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가 마음을 자기 의지에 복종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 하나를 자유자재로 다스리면 그것이 득도요, 그것이 부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마음공부가 유행하는 이유가 아마도 그런 착각이 만연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구름이 단언컨데 마음은 의지로 움직일 수 없다. 그것은 원효도 못하는 일이다.
원효는 해골바가지의 물 사건을 겪은 후 "일체유심조"를 깨달았다. 일체의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며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그 마음을 누가, 무엇이 그리 만드는가에 대해서 원효는 제대로 짚지 못했다. 그래서 후학들이 일체유심조 때문에 많이 헷갈려하고 있다. 일체유심조이니까 마음만 다잡으면 땡이라는 야무진 착각 속에서 꿈에서 깰 줄을 모른다.
마음은 그대의 의지로 어찌 할 수 없다. 원효의 사건을 예를 들어 이야기 하자. 원효는 캄캄한 밤에 해골바가지에 고인 썩은 물을 바가지에 담긴 물로 생각하고 시원하게 마셨다. 그러다가 아침에 그것이 해골바가지요, 자기가 잠들었던 곳이 무덤 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그는 전날 밤에 마신 물을 창자에 내려간 것까지 끌어올려 다 게워내고 말았다.
자 여기서부터가 문제다. 원효는 그 물이 해골바가지가 썩은 물이라는 것을 알고 말았다. 알고 만 것을 알기 전의 상태로 원효는 되돌릴 수 있을까? 이건 불가능하다. 원효가 해골바가지를 앞에 두고 "저건 시원한 감로수다. 시원한 감로수다. 저건 해골바가지가 아니라 물바가지다"하고 10년을 면벽수도를 하면서 최면을 건다 해서 원효의 마음이 해골바가지를 물바가지로, 그 썩은 물을 감로수로 받아들일까?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한번 알고나면 끝이다. 암만 마음을 다잡아도 알게 된 사실이 부정되지 않는다.
눈으로 해골바가지를 보고 섞은 물이라고 알게 된 이상 마음은 절대 그에 반대되는 의지에 승복하지 않는다. 어떤 최면과 각오와 필요성에 의해서도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 마음이 바뀌는 것은 오직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 뿐이다.
만약에 원효가 해골바가지를 보고 구역질을 하고 있는데, 혜초가 낄낄거리면서 말하기를 "이건 장난이었네 이 사람아. 해골바가지는 내가 자네 놀래주려고 아침에 가져다 놓은 거고 자네가 어제 저녁에 마신 것은 진짜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었네. 이게 그 물일세"하고 바가지에 담긴 물을 보여주게 되면 원효는 그 순간 구역질을 멈추게 된다. 마음이 새로 알게된 사실에 금방 승복하는 때문이다. 10년의 수행으로도 되돌리지 못하는 마음이 알게 되면 순식간에 바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앎에 의해서 바뀐 마음은 금강석처럼 강고하다. 자기의 의지로, 믿음으로 다잡은 마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굳센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의지도 수행도 수련도 최면도 필요없다. 그저 알기만 하면 된다.
길을 가다가 금반지를 줏었다 치자. 다이아몬드가 커다랗게 박힌 놈이었다 치자. 어떤 사람이 그것을 버리라고 해도 쉽게 버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감정사에게 가져가 확인을 했더니 다마도 가짜고 금이 아니라 금멕기를 입힌 구리라고 했을 때는 제발 좀 가지고 있으라고 사정을 해도 에이 재수엄써 하고 멀리 던져버릴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은 오직 아는 것에 따르고 순종한다. 알게 된 것에는 마음을 항복시킬 필요가 없다. 아무런 부수적인 노력이 없어도 마음은 아주 착한 종처럼 말을 잘 듣는다.
진리를 알게 되면 번뇌와 망상은 구리반지처럼 안 시켜도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우리에게 깨달아야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가르치신 것이다. 마음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으면 마음은 저절로 따라오는 것이다.
그런데 달마의 가르침은 뭔가? 마음이 진여이니 이 놈을 잡고 씨름을 해야 된다고 개나발을 불고 있다. 마음공부의 도사들은 뭔가? 이 놈을 비우고 이 놈을 갈고 딱아야 한다고 설레발을 치고 있다. 마음이 뭔지도 모르는 넘들이 마음공부를 한다고 사까닥질을 하고 있다.
마음이란 아는 대로 따라가는 봉사이다. 바로 알고 있으면 바로 가고, 잘못 알고 있으면 그릇 간다. 바로건 틀리게건 아는대로 간다. 때문에 마음이 올바로 가기를 원하면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진리를 알면 내 마음은 진리가 가르키는 대로 간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다. 어떤 수행으로도 마음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과 반대되는 의지를 받아들이게 할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러한 마음의 본질을 너무나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하시는 거다. 나머지 조사 나부랭이들은 똥오줌을 못 가린다.
왜냐하면 이런 공부들은 깨달음의 장애물이고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깨달음하고는 저언혀 관계없는 사까닥질이기 때문이다.
깨닫기 위한 수행은 마음의 활성이 최고도에 있기를 요구한다. 진리를 깨달아 알기 위해서는 마음은 그 에너지를 극한까지 동원하여야 하는 것이다. 어둠 속에서 양초 한 자루를 더듬어 찾으려면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손에다 집중을 해야 하겠는가? 그냥 앉은 자리에서 귀찮은 듯이 손을 휘저어본다고 양초가 손에 들어오겠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자기 내부의 모든 정보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서로를 연결시키고 결합하고, 엮어 나가야 한다. 추론하고 유추하고 사색하고 검증하고, 검산하고, 논증해야 한다. 가장 고도한 차원의 사유가 극한에까지 이를 때에 비로소 진리의 문이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의 활동은 불이 켜지고 나면 사라지는 어둠이요, 피안에 다다르면 버려야 하는 뗏목이다. 일부러 몰아내지 않아도 어둠은 빛이 밝혀지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이요, 뗏목은 일부러 버리지 않아도 강 건너에 도착하면 그 자체로써 버려지는 것이다. 따로 버린다는 행위가 필요없다.
그런데 마음공부라는 것은 강을 건너기도 전에 뗏목을 부수자는 짓이다. 뗏목이나 있는 넘들이면 모르겠는데 지푸라기도 없는 넘들이 뗏목부터 부수자고 드는 것이다. 피안으로의 항해는 위험하고 길고 앞길을 장담할 수 없는 인생 최대의 모험이다. 조금이라도 더 뗏목을 튼튼히 하고, 물과 양식을 싣고, 나침반을 준비하고 항해술을 익혀야 한다. 그 모든 것들은 막상 항해가 끝나고 나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다 내다버릴 것이다. 그러나 항해를 하기 전에는 아무리 세심하고 철저하게 준비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마음공부라는 것들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안하는 방법을 찾는다. 마음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에너지를 죽여서 비활성상태로 만든다. 마음을 죽이는데 모든 노력을 다한다.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는 것을 포기해 버린다.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모른다"하고 지랄염병을 하고 자빠진다. 강을 건늘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강을 쳐다 보지도 않으려 한다. 준비는 커녕 있는 것까지 부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마음공부로 뭘 깨닫는다 소린가? 깨닫는다는 것의 의미가 헷갈린다. 아무 생각도 안하면 편하다는 것을 깨닫나? 죽으면 더 편하다. 고마 죽어뿌라.
부처님은 해탈에 이르는 것을 차안에서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으로 비유하셨다. 마음은 피안에 다다를 때까지 우리가 타고 가야 할 뗏목이니 강을 건너고 나면 버려도 된다, 아니 절로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차안과 피안 사이의 강은 넓고도 깊다. 소용돌이치는 곳도 있고, 악어가 득시글거리는 위험한 곳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뗏목에다가 가능한한 많은 것을 실어야 한다. 항해 도중에 뭐가 필요하고 어떤 것이 소용될 지 모른다. 바늘 하나 실 하나도 소홀히 할 것이 없다. 온갖 것이 다 도움이 된다. 작대기 하나가 배의 구멍을 막아서 난파를 면하게 해 줄 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찾는 것이, 찾아야만 하는 것이 피안이 아니라 우리의 뗏목 안에 있으니 뗏목을 뒤져보라고 구라를 친 넘이 있었다. 그게 달마다. 목적지가 피안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니 힘들게 강을 건너지 않아도 뗏목을 뒤져보면 그 속에 우리가 찾는 게 있다고 거짓부렁을 씨부려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강을 건널 생각은 안하고 뗏목을 뒤지고 있다. 애써 실어놓은 것을 죄 꺼집어내서 팽개치고 있는 것이다. 하나라도 더 챙기고 싣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배를 비운다고 난리육갑을 치는 것이다. 다 들어내야 찾을 수 있을테니까.
이게 바로 전도망상이다. 수단과 목적을 혼동하고 방향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마음은 수단이다. 우리가 강을 건너기 위해 몸과 화물을 실어야 하는 배다. 건너고 나면 소용없다.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 속에 무슨 목적지가 있나? 무슨 보물이 있나?
달마의 거짓말은 수미산보다 크고 항하보다 깊다. 부처님의 정법을 가리고 뭇중생에게 미혹을 심은 죄는 억겁의 지옥불로도 속죄하지 못한다.
이슬이하고 백세주가 값이 똑같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세주 마실겁니다. 30년 짜리 와인이 있으면 그걸 더 마시겠지요. 케이티엑스하고 우등하고 표값이 같은데 우등열차 탈 이유가 있겠습니까.
우리 중생이 우선 마음이 불안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교회도 가고 마음공부도 하고 하는거다 하시는데 말입니다. 기왕이면 같은 시간 투자하고 같은 차비들고 같은 수고해서 가는 건데 말입니다. 왜 절에를 안 가고 마음공부하는 선원을 가시냐 이 말입니다. 부처님 말씀보다 그런 도사들 말씀이 더 달콤하고 솔깃해서 그렇습니까? 더 쉬워서 그렇습니까? 절이 미덥지 못하고 중들이 싫어서 그렇습니까.
중 보고 가시지 말고, 꼭 절에 가야 되는 것도 아니고 마음공분가 그런거 할 시간에 불경이라도 펴놓고 좀 읽으시면 그게 훨씬 도움이 되고 공덕이 됩니다. 대낮같이 밝은 전등 놔두고 왜 어두침침한 호롱불 밑에서 갑갑한 공부를 하십니까.
불경은 그냥 몇줄만 읽어도 내세에 고생을 덜어주는 공덕이 됩니다. 천수경의 한구절이 언젠가 죽어서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을 때 극락으로 안내하는 등불로 밝혀질지 모릅니다. 부모형제,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도 같이 가줄 수 없는 그곳으로 혼자 먼 길을 떠날 때 마음공부한 것들보다는 부처님 말씀이 도움이 됩니다. 깨달음 같은 것을 이생에서 못 얻어도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어둡고 외로운 길을 걸어서 이 세상에 도착해서 태어났는데 말입니다. 전생에 불경이라도 읽은 공덕이 있어서 밝은 곳으로 온 사람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하고 차이가 엄청 많은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정도란 뭐냐. 진리를 따르는 길이 정도입니다. 뭐가 진리냐? 올바른 설명이 진립니다. 뭐에 대한 설명이냐?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어디서 왔느냐?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느냐? 왜 태어났으며 왜 죽어야 하는가? 등등 그것만 알면 더 이상 알아야 할 것이 없는 질문들에 대한 답이 올바른 것일 때 저는 그것을 진리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죽은 다음에 어떻게 되는지 딱 부러지게 알고나면 나머지는 뭐 그리 알고 싶지도 않아요.
이런 궁극적 의문에 대한 답변을 가장 그럴듯하게 설명한 것은 불교밖에 없다고 나는 봅니다. 다른 종교의 답변들은 마카 소설이고 만홥니다.
그런데 마음공부라는 것들은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하는 짓에 "진리"라는 가치를 끌어다 붙인다는 점입니다. 저거 선생이 떠드는 소리가 진리랍니다. 진리는 개코. 그게 무슨 진립니까?
마음공부의 창시자가 달마인데 달마의 어록을 한번 보세요. 진리의 범주에 들어가는 소리는 한마디도 없고 마카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그냥 지혼자 지생각일뿐인 소리들입니다. 달마 어록 중에 진리에 해당하는 소리를 한마디라도 찾아서 가져 와 보세요.
오늘날의 마음공부 도사들 하는 소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게 다 외도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진리만 안 팔아묵으면 제가 이렇게 욕 안 합니다. 개나 고동이나 지 나발이 진리라 하니까 꿀밤들을 맞는 겁니다.
외도라 하는 정도야 점잖은 표현이죠.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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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2 [RE]마음을 닦아서 얻은 깨달음~~ ?? ( 2 ) 구름~~ 2005-12-08 20:55:34 739
Name 구름~~ http://clouds.or.krclouds@chol.com
subject [RE]마음을 닦아서 얻은 깨달음~~ ??
문제가 그거네요. "깨달음"이라는 말의 정의 내지는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
깨닫는다는 말은 불교용어가 아닌 순수 우리말로 일반적인 동사입니다. 그러나 수련이나 수행에 관련되어 이 말을 쓸 때는 불교가 약간 독점적 권리를 행사하는 말이 됩니다. 구름이 이 말을 쓸 때는 거의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각"이라는 의미로 씁니다.
불교의 깨달음은 명확한 목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제일 먼저 밝히신 것이 이것입니다. 바로 "죽음을 해결하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이고 소용이고 가치입니다. 죽음을 해결하지 못하는 깨달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의 깨달음"이 아닌 다른 공부의 소득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깨달음의 정의를 도외시하고 이 말을 사용합니다. 진리라는 말도 마구잡이로 아무 것에나 갖다 붙이고, 깨달음이라는 말도 지 멋대로 씁니다.
불교적으로 말할 때는 "깨달았다"는 것은 "생사의 의문을 다 풀었다", "죽음을 해결했다", "생사를 초극하게 되었다"는 말과 같은 의미라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깨달았다" 해서 어떻게 깨달았냐 물어보면 마음공부 해서 깨달았다 그럽니다. 그래서 뭘 해결했냐 물어보면 고마 횡설수설합니다.
죽을 때 폼을 보면 뭔가 해결을 본 것 같은 스님들도 가끔 있는데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이게 부처님이 해결보라고 하신 방법이 아닌 겁니다. 잔나비 아저씨들이 배우는 부시도만 해도 죽음을 초개처럼 여기는 경지까지 가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태연하게 웃으면서 지 배때기 좍좍 가르고 길 떠납니다. 그렇다고 부시도가 생사를 해결하는 진리냐 하면 택도 없는 소립니다.
그따우로 생사를 초극한 넘은 죽자마자 이 윤회하는 시방삼세에 바로 붙잡혀 옵니다. 근본적인 해결을 못 보고 헛지랄을 한 넘들은 암만 그럴듯하게 뒈져도 결국 중생입니다. 부처가 아니란 소립니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야 육도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생사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하는 것입니다. 화두참선하다가 옷 벗듯이 돌아가셨다 해서 그게 열반에 든 거냐? 천만에 씨나락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의 차입니다. 구름이 말하는 "깨달음"과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깨달음"은 의미가 전혀 다른 단어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깨달음"과 달마나 조사들, 마음공부 도사들이 쓰는 "깨달음"이 아주 다른 것이듯이...
저는 한세상 어렵사리 태어나서 말장난으로 허송하고 싶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생에서 최종적인 해결을 보고 싶습니다. 끝장을 내고 싶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