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문화숲길 18구간 (백제5구간 )추사 고댁
무한천을 따라 추사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추사고택으로 가는 길이다.
무한천을 따라 걷다 보면 무한산성도 자리 잡고 있다.
이 성은 신라 때 김유신의 둘째 아들 원술랑이 쌓았다고도 하며,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군대가 임존성을 함락하기 위해 주둔했던 곳이라 전해진다.
시골 길을 따라 걷다보면 추사 김정희선생이 뛰어놀던 곳 용산을 만나게 된다.
높지 않은 산엔 추사 김정희 선생의 필체가 가득하다.
내포문화숲길 속 문화자원
백제부흥군길: 예산역-예산대교-무한천 무한철교(45국도)-종경교(신암면)-용산 화암사-추사고택.
앞쪽으로 무한산성이 있다.
무한산성을 가기 위해 오르쪽으로 간다.
다시 왼쪽으로 가면,
무한산성 입구다.
그런데 안내판에는 무한산성이란 이름 대신 예산산성 이라고 되어 있다.
잘은 모르지만 고증을 통해 하나의 이름만 사용하면 어떨까 싶으며, 만약에 이름을 바꾼다면 그 취지를 설명해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무한산성은 오늘 걷는 길 중 유일하게 백제부흥군이 당나라 군을 맞이하여 싸웠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무한산성으로 오르는 길
그러나 실상은 무한산성과는 무관하게 홍살문도 있고,
홍살문을 올라서니
화랑묘로 가는 길이었다.
외삼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면으로 사당과 왼쪽으로 별채가 하나 있다.
화랑묘는 삼국통일을 이룬 김유신 장군의 화랑의 호국정신을 본받고 계승하고자 1965년에 세워졌다.
가락 예산군 종친회에서 세운 것으로, 이곳도 관리는 전혀 되고있지 않아 보인다.
화랑묘 왼쪽으로 난 길을 통해 무한산성으로 올라가 본다.
무한산성에서 내려다 본 화랑묘
분지처럼 되어 있어 외적을 막기에는 좋아 보이나,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있지 않은지 무한산성과
관련된 어떤 흔적도 찾을 수는 없었다.
추사기념관 앞쪽으로 세워진 추사 김정희 선생 동상
추사기념관으로 들어간다.
완당
추사 선생의 다른 호이다.
영의정을 지낸 고조부, 부마가 된 증조부로 이어지며 명문으로 발돋움 하였다.
추사고택 조감도
옹방강과 함께 그가 모신 스승이다.
좀 전에 호암사 병풍바위에서 보았던 "시경"의 탁본과
"천축고선생댁" 탁본
금석문에도 능했다는 추사
추사와 불교 그리고 초의선사
"명선" - 명과 선의 두 글자를 통해 차와 선이 둘이 아닌 경지를 보여준다.
제주도 유배기와 만년기
제주도 유배 시 역관이었던 그의 제자 이상적이 북경에서 구해다 주는 서책에 답례로 그려 주었다는 "세한도"
그가 남긴 많은 현판들
추사는 이 현판을 쓴 지 3일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추사기념관을 나와 주차장에서 카카오택시를 불러 예산역으로 돌아온다.
추사고택은 다음 6코스 때 다시 한번 찬찬히 돌아보자~^^
추사고택(秋史古宅).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옛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2동 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 지은
18세기 중엽의 건축물로서 당시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사랑채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
<석년> 글씨는 추사의 서자(庶子)인 김상우(金商佑 1817~1884)가 쓴 것이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였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안채 뒤편 언덕에는 추사 김정희의 영정을 모신 추사영실(秋史影室)이 있으며,
<추사영실> 현판은 김정희와 평생 막역한 사이였던 권돈인(權敦仁 1793~1859)의 작품이다.
고택의 오른쪽 담장에 달린 쪽문을 나서면 대대로 마셔온 석정(石井)이 있고,
거기서 100m쯤 가면 김정희묘(문화재자료 188)가 있다. 방마다 모사품이기는 하나 선생의 유묵이 걸려 있다.
후손이 세거(世居)해 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문화재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 매수하였다.
집 안에 있는 김정희의 영정과 도장, 염주, 붓과 벼루 등은 일괄 보물 제547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으며,
고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가 어려서 공부했던 절 화암사가 있다.
현재의 추사고택은 1977년 조선 양반집의 한 범본으로 서울의 대목수인 인간문화재 이광규 옹이 원래 53칸의 집을 반으로 줄여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