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누나
황보영락
M1 소총과 카빈 소총, 따발총 소리가 섞이면서 마을을 뒤집어 놨던 다다음 해였다. 1952년 열여섯 살 신부와 스물한 살 총각이 결혼했지만, 육이오 전쟁은 2대 독자 새신랑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었다. 신랑은 징집이 되어 전쟁터에서 사선을 넘나들었다. 용케도 살아남아 전쟁이 끝난 뒤에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다. 그 뒤부터 1971년까지 여섯 명의 자녀들이 태어났다. 삼남 삼녀이다.
누나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는 최빈국 중의 하나였다. 어머니 아버지만큼이야 고생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유교의 전통이 남아있는 고리타분한 향풍(鄕風)이 남아있었다. 마을 이름도 지례(知禮)라고 불리는 마을이었다.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말을 태어나면서부터 듣고 자란 누나였다. 그 뒤로 다섯 명의 동생이 줄줄이 태어났다.
몇 해 전에 친구들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 있는 봉정사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누나의 초등학교 동창분이 문화해설사를 하고 계셨다. 내가 누나 이름을 말하고 동생이라고 하니,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그분은 누나를 이야기하면서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영민한 아이였다”라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같이 놀러 간 친구들에게 내가 하고 싶은 누나 자랑을 누나 초등학교 동창이 대신해서 해 주셨다. 내가 이야기를 했으면 자랑이지만, 그분이 하는 누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다. 눈앞에 보이는 아름드리 참나무 가지도 그 해설사님의 말은 ‘참말’이라고 끄덕거리는 듯 아래위로 흔들리고 있었다.
실제로 누나는 부모님은 직접 노트를 사 준 적이 없었다고 했다. 매년 개최되는 운동회와 종업식 때 받는 성적우수상으로 받은 노트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누나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될 무렵, 6학년 두 개 반 중 하나는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는 학반이었다고 한다. 누나는 비진학 반에 편성이 되었다. 그 당시에 담임선생님이 우리 집으로 찾아오셨다. 찾아와서는 누나를 중학교에 보내야 한다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누나를 중학교에 진학시킬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선생님이 누나의 입학금을 보태주겠다는 제의까지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래도 줄지어 동생이 네 명이나 있다며 그 제의를 거절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누나는 뒷방으로 가서 훌쩍이며 울고 있었다.
누나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에 동생들을 돌보고 살림살이를 하는 것이 누나의 몫이었다. 나를 낳으신 분은 엄마이지만 나를 업어서 키우고 나를 가르친 사람은 누나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 봄날이면 누나는 나를 데리고 산으로 산나물을 채취하러 다녔다. 누나는 참취, 개미취, 원추리 같은 산나물과 약초를 많이 가르쳐 주곤 했었다. 1960년대 후반에만 해도 우리 마을 뒷산에는 나무보다 풀이 더 많았다. 그 풀 사이에 산나물과 산 약초가 많았기 때문에 그 약초를 캐서 생활하시는 분도 있던 시절이었다.
그 무렵 마을 한가운데에 공동우물이 있었다. 그 우물물은 50여 명 주민의 생명수였다. 누나는 밤 10시가 넘어서 잠을 자려는 나를 깨워 우물로 데려갔다. 우물물을 뜨려고 오는 사람들이 없는 늦은 밤을 골라서 우물 청소를 하기 위해서이다. 나의 임무는 우물 속으로 들어가 바가지와 양동이로 물을 퍼 올려주면, 누나가 받아서 버리는 협동방식의 청소작업이었다. 20kg도 안 되는 체구는 우물 속에서 작업하기에 특화된 체형이었다. 그 고향마을 우물 청소는 누나와 내가 도맡아서 한 것 같다.
우리 6남매의 맏이였고, 결혼해서는 삼 형제의 맏며느리로 생활하면서 스무 명이 넘는 시가의 4촌 형제들의 모임을 주도하셨고, 초등학교 최종학력으로 이웃 마을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생활 수기를 대신 작성하셨다. 그 이야기가 도지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 나중에 그 수기를 읽어봤다. 서사적 표현은 없지만, 사실 전달이 확실한 구어체의 비문법적 문장도 제법 있었다. 그 당시 여든 살 할머니 이야기는 사투리투성이의 비문법적 표현이 훨씬 더 호소력이 있었을 것 같기도 했다. 안동 새마을 부녀회 부회장을 하면서 나름 사회적 역량까지 발휘하셨던 누나이셨다.
그 시대에서도 누나는 자기 주도적 삶을 사신 것 같다. 형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통학용 새 자전거를 샀다. 그런데 누나는 여자가 타면 왜 안 되느냐고 항의하면서 보름달이 뜬 날 마당에서 금방 배워버렸고, 오토바이도 타고, 경운기도 몰고, 운전면허까지 금방 취득해 버렸다.
지금은 시내에서 작은 기름방을 하시는데 의외로 단골손님도 많다. 내가 보기에는 사업수완도 있다. 그러나 자형이 2년 넘게 뇌경색으로 요양병원에서 투병하고 있어서 동분서주하며 삶의 수레를 혼자서 해 질 녘까지 끌고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새마을 노래를 배우고, 국민교육헌장을 다 외워야 하던 시대적 요구가 있었다. 누나의 청춘은 가고 이제 칠순이 넘어버렸다. K 장녀들은 들판의 냉이 꽃처럼 무리 지어 피었지만, 꽃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이른 봄나물로만 대접받은 풀꽃이었을 뿐이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처럼 자세히 봐주고, 오래 봐주는 시대에 태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동화 ‘몽실 언니’처럼 동생들에게 자신의 등을 먼저 내어주고 우리 동생들의 등불이 되어 주었던 누나의 손등에 저녁 노을빛이 내려앉아도 남아있는 누나의 시간은 더 예쁘고, 사랑받는 봄날의 꽃이었으면 좋겠다.
첫댓글 성장환경이 비슷해서 그런지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큰누나는 어제 팔십 생일상을 받았답니다~~
지난 세월 청춘이 아깝습니다. 그때는 여자는 거저 동생들 뒷바라지 하다가 시집가고 했습니다. 누나에게 정말 잘 하세요.
형제의 등불이 되었던 누나를 많이 닮아서 글도 잘쓰시고 , 부지런하고 마음이 따뜻한 쌤의글 잘읽었습니다
누나의 수고와 헌신을 잘 알아주는 동생이 있어서 힘이 나실것 같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공책 한번 사지 않고 상으로 받았던 공책을 쓸 만큼 영민했던 누나! 누나와 함께 우물 청소를 했던 추억, 주어진 환경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확장해 나가는 누나의 모습, 누나를 생각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잘 드러나는 글입니다. 재미있게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