼 것이다. 중국인 유방제(파치피코, 본래의 중국 이름은 余恒德) 신부는 1834년 1월(양력) 조선에 입국하여 1836년 12월 3일까지 사목하다가 중국으로 귀국하였다.
12)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p. 260~263.
13) 차기진, <천안 일대의 교우촌과 공소> II, 18~19쪽.
14) 이에 대한 내용은 다음의 본문을 참조.
15) <최 바시리오 우정 씨 이력서>, 『증언록과 교회사 자료』, 83쪽.
16)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p. 460~461.
17) 류한영·차기진,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 양업교회사연구소, 2000, 96쪽.
18) 1850년 설립 당시부터 1851년 말 이전까지 조선교구 신학교는 다블뤼 교장 신부가 교우촌을 순방할 때마다 함께 이전되던 이동식 신학교였다(<다블뤼 신부가 부모님에게 보낸 1850년 9월 말의 서한>, 『다블뤼 문서』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394~395쪽, 399~400쪽). 그러다가 1851년 말 다블뤼 교장 신부가 신학교만을 전담하게 되면서 정주형 신학교로 운영될 수 있었다(<다블뤼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 바랑 신부에게 보낸 1853년 10월 6일 자 서한>, 『다블뤼 문서』 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4, 128쪽 ; <다블뤼 신부가 경기도 손골에서 부모에게 보낸 1853년 9월 18일 자 서한>, 『다블뤼 문서』 I, 432~433쪽). 다블뤼 신부의 신학교가 배티 교우촌에 있었다는 기록은 <페롱 신부가 루세이유 신부에게 보낸 1858년 9월 25일 자 서한>(A-MEP, vol. 577, pp. 1205~1206)을 참조. * 여기에서 A-MEP는 ‘파리외방전교회 고문서고’의 약자이다.
19) 배티 사적지 편, 『최양업 신부의 전기 자료집 제1집 “최양업 신부의 서한”』, 천주교 청주교구, 1996, 185쪽, 249쪽. 페낭 유학생 이 바울리노, 김 사도 요한, 임 빈첸시오 중에서 김 사도 요한은 최양업 신부가 선발한 신학생으로 추정된다. 한편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배티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훗날 홍콩에서 제주 표류인 김기량(金耆良, 펠릭스 베드로)을 만나 교리를 가르쳐 준 페낭 유학생 이 바울리노가 배티 교우촌을 김기량에게 알려 주면서 그곳 회장인 장 시몬을 찾아보도록 한 것이 분명하다(차기진 외, 『제주 순교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시복․시성을 위한 자료집』, 천주교제주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 2002, 17~18쪽).
20) 류한영·차기진,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 양업교회사연구소, 2000, 102쪽.
21) A. Launay, Mémorial de la M.E.P(1658~1913), Paris, 1916, f. 173 ; <페롱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57년 9월 17일 자 서한>, A-MEP, vol. 579, f. 289. 황모실에 있던 메스트르 신부의 무덤은 1970년에 발굴되었으며, 그 유해는 합덕 성당 구내로 옮겨졌다가 훗날 대전교구 성직자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22) <페롱 신부가 루세이유 신부에게 보낸 1858년 9월 25일 자 서한>, A-MEP, vol. 577, ff. 1205~1206 ; 차기진 외, 위의 책, 17~18쪽. 배티에서 성거산 소학골․서들골까지는 직선거리로 11~12km, 용덕리·대문리를 거쳐 가는 거리는 15~16km가 된다.
23) 페롱 신부는 1860년 성탄절에 홍주 거더리(현 당진시 합덕읍 신리 105-2 도촌) 공소를 방문하고 신자들에게 성사를 준 일도 있었다(<페롱 신부가 루세이유 신부에게 보낸 1861년 7월 28일 자 서한>, A-MEP, vol. 579, ff. 568~574).
24) M. L'Abbe Renard, Vie de Michel Alexandre Petitnicolas, Paris, 1891, pp. 240~254.
25)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분도출판사, 1980, 324~325쪽.
26) 충청도의 4개 사목 중심지는, 다블뤼 신부의 방사골(현 아산시 송악면 마곡리의 ‘방아사골’로 추정됨), 리델(F. Ridel, 李福明) 신부의 진밭(현 공주시 사곡면 신영리), 랑드르(J. M. Landre, 洪 요한) 신부의 황모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 그리고 다음에 설명한 조안노 신부의 둠벙이였다. 당시의 사목 중심지는 대체로 해당 선교사의 사목 관할 구역 안에 두어졌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27) <페롱 신부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1862년 9월 23일 자 서한>, A-MEP, vol. 579, f. 619 ; <페롱 신부가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1862년 10월 23일 자 서한>, A-MEP, vol. 579, f. 641.
28) <칼래 신부가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3년 10월 25일 자 서한> 및 <칼래 신부가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 자 서한>, A-MEP, vol. 579, ff. 685~687, ff. 1265~1292.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남부 지역의 순방은 다블뤼 주교가 담당하였다.
29) <페롱 신부가 루세이유 신부에게 보낸 1863년 8월 28일 자 서한>, A-MEP, vol. 579, f. 667.
30) <칼래 신부가 미리내에서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3년 10월 25일 자 서한> 및 <칼래 신부가 상해에서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 자 서한>, M.E.P, Vol. 579, pp. 685~687, pp. 1265~1292.
31) 오메트르 신부는 1863년 6월 조선에 입국한 이래 손골 교우촌에 머물면서 조선어 공부를 하였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하였다.
32) <칼래 신부의 1867년 2월 13일 자 서한> 참조.
33) <칼래 신부의 1867년 2월 13일 자 서한> 참조.
34) 1866년(고종 3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엄격하게 말해서 ‘1866년에 전개된 박해’를 말한다. 그러나 이전의 박해와는 달리 병인박해는 1867년(정묘년), 1868년(무진년)으로 계속 이어졌고, 1873년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에서야 종결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특히 경우에 따라서는 1868년의 덕산굴총사건(德山掘塚事件, 일명 南延君墓 도굴사건)으로 가열된 박해를 ‘무진박해’(戊辰迫害)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고에서는 1866년 이후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박해를 ‘병인박해’의 연장으로 이해하였다.
35) 『병인치명사적』 권1, 1923년 2월 2일, 49쪽, 서 수산나의 증언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36번, 유 베드로의 증언.
36) <페롱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낸 1866년 9월 서한> 및 <칼래 신부의 조선 순교자 전기>, A-MEP, vol. 579, ff. 939~945, ff. 1225-20~1225-21.
37) 프티니콜라 신부의 충고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칼래 신부와 자신의 사목 관할 구역(경상도 중부 이북 지역)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고, 적절한 교우촌 순방 절차를 고려하여 충고를 해주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박해를 예견한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38) <칼래 신부가 부모님에게 보낸 1866년 6월 8일 자 서한>, A-MEP, vol. 579, ff. 884~891 및 <칼래 신부의 1867년 2월 13일 자 서한> 참조.
39) <칼래 신부의 1867년 2월 13일 자 서한>.
40) 한국교회사연구소 역주, 『리델 문서』 I, 1994, 75~85쪽 및 99~112쪽. 리델 신부는 7월 7일 산동 반도 웨이하이(威海)에 도착하였다.
41)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하, 분도출판사, 1980, 463쪽.
42) 『치명일기』, 정리 번호 513번 ; 『병인치명사적』, 8권 47쪽. 최씨 집안의 전승에 따르면, 채 서방이 아니라 최 서방, 즉 공주 순교자 최천여(베드로)이고, 따라서 교회 순교록의 순교자 ‘채 서방 며느리’는 ‘최천여의 며느리’로 고쳐야 한다고 한다(崔秉基 제공, <최씨 일가 순교자 가계도(江陵崔氏 堤學公派)>, 타자본). 그러나 『치명일기』에 “채 서방 며느리는 배문호와 함께 치명하였다 하더라”라고 나오므로, 채씨를 최씨로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만일 이 며느리가 최천여의 며느리라면 ‘최천여와 함께 치명하였다’고 할 것이지 ‘배문호와 함께 치명하였다’고 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최병기(시몬, 1991년 66세)는 목천 사리목(현 북면 납안리 사리목)에 거주하는 순교자 최천여의 후손이다.
43) 『치명일기』, 정리 번호 509~513번 ; 『병인치명사적』, 1권 19․62쪽, 6권 2쪽, 8권 47쪽, 23권 73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6․52번. 현존하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교회 순교록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우선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에 의해 예비 조사 단계에서 정리된 『치명일기』(1895년 간행)가 있다. 그리고 조사 수속 단계에서 교황청 재판(교구 위임 재판) 단계까지 계속 보완 수집된 자료들을 책자 형태로 묶은 『병인치명사적』(절두산순교기념관 소장, 필사본)과 드브레(Devred, 兪世俊) 보좌 주교가 정리해 놓은 일련의 증언 자료집(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내용이 풍부한 『병인치명사적』은 1923~1925년 사이에 총 25권으로 필사 정리되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22권뿐이다. 나머지 3권은 직접 순교자 시복에 관계된 것으로, 교황청 비밀문서고에 소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44) 『치명일기』, 정리 번호 479번 ; 『병인치명사적』, 6권 56쪽, 23권 54쪽.
45) 『치명일기』, 정리 번호 164~166번, 748번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34번 ; 『병인치명사적』, 1권 46쪽, 23권 74쪽, 182․188쪽.
46) 『치명일기』, 정리 번호 181․182번 ; 『병인치명사적』, 23권 56~58쪽 ; 차기진, <목천 거주 서씨 집안의 순교 계보>, 14~16쪽. 박해 후 서씨 집안 사람들은 신자들이 살던 예산 간양골(현 예산읍 간량리)에 정착하였다.
47) 류한영․차기진, 『교우촌 배티와 최양업 신부』, 양업교회사연구소, 173쪽.
48) 배문호의 본이 성주 배씨라는 사실은, 그의 후손이라고 하는 배석조(裵錫潮, 요셉, 1991년 71세)의 증언과 가승에 따른 것이다(차기진, <천안 일대의 교우촌과 공소> III, 15쪽). 배석조 집안은 박해가 끝난 뒤 천안 부원골(현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로 이주해 살았다.
49)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6번 ; 『병인치명사적』, 1권 19쪽.
50) St. A. Daveluy, Vol. 5,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1858년 필사 정리), M.E.P. 소장, pp. 98~99 ; St. A. Daveluy, Vol. 4,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조선 순교사 비망기, 1860년 필사 정리), M.E.P. 소장, pp. 78~79.
51) ‘용인 검은정이’(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는 박해기에 신자들이 거주하던 교우촌으로, 박해 이후 공소로 설정되었다.
52) 목격자로 나오는 배경집(裵敬執, 베드로) 회장은 부친 바오로와 형 안드레아가 서울에서 순교한 뒤 익산의 용안을 거쳐 전주 대성리(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에 정착하였으며, 1879년부터 전주 지방회장으로 활동하였다(호남교회사연구소, 『전동성당 100년사』, 천주교 전주교구 전동교회, 1996, 210쪽). 배 안드레아가 거주하던 ‘진산 저귀골’(현 금산군 복수면 구례리)은 박해 후 공소로 설정된 곳이다.
53) 드게트 신부는 1876년 5월 8일 황해도를 통해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79년 5월 16일(음력 윤3월 26일)에 체포되어 9월 7일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54) 『우포도청등록』, 무인(1878년) 정월 11일. 배원성은 다블뤼 주교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을 자백한 뒤 배교를 거부하였고, 아들 배일룡도 드게트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사실을 자백한 뒤 배교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위의 기록에는 처형 여부가 나타나지 않는다. 또 배원성은 1878년 당시 58세, 배일룡은 27세였으므로, 배원성의 부친 배화첨의 순교 당시(1868년) 나이가 56세라는 것은 잘못임이 분명하다.
55) 차기진, <천안 일대의 교우촌과 공소> III, 15쪽.
56) 최병기 제공, <최씨 일가 순교자 가계도> ; 차기진, 위의 글, 15~16쪽.
57) 『치명일기』, 정리 번호 421번 ; 『병인치명사적』, 23권 75~76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57번.
58) 최병기 제공, <최씨 일가 순교자 가계도> ; 차기진, 위의 글, 16쪽.
59)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83번 ; 『병인치명사적』, 1권 93쪽. 최성첨과 그의 장남은 내포 출신으로 안성 성남에 거주하다가 체포되어 1868년에 죽산에서 순교하였고, 최 요한과 동생은 내포 출신으로 안성 성남에 거주하다가 천안 만복동으로 이주해 살던 중에 체포되어 1878년 죽산에서 순교하였다. 다만, 순교록에 ‘최 요한의 사촌은 목천 서들골 사는 최원심 회장’이라는 내용이 첨부되어 있으므로, 소학골 출신의 순교자 최천여와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앞으로 최원심 회장의 가계가 확인되어야만 할 것이다.
60) 고길천(재호 바르나바) 제공, <사기점골 고제환의 비문>, 성거산 성지 소장, 2006년 3월. 고길천(재호)은 고제환의 후손이다. 다만, 위의 글에서 순교자 고 요셉의 생몰 연도를 1800~1866년으로 설명한 것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 요셉의 동료인 배문호(베드로)의 순교 당시 나이가 24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61) 『치명일기』, 정리 번호 385번, 426번, 474번 ; 『병인치명사적』, 23권 42쪽.
62) 『병인치명사적』, 6권 2쪽.
63) 청주 절골은 덕동 옹기마을 공소(현 청원군 강외면 만수리)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마을이었고(『뮈텔 주교 일기』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1893년 12월 10일), 절골 이웃에는 1896년에 공소로 설정되는 민태절(현 청원군 강외면 심중리)이 있었다.
64) 차기진, <천안 일대의 교우촌과 공소> III, 14~16쪽 ; 정지풍 신부 소장, <납안리 소학골의 무덤 조사 및 위치도>(가제). 다음에 설명하는 궁형지 무덤 위치도에 대한 설명도 이에 따랐다.
65) 정지풍 신부 소장, <소학골 순교자 무덤에 대한 증언과 위치도>(필사본).
66) 정지풍 신부 소장, <성거산 성지 무명 순교자 묘지에 관한 여러 증언들>(타자본). 1959년의 이장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은 고 장사손(고 김택률의 장인), 고 김택섭(김택률의 형), 고 김택률, 고 박임용(박동현의 숙부), 박동현, 최용기(요한, 최병기 시몬의 동생), 안기현 등 7명이었으며, 훗날 이장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 이들은 고 김택률, 배순자(배문호의 5대손), 박동현, 최용기, 최병기, 배석호․배정구(배문호의 5대손) 등이었다.
67) 정지풍 신부 소장, <증언들에 대한 성지 담당 신부의 증언>(타자본).
68) 차기진, <목천 거주 서씨 집안의 순교 계보>, 14~16쪽의 수정․보완본.
69) 순교자의 후손으로 확인되는 당진 본당 서중석(徐重錫, 요셉)의 증언 및 다음 본문의 자료 참조.
70) 순교 당시 서 베드로의 나이가 65세였다는 것은 잘못 기록된 것이 확실하므로 『병인치명사적』에 따라 26세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71) 손 루치아는 증언자 서 루도비코의 모친으로 순교자는 아니었다.
72) 병인박해는 1866년 2월 23일(음력 1월 9일) 포졸들이 서울의 베르뇌(S. Berneux, 張) 주교를 체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73) 내포 출신으로 경상도 곤악이(현 문경군 동로면 鳴田里의 건학이)에서 생활하던 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내포 출신으로 예목이(문경군 문경읍 中坪里) 회장의 아들인 이 요한은 경상도에서 체포된 후 공주로 옮겨져 1866년 1월 26일(음 1865년 12월 10일)에 순교하였다.
74) 다블뤼 주교와 오메트르․위앵 신부는 1866년 3월 30일, 충남 보령에 있던 수영의 형장(일명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75) 문산(汶山) : 현 경북 상주시 사벌면 퇴강리(退江里) 즉 ‘물미’의 옛 이름. 물미[退江]가 한자식 표기인 ‘문뫼’[汶山]로 와전된 것이다.
76) 검은정이 :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77) 저귀골 : 현 충남 금산군 복수면 구례리.
78) 절골 : 현 충북 청원군 옥산면 동림리의 상동림으로 추정된다. 이 절골은 덕동 옹기마을 공소(현 청원군 강외면 만수리)에서 10리 거리에 있는 마을이었고(『뮈텔 주교 일기』 I, 한국교회사연구소, 1986, 1893년 12월 10일), 절골 이웃에는 1896년에 공소로 설정되는 민태절(현 청원군 강외면 심중리)이 있었다.
79) 대성동 : 현 전북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80) 요골 : 현 충남 공주시 유구면 명곡리.
81) 간양골 : 현 충남 예산군 예산읍 간량리.
82) 『치명사적』(1-60)에는 증언자 배 마르코가 ‘고산 한대골’에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83) 퉁점리 : 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명암리의 퉁점.
84) 부흥골 : 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의 부엉골.
85) 김백심(암브로시오) : 초기 교회에서 지도층 신자로 활동하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서울에서 순교한 김의호(金義浩)의 아들이요 당시 강원도 평창으로 유배된 김희달(金喜達)의 아우. 신유박해 이후 모친을 따라 강원도 평창으로 가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장성한 뒤 충청도 맹골면 방축골(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석장리)로 이주했으며, 1866년 10월 16일에 체포되어 서울에서 순교하였다.
86) 굴티 : 현 충북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87) 김 사도 요한은 최양업(토마스)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54년 봄 말레이시아의 페낭(Penang)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가 1863년 오메트르 신부와 함께 귀국한 뒤 배론 신학교로 편입하였고, 후에 환속하였다.
88) 배야티 : 현 충북 음성군 금왕면 백야리.
89) 서재 : 현 충남 공주시 유구면 명곡리 1구.
90) 조치경(타대오) : 1868년 7월 죽산에서 순교하였다.
91) 사리티 :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
92) 만월문 : 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월문리.
93) 쇠재 : 현 충남 아산시 영인면 성내리의 금성(金城).
94) 손골 : 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95) 턱골 : 현 전북 진안군 마령면 덕천리의 터골. 다음에 수록한 『치명사적』, 23-182에는 ‘진안 덕골’로 나온다.
96) 남방재 : 현 충남 아산시 신창면 남성리.
97) 가련이 : 현 충남 천안시 입장면 도림리의 청룡저수지 남쪽 마을.
98) 질울 : 현 충남 공주시 정안면 고성리의 기동(基洞)으로, 일명 질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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