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57) 초선의 자결
한편, 미오성에는 이각, 곽사, 장제 등 동탁의 심복 맹장(猛將)들이 일 만여 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동탁이 황궁에서 무참히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반드시 토벌대가 오리라 믿고 밤을 도와 군사들을 데리고 양주(凉州)로 쫓겨 달아났다.
여포는 미오성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초선부터 찾았다. 그리하여 그립고 그립던 초선을 얼싸안으며,
"초선.... 동탁을 죽였으니 이제는 우리 세상이오. 그대와 나는 이제부터 인생을 마음껏 즐깁시다!"
그러자 초선은 모든 것이 뜻대로 되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하여 여포에게 환한 얼굴을 지으며 말 없이 고개만을 끄덕여 보였다.
한편 황보숭과 이숙은 동탁의 친족들을 모조리 죽여없앴다.
그리고 동탁의 노리개감으로 끌려왔던 팔백 여명의 궁녀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놓아 주고, 동탁에게 붙었던 간신배는 모조리 목을 베었다.
그중에는 동탁의 아우 동민(董旻)과 조카 동황(董璜)도 끼어 있었다.
동탁이 미오성 깊숙이 숨겨 둔 재물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황금 23만근, 은 89근을 비롯하여 눈이 어지러울 정도의 보물들이 창고에 가득차 있었다.
왕윤이 그 소식을 듣고 명령을 내렸다.
"금은보화는 모두 장안으로 보내고, 곡식은 모두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줘라!"
이때 백성들에게 나눠 준 곡식은 물경 팔백만 석이나 되었다.
그러자 장안에 백성들은 기쁨에 넘쳐났다.
동탁을 제거하기가 무섭게 날씨는 청명해지고, 바람은 온화하고 헷빛은 따사로웠다.
"이제야 태평성대가 돌아왔구나!"
백성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소리높여 외쳤다.
집집마다 떡을 치고 술을 빚어 즐거움을 나누었다.
그리고 밤이면 횃불을 들고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이제야 맘놓고 살게 되었다." ..."평화는 횃불처럼 우리를 밝혀 주는구나!" ...
백성들마다 제각기 한마디씩 소리쳤다.
기쁨은 백성들에게만 넘친 것은 아니었다.
태사로 임명된 왕윤도 만조 백관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어 마음껏 즐겼다.
그렇게 흥취와 환희가 한창 무르익어 가는데, 별안간 누군가 왕윤에 앞에 나타나 깜짝 놀랄 소식을 전한다.
"태사님, 괴이한 일이 있사옵니다."
"무슨 일이 있단 말이냐?"
"거리에 나딩굴고 있는 동탁의 목 없는 시체를 부등켜안고, 통곡을 하는 놈이 있사옵니다."
"뭐? 역적 동탁의 시체를 부등켜안고 통곡을 하는 놈이 있다구? ....어떤 놈인지 당장 잡아 올려라!"
왕윤이 크게 노하여 불호령을 내렸다.
그 순간 만조 백관들도 술잔을 든 채 불안한 시선이 모아졌다.
얼마쯤 지나자 무장 병사들이 한 사내를 붙잡아 와서 왕윤의 앞에 꿇어 앉힌다.
"바로 이놈이옵니다."
모두가 한테 살펴보니, 무지막지한 시골뜨기 인물이 아니었다.
인품과 차림새로 보아하니, 조관(朝官)임이 분명해 보였다.
"고개를 들어라!"
왕윤이 큰소리로 외치자, 잡혀 온 자가 고개를 드는데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시중 채옹(侍中 蔡邕)이었다.
그를 알아 본 왕윤을 비롯한 만조 백관들은 깜짝 놀랐다.
채옹은 당대의 기재(奇才)로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왕윤은 목소리를 가다듬어 채옹을 꾸짖었다.
"역적 동탁을 죽인 것은 국가의 경사스러운 일이거늘, 한나라의 신하인 그대가 동탁의 시체를 부등켜안고 통곡을 했다니 어찌 된 일인고?"
채옹이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다.
"제가 나라의 대의를 어찌 모르오리까마는 동탁과의 개인적인 친분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제 잘못을 한 번 용서해 주신다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만조 백관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듣고 동정해 마지않았다.
"채옹은 재주가 비상한 사람이오니, 한 번쯤 용서하고 높이 쓰시는 것이 어떠할까요?"
하면서 왕윤이 관대한 처분을 내려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왕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심이 안정을 찾아가는 이런 시기에,공,사(共私)를 구분하지 못 하는 인물이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소?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저렇듯 줏대없는 인물은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하오."
그리하여 당대의 기재로 불린 채옹은 공, 사를 구분하지 못한 탓으로 목이 베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조정에서는 동탁이 남긴 잔재로 어수선한 가운데, 오직 한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여포였다.
장안의 백성들은 이레 밤낮을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노래를 목청껏 불러제쳤지만, 여포만은 어떤 곳에도 나타나지 아니하고 자기 집 후원에서 미친 사람처럼 이리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초선이 , 초선이! 왜 그대가 죽는단 말인가?"
하고, 울부짖었다.
그러다가 어떤 때에는,
"초선이가 나를 버리고 죽다니, 이게 웬일인가말야!"
하고, 통곡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초선의 시체를 안치해 놓은 방안으로 들어와선, 싸늘하게 식어버린 초선을 부등켜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넋두리를 하였다.
"초선이! 제발 죽지 말고 지금이라도 눈을 떠 봐주오!...."
그러나 숨이 끊어진 사람이 대답이 있을 리가 없었다.
초선은 동탁을 제거하는 목적이 달성되고 여포가 미오성으로 들어오자 그의 도움을 받아 일단 장안의 여포의 집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러자 여포는 이제야말로 초선이 완전히 자기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초선의 마음은 몹시 괴로웠다.
나라를 위하고 왕윤의 은혜를 생각해서 동탁을 죽이는데 아낌없는 협력을 하였지만, 동탁에 의헤 더렵혀진 여자의 몸으로 이제 다시 여포의 품에 안겨 행복을 꿈 꿀 생각은 없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열일곱 살 먹은 앳 된 여자의 자존심으로는 도저히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포가 궁중에 잠깐 다녀오는 사이에 몸에 지니고 있던 호신용 은장도로 자기 목숨을 끊어 버렸던 것이다.
여포는 그 사실을 알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초선이! 나는 그대를 용서했건만, 그대는 어찌하여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단 말이오!"
여포는 초선의 자살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를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초선이가, 나의 여자가 되기를 그토록 갈망하던 초선이가, 어째서 이 마당에 자살을 했을까?"
여포로서는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였다.
초선의 죽은 얼굴에는 아무런 미련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어떤 만족감으로 젖은 미소조차 띄고 있었다.
그녀의 육신은 비록 동탁에게 여지없이 유린되었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아리따운 자태는 죽어서도 더욱 빛나는 듯이 보였다. 자는듯 숨죽인 얼굴은 살았을 때 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달 조차 구름 속에 가린 어느날 밤, 이날 밤도 여포는 초선의 시체를 부등켜안고 소리없이 울다가 제풀에 잠이 들었다.
얼마를 자다가 문득 눈을 떠보니 창가에 어린 달빛이 초선의 시체를 고요히 비추는 가운데, 초선의 허리춤에 조그만 주머니가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응, 이게 뭘까?...."
여포는 주머니를 떼어서 속을 열어 보았다.
주머니 속에는 한 조각의 거울과 한 편의 사향(麝香)이 들어 있었고, 여러 겹으로 접은 종이 조각이 따라 나왔다. 그 종이 조각을 펼쳐 보니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 있었다.
여자의 살결이 약하다고 하지만
거울 대신 검을 품으면
검으로서 마음이 굳세어진다.
나는 스스로 가시밭길을 가련다
부모 아닌 부모의 은혜를 갚고
나라를 위한 길이라면
악기를 버리고 춤추는 손에
비수를 숨겨 들고 역적에게 접근하여
마침내 독배를 올리리라
들려 온다 죽음에 직면한 이 귓가에,
장안의 백성들이 부르는 평화의 노래
그리고 천상에서 나를 부르는
죽음의 소리!
..
여포는 단순하고 우악스러운 맹장(猛將)인 고로, 처음에는 그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러나 다섯 번 읽어 보고 열 번을 읽어 보는 동안에, 그 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크게 놀랐다.
(그러면 초선이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나와 동탁간에....?)
여포는 그 놀라운 사실을 깨닫자 분노를 참지 못하고 초선의 시체를 번쩍 들어가지고 후원에 연못으로 달려가 깊은 연못 속에 초선의 시체를 <첨벙> 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초선을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