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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남부로 남하한 부여 세력은 백제부여를 기반으로 담로 또는 이와 유사한 제도를 토대로 일본부여의 건설에 박차를 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담로제도가 가진 봉건적 요소는 범부여 연합체를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커다란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동북아시아의 역사상 부여계만큼 긴 세월 동안 자기의 정체성을 유지한 세력은 없었습니다. 쓰러지면 일어서고 타격을 받으면 장소를 바꾸어 또 다시 일어서는 끈질긴 생명력을 부여계는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끝없는 생명력의 유지는 부여사의 위대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주에서 궤멸되어 정체성의 유지가 어려웠던 부여계는 반도로 이주합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남하를 시작하자 백제부여는 일본의 개척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그러면 일본부여가 부여계에 의해 통일된 세력을 구축한 시기는 언제쯤일까요?
대체로 보면 4세기 말, 늦어도 5세기 말까지 일본의 통일을 완료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5세기 초에 백제부여로부터 대규모의 집단 이주가 있었고 5세기말 경에 강력한 통치 권력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송서』에 나타난 왜왕의 국서를 보면 충분히 추정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 교수는 5세기를 야마토 조정의 구성기로 보고 있습니다. 히라노쿠니오(平野邦雄) 교수는 대화(야마토) 왜의 일본열도의 통일은 5세기 후반이며, 왕권이 강화되고 발전된 것도 5세기 말 즉 왜왕 무(武) 다시 말해서 유라쿠 천황시대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히라노쿠니오는 "야마토 왜가 상당한 정도의 통일국가로 성장한 것은 5세기 후반 이후이며, 그 이전의 남부 조선지역에로의 병력을 파견하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본열도는 5세기 말까지 대체로, 홋가이도(北海島)나 간토 동쪽 지방을 제외하고는, 부여계에 의해 통일이 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게 야마토 왕조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백제에서는 고구려의 남하가 본격화됩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의 남하와 일본부여의 강화는 중요한 함수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국가 건설의 기초가 완성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래서 야마오유키하사(山尾幸久)교수는 "6·7 세기 일본의 국가형성의 역사는 조선으로부터의 이주민을 제외하고는 상상할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일본열도의 연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통일이나 고대국가의 형성이 늦게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미즈노유 교수는 오우진(應神) 시대에 이미 열도에서는 고대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본 반면, 이후의 학자들은 다이까가이신(大化改新)을 기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시모타쇼(石母田正)교수는 일본 고대국가의 성립시기를 7~8세기로 보고 있고, 키토우키요아키(鬼頭淸明) 교수는 고대국가로서의 야마토 정권은 킨메이(欽明) 천황부터라고 합니다.
일본열도의 통일이라는 것은 부여계의 야마토 왕조의 건설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현상입니다. 부여계가 일본열도로 진출함에 따라서 이제 부여계는 만주 - 한반도 - 일본열도에 이르는 거대한 영역의 제국이 됩니다. 물론 이 왕조는 안정적이지는 않습니다. 항상 외압이 상존하는 위태로운 상황이죠. 어떤 의미에서 끊임없는 외환(外患)에 시달린 부여계에게 일본열도는 더 없이 안정된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하는 말에 따르면, 오우진 천황이 일본열도를 정벌하면서 와키카무 언덕에 올라 "아,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를 우리가 얻었는가?"라고 감탄했다고 하는데 이해할만한 얘깁니다.
간단히 말해서 일본열도는 부여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제부여와 일본부여는 사실상 하나의 나라와 다름이 없는 일종의 국가연합 즉 범부여국가연합으로 봐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일본부여와 백제부여)는 하나의 역사공동체이자 운명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요소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째, 백제부여와 일본부여의 정치적 교환관계가 단순히 본국 - 지방정권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의 국가와 같은 정도의 혈맹적인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도 백제부여와 일본부여가 하나의 연맹왕국으로 볼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즉 일본부여와 백제부여는 별개의 국가가 아니라 담로 등과 같은 독특한 봉건제도로 얽혀있는 범부여 연합국가라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마치 백제에서 일본으로 왕을 봉하는 것처럼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 반대의 경우도 많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을 지배했다는 식으로 보기는 곤란합니다. 물론 초기에는 반도가, 후기로 갈수록 열도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백제부여는 외부의 침략으로 인하여 국력이 많이 소진되었기 때문입니다.
백제부여와 일본부여, 두 나라는 국가원수의 교체에 있어서도 서로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등 거의 한나라 수준의 국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정치적인 일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백제의 진사왕(385~392)의 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백제 - 가야 - 일본 등이 하나의 공동운명체였다는 실제 기록들이 『일본서기』에는 매우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서기』킨메이(欽明 : 531~71) 천황 2년조의 기록에, 백제의 성명왕(523~554 : 백제 성왕)이 가야에서 온 여러 사람들에게 "과거, 우리의 선조 근초고왕, 근구수왕께서 가야에 계신 여러분들과 처음으로 서로 사신을 보내고 이후 많은 답례들이 오고가 관계가 친밀해져서 마치 부자나 형제와 같은 관계를 맺었습니다."라고 합니다. 또한 의문스러운 점은 백제의 무왕은 일본의 죠메이천황(舒明天皇 : 628-641), 성왕은 일본의 킨메이 천황(欽命天皇)과 동일인이라는 여러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참고로 유물과 유적과 관련한 최근의 연구(2004)에 따르면, 백제지역(한반도)과 열도(일본)의 교류는 시기별로 양상을 달리한다는 것입니다. 즉 5세기 전반까지는 한반도에서 일방적으로 열도지역으로 이동한 것이라면,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는 한반도에서 열도의 방향뿐만 아니라 열도에서 한반도 방향으로도 많은 교류가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둘째, 열도와 반도가 하나의 연합왕국이었다는 증거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왜국은 478년부터 600년에 이르는 120여년간 오로지 백제와의 일국 외교체제를 유지하였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국과 한반도의 대외적인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대부분의 나라들이 다국 외교 전략으로 대응하는데 반하여 열도는 오로지 백제만을 외교적 대상으로 삼아서 선진문물의 유입과 외교적인 문제를 오직 백제만을 통하여 추진하였다는 것입니다. 열도는 거의 120여년 간을 중국의 남조 제나라와의 통교도 단절한 채 백제만을 통로로 하여 일국 외교를 추진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본부여와 백제부여가 범부여국가연합과 같은 특수한 관계가 아니면 해석이 안되지요.
백제부여와 일본부여의 이 같은 외교행태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열도와 백제부여가 하나의 국가연맹 또는 형제국가이거나 다른 하나는 외교권 전체를 백제가 장악했을 경우입니다. 만약 이 두 나라가 서로 유기적이고 상관관계가 없는 나라들이라면 일반적인 국가들의 외교 행태에서 보이는 것처럼 다양한 시도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 만큼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생존이 다급한 상황에서 영원한 동지가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백제의 세력이 극도로 약화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열도는 백제부여에 대해 마치 영원한 동지나 형제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특이하게도 열도의 왜왕권은 고구려와 신라에 대해서는 극도의 적대와 증오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의 일본이나 한국 사학계의 이론대로라면 열도는 거의 제대로 된 접촉도 하지 않았을 고구려에 대해서 엄청난 적대감을 보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이 같은 행태는 백제부여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일은 570년을 기점으로 하여 킨메이 천황 31년(570), 비다쯔 천황 2년∼3년(573∼574)에는 고구려 사신을 매우 환대하고 있는데, 이 때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군을 궤멸시켜서 백제의 적이 신라로 바뀐 이후라는 점입니다. 분명하게도 열도의 왜 왕권과 백제부여는 다른 국체를 지닌 듯이 보이면서도 하나의 생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610년 경 이후부터는 백제부여의 약화와 더불어 왜국의 외교 전략도 다소 다변화를 모색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일면이 감지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이 시기를 전후로 일시적인 신라 - 백제 관계의 긴장완화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다변화 외교의 필요성을 열도에서 인식했다는 의미도 됩니다. 즉 당나라가 성립되기 전까지는 남북조의 대립 등으로 상황 인식이 복잡했을 수 있지만 수나라나 당나라라는 초강대국이 성립되면서 열도는 크게 당황합니다. 즉 수백년 만에 중국 전토를 통일한 강력한 왕조의 등장은 열도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백제부여의 위기는 고조되었을 수가 있습니다. 열도에서도 무조건적으로 백제부여의 외교노선만을 따르기에는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일본부여의 세력이 백제부여보다도 훨씬 더 강력해진 상태입니다. 마치 미국이 영국에서 벗어나듯이 헤게모니가 거의 열도 쪽으로 기울어진 상황으로 보면 됩니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한 시기를 즈음하여 열도의 내부에서도 정치적인 소용돌이가 나타납니다. 즉 645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중앙권력을 장악해온 소가씨(蘇我氏)의 본종가(本宗家)가 타도되는 을사정변(잇시노헨 : 乙巳の變)이 일어납니다. 이 정치적 사건에 대하여 친백제에서 친신라 외교노선의 대두, 친당파와 친백제파의 대립, 백제와 신라의 두 나라에서 균형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김현구 교수는 당시 소가씨를 타도하고 들어선 다이카 개신 정권의 핵심 인물들을 하나같이 신라와 관계가 깊었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 왜국의 대당 외교노선은 백제와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당나라는 왜국으로 하여금 친신라 군사지원을 명하였지만 이를 왜국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즉 당나라 고종은 654년을 전후로 하여 새서(璽書)를 보내어 신라가 고구려·백제의 공격을 받으면 출병하여 신라를 구원하라고 명령했지만, 왜왕은 신라를 위해서는 단 한건의 군사적 지원도 해준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본다면 당나라는 주변의 나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초강대국이었기 때문에 당 고종의 새서를 거역하면서까지 지켜야할 무엇이 백제부여와 일본부여 사이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동맹국 수준을 넘어선 유기적 연관성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잠시 일본부여가 신라를 통한 대당외교노선을 가지려 했던 것은 백제부여를 무시한 것이라기보다는 부여계의 온존을 위한 현실적인 외교전략의 수용으로 보입니다.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대외정세 속에서 열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열망이 있었지만, 백제의 멸망이라는 시련으로 열도는 형제국인 백제 구원에 총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결국 열도에 있어서 외교정책 또는 국가정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바로 백제부여의 수호였다는 것이 이 시기를 통틀어 보면 자명한 사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째, 일본부여와 백제부여를 하나의 연합국가 범주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강력한 증거는 인적 물적 자원의 이동입니다. AD 4세기에서 AD 7세기 백제부여의 멸망 때까지 백제부여와 일본부여는 연맹국가 이상 또는 같은 나라 수준이 아니면 곤란할 정도의 생산요소(production factors)나 국가자원(national resources)의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먼저 라우스(Rouse) 교수는 일본의 죠오몬인은 홋카이도의 아이누족과 관련이 있으며 현재의 일본인들은 야요이시대와 고분시대를 거친 사람들과 연결이 된다고 합니다. 지나 반즈(Gina Barnes) 교수는 죠오몬인과 야요이인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한국에서 규슈(九州)로 여러 차례에 걸쳐 민족이동이 있었고, 5세기 경 기나이(畿內) 지역은 직접적으로 한반도의 사람들이 이동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의 인류학자인 하나하라가즈로(埴原和郎)는 "일본인의 골상과 얼굴, 모습 등을 토대로 당시의 도래인의 수를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 규슈 지방의 대부분 사람들이 도래인(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다. 야요이 시대부터 나라(奈良)시대에 이르는 약 1천년 동안 대륙(한반도)으로부터 일본에 건너 온 사람이 약 1백만 명"이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당시 교통수단이나 인구의 수준을 감안해 보면 이는 국가적인 이동에 해당합니다.
AD 5세기의 경우만 보더라도 백제부여는 대장장이·토목공사전문가·양조업자·의복재단사 등의 전문직 사람들을 대거 보냈습니다. 당시로 보면 이들은 국가경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국가자산입니다. 이들을 보내는 나라나 받는 나라나 아무런 관계가 없이는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요. 구체적으로 보면, 403년에는 궁월군[弓月君 : 하다씨(秦氏) 씨족의 시조]이 무려 120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백제로부터 야마도에 도착하였으며, 409년 아지사주(阿知使主 : 아야족의 시조)가 17개 현의 사람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왔으며 463년(유략쿠 7년)에 대규모의 기능공들이 백제에서 야마도 지역으로 이주해오는 등 백제부여의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오고 있습니다.
특히 궁월군의 후손인 하타씨(秦氏)는 5세기 후반에 92부 1만 8,670명이었고, 6세기 전반에는 7,053호라고 하는데 이 숫자는 8세기 전반에 파악된 일본 전체 인구의 1/28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하타씨는 현재의 교토 지역에 정착하여 직기(織機)를 통한 양잠 생산으로 부와 세력을 확고히 했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재정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제부여에서 일본부여로 이주한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백제부여의 수준에 준하여 이루어졌다는 점 또한 백제부여와 일본부여가 하나의 국가적 동일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즉 당시의 사정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인원이 일본으로 갔는데 이들은 백제에서 가졌던 지위에 따라 일정한 직위가 부여되었다는 것입니다. 백촌강 전투에서의 패배(663) 후 구원군과 함께 백제의 지배층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그 가운데 일본에서 배치를 받은 기록이 남아있는 사람만도 3천여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665년 2월에는 백제인 4백 여명을 오오미국(近江國) 카무카사군(神前郡) [현재의 시가현(滋賀縣)]에, 666년에는 좌평 여자신(餘自信)과 귀실집사(鬼室集斯) 등 남녀 7백여 명을 오오미국 가모오군(蒲生郡)으로 이주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의자왕의 아들 선광(善光)은 백제왕(百濟王)이란 호를 받았고 그의 아들들은 모두 일본 조정의 고위인사들이었습니다(『續日本記』) 귀족들의 경우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의 사람들이 일본 조정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대략 60여명 정도의 백제 유민이 일본의 조정에 참여했으며 일본의 『고사기(古事記)』(712)나 『일본서기(日本書紀)』(681~620)의 편찬에도 깊이 개입합니다.
넷째, 일본부여와 백제부여를 하나의 범주에 둘 수 있는 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백제가 멸망할 당시 백제를 방어하고 지키려는 일본의 의지가 하나의 나라가 아니면 곤란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에 일본은 마치 국운을 걸고 군대를 파견하여 백제를 지키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한국사학계에서는 '조국부흥전쟁설' 즉 백제가 일본의 조국이므로 조국을 부흥시켜야 합니다는 논리가 나타나고, 일본사학계에서는 백제가 일본의 속국이었으므로 속국을 구원하기 위해서 출병했다는 식으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사이메이 천황 6년, 일본에서는 660년 3월 당군의 대대적인 침공 소식과 더불어 그해 5월에 인왕반야회(仁王般若會)를 개최하는데, 이 법회는 외적 침입의 위기와 때를 같이하여 백여 위의 불상과 보살상을 안치하고 백인의 승려를 청하여 경전을 읽음으로써 부처님으로 하여 국토를 수호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백제부여에 닥친 위기를 열도에 닥친 위기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동맹국 또는 자국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이유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이어 사이메이 천황(齊明天皇)은 원정 해군을 지휘했으며, 나카 왕자는 5명의 장군을 파견하여 백제부여를 원조하고 백제부여의 풍 왕자는 5천명이 넘는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백재부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6명의 장군이 2만 7천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신라로 갔으며 당시 백제 부흥운동을 위해 파견된 백제의 좌평 복신(福信)에게는 화살 십만 척, 실 5백 근, 솜 1천 근, 피륙 1천단, 다룬 가죽 1천 장, 종자 벼 3천 석이 주어졌고 다시 피륙 3백단을 백제왕(풍)에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백제·일본 연합군은 나당연합군에 패배하여 일본의 4백 척의 군함이 전쟁에서 패해 백강(白江) 하구에서 불태워졌는데 그 연기와 불꽃으로 하늘과 바다가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전의 군사적 지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전 국력을 동원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본부여와 백제부여의 관계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가지게 합니다. 기존의 연구는 이에 대해 일본의 위기론, 백제로부터의 조 수취론, 백제에 대한 종주국론(백제가 일본의 조공국이라는 것) 등이 제기되고 있지만 모두 적절한 해석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백제가 종주국이었다고 하고 있고 일본은 일본이 종주국이었다고 강변합니다. 둘 다 틀렸습니다.
이것은 백제부여와 일본부여의 범부여국가연합의 차원에서만 이해가 가능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조공국에 불과한 나라에 대하여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무리한 해외원정을 단행한 경우는 역사상 유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나라의 13만 대군이 침공할 것이라는 정보는 660년경 고구려 사신을 통해서 이미 들었을 것인데 이것은 일본이 감당할만한 수준의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이 일로 말미암아 일본에서는 사이메이 천황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예순을 넘긴 사이메이 천황이 구원 요청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출병을 결정하고 친히 오사카, 북 규슈까지 가서 백제 지원을 진두지휘한 것을 보면, 백제 - 부여 관계를 단순히 가까운 나라라고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이메이 천황은 661년 오사카 항을 출발하여 모병(募兵)을 독려하고 그해 3월 쯔쿠시(筑紫)에 도착하여 본격적인 출병준비를 하다가 그 해 7월 급서하고 맙니다. 이후 황태자인 나까노오오에(中大兄) 황자[후일의 텐지(天智) 천황]는 9월에 5천의 군사를 선발대로 왕자 풍장(豊璋)에게 딸려 보내고 국상을 치른 후 11월부터 다시 출병준비를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나까노오오에(中大兄) 황자 즉 텐지 천황은 "백촌강 전투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일본서기』는 "백제가 다하여 내게로 돌아왔네. 본국(本國 : 本邦)이 망하여 없어지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의지할 곳도 호소할 곳도 없게 되었네.라고 합니다.
일본부여의 백제부여 지원에 대한 후유증은 매우 심각하였습니다. 일본 내에서도 일방적인 백제부여의 지원에 대한 회의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안정을 크게 저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텐지 천황이 서거하자마자 그의 아우인 텐무 천황이 '진신(壬申)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합니다.
이러한 부여계의 시련 속에서 절치부심(切齒腐心)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시라카베 왕자입니다. 시라카베 왕자는 후일 환갑이 넘어서 등극한 제49대 고닌 천황(光仁天皇 : 770∼781)입니다. 그런데 수십 년간 일본 황실의 족보를 연구해온 홍윤기 교수는 시라카베 왕자가 백제계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내용이 일본의 고대문헌인『대초자(袋草子 : 1157)』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대초자』는 일본 왕실의 조신(朝臣)으로 일본 황실의 비사에 대하여 누구보다 정통했을 것으로 보이는 후지와라노기요스케(藤原淸輔 : 1104∼77년)가 쓴 책이므로 사실일 가능성이 큽니다. 고닌 천황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의 아내가 야마토노니카사(和新笠 : ?~789)였고, 그 아드님이 간무 천황(桓武天皇 : 781~806)이기 때문입니다.
야마토노니카사(和新笠)는 간무천황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백제계를 대표하는 유력 씨족 출신입니다. 이어 등극한 간무천황은 조정과 주변을 대부분 백제부여계로 채우게 됩니다. 간무 천황은 엄청난 시련과 권력 투쟁 속에서 매우 어렵게 부여계의 황실을 제대로 회복한 것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부여계가 주류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간무 천황은 "노골적으로" 백제부여계를 중심으로 조정을 운영하게 됩니다. 그래서 『속일본기(續日本記)』에는 "왕실 요직은 모두 백제인 출신 인물들이었다."라고 합니다.
이상의 논의들을 토대로 본다면 일본은 바로 백제부여를 이은 부여 그 자체라는 것이지요. 백제와 일본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나라로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이며 그것은 바로 부여(扶餘)라는 보다 큰 차원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만 해석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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