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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도 비렁길 3코스를 걸었다. 직포-> 갈바람통 전망대-> 매봉전망대-> 학동 까지의 길이 3.5km, 약 2시간 거리다. 그러나 이건 그리 중요한 개념이 아니다. 싱겁게 미리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정도만 걷게 되었단 뜻이다. 하늘과 바다는 남도의 섬들을 꽉 붙잡아 둘 만큼 매력적이었고 사람들의 기대는 가을하늘 만큼 부풀었다. 이 좋은 가을에 감성 자극하는 남도의 섬이라니… 금오도 비렁길!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그 어느 때보다 좌석점유율이 높았고 급기야 입석표까지 생겼으며 덕분에 발길 되돌린 분도 있었다. 계절이 인기인지 장소가 인기인지 하필 그날은 결혼식도 없었는지 궁금했지만, 셋 다 일 것으로 결론내린다. 버스 승선까지 꼼꼼하게도 준비하고 배 시간을 위해 신분증 당부도 유난히 챙긴다. 6시 정시 출발을 위해 10분 이른 시간으로 미리미리 공지도 잘 한다. 여름휴가지로 아껴두었다 이번 참에 가족 나들이로 택한 집이 있는가 하면 봄부터 살뜰히 모아두었던 여행지의 버킷리스트를 이번 기회에 호기롭게 펼치는 이도 있었다. 소풍 기분 내느라 새벽잠 설치며 기분 맞춤 도시락을 싼 집, 천고마비 실감하려 입맛 도는 기호식품 준비하며 꼼수마냥 술 한 병씩 챙겨온 집들… 그거 다 4코스부터 수장될 줄 모르고 삶이 우리를 속인 만찬에 초대되어 간다.
산행가는 날이면 잠을 적게 잔다. 지금까지 대체로 그랬다. 섬으로 간다면 미리 앞서가는 설렘주의보는 고질병이다. 바다위에 뜬 다리만 보아도 설레는 풍토병을 지병처럼 안고 산다. 여수는 내 고향 건넛마을이다. 얼마 전에 반한 책 속 사나이가 여수 거문도 사람이다. 여수,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이름이다. 여수旅愁, 그리움의 다른 언어이다. 여수, 여수, 여행가자고 그렇게 조르다 퇴짜 맞은 도시이다. 지치지도 않는 여행병을 앓게 하는 밤바다의 도시, 그랬기에 혼자 가버릴까 궁리하던 도시였다. 이 모든 갈망 속에 금오도 비렁길을 간다... 그 어느 때보다 설렜던 건 무슨 징조였을까. 이제는 그런 것을 조합해보는 중이다.
신기항에서 출발한 배가 함구미 선착장에 닿았을 때 가장 먼저 달려나온 건 방풍나물 파는 아낙들이었다. 금오도 비렁길의 첫 번째 마을 풍경이다. 섬마을 민박집 해풍 맞은 담장 아래 섬사람 특유의 생활력이 묻은 목소리로 防風을 호객한다. 낚시객이나 산객들에게 오랫동안 되팔았을 목소리다. 바람을 들이자는 건지 막자는 건지, 풍은 풍끼리 잘도 어우러졌다. 굳이 함구(緘口)하지 않고 활짝 맞이하는 품새가 어선 몇 척 정박한 작은 어촌마을을 활기로 물들인다. 하늘 일정이 파란 것 보니 바다의 여정 또한 아름다울 것이 점쳐졌다, 그때까지는...
함구미마을엔 이정표가 친절하다. 먼발치서도 큼지막하게 눈에 띄는 글씨들이 비렁길 안내를 자처하였다. 섬의 생김이 자라(鰲)를 닮은 데서 금오도(金鰲島)라지만 나무가 울창하여 거뭇하게 보인 데서 거무 - 그무(그모) - 금오라는 한자이름으로 정착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함구미는 무엇을 함구하고 말고, 란 뜻으로 쓰였을까. 이리저리 굴려 보아도 마냥 제자리인 단어들만 오락가락 글쎄~ 한다. 암튼, 차창을 스치는 동안 끝없이 펼쳐지는 방풍나물들이 갯바람에 단련된 초록을 지천에 까는 풍경이 인상적이다. 이쯤되면 거뭇한 것도 오답이란 생각이 들겠다.
'비렁'은 '벼랑'을 뜻하는 섬사람들 언어다. 벼랑은 낭떠러지의 '랑-낭'에서 알 수 있듯 가파른 곳에서 떨어지는 이미지다. 이 과정에서 벌렁 나자빠진다 할 때 '벌렁' 또한 '벼랑'과 어원적으로 닮은 꼴임을 유추할 수 있다. 여수에서 가까운 남해에선 '엉구렁'이라는 용어가 있다. '엉구'와 '벼랑'이 만나 이런 사투리를 구사했을 법한데 이외에도 '엉구'와 물을 가둬 두는 작은 '둠벙'이 만나 '엉구벙'까지 합성해 낸 게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어릴 땐 이런 발음을 어떻게 적어야 할 지 몰라 막연히 어른들만의 사투리로만 천시(?)했는데 가만 보니 언어 속에 삶을 일군 환경과 그들의 척박한 생활터전들이 함께 엿보임을 알 수 있다. '비렁' 만나니 반가워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단어 몇 가지… 나의 오래된 습관들이다.
함구미 마을을 지나 우리가 걸을 3코스로 이동한다. 3코스가 시작되는 '직포'마을은 이렇게 아름다운 인삿말부터 가르친다. 사실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지 않는 바람에 마을 초입의 소나무 광경을 놓치고 말았다. 내릴 줄 알고 멍 하니 앉았다 그대로 출발하고 말았는데 아름드리 노송 아래 버스정류장은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직포'의 전설은 옥녀봉 선녀들이 수를 놓는다. 하늘나라 선녀들이 달밤에 베를 짜다 무더위를 피해 목욕을 내려왔는데 노는 데 정신이 팔려 그만 하늘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하늘나라 베를 짜는 선녀들을 대신해 직포(織布)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 숲에서 날아든 향기의 정체를 점점 알 것 같아진다.
'직포'의 첫 걸음은 시작부터 달콤한 동백숲 길이다. 그리 우람하지 않아도 빽빽하게 밀림을 만든 숲이 제법 한참 이어진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선 파도 소리도 부드럽게 갈라지는데 어디선가 기분 좋은 과일향까지 날아들었다. 요즘 절정인 은목서 향 같기도 하고 모과향 같기도 하지만 어디에서도 이들의 흔적은 없다. 그 은밀함이 길을 유혹한다. 걸을수록 내 여행의 운을 과하게 믿게 하는 구실까지 덤으로 주면서.
첫 번째 집결지는 '갈바람통 전망대'다. 순한 에메랄드빛을 보기 위해 저절로 밀집하는 자리에서는 내방 네방이 따로 없다.
바위에서 자생한 소나무는 갈바람통 지킴이 구실을 한다. '비렁'이 소나무를 단련시킨 자리에 전망대를 놓으니 탁 트인 조망은 소나무가 누리는 형국이다. 덕분에 사람들 얼굴마다 소나무 그림자가 다크서클로 내려앉았다.
곱게 자란 아들은 이런 경치를 무슨 재미로 받아들일까.
'갈바람통'
왠지 단순한 의미의 '갈바람'을 뜻하지는 않을 것 같다. 이곳 모습을 보니 '통로'를 짐작할 수 있는데 바위를 쩍 갈라 놓은 좁은 협곡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는 의미를 지니지 않았을까? 바위를 가른 것이 바람이라는 생각으로 이 바위 틈을 보자. 여름이라면 시원함이 남달랐을 법하다. 결국 멋대로 '갈바람통'을 해석해버린다. '바위를 가른 바람을 통째로 마시는 곳'이라고....
다시 기분좋은 숲길이 이어진다.
매봉 가는 길에 만난 작은 매 한 마리 그리고 에메랄드 바다.... 매는 이런 바다에서 날고 싶은 것이다.
길섶의 바위를 힘차게 기어 오르는 소나무는 눈길 한 번 더 받아야 마땅하다. 처음엔 어느 바람에 슬쩍 기울었을 것이다. 쉬이 제 뿌리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배운 뼈대있는 가문 답게 소나무는 이웃한 바위에 제 몸을 의탁하기로 한다. 드러나려는 뿌리는 저만치 숨기고. 그 바위와 오래 정을 통한 것인지 차차 바위와 소나무는 한 몸처럼 붙어 버렸다. 누워서 비렁을 기는 끈질긴 생명력에 잠시 서게 된다. 인간의 목숨 건 사투가 이 한 장의 더부살이만큼이나 처절할까. (그나저나, 이 풍경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주변 정화를 해준다면 바람직한 명소가 될 것도 같은데....)
매봉 전망대로 햇빛은 쏟아지고
은비늘 찬란하게 부서지면 저도 모르게 입 속 가득 바람을 들일 것이다. 갈바람 통째로...
'매봉 전망대'
3코스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곳. 이곳에서 '직포' 전설을 시로 만나게 된다. 옥녀봉 전설 속 선녀들이 베틀에 앉아 천년 세월 울며 보낸 사연을 화자의 나레이션으로 되살려냈다. 선녀는 말이 없고 찬란하게 부서지는 은비늘만 수를 놓고 있다.
반짝이고 반짝이는 윤슬. 바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수를 놓는다.
'출렁다리'
두 개의 가락지 형상이 인상적인 다리. 이 장면 하나를 보이기 위해 전망대를 만들어 둔 것도 인상적이다. 덕분에 올랐다 내려오는 샛길을 잘못 들어 맥없이 돌아나와야 했지만 그 길섶엔 구절초가 유독 많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이왕이면 가장 깨끗한 구절초를 찾노라며 자세히 살피니 상처 받지 않은 꽃 만나기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결국 한 송이는 만나게 되지만 말이다. 고개 들어 가을만이 아니다. 고개 숙여도 가을은 가을이다.
이왕 걷는 길, 더 아름다울 거리를 찾으며 걷는다.
다리는 '갠자굴통 삼거리'라는 독특한 이름 위에 서 있는데, 솟아오른 모습이 망루를 연상케 한다. 만약 자(闍)를 망루 闍로 읽는다면 자굴은 우리 고장의 자굴산(闍堀山)과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언뜻 성문 위에 놓인 망루처럼 높으며 우뚝 솟아 있다. 이때 굴이 우뚝 솟을 堀자를 쓴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바다의 동굴을 형상하고 있어 우리말 조합으로 해석할 가능성도 높다. 그럼에도 맑게 갠 자굴통이라면 우뚝 솟은 망루처럼 높은 사이에서 통과하는 이곳 지형을 뜻할 것도 같다. 이곳에 오니 말의 깊이를 찾는 이상한 실험정신이 .. 자꾸만 솟아오르는 것 같다.
다리는 때로 겁없이 날아오른다.
암만 봐도 오묘한 이름 '갠자굴통 삼거리'
바위를 찍은 게 아니다. 거대한 바위에서 인간의 작기를 보여주는 낚시꾼.
사람도 소나무도 불어오는 바람 앞에선 두 팔을 벌린다.
길이 있다면 그 길 위에는 반드시 사람이 서야 한다. 비로소 길다워지는 것이다. 키보드에 사람을 쓸 때 종종 '삶'이 될 때 있다.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이치를 순간의 동작으로 알게 하는 이치다. 길 위에 사람이 서지 않으면 길은 의미가 없다.
바다가 아름다워지기 위해선 배가 있어야 하고 배가 떠돌지 않기 위해선 등대가 있어야 한다. 바다는 비로소 바다다워진다. 점심 시간에 학동 마을에 다다랐다. 운명의 장소라면 좀 과할까?
길거리 식탁으로 택한 방파제에서야 소식을 듣는다. 우리가 걸어갈 4코스 구간이 태풍 콩레이로 인해 일부 구간이 무너졌단다. 아연실색, 가장 난감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음을 여러 수신음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하필 맛나다고 생각하는 점심으로 정신의 포만을 느끼고 있을 때였고, 유명하다는 '개도 막걸리'는 아직 개시하지도 못했을 때였다.
이때 인간의 심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바탕으로 전개되게 되어 있다. 선택은 대체로 두 가지다. '모범을 행하느냐'와 '모험을 강행하느냐'로 이번에도 나뉠 것이다. 집행부의 위치는 제각각이었고, 버스는 먼 거리의 종점에서 기다리고 있다. 미리 식사한 회원들 일부가 화장실을 가려는지 4코스로 가려는지 종잡을 수 없는 걸음을 옮긴다. 결정을 하기 전에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온다. 중론을 모아야 하지만, 흩어진 사람도 지도 속 표시도 이 방법을 참신하게 일러줄 묘안을 제시하지 못한다. 중간 중간 뻗은 길을 찾는 것 보니 4코스를 접는 눈치다.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모험은 아는 길만 가는 모범생에겐 역시 무리다.
결국 지자요수(知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는 말씀대로 포기의 대오에 합류하지만 속상한 마음은 삐죽삐죽 솟아오른다. 방파제에서 처음 우리를 부려 놓았던 학동마을 버스정류장까지 오르기로 한다. 어디로 가라는 말씀인지? 태풍 콩레이는 면사무소 직원의 말대로 그렇게 큰 피해를 상기시킬 만큼 길을 끊어놓았단 말인가? 인솔자의 경우와 따르는 사람들의 경우가 생각의 꼭지점에서 부딪힌다. 인터넷은 다양한 정보를 주지만 인생은 다양한 정보가 누락한 실체를 제공한다.
지금 내가 올리는 사진과 글은 정보가 아니다. 그저 내 생각이고 내 선택에 의해서 이런 글을 쓸 뿐이다. 사람들이 올리는 사진과 글은 감언이설이 될 수 있으니 너무 믿지 말 것이며, 되도록이면 마음의 절반은 비우고 다닐 것을 권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그 방법을 선택해서 다니겠지만 나는 매번 현장에서 배운다.
나의 수많은 단점에도 괜찮은 장점이 한두 가지 있다면, 적응력이 뛰어나다는 것? 마을길을 벗어나면 이렇듯 새로운 코스가 펼쳐지는 것에 금방 화색이 돈다. 파도소리 가깝던 길이 멀어지고 대신 집과 밭이 새로운 골목길을 만드는 곳으로 접어들었다.
훌륭한 돌담을 자주 만난다. 자연에 가까운 사람이 쌓아 일군 것은 모조리 위대하다. 더러 알려지지 않고 자세히 봐주지 않아서 덜 유명한 곳들이 훌륭한 삶을 전시할 때, 그럴 때 좀 심쿵해주면 좋겠다.
돌담길이 정성스러워 눈길 자꾸만 달려가는데 이 풍경 그대로 어린 시절 누비던 고향집 뜨락이 된다. 방풍 캐느라 땅을 기어다닐 어른들이 밭가에 엎드린 듯하다. 섬사람들 부지런한 건지 작물들이 바지런한 건지 이 환경이 그들을 키우는 건지….
우리 동네 같은 저들의 동네. 내겐 이런 고요한 질서가 곧잘 와닿는다. 보이는 곳마다 수를 놓듯 단정한 돌담길과 꼬부랑 넘어가는 길들.
새로운 소풍길이 이어진다. 정보에 나오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기분이라 더욱 좋다. 낯선 마을을 지나는 사이 왠지 익숙한 기분을 어린시절 소풍길에서 찾는다. 바짓가락 적시던 길섶 이슬 같은 이 길의 매력을 어찌 말로 다 할까. 비록 가지 못한 그 길이 미련으로 서성일지라도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은 이 길 만의 방식으로 이미 나를 사로잡고 있었다.
가지 않은 길
-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 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진정한 여행'
여러 입장까지 염두에 둘 필요는 없지만 솔직히 염소 입장에선 우리가 얼마나 낯설었을까. 낯선 자의 시선이 필요한 시점이 되니 쓰면서도 즐겁다.
요즘은 여행지를 떠나기 전 숱한 자료로 검색을 해서 웬만한 정보는 알고 간다. 익숙한 대신 재미가 없다. 반전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 속 멋진 풍경은 지저분한 구간을 제거한 최선의 각도에서 사진을 장식하므로 실물보다 아름다운 허상을 전시하기 십상이다. 멋진 풍경만을 본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가면 실망한다 말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그러나 여행은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느낀 지점에서 진정한 여행의 묘미를 발견하는 것. 사람도 반전이 있어야 매력적이듯 여행은 타인의 사진과 글에 반전을 가하는 살아뛰는 개척정신을 필요로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우리는 정보를 잃고 내 경험을 믿을 차례, 여행이 던지는 반전의 순간이다.
"태풍 콩레이로 여기까지 왔소?"하고 묻는 염소.
섬집은 특히 감나무 한 두 그루씩은 꼭 키운다. 바다를 저만치 내려다보던 자리에 우리집도 이렇게 감나무를 키웠지. 감이 주렁주렁 열린 풍경을 지날 때 내 기분도 절정이었다. '반전' 다음에 온 '평화' 때문이었을까.
이 층층식 계단마다 내 고향 마을이 어릿거린다. 푸른 것이 시금치 아닌 방풍이란 것만 다를까.
결국 3코스 마지막 길에 와서야 이 고샅길 걷기 아니, 오늘 가지 못한 길의 주제를 알았다. 우리의 금오도 비렁길은 이렇게 3코스에서 중단되고 말지만 여러분, 이 한 마디 꼭 읽어주세요, 하며 김용택 시인이 어느 집 담장에서 뜸적뜸적 우리를 불러세운 것이다.
쉬는 날 / 김용택
사느라고 애들 쓴다
오늘은 시도 읽지 말고 모두 그냥 쉬어라
맑은 가을 하늘가에 서서
시드는 햇볕이나 발로 툭툭 차며 놀아라
결국 인생이란 시시해서 詩다. 호기롭게 떠났어도 한 줄 시가 그거 다 안다는 듯 이렇게 쉬라 하니 옳다거니, 하게 된다. 이렇게 공치는 날도 있어야 시드는 햇볕도 발로 툭툭 할 수 있는 거라니, 우리가 걸으며 툭툭 찼던 발부리 너무 욕할 것 없다. 실패가 아니라 하루 쉬었다 온 셈 치는 거다. '시드는-햇볕'을 '시-드는-햇볕'으로 읽으려면 쉬는 날 만이 그 묘미를 아는 법!!! 하루 잘 쉬었다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