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비실체성
언어와 개념은 도구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이것을 절대시하고 고정하면 안된다.
소쉬르 이전의 서양 주류 철학을 한마디로 규정하여 ‘이데아를 향한 끊임없는, 고단한 날갯짓’이었다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닐 것이다. 플라톤에서 헤겔이나 칸트에 이르기까지 서양 철학자들은 이데아, 본질, 실체 등을 규명하기 위하여 고통스러운 사색을 하였다. ‘나무’는 광합성 작용을 한다든가 탄소동화작용을 하기에 ‘나무’인 것이고, 나무는 그 스스로 ‘나무스러움’을 지니고 있으며 나무에 다가가면 나무의 실체를 알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소쉬르는 이런 실체론적 사유를 뒤엎고 구조적 사유의 지평을 연다. 나무는 나무 안에 없다. ‘나무’는 스스로 아무런 의미도, 본질도 갖지 못한다. 나무는 ‘풀’과의 차이를 통하여 ‘목질의 줄기를 가진 다년생의 식물’이란 의미를 드러낸다. 풀이 없었다면 나무 또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러한 차이들은 이 자체가 실체가 아니라 구조 자체가 만들어내는 효과다.” 이처럼 체계 속의 각 기호는 다른 기호들과의 차이 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의미는 기호 안에 내재하지 않는다. 의미는 사물의 본질이 드러난 것도, 주체의 경험이나 이해에 바탕을 둔 것도 아니다. 의미는 차이나 관계에 따라 드러난, 공유된 의미 작용 체계의 산물이다.(이도흠)
선과 악, 빛과 어둠, 낮과 밤.낮은 빛으로 가득하고 밤은 어둠으로 가득하다.낮은 구별을 드러내고 밤은 구별이나 차별을 무화한다.
수면에는 어둠이 빛이다. 반성과 성찰, 깊은 명상에는 밤과 어둠이 빛이다.
낮은 빛이고 눈이다.낮에는 석조전의 건물을 환하게 볼 수 있으나 암울했던 시대의 고종과 민중의 아픔은 드러내지 못한다."눈은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열지못한다. 닫을 수 있을 뿐이다."
사유의 눈은 "실핏줄이 드러나 피곤해 보이는 눈이었다"
낮과 빛은 깊은 사유의 눈을 열지 못한다.밤은 눈을 무화하고 깊은 마음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비로소 어둠 속에서 당시의 아픔을 환하게 드러낸다.어둠 속에서 볼 수 있는 것."그래서 밤이어야만 했다. 백년 전의 사람들, 백년 전의 비, 백년 전의 쇠락 "
낮과 밤, 빛과 어둠을 전도하여 볼 수 있는 역설적 사유다.
밤의 미학 / 문익환
커튼을 내려 달빛을 거절해라.
밖에서 흘러드는 전등불을 꺼라.
그리고 눈을 감고 가만히 기다려라
방 하나 가득한 어둠이 절로 환해져서
모든 것이 흙빛 원색으로 제 살을 내비치거든
네 몸에서도 모든 매듭을 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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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석조전 / 안희연
그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밤의 석조전
낮에는 가본 적 있다. 모든 것이 매끄럽고 선명했다. 기둥의 수, 창문의 투명도, 호위무사처럼 서 있는 나무의 위치까지도
돌인지 자갈인지 모래인지,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낮엔 다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밤이어야만 했다. 백년 전의 사람들, 백년 전의 비, 백년 전의 쇠락 앞으로 나를 데려간다면
모든 돌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고, 나는 이 거대한 돌이 말하게 하고 싶었다.
티켓을 끊고 들어간 밤의 석조전은 인공적인 빛에 휩싸여 있었다. 야행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밤의 석조전이 감추고 있는 밤의 석조전으로 들어가려면
눈은 들여다볼 수 있을 뿐 열지못한다. 닫을 수 있을 뿐이다.
여러 겹의 달빛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한 사람이 눈을 감았다 뜨는 소리는 몇 데시벨일까. 꽃병 속에서 줄기가 짓무르는 소리는?
몇걸음 못 가 돌아봤을 때, 아닌 척 눈을 부릅뜨는 밤이 보였다. 실핏줄이 드러나 피곤해 보이는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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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을 칭할 때 흔히 목사 혹은 통일운동가라 하지만 실은 시인이기도 하다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물리적 시간으로서의 밤. 그런 밤에 시 속 화자는 오히려 더 어두운 상황을 만들라고 명령한다.
눈까지 감으라고 한다. 이는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보라는 말이다. 그렇게 육체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방 하나 가득한 어둠이 절로 환해’질 것이란다. 비록 물리적 시간은 밤이요 모든 빛을 차단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되면 오히려 사위는 저절로 환해진다고 한다.
그렇게 될 때에 ‘모든 것이 흙빛 원색으로 제 살을 내비치’게 된단다. 즉 겉으로 드러난 윤곽이 아니라 원색의 제 살 - 바로 실체, 본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한둘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렇게 볼 수 있단다. 여기서 화자는 마음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때에 ‘네 몸에서도 모든 매듭을 풀어라’고 지시한다. 매듭이라니. 인연일 수도 있고, 갈등일 수도 있다. 어쩌면 삶에 대한 의문이나 고민 혹은 욕망이기도 하리라.
<석조전>
석조전(石造殿)은 덕수궁의 전각으로, 구한말에 지어진 신고전주의 양식의 궁전이다. 중화전의 서북쪽, 준명당의 서쪽에 위치해 있다. 1897년에 건립하여 경술국치해인 1910년에 완공되어, 대한제국과 역사를 함께 했다.
밤은 낮보다 은밀하다.
밤은 우리의 눈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고
성찰의 시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사물들에게도 새로운 빛과 분위기를 안겨준다.
밤이 참 좋다.
"밤은 하루하루 새로웠다. 매 순간마다 새로운 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밤의 소리는 들개들의 소리였다. 그들은 신비를 향해 짖어 대고 있었다. 그들은 밤이 만들어 낸 공간과 시간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이 마을과 저 마을에서 서로 화답하며 짖어 댔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연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