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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의 영웅적 덕행 1 [브뤼기에르 소(蘇)주교 심포지엄 2차 자료]
방종우 신부(가톨릭대학교)
1. 들어가는 말
브뤼기에르 주교는 단 한 번도 한국에 발을 디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직자 없이 신앙생활을 하던 조선 교우들의 편지에 관한 소식을 듣고1) 조선 땅의 전도를 자청하는 편지를 보내2) 조선 교구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
임명 이후 주교의 행적은 페낭의 출항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마닐라, 마카오, 푸저우, 장난, 즈리, 창즈, 시완쯔 교우촌까지 이르게 된다.3) 이는 오직 하느님과 조선 교우들을 향한 열망에서 비롯된 긴 여정이었다. 비록 조선 땅을 밟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 그의 열망은 이루어지지 않은 듯 보이지만 앞서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는 점, 조선 교회에 대한 상황의 기록, 복잡한 수도회 사이의 분쟁 혹은 협력 속에서 항구하게 조선 교회를 위한 해결책을 강구했다는 점, 조선입국에 대한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타진하며 신학생 양성과 새로운 선교사 파견의 다양한 가능성을 마련했다는 점, 이를 밑바탕으로 조선 교회 안에 신앙이 확고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열망은 결실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교의 행적을 종합적으로 보면 향주삼덕(向主三德, virtus theologica)과 사추덕(四樞德,
virtutes cardinales)의 모든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이에 먼저 향주삼덕과 사추덕의 개념을 간단히 살펴보자면 이는 그리스도교 윤리신학에서 가장 주요하게 여기는 덕으로 일곱 가지의 덕을 근원에 따라 두 가지의 그룹으로 나눈 것이다. 이중 향주삼덕은 하느님의 선물에 의해 주어지는 초자연적 덕이며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얻게 되는 덕으로, 신앙의 덕(信德), 희망의 덕(望德), 사랑의 덕(愛德)이다.4) 이 향주삼덕은 모든 인간적 덕들의 뿌리가 되는 것으로 종교생활의 내적원리이며 인간 구원을 위한 필수적인 덕, 하느님께 대한 기본덕이고 하느님이 주신 은총에 기인한다.
이 믿음과 희망 사랑 안에서 인간은 하느님께 자신을 자유롭게 개방함과 동시에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되며 이를 바탕으로 사추덕이 온전히 인간 안에 자리하게 된다.5) 사추덕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 이룩할 수 있는 자연덕으로 현명(賢明), 정의(正義), 용기(勇氣), 절제(節制)를 의미한다.12)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권능에 힘입어 이미 인간의 내면에 “초자연적 방식으로”13)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모든 인간 안에 내재하는 하느님을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한 ‘자연적 적합성’(aptitudo naturalis)로서 근본적인 질서를 이야기하는 것뿐이지 이것을 얼마나 인지하고 드러낼 수 있는가의 문제는 이성과 의지의 역량에 달려있다.14)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1테살 1,3)라고 선언함으로써 세 가지 덕을 일찍이 언급한다. 물론 성서에는 두려움, 신뢰심, 효성심과 같은 다른 ‘신학적 덕’ 역시도 언급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교회 전통에서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다른 덕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15)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로마 5,2).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이에 세 가지 덕을 보다 더 면밀히 살펴보자면, 첫 번째 믿음의 덕은 “하느님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것과, 거룩한 교회가 우리에게 믿도록 제시하는 모든 것을 믿게 하는”16)덕이다. 이 믿음으로 인간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게 되며, 하느님의 뜻을 알고 실천하고자 애쓰게 된다.17)
두 번째 희망의 덕은 “그리스도의 약속을 신뢰하며, 우리 자신의 힘을 믿지 않고 성령의 은총의 도움으로, 우리의 행복인 하늘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하는”18) 덕이다. 이는 단순히 세속적인 행복을 희망하는 것이 아닌 하늘나라를 향한 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다 구체적으로는 구원을 향한 희망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산상설교를 통해 참 행복의 의미를 선언함으로써 (마태 5,1-12 참조)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시련과 유혹을 이겨내고 하느님께 희망을 둘 것을 선언하셨다.
그러므로 이 희망의 덕의 동기는 무엇보다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약속에 대한 충실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희망에 있어 그리스도의 탄생과 구원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드러내 보이며, 부활 사건은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확고한 충실함에 대한결정적 증거가 된다.19)
세 번째 사랑의 덕은 “하느님만을 위하여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게 하는”20) 덕이다. 이렇듯 사랑의 덕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데, 먼저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사랑은 하느님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당신을 내어주셨고(갈라 1,4 참조) 인간을 먼저 사랑하셨다는 점에서(1요한 4,9) 사랑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 이에 인간은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을 부지런히 찾게 되고 그를 찾은 뒤에는 그것을 굳건히 붙잡는 방법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사랑은 덕이라 일컬어진다.21)
하느님께서는 이 사랑의 덕을 통해 인간에 게 하느님을 사랑할 힘을 주시지만 그러나 이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의지’에 속한다. 즉 사랑 의 덕은 인간의 의지에 작용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한 편 이 사랑의 덕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하는 끈”(골로 3,14)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닦아야 할 덕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애덕은 인간적 사랑의 능력을 하느님 사랑의 초자연적 완전 함으로 고양시킨다.22)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자연스럽게 두 번째 사랑의 대상, 즉 타 인을 사랑하게 된다. 이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특별히 “내가 너희를 사 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요한 15,12)라는 그리스도 선포에 서도 엿볼 수 있다. 형제애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1요한 4,20). 이러한 점에서 사랑의 덕의 두 가지 대상, 즉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타인에 대한 사랑은 불가분 한 성격을 지닌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으로부터’ 우러나 형제를 사랑할 때 ‘하느님으로부터’ 우러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 단일하고 똑같은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23)
지금까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무상으로 선사하시는 덕, 향주삼덕에 대해 살펴보았다. 궁극적 으로 이 세 가지 덕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의 완성을 지향하는 덕이며, 하느님 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여정이 며 그분과의 인격적인 일치를 위한 여정이므로 이 덕들은 필수적이다. 한편으로 하느님은 인간의 본성적 능력을 초월해 계신 분으로, 인간의 힘만으로는 사랑의 덕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점에서 인간의 사랑이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은 어디까지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초자연적인 영역으로 이끄실 때 비로소 인간은 하느님을 인식하고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사랑의 덕은 초자연적인 덕이라 할 수 있으며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해주는 중추적인 덕이라 할 수 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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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대목구 설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한은 1824년 유진길이 「조선교회의 암브로시오와 그 동료들」의 이름으로 교황에게 보낸 서한이다. 이 안에서 조선교우들은 일회적인 선교사 파견을 넘어서 안정적인 사목을 위한 방책을 요청했고 선교사들의 입국 방법 및 조선의 정세 등을 자세히 적어 제출했다. 이 서한은 먼저 마카오의 포교성성 대표부 책임자 움피에레스(Raphael Umpierres)에게 전달되어 번역되었고 1827년 로마 교황청에 도착하게 된다. 참조: 한국교회사연구소, 『한국천주교회사2』, 한국
교회사연구소, 2014, 175-178쪽.
2) 참조: 정양모·윤종국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가톨릭출판사, 2023, 10신[원문: 최석우·안응렬 옮김, 달레 (Claude-Charles Dallet), 『한국천주교회사中』, 분도출판사, 1980, 223-231쪽].
3) 지명은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과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의 중국 지명 한글 변환표를 참조하였다.
4) 참조: 『가톨릭교회교리서』 1812항.
5) 참조: 이승찬, 「대신덕」,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6. 1621-1627쪽.
6) 참조: 『가톨릭교회교리서』 1805항.
7) 참조: 유봉준, 「사추덕」,『한국가톨릭대사전 제6권』, 한국교회사연구소, 1998. 4037-4039쪽.
8) Augustinus, de Moribus Ecclesiae Catholicae Et de Moribus Manichaeorum, Austrian Academy of Sciences Press, 2009, 15.25
9) 『가톨릭교회교리서』 1812항.
10) 참조: 『가톨릭교회교리서』 1813항.
11) 참조: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덕’』, 이재룡 옮김, 한국성토마스연구소, 2020, Ⅰ-Ⅱ, q.62,a.1.
12) 참조: 칼 페쉬케, 『그리스도교 윤리학』, 방종우 · 이동호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22, 140쪽.
13)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덕’』, Ⅰ-Ⅱ, q.62,a.1.
14) 참조: 『신학대전 ‘덕’』, Ⅰ-Ⅱ, q.62,a.2.
15) 참조: 칼 페쉬케(Karl H. Peschke), 『그리스도교 윤리학 제2권』, 김창훈 옮김, 분도출판사,1992, 27쪽.
16) 『가톨릭교회교리서』 1814항.
17)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계시헌장」 5항.
18) 『가톨릭교회교리서』 1817항.
19) 참조: 『그리스도교 윤리학 제2권』, 96쪽.
20) 『가톨릭교회교리서』 1822항.
21) Cf. Bernardo di Chiaravalle, Il dovere di amare Dio, Paoline, 2014, 2.2.
22) 참조: 『가톨릭교회교리서』 1827항.
23) 아우구스티누스,『삼위일체론』, 성염 옮김, 분도출판사, 2015년, 709쪽(VIII, 9.12).
24) 참조: 윤주현,「기도의 원천으로서 향주삼덕」, 『신학전망』 188, 2015, 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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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브뤼기에르 주교의 행적과 향주삼덕
1) 신앙의 덕
아시아 교회를 위해 머나먼 여정을 떠난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을 상기해 보면 사실 향주삼덕 이 당연히 그 밑바탕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죽음을 각오하고 인간적 고통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는 쉽게 추정할 수 있는 사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교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이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진다. 이에 먼저 주교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신앙의 덕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부모님께 보낸 서한을 통해 “이제까지 아낌없이 사랑해 온 모든 것과 이별 해야 할 시간이 되었음”25)을 알리며, 이것이 당신 “독생성자를 희생하신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일”26)임을 증언한다. 그리고 머나먼 길을 떠나게 된 것이 변덕스러운 마음, 현실에 대한 불만, 미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님을 밝히며 “저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추구한다”27)는 사실 을 단호하게 천명한다. 그리고 양심을 깊이 성찰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 친히 선교사가 되라는 열망을 심어주셨음을 고백하며 결국 그 강렬한 힘에 압도되었음을 이야기한다. 또한 “이 세상에 서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것뿐이라는”28) 사실을 강조하며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 서”29)라는 주의 기도를 바탕으로, “우리가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추구해서야 되겠습니까?”30)라 는 선언을 통해 자신의 강력한 신앙을 드러낸다.
신앙의 덕은 그의 출신인 카르카손(Carcassonne) 신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주교는 이 서신에서 하느님의 섭리로 페낭에 도착했음을 증언하며 선교사를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신학생들이 응답하기를 요청한다. 여기서 그는 ‘두려움’31)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저항했을 때 맞이하게 될 결말에 대한 걱정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페낭의 원주민들은 비록 비신자들이거나 무슬림이지만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니며 하느님 나라의 길을 가르쳐 줄 친절한 선교사를 기다리는 입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아 그들이 버림받는 원인을 제공한다면 그것은 “고귀하고 찬탄할만한 부르심에 불충하는 것”으로, 이는 오히려 “남은 생애 동안 고초를 자초하는 일”이다. 이러한 엄중한 경고와 함께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일이 부모님을 몹시 슬프게 하는 일을 동반하지만 예수님께서 부모조차 버리라고 했다는 복음 말씀을 상기시키면서, “사람들에게 순종하기보다는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값지다”는 말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드러 낸다. 이러한 주교의 권고는 하느님이 자신을 부르셨다는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의 일생 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신앙의 덕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증명한다.32)
또한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된 뒤, 프랑스 리옹 『전교 후원회 연보』 편집자와 전교후원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교는 먼저 조선 선교의 위험과 어려움에 대해 상세히 밝히지만,3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이끄심과 헤아릴 길 없는 섭리를 알 수 없으므로 너무 따지지 말고 경배해야 한다”34)라고 말함으로써 모든 성공 여부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몫임을 강조한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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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신, 67쪽[카르카손 교구 주보 (1835년 10월 5일자)].
26)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신, 67쪽.
27)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신, 68쪽.
28)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신, 69쪽.
29)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신, 69쪽.
30)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신, 69쪽.
31) “만일 여러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오랫동안 저항한다면 하느님께서 불충한 종에게 내리시는 선고가 그대들에게 떨어지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8신, 97쪽[APF, v.4(Lyon, 1830), ff. 207~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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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그에게 조선 선교는 강력한 목적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계획에 속한 것으로 그 결과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즉 선교의 성공 여부는 일생일대의 목표이지만 한편으로는 하느님께 달려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선 선교 결과가 어찌 되든지, 저는 언제나 자족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떤 경우에도 자족하렵니다. (…) 제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도중에 쓰러진다면 비록 제가 쟁취하지는 못했더라도 다른 선교사들이 쟁취할 승리의 열매를 미리 맛보며 즐길 것입니다. (…) 오로지 하느님 섭리의 도우심에 의탁하면서 새로운 선교지 조선을 향해 가겠습니다.”36)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신 전반을 보면 이러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이 매우 분명하게 나 타난다. 마카오의 포교성성 책임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주교는 조선에 들어가는 기회를 놓쳤음 을 이야기하면서 타타르의 추위에 대한 끔찍함을 언급하면서도, 앞으로 닥칠 모든 일과 위험을 예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자신이 생각한 어려움보다 덜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명령과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37) 는 강한 믿음을 드러낸다.
더불어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올해는 돌아다니는 것을 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하느님의 섭리가 이를 허락하지 않음을 알리며, 비록 힘든 상황이 지속되고 있지만 “선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시작하신 일을 매듭지으시리라는 믿음이 있음을”38) 드러낸다. 이는 그의 선교에 대한 강한 의지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또한 서신의 곳곳에서 나오는 편지에서 자주 반복되는 어휘는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소서!”이다. 그리고 주교의 죽음을 알리는 알퐁소 데 도나타(Alphonso De Donata) 산시 보좌 주교의 증언을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나는 외지 타타르에서 죽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시기를 바랄 따름입니다”39)라고 언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이 그토록 열망했던 조선 땅에 입국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을 확신하는 순간에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신뢰를 굳건히 간직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이 증언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정 전체가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여정이었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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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8신, 97쪽.
33)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4신, 191-193[APF, v.6(Lyon, 1833), ff. 543~551,552~587].
34)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4신, 196쪽.
35)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4신, 195-196쪽.
36)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4신, 196쪽.
37)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0신, 247쪽[AME, v.577, ff. 94~97].
38)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2신, 262쪽[AME, v.577, ff. 267~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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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희망의 덕
얼핏 생각하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희망이 조선에 대한 선교였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의 서한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의 희망은 하느님의 도구로 유용하게 쓰이는 것이었고, 조선에 대한 선교는 이를 위한 응답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희망은, “복음을 처음으로 전한 사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겠다는 열정”이었으며 “조상들이 받았던 복음의 봉사를 가련한 이교 백성들에게 베풀기 위한”40) 것이었다. 그의 희망의 덕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특별히 파리외방전교회가 조선 선교를 맡기를 주저하고 있는 상황에서 브뤼기에르 주교가 본부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서한을 보면 그의 강렬한 희망의 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악에서 선을 끌어내릴 수 있는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으며 그러므로 희망을 포기할 수 없음을 강한 어조로 이야기한다.41) 이 서한은 그의 희망의 덕을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서신이라 할 수 있는데, 조선 선교를 위해 몇 해를 더 기다려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브뤼기에르 주교가 이를 다시금 검토하기를 요청하는 서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조선 선교가 미뤄진 이유, 즉 기금이 없으며 선교사가 없고 다른 선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으며 조선을 뚫고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이 조선 선교에 대한 희망을 결코 미루게 할 수 없음을 강조하며 하나하나의 이유에 대한 반론을 논리적으로 개진한다.
첫째로 기금이 없다는 이유에 대해, 내일의 걱정으로 하느님의 섭리를 모욕할 수 없으며 하느님께서 새로운 재원을 만들어주실 것이라고 말하며 “우리의 희망은 저버려지지 않으며 주님께 서는 선교지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적을 행하심”42)을 강조한다.
두 번째, 선교사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고 다시 올 ‘희망’을 포기할 수 없으며 지원자 한 사람을 구하면 열 명의 지원자가 생길 것이라며 열심한 조선 교우들이 교황님께 올린 편지를 알릴 것을 요청한다.
세 번째, 다른 선교지에도 급한 일이 많다는 것에 대해 선교지 전체로 볼 때에는 신부 한두 명 이 줄어드는 것이 큰 공백으로 여겨지지 않지만, 선교사가 없는 선교지의 경우 신부 한두 명이 말할 수 없이 큰 은혜가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사제 한 명이 크나큰 ‘희망’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넷째, 조선을 뚫고 들어가기 힘들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것이 가장 그럴듯 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계획이 어렵다고 해서 그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하느님의 영광과 구원사업에 겁을 내거나 소극적이어서는 안 되며 불가능한 것도 시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 조한다.43) 특별히 이 부분에서 인상 깊은 것은 순교의 상황에서도 신입 교우가 늘어나고 있는 조선의 상황을 브뤼기에르 주교가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교는 이러한 교회가 버림을 받아야겠냐고 반문하며,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알자마자 공경하고 사랑한 조선인들 앞에 장벽을 둘리 없으며 만약 그런 생각을 한다면 이는 섭리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음을 천명한다.
마지막은 너무 많은 일을 하면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이유에 대한 반박이다. 주교는 여 기서 파리외방전교회가 아직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선교를 미루는 것이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한다면 신부 한두 명만이라도 보낼 것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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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53신, 360쪽[AME, v.577, f451].
40)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8신, 99쪽.
41)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28쪽[달레, 『한국천주교회사中』, 223~231쪽].
42)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27-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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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따르면 그렇게 소수의 선교사라도 입국하게 되면 분명 선교지가 지탱될 것이며 하느님의 섭리는 다른 구제책을 마련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해서 설사 해당 선교사가 사형을 당한다 할지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해보았다는 만족감이 있을 것이며 자책하는 일도 전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위험한 사업을 맡을 신부가 누구이겠습니까. 제가 하겠습니다”44)라고 함으로써 스스로 ‘희망’의 유용한 도구가 되겠다고 선언한다.45)
당시 조선 선교를 망설이는 선교회의 이유에 대한 반박은 그의 한 치의 의심 없는 희망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에게 있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인간의 의심은 희망의 덕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야기한다. “주님께서는 선교지를 구원하시기 위해 기적을 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전능이 작아졌단 말씀입니까, 혹은 우리의 신덕과 망덕이 줄어들었단 말씀입니까?”46) 그가 이러한 강한 주장을 하는 이유는 인간적인 사정으로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면 조선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를 전파할 희망은 영영 사라져 버리고 말 것”47)이기 때문이다.
즉 브뤼기에르 주교의 희망은 단순한 인간 개인의 희망이 아닌, 하느님의 전능함을 통해서 성취될 조선인들의 구원을 향한 희망이다. 그리고 이 희망의 결과로 마침내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칙서를 통해 조선을 대목구로 설정하고48) 브뤼기에르 주교를 대목구장으로 임명하게 된다.49)
이후 주교의 행적에서도 조선 선교를 향한 희망은 결코 끊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 명확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은 그로부터 6년이 지난 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마침내 조선 국경을 향해서 떠나게 된 주교는 네이멍구와 만주 3,000리의 길을 통과해야 함을 알리며 다가올 겨울의 추위를 예견하고 있다. 그럼에도 “저는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주님께 모든 희망을 겁니다.
정에서 그는 결국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지만 이후 조선교구 2대 대목구장이 되는앵베르 주교가 조선 땅을 밟게 됨으로써 그의 희망은 지속될 것이었다.
저의 희망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50)라는 말을 통해 변치 않는 희망의 덕을 드러낸다. 이 여정에서 그는 결국 조선에 입국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지만 이후 조선교구 2대 대목구장이 되는 앵베르 주교가 조선 땅을 밟게 됨으로써 그의 희망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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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30쪽.
44)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34쪽.
45)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27-136쪽.
46)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28쪽.
47)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36쪽.
48)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2신, 142-143쪽[달레, 『한국천주교회사中』, 234~236쪽].
49)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3신, 144-145쪽[달레, 『한국천주교회사中』, 236~238쪽].
50)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49신, 343쪽[카르카손 교구 고문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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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랑의 덕
지금까지 언급한 신앙의 덕과 희망의 덕은 실로 하느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면 결코 발휘될 수 없는 덕들이다. 하느님을 향한 그의 사랑은 순교도 불사하겠다는 굳센 의지를 통해서 분명히 드러난다. “만일 이 나라에 파견된 신부가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다든지 사형을 당한다든지 하면 그 당사자에게는 이익이 될 것입니다”.51) 한편 그가 조선의 선교에 각별히 힘을 쏟은 이유는 “신앙의 뿌리가 조선에 깊이 내린다면, 조선의 지정학적 위치로 보아 (…) 복음의 빛이 북쪽 몽골과 조선 인근 여러 섬으로 전파될 것”52)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히 조선뿐만 아니라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일본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으며 지리학적으로 가까운 조선에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질 경우 일본 선교에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예견한다.53) 이는 단순히 영역을 넓히는 세속적인 의지가 아닌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한”54) 것이다.
한편, 믿음의 덕과 희망의 덕을 통해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덕’을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다면 그와 별도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웃 사랑의 덕’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을 보면 그는 기본적으로 조선인들을 측은하게 생각하고 있다. 종종 그는 “불쌍한 신입 교우”55)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조선인을 바라보는 자신의 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조선인이 불쌍한 이유는 이들이 믿음의 덕이 아직 약하며 갖가지 유혹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에게 애덕이란, “불행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내가 필요한 것까지도 나누어주는 것”56)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인들에게 넉넉지 못한 음식을 조금 떼어서 나누어는 것과 같이 한두 명의 선교사라도 파견 되어야 하는다고 주장하는 그의 서한을 보면 얼마나 그가 “슬픔에 잠긴 조선”57) , “지구 저 끝에 있는 불쌍한 교우들”58)을 사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그를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하는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칙서 이후, 당시 중국 교회를 관할하고 있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조선 입국이 미뤄지자 이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함과 동시에 파리 외방전교회가 조선 대목구를 관할하도록 청원서를 여러 차례에 걸쳐 보낸 기록을 보면 그가 얼마나 조선에 대한 사랑의 열정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59)
조선 교우들을 향한 항구한 사랑은 무엇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행적에서 드러난다. 그는 여행기에서, 스스로 아주 젊은 시절부터 조선의 가엾은 신입 교우들이 방치되어 있음을 알았고 이들을 구하러 가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실제로 교황청 포교성성이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맡기고 싶다는 뜻을 알렸을 때, 조선에 대한 열망이 구체적으로 커졌음을 이야기한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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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33쪽.
52)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4신, 192쪽.
53)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4신, 192-194쪽;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77-78쪽.
54)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4신, 196쪽.
55)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36쪽.
56)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29쪽.
57)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30쪽.
58)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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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은 1801년 주문모 신부의 순교 이후, 30년 동안 사제가 없는 상태에서 신앙이 이어지고 있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중국에서 체포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면서도 아무리 불가능해도 시도를 해봐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여행기에서, 하느님이 괜히 먼 조선에 그리스도교인들을 만드는 기적을 베푸셨을 리 없음을 밝힌다. 또한 조선인들이 그를 맞이하러 나오기 힘들기에 직접 다가가 조선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61)
온갖 예상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토록 열정적으로 조선 선교를 위해 힘썼다는 사실은 비록 조선 교우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을지라도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 한다.
1832년 조선대목구장 임명 소식을 전해 듣고 말레이시아 반도의 서쪽 섬 페낭(Penang)에 머물고 있던 그는 조선을 향해 출발하게 된다. 싱가포르 → 마닐라 → 마카오 → 푸젠성(福建省, 복건성) → 장난(江南, 강남) → 즈리(直隸, 직예) → 산시성(山西省, 산서성) → 시완쯔(西灣子, 서만자)를 거쳐 마찌아즈(馬架子, 마가자)에 이르는 긴 여정이었다. 이 중 육로로 이동한 거리를 현대의 기준에서 어림잡아 봐도, 마카오에서 푸젠성까지는 727km, 푸젠에서 장난까지는 1,445km, 장난에서 즈리까지는 2,079km, 즈리에서 산시까지는 220km, 산시에서 시완쯔 까지는 217km, 시완쯔에서 마찌아즈까지는 589km로, 어림잡아 5,277km에 이른다.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 긴 거리를 오가며 조선 땅에 들어갈 방법을 강구했던 선교 여정은 1832년 8월 4일에서 1835년 10월 20일에 이르기까지 약 3년이었다. 그리고 그 결말은 결국 조선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숨을 거두는 것이었다. 그는 시완쯔에서 조선으로 이동하기에 앞서 보낸 마지막 서한에서 다음과 같은 각오를 밝힌다.
“저희는 내일 길을 떠나려고 합니다. 앞으로가 제 여행 중 가장 험난한 여정입니다. 제 앞에는 온갖 어려움과 장애와 위험만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는 머리를 숙이고 이 미로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제게는 선하신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의 강력한 중재로써 제 소망을 들어주시어 저를 무사히 안전하게 그 미로에서 구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습니다.”62)
그러나 결의와는 달리 그는 마찌아즈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세상을 떠나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산시 보좌주교 알퐁소 데 도나타는 “나는 외지 타타르에서 죽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63)라는 편지를 미리 받았음을 증언한다. 여기서 타타르는 시완쯔이므로 산시 보좌주교에게 보낸 편지는 시기상 조선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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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 교구장 임명은 1831년 9월 9일에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의 칙서를 통해서 행해졌으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 사실을 1832년에 이르러서야 간접적으로 파리외방전교회의 뒤부아 (Jean Antonie Dubois) 신부의 편지를 통해 알게되었다. 그러나 조선입국을 위해서 교황 칙서를 직접 수령하고, 이 사실을 조선 선교지를 담당하는 전임 관할권자에게 제출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했다. 즉, 신설된 조선 대목구장에 임명되었으므로 당시까지 재치권을 가지고 있던 북경 교구장에게 임명장을 제시하는 절차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주교는 페낭을 출발해 싱가포르, 마닐라 등을 경유해 1832년 마카오에 들어가 이 절차를 준수하고자 했으나 그가 파리외방전교회를 탈퇴해 포교성 파견 선교사의 자격으로 조선에 들어가고자 한다는 오해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파리 본부의 오해를 풀기 위해 조선 대목구를 파리외방전교회가 맡도록 해달라는 청원 서한을 포교 성성에 보냄과 동시에 스스로도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의 자격으로 조선에 가려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혀야 했다. 참조: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갈등」, 『교회사연구』 44, 한국교회사연구소, 2014, 192~193쪽;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08쪽.
60) 브뤼기에르 주교는 1829년 샴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1828년 1월 6일에 발행된 『외방전교회 회람』을 통해 이 소식을 전해 들었다.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77쪽.
61)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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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고려해 보면, 죽음이 확실히 예상될 정도로 그의 건강이 이미 좋지 않았음을 추측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땅으로 출발했다는 것은 조선 교우들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실천에 죽음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브뤼기에르 주교 약전과 송별기」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열정으로 그가 아주 오래전부터 순교에 대한 열망을 지니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파리에 도착해 1825년 부모님께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가 항해 중에, 또는 현지에 도착해서 죽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상관없어요. 하느님께서는 제게 가장 유익한 것을 아시니까요.” “프랑스를 떠나면서 저는 선교지에서 1년 반 또는 길어야 두 해쯤 살고 죽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64)
4. 사추덕의 정의와 개념
현명, 정의, 용기, 절제를 의미하는 사추덕은 인간 사이의 행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따르면 현명은 “모든 상황에서 우리의 참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실행할 올바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실천 이성을 준비시키는 덕”65)으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방해가 되는가를 알아내는 덕이다. 정의는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66)로, 하느님만을 섬기며 인간 사이에 속해있는 모든 질서를 지키는 덕이다. 용기는 “어려움 중에도 단호하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하도록 하는 윤리 덕”67)으로 하느님 때문에 모든 것을 가벼운 마음으로 지고 가는 덕이며, 절제는 “쾌락의 유혹을 조절하고 창조된 재화를 사용하는 데에 균형을 유지하게 해 주는덕”68)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잘못됨이 없도록 자기를 보살피는 덕이다.
이를 실제 행동에 적용하자면, 인간은 현명을 통해 바른 길을 찾고 질서를 유지시켜 나아가며, 정의를 통해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벗어나 사실에 입각해 바른 것을 지켜나가게 된다. 또한 용기를 통해 나태함과 교만을 억제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조절하고 굳세게 행동하며, 절제를 통해 행동을 통제하여 중용의 덕을 지키게 된다. 인간의 성품을 단련시키며 선을 쉽게 실천하도록 하는 이 사추덕은 교육, 사려 깊은 행동, 하느님을 향한 노력과 끈기를 통해 얻게 되는 덕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정화되고 고양된다.69)
브뤼기에르 주교의 서한과 여행기를 보면 앞서 다룬 향주덕뿐만 아니라 사추덕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고루 발견할 수 있다. 하느님께 의지하며 그분만을 사랑한 주교의 삶은 개인의 노력과 고민이 동반된 자연덕의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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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52신, 354쪽[AME, v.579, ff127~130].
63)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53신, 360쪽.
64) 정양모 신부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 약전과 송별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87쪽.
65) 『가톨릭교회교리서』 1806항.
66) 『가톨릭교회교리서』 1807항.
67) 『가톨릭교회교리서』 1808항.
68) 『가톨릭교회교리서』 1809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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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브뤼기에르 주교의 행적과 사추덕
1) 현명의 덕
브뤼기에르 주교는 조선 땅에 입국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편을 살펴봄과 동시에 선교 여정에 어려운 위기에 처하면 이를 지혜롭게 극복하고자 꾸준히 노력했다. 특별히 그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당시 조선 교회의 책임권의 문제였다. 아시아의 선교는 복잡한 상황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크게 세 개의 선교단이 각자의 세력에 힘입어 활동하고 있었다. 북경에는 포교성 소속 선교단과 프랑스 선교단,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있었고 특별히 프랑스 선교사들은 선교 보호권(padroado)을 수여받은 포르투갈 교구장의 관할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70)
이러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선교지 배경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5세기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의 강대국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 두 나라는 새로운 영토에 가톨릭 교회를 세우는 것을 우선시했다. 한편 당시 교황청은 아시아와 신 대륙에 선교사를 파견하는데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이 부족했으므로 교황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식민지 개척의 독점권을 인정하는 한편, 선교에 대한 권한과 의무를 일임했다.
이렇게 부여된 선교 보호권은 자국이 관할하는 영토에서의 교구 설립, 주교 추천 및 임명, 선교사 파견, 교회 운영 및 관리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이민족 정복과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원주민의 강제 개종, 무엇보다 자신의 나라에서 파견한 선교사 외에는 누구도 선교 활동을 허락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을 동반했다. 결국 보편 교회 안에서 선교 업무를 총체적으로 감독하고 관장할 필요가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교황청은 포교성성을 신설해 ‘대목구’(Vicariatus Apostolicus) 제도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교황이 직할하는 교구를 설정하고, 명의 주교를 대목구장으로 임명해 교황을 대신해 사목 하도록 하는 제도였다.71)
이에 따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재위 1830~1846)에 의해 1831년 조선에 대목구가 세워지게 되 었고 이는 중국에 머물며 조선으로의 입국 방법을 강구하던 초대 조선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중국 선교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 문이다. 이러한 갈등 상황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자신에게 필 요한 권한과 청원을 포교성성에 보고한다. 이를 정리하자면 첫째, 조선에서 활동할 사제들에 대한 견진 성사권 위임이다. 이는 박해라는 극심한 영향 중에서도 필요한 성사의 은총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둘째, 박해 등의 긴급한 이유가 있을 때, 조선 밖에 신학교를 세우고 그곳에 한 에서는 해당지역의 관할권자의 법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와 동료 사제들의 재치권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다. 이는 조선인 방인 사제를 지속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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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참조: 『가톨릭교회교리서』 1810항.
70)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와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갈등」, 188~189.
71) 교황청 포교성성은 기존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교회에 부여된 선교 보호권과 선교지 수도회의 특권을 축소하고자 노력했는데, 본토인 성직자를 양성해 토착 교회를 세우도록 하는 시도와 선교지의 정치에 관여하거나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후 이러한 선교 지침은 포교성성의 직할 선교회인 파리외방전교회의 기본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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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성사를 받는 것이 불가능한 조선인들에 대한 대사권이다. 그는 포교성성의 교령에 이것이허락됨을 밝히고 있으나 남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함께 명시하여 조심스러운 허락을 구한다. 넷째, 조선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선교사들이 책임질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청이다. 당시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조선으로의 여정을 늦추는 인상을 받고 있는 입장에서72) 그는 “공동 합의”의 필요성을 주창한다.73)
이러한 그의 청은 포교성성에 의해 받아들여져 몇몇 권한을 부여받게 된다.
이는 첫째, 조선 외의 지역에 사제들이나 교리교사를 파견할 수 있는 권한 부여74),
둘째, 신학교가 설립될 지역이 어떤 교구에도 속하지 않을 경우 조선 경계 밖에서도 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가능 하다는것75),
셋째, 고해 사제가 없고 성사 배령이 불가능하지만 교우들이 통회하고 은총의 지위에 있다고 판단될 경우 사제들의 대사가 가능하다는 것76), 미사 중에 당시 쉽게 구할 수 없었던 밀랍초가 아닌 목랍초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77) 등이다. 그리고 후에 29개 조의 특별 권한(Facultates)을 전달받게 되는데 서품의 법정 기간을 지키지 않고서도 서품을 줄 수 있는 권한, 혼인 관면 권한, 열교, 배교, 이교와 관련된 이들에 대한 사죄권 등이다.78)
이를 종합해 보면 브뤼기에르 주교가 조선 토착화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으며 이는 차차 조선의 선교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지혜로운 판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 투갈로 대표되던 선교사업의 일반적인 개념이 노예무역과 정복, 식민지화였다면 브뤼기에르 주 교에게 있어서 선교란 다른 개별 교회의 생활 방식과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었다. 이는 포교성성 이 새롭게 가지고 있던 식민지의 폭력에 대해 대항하고자 하는 정신과도 부합하는 것이었으며79) 브뤼기에르 주교 이후에도 조선 땅에 복음이 잘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조치였다.
이러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지혜는 조선 대목구의 창설뿐만 아니라 후임자를 예견하고 미래를 내다봤다는 점에서도 매우 탁월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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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요한, 「1829년 브뤼기에르 신부가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서한 연구」, 『가톨릭 사상』 66, 대구가톨릭대학교 가톨릭사상연구소, 2023, 161-163쪽.
72) 특별히 이 시기 브뤼기에르 주교가 느낀 어려움은 당시 쓰촨 선교지에서 사목을 수행하고 있던 모방 신부와 관련된 문제였다. 모방신부의 뜻에 따라서 그들은 함께 조선 입국을 결심하지만 포르투갈 선교사에 의해 모방 신부가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장난을 지나가는 것에 대한 항의문을 받게 된다. 이는 유럽인이 단 한 명도 없던 지방에 여러 명이 도착할 경우 박해가 일어날 수 있다는 걱정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교황청 포교성성의 선교사라면 쉽게 조선에 입국할 수 있으므로 브뤼기에르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의 신부들과 공모를 꾸몄다는 오해도 있었음을 주교는 여행기에서 밝히고 있다. 그 결과,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로부터, 심부름꾼을 데리고 갈 수 없으며 이를 위반할 경우 심부름꾼을 배에 가둬두고 하선을 금지할 것이라 는 공식적인 통보를 받게 된다. 이후 마카오 주재 파리 외방 전교회의 의견에 따라 브뤼기에르 주교는 먼저 홀로 조선 땅에 들어가고자 시도하게 된다.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29-131쪽.
73)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6신, 231-237쪽[APF.SOCP, v.76, ff197~198].
74)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3신, 263-265쪽[AME, v.579, f104].
75)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4신, 266-267쪽[AME, v.579, f105].
76)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5신, 268-269쪽[AME, v.579, f106].
77)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6신, 270-271쪽[AME, v.579, f107].
78)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43신, 295-301쪽[AME, v.579, f121,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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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특별히 훗날 조선에서 순교할 앵베르(Laurent-Joseph-Marius Imbert, 1837년 12월 18일 입국, 1839년 순교),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 1836년 1월 13일 조선 입국, 1839년 순교), 샤스탕(Jacques Honoré Chastan, 1837년 1월 1일 입국, 1839년 순교) 신부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보였다. 특별히 앵베르 신부의 경우, 사천대목구에서 신학교를 운영한 경험이 있음에 조선 방인 사제를 키우는 데 있어 좋은 후임자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겼고 장차 랴오둥 지역에 조선신학교를 만들게 된다면 앵베르 신부가 담당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또한 그를 보좌주교로 임명하는 것이 좋겠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로 일찍이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앵베르 신부는 1837년 브뤼기에르 주교의 후임으로 임명되고 조선 땅에 입국해 방인사제 양성을 위해 애쓰다가80)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 밖에도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르투갈 선교사들과의 마찰에서 벗어나 조선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확보하고자 랴오둥에 교구를 설정해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겨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했다. 또한 방인사제 양성을 위한 안전성을 위해서도 랴오둥 지역을 조선대목구에 맡겨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는데 이 지역이 동쪽으로 한반도와 접해있고, 남쪽에 황해 와 서한만이 있어 배로 조선에 들어가기 용이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81) 이로 인해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교사들을 안내하고 피신처 등을 제공하기에 랴오둥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으며 현실적으로 신학교를 즉시 조선에 세울 수 없으므로 박해가 일어난 적이 없으면서도 조선과 인접한 이 지역이 선교의 중요한 기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82)
이에 따라 1838년 랴오둥 대목구가 분리 설정되었다. 이것이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를 계기로 교황대리 감목이 중국에 자리를 잡게 됨과 동시에 포교성성의 유구, 일본, 대만등의 동아시아 지역 선교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83) 이렇듯 조선 선교를 향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열망은 단순히 선에서만 그치지 않고 동아시아 전교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는 단순히 수도회의 관할을 넓히거나 부당한 처우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 것이 아닌, 선교의 용이함을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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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참조: 에일워드 쇼터(Aylward Shorter), 『토착화 신학을 향하여』, 김준철 옮김, 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7, 250-251쪽.
80) 앵베르 주교보다 1년 앞서 입국한 모방신부에 의해 세 명의 신학생들이(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게되었지만 앵베르 주교는 조선 교회의 사정상 자신이 직접 사제를 양성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정하상(바오로, 42세)과 이재의(토마스, 32세), 그 외 26세와 20세의 청년 2명을 신학생으로 받아들여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쳤으며 앞으로 3년 후에 서품식을 거행하기를 희망했다. 참조: 엄윤숙·김미연 옮김, 『앵베르 주교 서한』, 천주교수원교구, 2011, 21번 서한, 321-323쪽 [A-MEP, V.1254, ff.119~122).
81) 브뤼기에르 주교는 해로보다는 육로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을 갖고 있었으며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에 대해서는 서양인이 조선과 무역을 하지 않으며 조선 연안으로 무역을 하러 가는 중국인들의 미덥지 못함을 예로 들어 반대 의견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에 그 역시 해로를 통한 방법이 불안정한 것임을 인정하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를 바라며 해로의 입국도 고려해야 함을 주장한다.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28쪽; 김수태, 「프랑스 선교사의 조선 입국로 모색 방안」, 『교회사연구』 41,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 82-83쪽.
82)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47신, 323~338쪽[APF.SOCP, v.76, ff499~501; AME, v. 577, ff. 319~328]; 『브뤼기에르 주 교 여행기』, 297-2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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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의의 덕
정의가 “마땅히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 한 의지”84)라고 한다면,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에서 발견되는 정의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하느님께 드릴 것을 드리고자 하는 정의’로서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는 여행기에서, “저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합니다. 저는 하늘의 명령에 복종하며 그것을 수행합니다.
(…) 당장이라도 떠나야 하는 것인 양 언제나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85)라고 밝힘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고 돌려드리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다. 또한 어떻게든 조선 교우들을 도와야 한다는 심정은 이미 하느님의 존재를 깨달은 교우 들에게 하느님의 정의를 지속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강력한 자극의 원천이다.86)
두 번째 정의의 모습은 ‘이웃에게 주어야 할 것을 주려는’ 의지이다. 주교는 그의 여행기를 통해 중국에서 횡행하는 윤리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부모가 딸들을 팔 수 있으며, 심지어 죽여 버릴 수 있고 아들만이 유산을 물려받는다는 점, 딸만 있을 경우 재산이 가까운 친척에게 넘어간다는 점에서 중국 문화 안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고 퇴화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음을 개탄하며, 여성의 운명을 달래주고 더 큰 자유를 주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임을 강조한다.87)
이밖에도 박해를 피해 도망친 교우들을 자신이 머물던 집에 피신시키고88) 오랫동안 그와 동반했
던 안내자 왕요셉이 오랫동안 연락이 끊기자 여러 차례 심부름꾼을 보내 찾는 모습을 보면,89)
그가 인간적 정의를 꾸준히 실천하는 사람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느님께 드릴 것’과 ‘이웃에게 돌아가야 할 것’에 대한 정의 모두를 함께 포함하는 것으로, 앞서 언급한 포르투갈 선교사들과의 갈등 가운데 드러난다. 교황청 직속의 대목구 증설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은 실제로 신임 대목구장의 부임을 방해 하였다. 이에 따라 난징 교구장 피레스 페레이라(Pirés-Pereira) 주교와 총 대리 카스트로(Castroe Moura)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의 중국 대륙 종단을 방해해 조선 입국을 막고자 하였다.90)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는 부당한 처사에 대해 종종 분노를 드러내기도 하며 경 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부당함에 항거하는 것이었다.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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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처음 랴오둥 대목구는 랴오둥·만주 지역뿐만 아니라 내몽골 지역까지 포함하고 있었지만 몽골 지역을 맡고 있던 프랑스 라자로 회의 이견에 따라 1840년, 라자로회가 담당하는 몽골대목구와 파리외방전교회가 담당하는 만주대목구로 나뉘게 되었다. 참조: 이석원, 「1830년대 로마가톨릭(천주교)의 동아시아 선교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의 활동」, 『교회사학』 8, 수원교회사연구소,
2011, 120쪽.
84) 『가톨릭교회교리서』 1807항.
85)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80-81쪽.
86)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76-77쪽.
87)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34-135쪽.
88)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32-333쪽.
89)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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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하느님을 향한 정의, 이웃에게 주어야 할 신앙을 주려는 지속적이고 확고한 의지에서 오는 의사 표명이었다. 실제로 난징 교구장은 랴오둥 지역의 교우들에게 조선행 선교사들의 거처를 제공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며 자신의 서한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 어떤 선교사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편지를 썼다.92)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아무런 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랴오둥지역의 거처를 마련해 줄 것을 난징 교구장에게 재차 요구했다.93)
그는 이에 대한 불합리함을 보고하며 랴오둥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는데, 이에 대해 “복수의 행위가 아닌 자비와 정의의 행위”94)라고 주장한다. 30년째 버림받고 있는 조선 교우들을 구하기 위한 것이며 순교자의 피가 뿌려진 조선 땅에 십자가 깃발을 꽂을 수 있는 희망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95) 즉, 그가 원했던 랴오둥지방과 조선의 주교 재치권의 통일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는 이러한 관계 안에서 자신이 다른 이들을 모욕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고려하고 있음을 밝히며, “개인적인 언쟁과 모독이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보편적인 이익에 직 결되는 조선 선교 사업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될 것”96)임을 강조한다. 이에 따라 그러한 의도가 없을지라도 부적절한 단어를 경솔하게 사용했거나 중상모략적인 판단이 있다면 이를 수정하고 개선할 것이며 그만큼 두려운 것이 없다는 것을 당부하는 것을 보면 그가 정의를 사랑하는 한편, 개인적인 분노에서 오는 감정을 경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97) 또한 조선 선교 사업에 있어 파리외방전교회와 오해가 있을 때 역시 그는 자신의 실수를 서슴없이 인정하며, 의도가 없었음에도 무례했거나 도를 넘은 말이 있었다면 진심으로 취소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실수로 인해 조선 교우들이 손해 보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신신 당부한다.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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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참조: 「중국 체류 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 61쪽.
91)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96쪽, 113-114쪽, 130쪽, 201쪽, 221쪽, 269-270, 287-289쪽, 327쪽.
92)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01-302쪽, 317쪽, 320쪽; 수원교회사연구소 역주·편찬, 『샤스탕 신부 서한』, 수원교회사연구소, 2019, 16신, 223-225쪽.
93)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18쪽.
94)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21쪽.
95)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20-321쪽.
96)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19쪽.
97) 「사목헌장」의 “오류에 대한 미움”과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에 대한 미움”의 구분은 브뤼기에르 주교의 포르투갈 선교사들을 향한 입장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이에 따르면 ‘오류’는 항상 배격해야 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미움은 곧 개인 혹은 단체의 오류, 나쁜 성격, 악한 행위에 대한 미움이다. 이는 악행과 결함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기에 이를 미워하는 것은 정당하다. 한편 ‘오류를 저지른 사람’은 언제나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한다. 오류를 저지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며, 해치고 제거하려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므로 자애적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다. 즉, 오류는 언제나 배격해야 하는 것인 반면 오류를 저지르는 사람은 인간의 존엄성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피조물이므로 미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홀로 심판자이시라는 것에서 기인한다. 인간은 누구의 내적인 죄를 판단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브뤼기에르 주교의 분노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오류’에 대한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 한편, 자신이 다른 이들을 모욕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경계하고 두려워함과 동시에 “난징 주교를 용서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그의 재치권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면 ‘오류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는 인간적 미움을 자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28항;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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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용기의 덕
당시의 모든 선교사들에게서 발견되는 모습이지만, 브뤼기에르 주교 역시 선교에 잇따르는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서 이미 잘 인지하고 있었으며 “더욱 큰 어려움들에 봉착하리라는 확신”99) 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여행기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지리하고 고통스런 이 긴 여행에서 당한 온갖 장애에 대해 내가 놀라고나 당황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는 중국에서 체포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장애의 난관에 꿋꿋이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 내 감정 상태였습니다.”100)
이렇듯 그는 서한과 여행기의 여러 부분에서 언제든 목숨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음을 밝히며101) 부모님보다 자신이 먼저 죽을 수 있음을 예견하고102) 순교가 최고의 영예임을 밝히고 있다.103) 비록 조선 땅을 밟지 못한 채 무리한 여정으로 인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설사 성공적으로 조선 땅에 들어섰다 할지라도 그 이후 입국한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와 함께 순교를 당했을 것은 자명하다. 그의 순교를 향한 의지는 1832년 11월 18일에 조선 교우들에게 보낸 그의 서한에 매우 분명히 나타난다.
“나는 앞으로 너희 나라에 집을 짓고 살면서 죽음에 이를 준비를 이미 하였노라. 내가 너희들 중 몇사람을 신부로 세울 수 있다면 그때는 너희 나라에 성교(聖敎)가 끊어지는 일이 없을 것이며, 위안이 신비로운 자취에까지 미치고, 성교가 반드시 널리 드날리게 될 것이리라.”104)
이러한 용기는 실제로 여정 중에 여실히 드러난다. 48일 동안 콩알만큼의 음식을 겨우 먹을 수 있었던 궁핍, 피로, 낯선 음식으로 인한 고통과 질병,105) 6개월 동안 지속된 이(蝨)로 인한 고통,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부가 벗겨지고 여기저기에서 피가 나는 고통”106), 영하 20도에서 30도에 이르는 극한의 온도107) 속에서도 그는 계속해서 조선을 향해 걸어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용기는 “육체적으로 더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나 나와 동행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는 경우가 아니면 내 발길을 돌리는 일이 없을 것”108)이라는 그의 각오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있어서 선교사는 “부지런한 일꾼과 같이 뒤 를 돌아보아서는 안되며 상관이 그를 다시 부르면 신속한 태도를 보이면서 되돌아갈 각오를 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순종은 “신학교 입학과 함께 시작해서 오로지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끝나는 것”으로,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들의 흔적을 밟게 된다”109)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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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0신, 178쪽 [AME, v. 577, ff. 241~246].
99)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77쪽.
100)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77쪽.
101) “조선행 성소를 받은 선교사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많이 고생하는 복락을 누릴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을 많이 개종시키고
몇 해 안 되어 순교의 영예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즉시 조선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6신, 84쪽.
102)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0신, 178쪽 [AME, v. 577, ff. 241~246].
103)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10신, 133쪽.
104) 최기섭, 김홍경 옮김, 「브뤼기에르 주교의 사목서한」,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55-356쪽[AME, v.579, ff. 91-93].
105)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60쪽, 167쪽, 169쪽, 177-178쪽.
106)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90쪽.
107)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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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여행기의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의 용기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언급함으로써 커다란 울림을 안겨준다. “어쨌든 이 위험스런 계획이 어떻게 진행될까 하는 데 대해서는 별로 걱정되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운명을 하느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나는 하느님 섭리의 품 안에 내 한 몸을 던져, 중도에서 죽거나 불가항력에 의해 저지당하지 않는 한, 나의 달음박질 종척지에 이를 때까지 머리를 숙이고 위험을 뚫으며 달릴 것입니다.”110)
4) 절제의 덕
비교적 여유 있는 자작농 집안에서 성장했으며 1815년 사제서품 이후, 1816년부터 1825년에 이르는 긴 시간 고국의 소신학교와 대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활동을 접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한(1825년 9월 17일) 브뤼기에르 주교의 절제의 덕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는 없다.111) 그가 스스로 선택한 선교를 향한 여정은 그 자체로 고행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제의 덕은 즐거움의 유혹을 조절하는 것뿐만 아니라 재화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까지 포함함으로112) 이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먼저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었지만 전교회에 금전적인 부담을 지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조선대목구가 포교성성의 직속 관할이었으므로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교 서품식(1829년 6월 29일) 때 교우들로부터 받은 모든 것을 샴으로 돌려보냈으며 파리에서 동료사제들로부터 받은 소품들과 내의류를 산정해 주기를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대표부 책임자였던 움피에레스(Raphael Umpierres) 신부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경리부장이었던 르 그레즈와(Pierre-Louis Legrégeois) 신부에게 부탁함으로써 페나에서 마카오까지의 경비를 모두 갚고자 하였다. 또한 사적으로 전달받은 2개의 주교관 역시 팔아 조금이라도 빚진 것이 있다면 갚고자 했다.113) 그 밖에도 마닐라 대교구장으로부터 전별금으로 뱃삯을 받을 때에도 그냥 받지 않고 빌린다는 조건으로 받았으며 후에 마카오에 도착해 포교성성의 하사금을 통해 곧 갚았다.114) 또한 조선 교우들에 대한 지원금을 라자로회 회원 신부로부터 빌린 뒤에도 바로 돌려주 었고,115) 산시 지방에 머물 때 돈이 한 푼도 없자 도움을 받았던 대목구장 살베티(Joachim Salvetti)에게도 후에 모두 빚을 갚았다.116)
한편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교성성에 금전적 도움을 요청하곤 했다. 이는 선교의 여정 중에 머
물 곳을 구하거나 심부름 꾼들의 특별 수당 및 통행료를 내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117) 그는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먼저 조선에 입국해 있던 중국인 신부 유방제에게 100테일(약 700프랑)을
보낼 수 있었고 이후 조선에 들어가면 그가 선교하느라 진 빚을 갚을 것을 약속했다.118)
이러한 모습들은 그가 금전적 측면에서 매우 투명했으며 절제의 덕을 가지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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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60쪽, 167쪽, 169쪽, 177-178쪽.
109)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32쪽.
110)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46쪽.
111)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48쪽;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381쪽.
112) 참조: 『가톨릭교회교리서』 1809항.
113)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20신, 178쪽 [AME, v. 577, ff. 24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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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국에서의 기록을 보면 자연스럽게 절제할 수밖에 없었음은 확실하다.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들키지 않기 위해 되도록 본토인들과 같은 남루한 복장을 입어야 했기 때문이다.119) 또한 음식이 워낙 입에 맞지 않았으므로120) 절제는 당연하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기에서 그의 검소한 성품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다. 중국 여정 중 소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때 현지 회장이 주교의 지나치게 소박한 옷으로 인해 빈축을 살 것이라 지적하며 옷을 구입할 수 있도록 돈을 빌려줄 테니 나중에 갚으라고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대답한다. “나는 영영 갚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아직 내 수중에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돈은 이보다 더 절박한 일에 쓸 작정이오. 굶어 죽는 것보다는 좋지 않은 옷을 입는 쪽이 더낫습니다.”121)
또한 파리외방전교회로 떠나기 전 카르카손 대신학교에서 고행을 실천하고자 빵과 물만 먹고 살았으며122) 모방 신부는 그가 “고신극기에 익숙해서 단식을 계속했음”123)을 증언한다.
6. 나가는 말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을 정리하면 베르나르도 성인이 『신애론』에서 밝히는 사랑의 네 가지 등급을 떠올리게 된다.124) 이에 따르면 사랑의 가장 낮은 첫 번째 등급은, “자신을 위해 자신을 사랑하는 것”125)이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는 자신의 고국과 기도와 연구에 헌신하는 삶을 포기하고 가족들에게조차 자신의 열망을 숨기고 고국을 떠나야 했다. 즉, 하느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개인적인 정을 거둔 채 하느님을 사랑했다. 베르나르도에 따르면 이어지는 사랑의 두 번째 등급은 “자신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126)이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조선을 향한 열망은 자신의 개인적 영달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하느님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순교의 각오를 서한을 통해 여러 번 밝힌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사랑이, 세번째 등급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127) 임을 몸소 증거 한다. 베르나르도에 따르면 이 세 번째 등급은 하느님의 존재 자체가 너무나도 크고 놀라우므로 자연스럽게 희생과 사랑을 실천하는 단계이다. 이는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등급이다.
이후 이 사랑을 잘 실천하면 네 번째 등급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하느님을 위해 자기를 사랑하게 되는 단계”128)이다. 이는 죽음 이후 하느님을 마주하며 느끼게 되는 가장 높은 등급의 사랑인데 “더이상 하느님 외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단계에 이른 사람”이 누리는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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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69쪽, 107쪽.
115)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09-310쪽.
116)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25쪽.
117)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99쪽.
118)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04쪽.
119)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81쪽.
120)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68-169쪽.
121)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146쪽.
122) 참조: 「브뤼기에르 주교 약전과 송별기」, 376쪽.
123)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54신, 362쪽[AME, v. 1260, ff. 6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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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베르나르도는 인간이 육체에 머무르고 있으면, 육신의 번거로움으로 인해 이 사랑이 성취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적어도 부분적으로”129) 이 사랑의 등급에 도달하는 현세의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은 육신의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성가심에도 방해받지 않는 사람들이며, 주님의 기쁨을 향해 가능한 최대의 속도와 열의로 서두르는 사람들로 거룩한 순교자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 사랑의 단계는 사랑의 위대한 힘이 그들의 영혼을 감각에서 분리시켰기에 가능한 것으로 이를 통해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몸을 외부의 고통에 노출시키고 고문을 업신여길 수 있게 된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여정을 떠올려 보면 비록 그가 순교의 영예를 얻지 못했지만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향주삼덕(믿음, 희망, 사랑)과 스스로 추구하고 행한 사추덕(지혜, 정의, 용기, 절제)을 통해 이 마지막 사랑의 등급까지 도달하였음을 필자는 감히 주장한다. 그의 삶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희망, 사랑으로 충만했으며 지혜와 정의, 용기와 절제를 온전히 실천한 영웅적 삶이었다.
이는 온전히 하느님을 위한 것이었으며 한 번도 만나 본 적 없는 조선의 그리스도인들, 나아가 아직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은 비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열망 안에서 죽음 은 두려운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모방 신부의 기록에 따르면 브뤼기에르 주교는 평야가 아닌 곳을 걸어갈 때 15분마다 쉬지 않고는 걸음을 옮길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심한 두통과 구토가 있었음에도 마지막 여정을 감행했으며 결국 이 중에 숨을 거두게 되었다.130)
이러한 주교의 삶은 마르코 복음 12장 30절에서 31절까지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중계명 을 떠오르게 한다. 어떠한 계명이 첫째가는 계명이냐고 묻는 율법학자에게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말씀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브뤼기 에르 주교의 하느님을 향한 영웅적 삶을 통해 조선은 대목구로 설정이 되었고 선교사들이 장차 복음을 선포하는 기반이 마련되었으며131) 방인사제들이 탄생하고 신앙이 계속되는 든든한 뿌리를 얻게 되었다. 모방 신부의 증언대로 그가 “하느님의 계획을 이루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모 든 일을 하였음”132)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응당 가져야 할모범적인 삶을 뚜렷하게 보여줌으로써 현재에도 한국 교회의 신앙을 아름답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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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Cf. Bernardo di Chiaravalle, Il dovere di amare Dio, pp.150-161.
125) Bernardo di Chiaravalle, Il dovere di amare Dio, p.150.
126) Bernardo di Chiaravalle, Il dovere di amare Dio, p.154.
127) Bernardo di Chiaravalle, Il dovere di amare Dio, p.154.
128) Bernardo di Chiaravalle, Il dovere di amare Dio, p.156.
129) 베르나르도는 순교자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지상에서 네 번째 등급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음을 배제하지 않지만 이를 가정 형의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인간의 고통의 감각이 이를 “방해”할 수 있음을 드러낸다.
130)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54신, 361-362쪽.
131) 브뤼기에르 주교의 장례를 마친 모방 신부는 조선인 신자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를 맞이하기 위하여 준비한 길을 따라 1835년 말, 조선으로 입국하게 되고 뒤 이어 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다. 이는 브뤼기에르 주교를 입국시킬 목적으로 마련 해 두었던 모든 예비 조치들을 활용함으로써 가능한 것이었다. 이 예비 조치에 대한 내용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조신철 가롤로, 김 프란치스코가 보낸 편지들에 잘 나타나 있다. 참조: 최석우,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 한국교회사연구소, 2012, 151쪽; 정양모 신부 옮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조신철 가롤로, 김 프란치스코가 연명으로 교황 성하께 보낸편지」 (1835년 2월 16일),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87-390쪽; 정양모 신부 옮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 조신철 가롤로, 김 프란치스코가 연명으로 브뤼기에르 주교께 보낸 편지」(1835년 2월 16일), 『브뤼기에르 주교 여행기』, 391-394쪽.
132) 『브뤼기에르 주교 서한집』, 54신, 361-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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