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가면 둘러보는 곳이 있다. 내가 태어난 집터와 건너편 사과밭 중간에 있는 당산나무가 있던 자리다. 마을의 당산나무는 느티나무였다. 이제는 초가삼간이나 하늘을 이고 서 있는 기세 좋은 느티나무는 볼 수 없지만 터는 남아 지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하다.
마을 이장을 육 년간 역임한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디스크 수술로 허리가 불편해 재활 운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당산나무에 동제를 지내고 있는지도 물었다. 이십 년 전부터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고 했다. 느티나무가 수령을 다해 흙으로 돌아가면서 마을 당산나무 역할을 할 수 없어 절에서 동제를 지내다 지금은 지내지 않는단다. 읍내에 대기업과 공단이 들어와 읍민의 의식이 변하였으며 외국인의 유입이 많아진 영향이기도 하다.
느티나무가 있는 동제당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주위에는 사과나무가 둘러싸고 있어 손만 뻗으면 따먹을 수 있지만 주인어른의 얼굴이 떠올라 침만 삼키며 손을 내렸다. 여름이면 느티나무 아래서 놀거나 나무를 타고 올라 담력을 뽐내기도 했다. 일을 하다 지친 어른들이 낮잠을 자는 곳이기도 했다.
마을 어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느티나무는 천년을 살고 있는 영물이라고 했다. 천년기념물 몇 호라는 비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확인할 수 없다. 나무 기둥이 너무 굵어 누워있었고 그 속은 터널처럼 넓어서 서너 명이 들어가 놀아도 충분했다. 누워있는 기둥에서 난 줄기의 굵기도 엄청났을 뿐만 아니라 크기도 하늘을 찌를 듯 컸다. 그 옆에는 동제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와 도구를 보관하는 조그마한 집이 있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느티나무 아래에서 동제를 지냈다. 동제를 위한 마을 논이 네 마지기 있었는데 제주가 농사를 지어 동제를 지내고 남은 것은 제주가 가졌다.
우리 집은 밭이 있고 논은 없었다. 아버지가 제주가 되어 동제를 지내면 쌀밥을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아 제주가 되기도 쉬웠다.
동제란 마을을 지키는 동신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이다.
고향마을 동제의 목적은 풍년과 마을의 안녕이다. 동제가 무사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마을 사람은 부정을 가리고 금기를 지키며 성스러운 시간과 공간을 정했다.
아버지는 새해 첫날부터 집 밖의 출입을 제한하고 언행을 조심하셨다. 제관은 어류와 육류를 먹지 않고 술과 담배를 끊으며 매일 찬물로 목욕재계해야 한다. 부부가 한방에 들지 않으며 출입문 밖에는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마을 동제당에도 보름 동안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잡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정월대보름 첫 시간이 오면 아버지 어머니는 준비한 재물을 이고 지고 느티나무가 있는 동제당으로 가셨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모님의 하얀 두루마기를 휘감고 달빛마저 고고할 때 부모님이 귀신의 입에 들어가서 영영 못 돌아오실 것 같아 겁이 났다. 동제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제에 차렸던 제물을 고루 나누어 먹었다. 내가 잔치의 주인공이 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동제를 지내지 않는다. 그래도 마을은 발전하고 사람들은 평화롭다.
고향은 경주시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다. 울산과 인접해 있어 공단이 많고 울산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인지 공동체 의식이 약해 진지 오래다.
동제는 공동운명체라는 자기 소속감을 확인시키고 공동의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는 행사였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고향과 함께 떠오르는 편안한 단어 중 하나다.
2024.6.22. 김주희
첫댓글 고향 마을 동제 지내던 이야기가 다시금 예전 기억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 마을의 동제 지내던 느티나무는 지금은 없어지고, 동제도 지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 시대의 흐름이라 생각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지요. 마을마다 하나씩은 있었는 데 .... 아련한 추억을 불러 주셨습니다.
동제는 옛날에는 마을의 큰 행사였습니다. 제관을 맡기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니며 마을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옛 풍속입니다. 아마 이제는 거의 사라지고 흔적만 남은 마을이 많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즐거운 추억 입니다. 글이 점점 좋아집니다. 시간을 내서 글을 읽고 쓰고 생각을 다듬으면 더욱 좋은 글이 됩니다.
지난 날의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글입니다. 문명한 사회일수록 옛 전통을 보존해 갔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외국인이 많을수록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나가는 자세가 필요한데 . 안타깝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